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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려인민과 국가는 고려괴뢰황제가 조약에 서명한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3. 국제법의 권리에 따라 각 나라의 오류를 규정하고 『신공도(新公道)』를 세워야 하는 바 고려민중은 현재의 고려를 개조하여 독립국가로 될 것을 주장한다.
또 그 청원서를 영어,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외교협회와 파리에 있는 각 국의 야당대표, 그리고 유럽의 각 대 신문사에 주었다. 이렇게 내보낸 청원서가 무려 만여 부가 되었다. 그러나 회의가 끝날 때까지 이 정의로운 청원서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미국, 영국, 프랑스가 모두 아시아에 식민지가 있어 일단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면 그들의 식민통치가 흔들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5]
이동휘는 안창호의 행위에 대해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최근 “우리정부가 독립을 선포한 1년 사이에 많이는 화평의 방식에 치우쳐 왔다. 헌데 결과는 어떠한가? 후에 방침을 고쳐야 한다. 총을 든 자들과는 총으로 맞서야 한다.”고 말했다. 분명히 안창호를 견주고 던진 화살이었다.
사실상 이동휘는 이미 이동휘 대로 자기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동휘와 노백린은 우선 동북 삼성의 반일 투쟁에 대한 영도를 가강하였다. 이동휘는 5월에 안병찬(安炳瓚), 여운형(呂運亨)과 비밀리에 고려공산당을 건립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에 대한 견해에서 분기가 생겨 이동휘를 위수로 하는 상해파와 안병찬, 여운형을 위수로 하는 이르쿠쯔크파로 갈라졌다. 두 파는 단결할 대신 종파투쟁에 열을 올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3년에 제3공산국제에서 명령을 내려 고려공산당을 해산시켰다. 하지만 이동휘는 두 가지 일에서는 성공하였다.
첫째: 1920년 4월 이동휘가 임시정부총리의 신분으로 러시아에 가서 소베트 러시아 치타정부 대표와 『동맹밀약』(同盟密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후에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하여 비록 집행되지는 못했지만 임시정부와 러시아정부 간에 맺어진 가장 이른 외교적인 밀접한 연계로 되었다.
『동맹밀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러시아 경내에서 대한독립군은 완전히 치타정부의 공산주의에 복종한다.
2) 일본을 적으로 하여 러시아 영토에서 교전 시 독립군은 러시아를 원조하고 조선영토 내에서 교전 시 러시아군이 독립군을 지원한다.
3) 대한독립군 정부가 조선본토에 천이하기 전까지 러시아는 일정한 구역을 할애하여 독립군의 활동기지로 삼게 한다.
4) 대한독립군정부는 러시아 신정부에서 지정한 약간 명의 고문을 둔다.
5) 러시아 정부는 대한독립군에 무기와 식량을 지원한다.
6) 러시아 정부는 대한독립군에게 하바롭스크에 있는 제3호, 제4호 금광의 채벌권을 준다.
7) 러시아철도 수비를 쌍방이 공동으로 책임진다.
8) 대한독립군은 독립과 유관된 군사행동을 할 때 철도를 무상으로 사용한다.
9) 러시아 정부는 독립군에게 5연발 보총 2000자루를 공급한다.[6]
둘째: 이동휘는 고려공산당을 창건한 후,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보냈다. 한형권은 소련 원동지구 서기 스미얀스키의 안내로 레닌을 만나보았다. 원래는 여운형과 안병찬이 한형권과 동행하기로 했지만 이동휘가 경비가 딸린다는 이유로 자기의 심복인 한형권만 보냈다.
한형권은 레닌한테 한국독립운동과 한국임시정부의 정황을 소개하고 원조를 요청했다. 레닌이 흔쾌히 응낙하고 자금이 얼마나 수요 되는가고 물었다. 한형권이 200만 루블이면 된다고 하였더니 레닌이 큰소리로 웃고 나서 “뭐라고요? 200만? 일본과 싸우는데 고작 200만이라고요?” 라고 말했다.
한형권은 그제야 너무 적게 불렀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일국의 수령 앞에서 이미 한 말을 고칠 수 없는 지라 황급히 해석하였다.
“본국과 미국의 한인들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생각 잘 했습니다. 약소 민족일수록 자기 일을 자기 절로 해결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레닌이 먼저 60만 루블을 주면서 임시정부에 전하라고 하였다. 한형권은 즉시 상해에 있는 이동휘에게 전보를 쳤다.
6월, 한형권이 한국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소베트 러시아와 아래와 같은 조약을 체결했다.
1.대한민국임시정부는 소베트 공농정부를 승인하며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선전한다.
2. 소베트 공농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며 한국의 독립투쟁을 지지한다.
3. 소베트 공농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서시베리아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군사를 배양하는 것을 동의하며 무기와 탄약을 제공한다.
4. 서 시베리아에 주둔하는 대한민국 독립군은 소련군 사령관의 명령에 따르며 서시베리아 지구에서 공산주의를 선전한다.[7]
이동휘는 한형권이 돈을 가지고 떠났다는 전보를 받자 국무회의에 알리지 않고 또 몰래 비서장이요 자기의 심복인 김립(金立)을 시베리아로 마중 보내어 돈을 받아오게 하였다. 이동휘는 그 돈을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직접 자기 손에 넣으려 하였으나 김립은 또 제 속내가 따로 있어 그 돈으로 우선 자기 가족을 위하여 북간도에 토지를 사고 상해에 돌아와서도 비밀리에 숨어 광동여자를 첩으로 들이고 향락을 누렸다. 그러다가 김립은 회령 죄가 드러나 김구의 명령에 따라 경무국의 경호인원들인 오면식(吳冕稙), 노종균(盧宗均) 두 청년에게 총살됐다.
날이 갈수록 이동휘와 안창호의 모순은 더욱 격화되었다. 이 일로 김구가 몹시 걱정하였다. 이동휘의 처지가 점점 곤란하게 되었다. 내부에서는 고려공산당이 분화되었고 외부로부터는 안창호의 반대를 받았다.
하여 이동휘는 유력한 지지자와 튼튼한 동맹군이 필요했다. 그가 처음으로 생각한 사람이 김구였다. 그는 김구를 보기 드문 인재라고 인정했다. 김구는 평민출신으로 사람이 정직하고 갖은 풍파를 겪었으며 정치 두뇌가 있었고 일 처리에서 과단성이 있었다. 무장투쟁과 외교투쟁을 병행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자기와 비슷한 점도 있었다.
어느 가을 날, 그날은 하늘이 몹시 높고 푸르렀다. 이동휘의 요청으로 김구와 이동휘가 황포공원에서 만났다.
이동휘는 몸이 웅장하고 군인 기질이 있었으며 성격이 강직하였다. 그는 말없이 한참 걷다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적은이(아우님이란 뜻으로 이동휘가 수하 사람들에게 즐겨 썼음) 날 좀 도와주게.”
