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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와 교회(3)-음부의 권세>의 줄거리: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임을 천명하실 때, 그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때 '권세'란 직역하면 바로 '대문'(gate)이라는 뜻입니다. '음부의 대문'이 교회를 이지기 못하리라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 상황을 보면 음부의 대문이 이기지 못하는 바로 그 교회가 맞는가 싶습니다. 만약 이런 의심이 맞다면 그것은 베드로의 고백이 곡해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요.
십자가와 교회(3)-음부의 권세
(마태복음 16:15~20)
15.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20.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와 교회(3)-음부의 권세>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와 교회(3)-음부의 권세’
지금 ‘십자가와 교회’라는 주제로 며칠 째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이 전체의 과정에서 주제의 핵심적 목표는 교회를 인식함에 있어서, 출석하는 예배당과 예배당에서 일어나는 각종 모임이나 만나는 사람들을 떠올리는 대신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떠올리자는 것입니다. 교회는 십자가 너머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역사적 사건 위에 서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마음 심장을 꺼내 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면 부활 예수님께서 내 마음을 가지실 것이고, 승천 예수님께서 내 마음을 가지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께 마음을 드리기만 하면 부활과 승천을 따라서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마음이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 전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내 마음을 드리는 것을 신앙고백의 형태로 표현한 것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는 곧 마음을 모으시는 분(mind collector)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께서 본래 당신의 자리이신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돌아가실 것입니다. 이것이 곧 부활과 승천의 길을 내 마음이 따라감을 의미합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해석처럼 두 가지 의미로 끊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나누는 것은 베드로 고백의 우선적 의도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당연히 예수님의 속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서 수행하실 사역의 내용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져가시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돌아가실 때에 우리 마음 또한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에 서게 됨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역의 내용입니다.
골로새서 3장 1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라는 말씀에서처럼, 기독교인과 교회는 운명적으로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진 마음의 공백을 하늘로 채우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보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 18절을 보면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을 예수님께서 천명하시면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소위 교회로 부르는 단체의 상태가 예수님께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천명하신 그 교회일까요? 내가 출석해온 교회가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교회인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인지 우선 눈에 보이는 현상을 통해서 합리적인 의심을 해보기로 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각 교회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갈라디아 교회, 에베소 교회, 빌립보 교회, 골로새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가 등장하고 계시록에서도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피아, 라오디게아 교회들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교회의 이름은 지역의 이름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절을 보면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라고 하는 말씀에서처럼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들의 이름과는 사뭇 다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때부터 영락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영락교회입니다. 또 소망교회, 명성교회, 온누리교회 등이 있습니다. 전부 장로회 통합측 교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교회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게 뭐 어쨌다는 것이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식으로 교회의 이름을 지었다면 영락교회는 ‘서울 중구 저동 교회’라고 해야 맞습니다. 제가 어려서 유아세례를 받았던 희성교회도 마찬가지로 ‘마포구 서교동 교회’하고 해야 될 것입니다. 서교동에 여러 교회가 있다면 서교동 1교회에서부터 서교동100교회 식으로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지역을 포기하고 고유한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요?
교리적으로는 주님의 교회, 하나님의 교회, 예수님의 교회가 모두 하나의 공교회임을 입으로 고백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옆에 있는 교회를 우리 교회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예배당을 중심으로 독립된 조직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산이나 행사도 개별적 독립된 예배당 중심의 조직체 단위로 움직여 가면서, 종파가 나뉘고 분파가 나뉘고 각 교회가 개교회로 나뉘어졌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님이 세우시려고 했던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렇게 나누어진 이유는 교회의 근간인 베드로의 고백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면 이렇게 분열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너머에 마음을 둔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라면 ‘십자가 너머에 마음을 둔 것’이라는 의식 하나만이 공통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연희동에 사는 사람들이 마음을 십자가 너머에 두면 그들이 연희동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1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 너머에 마음을 둔 사람들 전체를 한 교회로 보고 그 가운데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라고 일컬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의 개념이 박살나고 교회는 독립된 개체로서 움직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의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을 보면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그 집에 있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그 집이 교회였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0절에서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처럼 주변의 사람들이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 모여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당을 중심으로 한 교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얼른 보기에도 우리의 교회 형태가 주님이 세우시고자 했던 교회의 형태는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현상을 가진 교회들이 음부의 권세를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문 18절의 ‘음부의 권세’라고 하는 말에서 ‘권세’라는 말을 썼는데 헬라어 단어의 본뜻을 보면 ‘대문’이라는 의미입니다. 음부는 하데스로 죽은 자의 세계 즉 지하세계를 의미합니다. 음부의 권세는 음부의 대문으로 ‘사후세계의 대문(The gates of Hades)’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후세계가 지옥과 동의어는 아닙니다. 결국 사후세계의 문은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문입니다. 사람은 육체를 벗을 때에 세상 바깥으로 나가게 됩니다. 마음에 ‘나’라는 의식이 있을 때에만 나는 ‘나’로서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 내가 육체를 벗을 때에 들어가는 문이 바로 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음부의 대문입니다.
한편 우리가 지금까지 반복해온 것처럼 십자가도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문입니다. 음부의 대문도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고, 십자가도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문입니다. 세상에는 본래 음부의 대문만 있었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또 하나의 문이 생겼습니다. 이 두 문의 차이점은 십자가는 몸이 죽기 전에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고, 음부의 대문은 몸이 죽은 뒤에 몸에서 풀려난 마음이 세상 바깥으로 나가는 문입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에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하는 말씀에서처럼 살아있는 동안에 십자가 문을 통과하면, 우리의 마음은 주님의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우리의 육신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허물로 죽었다’라고 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마음이 죽었음을 뜻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하늘에 앉히셨다는 것은 부활과 승천을 뜻하는 것입니다.