김구는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경무국장으로 총리를 호위하는 저의 직책에 무슨 차질이라도 있었습니까?”
이동휘가 손을 젓고는 “아닐세. 나와 함께 일을 하면 어떨까 해서 만나자고 한 거네. 대저 혁명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사업인데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독립운동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하니 이대로 독립을 하더라도 다시 공산주의 혁명을 하여야 하니 두 번 피를 흘림은 우리 민족의 대불행이 아닌가. 그러니 적은이도 나와 같이 공산주의 혁명을 하는 것이 어떤가?” 하고 말했다. 그 태도가 아주 진지하고 어조가 절절하였다.
김구는 공산주의를 연구하지 않았다. 아니, 엄격하게 말해서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 흥취가 없었다. 그는 고려공산당 내의 상해파와 이르쿠쯔크파 지간의 파벌투쟁을 목격하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는 오늘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에는 독제정치의 특점이 있다고 인정했다. 김구는 독제 중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철학을 기초로 한 독재라고 생각하였다. 그가 레닌을 좋아하지 않고 이동휘를 반가워하지 않은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김구는「정치이념」에서 자기의 정치주장을 아주 명백히 밝혔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 독재국가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다. 군주나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거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제의 주체일 때는 이것을 제거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니 이러한 독재는 큰 조직의 힘이거나 국제적 압력이 아니고서는 깨뜨리기 어려운 것이다. 우리나라의 양반정치도 일종의 계급 독재이거니와 이것은 수백 년 계속했다.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일의 나치스의 일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계급 독재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철학을 기초로 한 계급 독재이다.”[8]
김구가 이동휘를 바라보며 이렇게 반문했다.
“우리가 공산주의 혁명을 하는 데는 제3국제공산당의 지휘와 명령을 안 받고도 할 수 있습니까?”
이동휘가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되지요.”
이에 김구가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 독립운동은 우리 대한 민족 독자의 운동입니다. 어느 제3자의 지도나 명령에 지배되는 것은 남한테 의존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 헌장에 위배됩니다. 자기 집 우물은 자기가 파야 합니다. 총리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천만 불가하니 저는 총리의 지도를 받을 수 없고, 또 선생께 자중하시기를 권고합니다.”[9]
이동휘가 불만스러운 기색으로 돌아갔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꼬리가 없이 끝나고 말았다.
[주]
[1] 「신규식이 임시정부를 대신해 미국의회단에 전해달라고 손중산에게 보낸 진정서」부본.〈대만당사회〉문건
[2] 조맹선(趙孟善):(?-1922) 의병장 겸 독립운동가. 호 원석 (圓石) 황해도 평산군 출신. 이안용을 비롯해 을사조약에 찬성한 5적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자 평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참모장으로 활약, 3.1운동 후 중국에 건너가 대한독립군을 건립하고 총단장을 맡음.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3]「신규식이 임시정부를 대신해 미국의회단에 전해달라고 손중산에게 보낸 진정서」부본.〈대만당사회〉문건
[4] 金正明,『한국독립운동』 제2권, 242쪽.
[5]「파리에서의 조선대표의 언행」,『민국일보』, 1919년 8월 14일.
[6] 홍콩『화자일보(華子日報)』, 1921년 5월 10일, 《신보(晨報)》, 1921년 5월 3일.
[7] 천진『대공보』, 1920년 6월 20일.
[8]『백범일지』, 306쪽.
[9]『백범일지』, 237쪽.
이승만이 상해에 오다
1920년 12월 8일에 이승만 박사가 상해로 왔다. 이 임시정부 제1임 대통령은 임시정부가 건립된 지 1년 9개월 27일 만에야 비로소 상해에 온 것이다.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도래를 두고 많은 생각들을 하였다.
1919년 8월에 국무총리 안창호와 이승만 박사 사이에 아래와 같은 전보가 오갔다.
워싱턴, 구라파 위원부
이승만 각하:
임시정부는 건립 최초에 국무총리제를 실시했고 서울정부는 집정관제(集政官制)를 실시했습니다. 한국의 경우 어떤 정부든 물론하고 대통령제를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각하는 다만 집정관의 명의로 우리 정부를 대표할 수 있으며 헌법을 고치지 않는 정황에서 대통령 행세를 하는 것은 헌법에 위배됩니다. 하니 대통령 칭호를 거두시기 바랍니다.
대한민국 대리 국무총리 안창호
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창호 각하:
각 국이 우리 정부를 승인하게 하기 위해 나는 대통령의 명의로 각 국에 국서를 보냈고 대총통의 명의로 한국국정서를 발표했습니다. 허니 지금 대총통의 명칭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들 내부에서 논쟁이 있으면 그 소문이 세인들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고 필연적으로 우리의 독립운동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인즉 여러 분들이 각자 맡은 바 책임을 다 하고 떠들지 말기를 바랍니다.
워싱턴 이승만
이때 상해 대한임시정부, 서울임시정부, 소베트 러시아 대한임시정부는 한창 합병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국무대리총리 안창호는 비록 전보문에서는 이승만을 질책했지만 이승만의 정치야심을 제대로 보아내지는 못하였다.
안창호는 상해독립계 인사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8월 16일에 상해, 서울, 소련에 있는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합병한다는 결의안을 통과하였다.
1920년 3월 19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이 2개월 내에 상해에 와 취임해야 한다는 결의안을 작성하였다. 이리하여 이승만이 부득불 상해로 오게 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상해의 한인 교포들과 임시정부의 관원들은 이승만 박사가 빨리 상해에 와 그들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창조할 것을 바랐다.
12월 8일 오전 10시, 안창호와 김구가 황포부두에 가 이승만 대통령을 영접하였다. 그날 김구를 따라 이승만의 안전을 책임졌던 경호인원 임웅일(林雄日)이 당시의 정형을 이렇게 회상하였다.
그날 몹시 추웠다. 11시 30분 이승만 박사가 부두에 내렸다. 중절모자를 쓰고 검은 양복을 입었는데 짜장 서양인의 풍도를 갖춘 멋쟁이 신사였다. 한다는 첫 마디가 “어, 추워, 대륙기후가 좋지 않구만. 상해 워싱턴에 비하면 너무 더러워……” 였다. 이승만의 행동거지를 보니 정치인이나 독립운동을 하는 혁명가답지 않았다. 마치도 호화로운 세계에서 온 도련님 같았다……”
이승만은 1875년 생으로 김구보다 한 살 위였다. 그는 황해도 평산 사람이며 아명은 승룡(乘龍)이고 호는 무남(霧南)이었다. 그는 일찍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졸업 후 배재학당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했으며 서재필(徐載弼)이 영도하는 협성회와 독립협회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898년에 독립협회의 기타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어 무기도형에 언도되었다. 일찍 궁내 특진관(宮內特進官)으로 있었고 후에 미국, 영국, 독일 등 국가의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었던 민영환(閔泳煥)의 담보로 출옥하고 미국에 갔다. 하프대학에서 학사학위를 획득했고 또 워싱턴 부린스톤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얻었다. 1910년에 귀국하여 기독교 청년회에서 활동하다가 또 체포되어 판결을 받았고 1912년에 미국 목사의 도움으로 출옥한 후 미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그는 미국 한인들 중에서 얼마간 위망이 있었다. 그는 동방의 문화전통은 낙후하고 우매하며 오직 서양문화만이 진보적이고 숭고하다고 여겼다. 1919년에 미국 총통에게 『위탁통치청원서』를 교부하여 한국의 독립을 미국에 위탁하여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 미국화 된 “독립영웅” 이 당당히 상해로 온 것이었다.
“도산선생, 그간 잘 계셨소?”
이승만이 안창호의 손을 잡고 열정적으로 인사했다.
“무남선생님, 오시느라 수고했습니다. 이 분이 경무국장 백범선생입니다.”
안창호가 김구를 소개했다.
“백범 형,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이승만이 김구와 힘 있게 악수했다.
그날 오후, 임시정부 예당에서 이승만을 환영하는 대회를 열었다.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경무국장 김구, 외무총장 김규식 등 임시정부의 모든 요원들과 의정원의 의원들이 환영회에 참가하였다. 비서국 국장 김립이 회의 사회를 보았다.
국무총리 이동휘가 열정에 넘치는 환영사를 하고 있었지만 김구의 귀에는 한마디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심정이 왜 불쾌한 지 스스로도 똑똑히 알 수 없었다.
회의 후 이광수가 김구를 청하여 독립신문사 사무실이 있는 창여리(昌余里) 23호로 갔다. 이광수가 『논어(論語)』를 꺼내들고 의미심장하게 말하였다.
“중국의 유학자들이「논어」를 절반 알면 능히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였습니다만 저는 아무리 해도 이 말의 뜻을 터득할 수 없습니다.”
김구가 『논어』를 몇 장 번지고 나서 말하였다.
“유가의 교의는 세상을 건지는 하나의 경세제국(經世際國) 의 학술이론이요.〈마음을 바르게 먹고 성심껏 수양하면 가정을 구하고 나라를 다스리며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제 집 일을 걱정하듯 나라 일을 걱정하라〉,〈나라의 흥망이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등은 모두 중국의 역대 통치자들의 치술(治術)과 권술(權術) 이었소. 우리도 그 정신을 잘 알아야 하오. 자네는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사실 우리 반도문화는 대륙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소.”
이광수는 작가로서 권력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이 없었지만 치술과 권술에 대해선 흥취가 있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논어』에서 시작하였다가 점차 깊이 들어가 목전의 복잡한 국세를 담론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광수는 손색없는 독립운동가였다.
사분오열된
임시정부
이승만은 확실히 명실공이 학자임에 틀림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선후로 두 개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학위까지 따낸, 당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인재였다. 그는 1914년에 하와이에서 잡지 『한국태평양』을 꾸리고 독립정신을 고창했으며 1917년에는 미국에서 독립군 군사학교를 꾸렸다. 하니 그는 확실히 독립투사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그는 “천하의 나라는 모두 험난한 길을 걷는다.” 는 역사의 장권지도(掌權之道)를 몰랐으며 또한 “나라에 변이 많으면 아래 사람들의 태도에 변화가 많고 나라에 근심 걱정이 많으면 아래가 온정하지 못하고 위에서 요구하는 것이 많으면 아래서 서로 싸운다(上多事則下多態, 上煩憂則下不定, 上多求則下交爭)” 는 천하지도를 모르고 있었다. 이승만은 프랑스 조계지 하비로 321호에 거처를 정한 후 미국영사관, 프랑스영사관을 방문하였을 뿐 임시정부의 현황을 참답게 조사하지 않았고 동북의 무장투쟁과 한국 본토의 국세도 요해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는 당연히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인이며 자기 말이면 진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승자가 왕이고 패자가 역적”이라는 낡은 역사관을 신봉하였고 “나를 따르는 자는 흥하고 나를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 는 고루한 관념에 물젖어 있었다. 하여 처음부터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각 총장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1921년 1월 5일에 제2차 국무회의를 열고 국무총리 이동휘가 제출한「정부쇄신법」을 검토하고 행정결정권과 행정제도변경문제를 확정할 준비를 하였다. 이 법안은 이동휘와 각 총장들이 동의를 거쳤고 이승만만 동의하면 통과할 수 있었다. 이 법안은 이승만이 상해에 장기적으로 있으면서 총통의 직책을 행사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이 이 법안을 반대하였다. 이승만은 미국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미국의 한인교포들이 내놓는 독립자금이 상당하여 거기서 사낭(私囊)을 챙길 수 있었고 둘째, 상해에 있으면 일본 헌병들과 일본특무들에게 수시로 체포되거나 암살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승만에게는 “제 집 일을 근심하듯 나라 일을 근심”하는 그런 애국심이 없었다.
『임시정부통신』이 게재한 국무회의 제2차, 제3차 회의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2차 회의
전체 총장: 임시대통령은 반드시 상해에 있으면서 정부사업을 주최하여야 한다. 만약 이렇게 못 하겠다면 행정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위임하여 총리가 모든 결재권을 행사하며 한 달에 한 번씩 대통령에게 보고한다.
이승만: 워싱턴의 외교사업이 아주 분망하여 미국을 떠날 수 없다. 결재권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할 필요가 없다. 현상을 이대로 유지하면 된다. 중요한 일이 있으면 워싱턴에 보고하여 나의 비준을 거친 후 집행하면 된다.
제3차 회의
이동휘: 국무총리제를 개변하고 국무위원제를 실시하여 국무위원이 각종 행정사무를 결정해야 한다. 지난 날 대통령이 미국에 있어 허다한 문제를 제때에 해결하지 못했다.
이승만: 국무위원제는 서울정부의 정신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국무위원제를 실시할 수 없다.
……[1]
이승만의 이러한 태도는 이승만에 대한 임시정부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정국(政局)에도 큰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이어 이승만은 대통령의 권리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총판 안창호를 면직시켰고 5월 16일에는 대리 국무총리 이동녕을 면직시키고 법무총장 신규식이 대리 국무총리를 겸하게 하였다.
이동휘는 『상해의 나날들』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실망했다. 철저히 실망했다. 이승만의 애국심이 이렇듯 허위적이라는 것을 정말 몰랐다. 사람들은 이승만이 진짜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자본을 건지기 위한 사기 행위라고 의심했다. 그는 상해에 온 후 동북의 항일무장투쟁 상황이나 임시정부의 정황을 요해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인들이 있는 곳에 가서 서양인들과 함께 백낙문(白樂門)에서 아가씨들과 춤을 추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우리민중은 고난에서 허덕이고 왜놈들은 잔혹한 중세기의 착취방식으로 우리나라 민중을 착취하고 있다. 만약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잔혹하게 도살한다.