반면 음부의 대문은 십자가 문과는 반대로 육신이 죽어서야 떠나게 된 마음이 지옥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음부의 대문으로 번역한 것처럼 음부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육체가 살아 있음으로 마음을 이 세상의 것으로 채우면서 살았던 사람들은 죽을 때에 음부의 대문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그러한 대상이 될 뻔하고 우리 또한 마찬가지로 자녀들로 마음을 채우려고 합니다. 돈을 벌고 출세해서 마음을 채우려 할 수도 있습니다. 모두 몸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음부의 대문은 이러한 몸이 죽고 마음이 들어가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두려움으로 우리의 삶을 지배합니다. 몸이 없어지면 마음 채움 거리가 소멸되기 때문입니다. 몸이 있어야 세상에서의 기쁨거리와 만족거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음부는 몸이 없어진 마음이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의 일생을 두려움으로 지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과 연합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 크기로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마음을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만족거리와 기쁨거리로 채우려고 하는 것이 곧 죄악이고 더러움입니다. 간음이고 악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서 마음 채움 거리를 위해서 살던 자들은 음부의 대문으로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대문이 생겨남을 통해서 육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도 마음을 세상 바깥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간 마음이,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님과 교제하시면서 허락하신 모든 것을 같이 누리게 되는데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이미 하늘로 간 자들에게는 몸이 죽는 것이 아무런 상실이나 두려움의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몸으로 만나고 접촉하는 것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기 때문에, 몸이 죽는 것은 아무런 상실의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궁극적 기쁨과 만족으로 추구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들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갖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대문을 통해서 하늘에 가있거나 가려하거나 반복적으로 가는 이들에게 음부의 대문은 폐문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상 안에서 기쁨거리와 만족거리를 찾는 이들에게는 음부의 대문이 강력한 힘으로 작용합니다.
예를 들어서 교회가 5년 계획으로 500억짜리 예배당을 짓기로 하고, 목사님과 당회와 온 교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당을 짓게 해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들의 마음은 이 땅에서의 기쁨거리를 찾으므로 음부의 대문으로 들어가는 도상 위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예배당이 우리 예배당, 우리 예산, 우리 조직체가 되어서 교회는 지역을 벗어나 고유의 이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강동구 명일동 교회가 아니라 명성교회가 되었고, 압구정동 교회가 아니라 소망교회가 되었습니다. 작은 규모라도 교회 짓는 일에 전심을 다하고 교회가 완성되면 성도들이 기뻐하고 만족해합니다. 목사님으로 시작해서 교인들이 이 세상 안에서 마음 채움 거리를 발견하고 추진하고 이루려 한다는 것은 곧 음부의 대문을 향해 가는 길에 서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별의별 희한한 교회들이 다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본래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에 지역을 따라 모이면 될 뿐입니다. 중구 저동에 살고 있는 사람이 십자가 너머에 마음을 두고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하면 중구 저동 교회일 뿐입니다. 그런데 영락교회의 성도, 소망교회의 성도, 명성교회의 성도, 온누리교회의 성도라고 하면서 교회를 자신들만의 조직체로 만들어서 우리 예배당, 우리의 예산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주님께서 베드로의 고백 위에 세우시려고 했던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또한 본문 19절을 보면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주신 특별한 은혜가 아닙니다. 이 대화 속에서 베드로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의 대표입니다. 아담이 인류를 대표하듯이 베드로는 신앙고백을 하는 모든 자들을 대표하여 주님과 대화를 하는 셈입니다. 이 천국 열쇠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부활과 승천을 따라 하나님께 마음을 두려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악에 대해 명확히 알아야합니다. 자녀가 무엇인가 잘못해서 기분이 나쁩니다. 그럴 때 자녀에게 마음을 둔 것이고, 자녀를 신으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의 형통이 내 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자녀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죄악입니다.
우리는 원죄의 체질 때문에 몸으로 만나는 것들을 마음의 채움 거리로 삼으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와 돈과 이 세상 것으로 기뻐하려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의 마음은 천국으로 이어지는 부활과 승천을 길을 가게 됩니다.
결국 주님께서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한 것은 주님께서 지실 십자가를 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그 십자가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천국을 왕래하게 될 열쇠입니다. 요한복음 1장 5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실 때에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은 주님의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은 자들에게는 하늘과 땅 사이가 완전히 개통되어 오르락내리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가 막히는 말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라고 하신 말씀도 하늘과 땅이 완전히 소통되는 상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땅에서 하는 일들이 하늘에서 거부되지 않으며, 땅에서 멈추는 일들이 하늘에서 하라는 명령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이미 하늘과 통하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열쇠를 쥐고 하늘과 왕래하는 기쁨과 만족을 나누는 교제로서의 모임이 진전되고 유지되고 발전되었다면, 요즘 같이 몇 백억의 예배당과 상가지하에서 지상으로의 발전을 꿈꾸지는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목사님이 설교를 잘하신다 못하신다는 말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사님은 그저 십자가를 전할 뿐입니다. 역사적 사건이었던 십자가 사건이 듣는 사람들에게 지금의 사건이 되도록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부분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부터 17장 8절까지에서 세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먼저 베드로의 고백이 나오고, 십자가 사건을 예고하시는 예수님을 베드로가 만류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황홀경에 사로잡혀 산 아래의 일을 망각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베드로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의 대표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들은 베드로만의 사건이 아니라 신앙고백을 하는 모든 이들의 사건이 됩니다.
내일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만류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서 교회의 목회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 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께서 세우시겠다고 천명하신 교회를 음부의 대문이 이기지 못하도록 회복할 수 있는 긍휼과 힘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