정암(靜庵)과 율곡(栗谷)은 우리나라의 공자다. 정암은 늘 “제 집 일을 근심하듯 나라 일을 근심하라” 했고 “국가의 흥망에 필부도 책임이 있다.” 고 말했다. 그런데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는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도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승만은 이렇게 말하였다. “일본은 동방의 강국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강국이다. 한국은 이미 망했다. 만주에 있는 몇 만 자루의 총을 가지고 어떻게 일본인들을 이길 수 있겠는가. 춘원(이광수)이 만주의 청산리에 가 보니 일본인들에게 살해당한 동포들의 피가 강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니 내 보기엔 세계형세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2]
1921년의 봄은 근심과 걱정과 혼란 속에서 찾아왔다. 2월, 박은식과 원세훈 등이 연명으로 『동포들에게 알리는 글』이라는 표제로 시국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들은 국민대표대회를 열고 임시정부를 대체할 새로운 정치기구를 건립하자고 요구했다. 그들은 현 임시정부를 제 구실을 못하는 무용지물이라고 여겼다.
3월 5일, 조완구(趙完九)[3], 윤기섭(尹基燮)[4] 등 45명이 선언문을 발표하여 임시정부를 견결히 옹호하고 대통령과 임시정부 각 총장을 신임한다고 표시했으며 임시정부를 파괴하는 행위를 방지하자고 호소하였다.
『협성회(協成會)』도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파와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파가 형성되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4월 20일에는 북경에서 군사통일주비회의가 열려 임시정부에 대항하는 엄중한 국면이 나타났다.
『북경군사통일주비회』는 무장투쟁을 주장하는 조직이다. 박용만(朴鏞萬)[5], 신채호(申采浩)[6], 신숙(申肅)[7] 등이 원래는 각 지방의 항일독립무장을 통일할 목적으로 이번 회의를 열었는데 회의에서 신채호가 이승만의 위탁통치청원서를 폭로하자 회의분위기가 바뀌어 회의에 참가한 사람들이 모두 분노하여 이승만을 성토하고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4월 27일, 신채호, 박용만, 신숙 등을 위수로 하는 북경의 군사통일주비위원회는 『임시정부를 해산할 데 관한 결의서』를 발표하고 대표를 파견하여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에 『불신임』의안을 전달했다.
이러한 준엄한 국세에 대처하여 임시정부는 성명을 발표하여 반박하였다.
김구, 김규식, 서병호(徐炳浩) 등 사람들은 이승만에게 불만이 많았지만 임시정부를 살리자는 큰 국면에서 출발하여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일부 사람들의 극단 행위를 견결히 반대하였다.
김구는 또 국민회의를 열자고 주장하는 박은식을 찾아가 아주 정중하고 단호하게 “만약 당신이 계속 국민회의를 열자고 주장하면 당신은 이완용 같은 매국적이요.” 라고 말했다. 국민회의를 열면 문제의 해결은커녕 기필코 붙는 불에 키질하는 형국으로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기의 힘으로는 임시정부의 혼란한 상태를 수습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핍박에 못 이겨 대통령 직에서 사직하였다.
이때 또 이동휘의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1922년 1월 26일 내무총장 이동녕, 군무총장 노백린, 재무총장 겸 노동총장 이시영, 교통총장 손정도가 연명으로 이동휘 문제에 대해 공보를 발표하였다.
그들은 “이동휘가 정부 중직을 이용해 김립과 결탁하여 암암리에 한형권을 인국(소련)에 파견하였고 김립이 인국에서 후의로 증송한 거금을 중도에서 절취하였다. 그럼에도 이동휘는 도리어 죄를 임시정부의 전체 요인들에게 전가시키면서 임시정부를 붕괴시키려 하였으니 그 죄에 천인이 공노한다.” 고 질책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김립과 이동휘가 결탁하여 인국의 돈으로 사낭을 채웠다. 공산의 미명 하에 간첩노릇 하였으니 그 죄 마땅히 극형에 처해야 한다.”, “이동휘는 정부의 중용을 받았고 대우도 좋았건만 배은망덕하고 반변하여 적에게 투항하였으니 죄를 면하기 어렵다.” 고 맹공격을 하였다.[8]
사실 이동휘는 김립과 결탁하여 돈을 사낭(私囊)에 넣은 적이 없다. 허나 그의 심복인 김립이 돈을 절취하여 땅을 사고 첩을 얻어 호의호식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결국 이동휘는 김립의 횡령죄에 연유되어 부득불 사직한 뒤 소련으로 가 신규식이 국무총리로 선거되었다. 이동휘는 소련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8년에 블라딕보스토크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4월, 『독립신문』주간 이광수도 임시정부를 떠나 귀국하였고 귀국 후 인차 친일파로 되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광수가 상해에서 사귄 허영숙(許英肅)은 일본간첩이었다. 그녀의 사촉으로 이광수는 혁명을 배반하고 수치스러운 반역자로 되었던 것이다. 귀국한 이듬해 이광수는 허영숙과 결혼하였고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상해에서 철저히 실패했다. 그러던 중 상해를 떠날 구실을 찾게 되었다.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태평양 회의에 참가한다는 구실로 6월 4일에 수행인원 임병직(林炳稷)과 함께 『그린니트호』 윤선을 타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승만이 상해에 머무는 152일 사이에 임시정부는 한 차례의 큰 재난을 당했다.
[주]
[1] 1921년 5월 8일,『임시정부통신』.
[2] 이동휘,『상해의 나날들』.
[3] 조완구(趙完九): (1887-1959) 독립운동가, 정치가, 러시아에 가서 동지사를 결성. 상해임시정부수립에 참여, 의정원 의원, 재정부장 역임, 광복 후 신탁통치와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면서 시종 김구의 노선을 지지.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4] 윤기섭(尹基燮):(1887-1959) 경기도 파주 출생, 민중계몽과 민권사랑 운동에 진력. 임시정부 의원, 군무장 역임. 6.25전쟁 때 납북. 납북인사들을 중심으로 평화통일촉진위원회를 결성하고 집행위원이 됨. 1959년 반혁명 죄로 청산됨.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5] 박영만(朴英晩): 독립운동가. 1914년 평안남도 안주 출생. 일본 와세다대학 졸업. 북경에서 신채호, 신식과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 무장투쟁을 주장. 후에 광복군 선전과장, 광복군 제2지대장. 1981년에 사망.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6] 신채호(申采浩) : (1880.7.7-1936.2.2) 독립운동가. 사학가. 언론인. 『화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활약하면서 내외의 민족영웅전과 역사논문을 썼고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에서 무장투쟁을 제창하였다. 무정부주의자 비밀결사 사건으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십 년 도형을 받고 8년 만에 여순 감옥에서 순국. 1962년 건국공로훈장이 수여 됨.
[7] 신숙(申肅): (1885-1967)독립운동가. 천도교인. 경기도 가평 사람. 천도교 간부로 활약하면서 국내외 항일투쟁을 주도. 1920년 상해임시정부의 요청으로 상해에 가서 천도교 선전에 힘쓰는 한편 국내에 사람을 파견해 부산경찰서를 습격하게 함. 신채호, 박영만과 함께 무장투쟁을 주장. 1962년 건국공로훈장 수여.
[8] 庄錫昌,『한국독립운동과 중국』124쪽.
제4부 환난을 함께 하다
한중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오랜 세월 운명을 함께 해왔기에 두 나라 민중이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지 않을 이유가 없다.
《중화연합회 국민에게 알리는 글》 발표
김구는 비를 무릅쓰고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어양리(漁陽里)로 갔다. 신규식이 사람을 보내어 중요한 교육회의가 있다고 하면서 김구를 불렀던 것이다. 그 곳에는 신규식이 사무실 겸 침실로 쓰는 방이 있었다. 이 방에서 신규식은 중국의 애국인사 진영사(陳英士)[1], 송교인(宋敎仁)[2]과 함께 『신아동제사』[3]를 꾸렸으며 이 방에서『한국혼』, 『이순신』, 『안중근』등 책을 집필하였다.
김구는 신규식이 민족교육을 매우 중시하며 그 목적이 독립인재 양성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신규식은 상해에 망명하여 온 후 『박달학원』(博達學院)을 꾸렸다. 그는 상하이에 가 유학을 하고자 하는 청년들이 몰려들자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교육을 시켜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박달학원은 중국과 구미지역에 가서 유학하기를 원하는 학생들에 대한 예비교육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영어와 중국어, 역사, 지리, 수학 등 과목을 강의하였다. 주요 교사들로는 조성환, 박은식, 신채호, 홍명희, 문일평 등 독립투사들이 대부분이었고 그 외 중국인 농죽(農竹)과 미국인 모대위(毛大衛)도 있었다. 『박달학원』은 3기에 걸쳐 100 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신규식은 졸업생들의 지원하는 바를 최대한 중시하여 중국과 구미에 유학을 보내거나 유학자금을 융통할 수 있도록 알선해 주었다. 이러한 정성은 중국청년들에게도 미쳐 그들은 신규식을 따르고 존경하였다. 그 한 예로 대조신(戴朝臣)이라는 중국청년은 신규식을 아버지처럼 섬겼고 일제의 감시를 받던 신규식이 몇 차례 체포될 위기에 놓이자 몸을 던져 구해주기도 하였다.
김구가 부랴부랴 도착하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아직 오지 않았다. 신규식이 김구를 보고 말했다.
“백범선생님이 제일 먼저 오셨구먼요. 오늘 한중인사들이 모임을 가지고 한인들의 교육문제를 가지고 토론하려 합니다. 아직 시간이 이르니 먼저 『민국일보』에 실린 중화 전국 각계 연합에서 발표한 이 글부터 보십시오. 전 중화가 일떠나 한국의 독립을 돕자는 고마운 글입니다.” 김구가 글 제목을 보니 『국민에게 알리노라(告國人)』였고 발표된 날짜는 1920년 11월 5일이었다.
“전국의 부모, 형제자매들에게 삼가 알리노라. 한국인들이 임시정부를 세운 지 어언 2년, 그 사이 그들은 갖은 난관을 극복하고 백절불굴의 의지로 일본인들과 혈전을 벌려 세인들을 놀래웠다. 구라파와 미국의 여론도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인(仁)을 숭상하고 정의를 주창하기로 세상에 알려져 있거니…… 우리는 한국과 순치(脣齒)관계고 형제와 같도다. 지금 한인들은 독립의 기치를 높이 추켜들고 용감히 싸워 세계를 진감하고 있다…… 누구도 그 기세를 막을 수 없을 것이며 단언컨대 한국은 꼭 독립할 날이 있을 것이다. 무릇 이성(理性)이 있는 국민은 그들을 돕는 것을 응당 낙으로 삼을 지어다. 만약 우리가 동심협력하여 그들을 돕지 않고 공리와 인도주의에 어긋나는 일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민족의 큰 치욕으로 될 것이며 우리민족은 멸망의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중화민족이 한국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야 할 이유는 아래와 같노라.
1) 전에 일본은 갑오중일전쟁, 갑신일로전쟁 그리고 《중일마관조약》에서 한국의 독립을 인정한다고 명백히 밝혔다. 일본은 오늘 그 약속을 지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여야 한다.
2) 인도주의에서 출발하여 마땅히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여야 한다.
3) 동아시아의 안녕과 세계평화를 보위하기 위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여야 한다. 한국이 동방의 세르비아로 되어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야 한다.
4) 한국인들은 독립이 박절하기에 민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다.
5) 한국과 중국은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사이 두고 있고 산동반도와 황해를 마주하고 있어 일단 한국에서 어떤 일이 생기면 만주에 영향이 미치고 만주에 일이 생기면 반드시 몽골과 관내에 그 영향이 미치게 된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한 후 이미 만주가 일본에 침점 당했고 몽골이 위태롭게 되었다. 일제는 산동을 침략하고 있으며 그 세력을 황하유역까지 뻗치고 있다. 불 보듯 뻔한 바 이제 우리가 스스로 자기를 구하지 않는다면 미구에 우리나라도 두 번째 한국으로 될 것이다.
……총적으로 우리들은 한국의 독립을 위해 그들을 적극적으로 원조하여야 한다. 그들을 돕는 방법은 여러 가지일 수 있으니 혹자는 글을 써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할 수 있고 혹자는 선전의 방식을 취할 수 있고 혹자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할 수 있고 혹자는 각 대사관에 한국 독립에 관한 진정서를 제출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세계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게 함으로써 일제의 침략기염을 꺾어버리고 동방의 화근을 없애버려야 한다.”[4]
김구가 신규식에게 신문을 넘겨주면서 말했다.
“제가 20세 때 청계동의 안진사댁에서 학자 고능선(高能善)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한국의 각 계 인사들이 중국에 가 중국의 정계, 학술계와 광범히 연계를 가지고 중국의 지원을 받아야 한국이 전도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글을 보니 한중관계의 중요성을 더욱 알 것 같습니다.”
“한중관계는 순치관계이며 환난지우이므로 서로 이해하고 지지하여야 합니다. 중국에 온 우리 동포들이 처음으로 고려해야 할 문제가 한중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입니다. 먼저 〈세계의 피압박 민족이 연합해야만 공동으로 해방될 수 있으며 전 세계 민족이 다 같이 평등해야만 세계의 대동(大同)이 이룩될 수 있다〉는 손중산 선생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김구도 동감을 표시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각 계 인사들과 광범하게 접촉하고 그들의 지지를 쟁취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신규식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교육계의 황염배(黃炎培), 양석생(梁錫生), 등신영(鄧莘英) 등 선생들이 상해의 한국동지들과 함께 교육사업을 전개하려고 연석회의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미 이 사실을 임시정부 노동총판 도산선생에게 통보했습니다. 백범선생은 경무국장이시니 당신께서도 참가하십시오.”
신규식이 빛나는 눈길로 김구를 바라보았다.
“교육이야 예관선생 같은 학자들이 하실 일이지 저 같은 문외한이 뭘 알겠습니까?”
“백범선생이 문외한이라니 웬 말씀이십니까? 국내 황해도에서 학교를 꾸리시고 수많은 독립인재들을 양성한 백범선생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오늘 회의에 참석하셔서 좋은 견해를 발표해 주십시오. 그리고 교육기관을 보호하는 일도 매우 중요합니다.”
1920년 11월 8일, 황염배[5]를 위수로 한중국교육계의 인사들과 한국의 안창호, 김구, 여운형, 김인재 등이 대동주루(大同酒樓)에서 공동으로 두 나라의 교육사업을 상의하였다. 회의에서 상해에 있는 인성학교(仁成學校)[6]를 임시정부 산하에 두고 임시정부가 관리하기로 결정하였다.
경무국장인 김구는 학교의 안전과 학교를 잘 꾸리기 위해 많은 일들을 하였다.
1921년 중국의 각지에서 『중한호조사』가 성립되었다.[7]
[주]
[1] 진영사(陈英士): 1878-1916년,호주(湖州)사람. 호 기미(其美)기에 흔히 진기미라고 부르기도 함. 동맹회 주요한 골간. 민국 2년 (1913)에 원세개(袁世凱)가 음모를 꾸며 황제가 되었을 때 진영사가 분연히 성토함. 상해에서 원세개를 반대하여 무장폭동을 조직했다가 원세개가 파견한 특무에 의해 암살. 신규식의 절친한 벗.
[2] 송교인(宋教仁, 1882년-1913년): 자 둔초(遁初),호(渔父),호남성 도원(桃源)사람. 1913년에 상해에서 원세개가 파견한 특무에게 암살. 향년 32세. 중국의 위대한 민주혁명 선구자, 중화민국 창시인의 한 사람. 민국 초기 처음으로 내각제를 창도한 정치인. 신규식의 절친한 벗. 진기미(陳其美)로 불리기도 함.
[3] 『신아동제사(新亞東濟社)』: 1912년 상해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결성한 혁명세력 연합단체. 한국 측에서는 신규식, 박은식, 김규식 등이 주축이고 중국 측에서는 진기미(陳其美:진영사), 송교인(宋敎人), 호한민(胡漢民) 등이 주축이었음.
[4] 『민국일보』1920년 11월 5일
[5] 황염배(黃炎培1878-1965): 호 초남(初南), 자 임지(任之). 강소성 사현(沙縣) 사람. 중국 근대의 저명한 애국자, 민주주의 교육가. 중국 근대 직업교육의 창시인, 이론가. 상해 한인 혁명가들과 교분이 두터웠음.
[6] 『인성학교(仁成學校)』:1917년에 몽양 여운형(呂運亨)이 상해에 세운 조선인사립학교. 후에 상해임시정부에서 관리함.
[7] 『중한호조사』: 1919년부터 중화민국 각지에서 한국의 독립가들과 중국의 민간인들 사이에서 한국독립지원, 반제국주의 활동을 목적으로 결성된 민간단체. 이 단체는 중국의 오산(吳山)과 임시정부의 윤현건, 조동호 등이 결성함. 중국공산당의 지도자 진독수도 참여. 모택동은 『장사중한호조사』의 핵심성원임.
진독수가 도움을 청하다
1920년 5월, 제3공산국제 원동국에서 위진스키를 중국에 파견하여 중국의 사회주의자들을 도와 중국공산당을 건립하게 하였다. 8월, 북경대학 교육장 진독수(陳獨秀)[1]가 상해에 왔다. 당시 대계도 (戴季陶), 요중개(蓼仲愷), 심현로(沈玄盧)가 상해에서 잡지 『건설』과 『성기평론(星期評論)』을 꾸리고 있었으며 이대소(李大簫)[2]의 학생인 한인 전가농(全家農: 일명 全一學)이 상해에서 무정부주의를 선전하고 있었다. 진독수, 이한준(李漢俊), 심정일(沈定一), 양명재(楊明齋) 등이 상해 프랑스조계지에서 공산주의소조를 건립하고 중국공산당을 건립할 준비를 하였으며 잡지『신청년』을 공개적으로 출판하고 맑스-레닌주의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이리하여 상해에서 각종 사조가 활약하기 시작했다. 진독수(그 당시 이름은 덕리德利는 프랑스조계지에 있는 백문위(柏文瑋)의 집에 유숙하였다. 당시 치안이 아주 혼란스러워 진독수의 신변이 매우 위험하였다.
이때 김구가 발 벗고 나서서 경무국장의 신분으로 진독수를 여러 면으로 도와주었다. 전가농이 자기의 일기에서 당시 자기와 진독수, 김구와의 공동활동 경력을 반영하고 있다.
경갑(庚甲) (1920년) 8월 27일.
오늘 아침에 심현로, 이한준 선생이 어양리 3호에서 망나니들에게 맞아 부상을 입고 돈을 빼앗겼다. 진독수선생이 이 소식을 듣고 즉시 장상술(張上述)과 백문위를 파견하여 경찰에 신고하게 하였고 나를 하비로에 가 한국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게 하였다. 나는 임시정부에 가 대리 국무총리 안창호선생을 만났다. 나는 그들에게 진독수선생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상해에서 『신청년』을 꾸리고 있으며 공산주의 소조를 성립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대계도, 요중개, 심현로 등이 신문화 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임시정부에서 인원을 파견하여 활동에 참가하고 협조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안창호선생이 김구를 불러왔다. 그와 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무정부주의자이고 김구는 민족주의자로서 우리들은 이념상에서 차이가 컸다. 그러나 한국의 독립이라는 이 문제에서 매우 많은 비슷한 점이 있었다. 내가 청하니 김구는 어양리에 가 진독수와 이현준 등을 만나겠다고 약속하였다. 보아하니 김구는 아주 성실한 사람 같았다.
경갑(庚甲) 9월 3일.
모친의 편지를 받았다. 부친은 이미 사망했고 누이는 일본에 갔다. 모친께서는 나라에 충성하고 가정에 효도하여 벗을 믿고 나라를 위해 힘을 내라고 분부했다.
어양리 2호에 있는 백문위의 집에서 진독수, 이한준, 양명재 등이 김구를 맞이했다.
“김 국장의 내방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도 역시 중국을 구하기 위해 암흑 속의 민중을 불러 일으키려고 합니다. 나 본인은 한국민족운동의 형편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나는 ‘일본은 반드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야 한다’는 손중산선생의 말에 동감입니다.”
진독수는 단도직입적으로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자기의 태도를 표시했다.
김구가 말했다.
“목전 우리민족은 일본 놈들의 야만적인 통치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중국의 민족혁명에 대해서도 아주 지지하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상해뿐만 아니라 기타 지방에서도 한국의 민족주의자들과 광범하게 접촉하였다.
1919년 초, 장사, 안경, 무한, 광주와 상해 등 지에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를 건립하였고 중국공산당의 조기 활동가들이 모두 이 조직에 참가하였다. 1921년 3월 17일, 호남의 『중한호조사』가 장사(長沙) 소오문정가(小吳門正街)에 있는 한 소학교에서 성립되었다. 한국 측에서 임시정부 외무부 선전원 황원희(黃遠熙), 이우맹(李愚氓), 이기장(李基彰) 등 3명이 참가하였고 중국 측에서는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였다. 그 중에 모택동(호조사 통신부 주임)과 하숙형(何叔衡: 선전부 주임)[3]도 있었다. 같은 해 5월, 상해에서 『중한호조사』가 성립되었다. 한국임시정부에서 신규식, 이유필, 조상섭, 여운형, 김홍서 등 요인들이 참가하였고 중국 측에서는 주검추(周劍秋), 황종한(黃宗漢) 등이 참가하였다. 후에 등중하(鄧中夏)[4], 운대영(惲代英)[5], 양현강(楊賢江), 이아농(李亞農), 장제범(張濟帆) 등도 참가하였다. 상해『중한호조사』는 하비로에 냉면식당을 꾸리고 중국공산당과 한국 애국지사들의 비밀연락처로 삼았다.
1922년 11월, 중국공산당 제 22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한국문제를 국제형세의 일부분으로 삼고 회의 의정에 올렸다. “고려 등 피압박민족들이 일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조직 있게, 세차게 독립운동을 일으키고 있어 제국주의자들이 불안해하고 있다.”[6]
대회에서는 「선언」을 발표하여 한국에서의 일본제국주의의 잔혹한 식민통치와 한국민중에게 가져다 준 고통에 대해 강렬하게 규탄하고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독립투쟁을 높이 찬양하였다.
[주]
[1] 진독수(陳獨秀1879-1942): 중국의 사상가, 정치가, 혁명가. 자는 중보(仲甫), 호는 실암(實岩). 안휘성 명문가 출생. 일본 유학. 북경대학 문과대학 학장 역임. 1916년 『신청년』잡지 발간. 1917년 호적(胡適) 등과 함께 백화문(白話文)을 제창하고 유교사상을 비판함. 1921년 중국공산당 창건에 앞장서고 총서기로 당선됨, 1927년에 국공합작이 파열되자 총서기직에서 축출 당함. 당시 공산당의 노선과 엇갈려 트로츠키파로 지탄 받음. 1940년에 病死.
[2] 이대소(李大釗 1889년-1927년): 중국 최초의 맑스주의자. 중국공산당 창시자의 한 사람. 1913년 천진 북양정법전문학교 졸업. 일본에 건너가 조도대학(早稻大學)에서 공부. 후에 북경『신종보(新種報)』 주필, 북경대학 도서관 주임.『신청년』잡지 편집. 5.4운동을 영도하고 개령주의와 투쟁함. 국공합작기간에 손중산을 도와 삼민주의를 제정하고 국민당을 개조하는데 큰 작용을 놀았음. 신채호 등 한국인 독립가들과 우의가 깊었음.
[3] 하숙형(何叔衡 1876-1935): 중국무산계급혁명가. 중국공산당 창시인의 한 사람. 호남자수대학 교장(湖南自修大學校長) 역임. 1928년 모스크바중산대학에서 학습. 1931년 중앙소베트집행위원 겸 공농검사위원, 대리인민위원, 최고법원 원장. 1935년 복건성 장하(長夏)부근에서 국민당 군대와 싸우다가 희생.
[4] 등중하(鄧中夏): 1896년 호남 의장(宜章) 출생. 1917년 북경대학 국문학부 졸업. 1919년 5.4 운동에 참가. 1920년에 북경대학 맑스주의학설연구소 성립. 동년 10월 북경공산주의소조에 참가. 1922년 제2기 사회주의청년단 중앙 집행위원, 임시중앙국 위원장, 조직부 주임. 1927년 중공중앙 8차회의에 참가. 중앙정치후보위원에 당선. 1935년에 국민당당국에 체포. 9월 21일에 남경에서 피살. 당년에 39세.
[5] 운대영(雲代榮): 1895년 호북성 무창(武昌) 출생. 자(字) 자의(子毅). 무창중화대학 졸업. 192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1923년에 청년단중앙 선전부장. 『중국청년』 주필. 상해대학 교수. 황포군관학교 정치교관 겸 중공당단서기, 무한중앙군사학교 교관 역임. 남창기의와 광주기의에 참가. 1928년 후 중공중앙 선전부 비서장, 중앙조직부 비서장 역임. 국공합작시기 국민당 제2기 중앙집행위원. 1930년 상해에서 국민당에 체포. 남경에서 살해됨.
[6] 『중공당사자료』, 464-467쪽.
광동 호법정부가
한국임시정부 승인
1921년의 추석은 을씨년스러운 전시 상태를 가지고 강림하였다. 북풍이 기승을 부렸다. 상해탄은 쓸쓸하고 처량하였다. 거리는 텅 비어 나다니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모두 집안에 박혀 추석의 밤을 보냈다.
김구의 방이다. 이동녕과 김구가 방금 전에 민석린(閔錫麟 즉 민필호)[1]이 보내온 『중국호법정부가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한 시말기(中國護法政府承認 韓國臨時政府始末實記)』를 보고 있다. 이 문장은 3월 31일에 『국민공보』에 발표 된 것이다.
문장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921년 10월, 대리 국무총리이며 외무총장, 법무총장인 신규식이 비서 민석린(閔錫麟)과 함께 광주에 있는 호법정부에 가 한국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는 문제를 가지고 협상하였다.
신규식과 민석린은 광주에 가기 전에 먼저 홍콩에 가 신규식이 신해혁명 때 사귄 벗인 당계요(唐繼堯)장군을 만났다. 당계요는 신해혁명 전에 신관관절(新官管節)을 지냈고 후에 곤명에서 기의에 참가하였다. 그 후에는 전군군벌(滇軍軍閥: 滇은 운남성의 약칭)이 되었다. 1921년에 다른 한 군벌 고품진(顧品珍)에게 패하여 지금은 잠시 홍콩에 피해 있으면서 재기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규식은 당계요에게 한국임시정부 성립과정을 소개하고 이번에 온 목적을 이약했다.
신규식은 3.1운동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한국독립운동을 소개했다.
“……근년에 우리 정부는 이념의 차이로 혼란이 생겨 인사변동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하여 여러 사람이 이 동생을 보고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법무총장을 맡으라 하며 차마 거절할 수 없어 응낙하고 비록 재능은 없으나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우리 임시정부가 귀국 경내에서 건립된 지 어언 3년이 되었사온데 그 사이 정식으로 귀 정부를 방문하지 못해 너무나 죄송합니다. 북경정부는 이미 일본 세력들에게 포위되어 근본 상에서 중국민중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오늘 광동에서 호법정부가 성립되고 손대통령이 집정하니 우리들은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 번에 우리 정부가 이 동생을 특사로 파견하여 국서를 가지고 귀 정부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호법정부가 우리 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해주고 우리 광복운동을 지원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광주에 오게 되었습니다……”
당계요가 듣고 아주 기뻐하였다.
“좋습니다, 좋고 말구. 한데 참 부끄럽습니다. 우리나라가 공화국을 건립한 지 이미 10년이 되었습니다마는 이 10년 사이에 정객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군벌들이 할거(割據)를 하면서 전란이 계속되니 나라가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오늘 손대통령이 호법정부를 세워 우리민족이 희망이 있게 되었지요. 그러나 북양군벌을 철저히 타도하고 중국을 통일하자면 아직 시일이 걸려야 합니다. 귀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우리는 전적으로 동정하고 지지합니다. 헌데 빈 말 뿐이고 지금까지 크게 원조해주지 못해 대단히 죄송합니다.”
당계요는 또 임시정부의 군사와 경제상황에 대해서 물었다.
이에 신규식이 대답했다.
“우리 임시정부는 지금 모든 것이 박약합니다. 군사를 말할라치면 길림성과 요녕성, 그리고 영고탑(寧古塔) 일대에 군사 근거지가 있습니다. 그 곳과 우리 본국은 비교적 거리가 가까워 일하기 편리합니다. 동북 3성에 우리 한민족이 200 여만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의 그들의 지원하는 자금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부 동지들이 무관학교를 꾸리고 군사교육을 실시하여 사관들과 혁명간부를 배양하고 있습니다. 후에 장학량(張學良)이 학교를 해산하라고 명령하여 학교가 폐쇄당하고 대부분의 학생들이 독립군에 참가하였습니다. 지금 동북에서는 항일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작년 9월 초순에 길림성 화룡현 부근 청산리전투[2]에서 일군 만 여명과 격전하여 일군 3천 여명을 격살하고 연대장 한 명을 격사하였습니다. 그 번 싸움은 한국독립무장투쟁사에 중요한 한 페이지를 써넣었습니다. 헌데 경제 면에서는 막대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국내의 동포들은 일본인들의 경계가 삼엄하여 자금을 보내올 수 없고 주로 미국 동포들이 자금을 보내오지만 그것 또한 얼마 안 됩니다. 그래서 늘 자금난으로 모대기고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해도 자금 때문에 할 수가 없습니다.”
당계요가 말을 받았다.
“한 민족이 광복을 하려면 자기 힘에 의거해야 하지만 외부의 지원도 필요합니다. 이 동생은 귀국에 대해 전부터 인상이 아주 좋습니다. 전에 일본에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할 때 서울에 들렸었는데 거리에서 다니는 학생들이 생기가 넘치고 영준하여 전혀 망국의 학생들 같지 않았습니다. 만약 앞으로 이 동생이 운남에 돌아간다면 맹세코 한국을 위해 한국인 군사인재를 배양하겠습니다. 적어도 두 개 사단쯤 말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많이 돕고 싶으나 지금은 힘이 미치지 못해 미안할 뿐입니다. 가령 프랑스 은행문제가 풀린다면 당장 10만 위안을 후원하겠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신규식이 깊이 감동되었다.
“장군의 후의를 가슴 깊이 새길 것입니다. 장군께서 하루 빨리 운남으로 돌아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이것은 장군의 개인의 행복일 뿐 아니라 우리 한민족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이 동생이 상해에 돌아간 다음 여러 동지들에게 장군의 후의를 전달하겠습니다.”
당계요가 신규식에게 감사를 드리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운남에 가는 일은 조만간 현실로 될 것입니다. 목전엔 잠시 비밀로 붙이고 있습니다. 운남에 돌아가면 선생께 통지할 테니 우리한테 사람을 보내 협상합시다. 우리는 열렬히 환영할 것입니다.”
당계요와 작별한 신규식과 민석린은 10월 29일에 광주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아침, 신규식과 민석린이 손중산을 만나려고 관음사(觀音寺) 아래에 있는 총통부로 찾아갔다. 회객실에서 총 참의원 호한민(胡漢民)[3]이 그들을 접대하였다. 신규식이 호한민에게 온 뜻을 말하자 호한민은 이렇게 말하였다.
“선생은 우리의 오랜 벗이라 사실 손 총통을 만나는데 번다한 절차가 필요 없겠지만 이번에 선생은 나라의 대표 자격으로 왔기에 국제관례에 따라 먼저 외교부와 상의한 다음 나와 함께 총통을 배알하러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호한민이 신규식을 데리고 외교부장 오정방(吳廷芳)과 차장 오조구(伍朝柩)를 만나 온 뜻을 말한 다음 정식으로 손중산을 회견하였다.
11월 3일 아침, 그날은 바람 한 점 없었고 하늘이 푸르청청 하였다. 손중산이 관음산의 총통부에서 김규식과 민석린을 회견하였다. 호한민도 자리를 같이 했다.
손중산은 중국 근대의 위대한 민족혁명가다. 이름은 문(文)이고 자는 덕명(德明)이고 호가 일산(逸山)이며 후에 이름을 중산초(中山樵)라고 고쳤다. 1866년, 광동성 향산(香山)에서 출생했다. 1882년에 홍콩에서 서의서원(西醫書院)을 졸업했고, 1894년에 이홍장(李鴻章)에게 정치혁신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가 거절당하고 1900년에 광주에서 기의를 발동했다가 실패했다. 1905년에 일본 도쿄에서 중국동맹회를 결성하고 총재로 추천 받으며 “외적을 몰아내고 중화를 회복하며 토지를 골고루 나눈다.”는 3민주의학설을 창립하였다. 1911년에 무창기의를 발동하고 12월에 임시총통에 선거되었고 1912년에 중화민국임시정부를 성립하였다. 1917년에 광주에서 호법군정부를 성립하고 대원수가 되어 북벌을 시작하였다. 1918년에 국민당을 창건하고 1920년에 비상대통령에 취임하였지만 1922년에 진형명(陳炯明)의 배반으로 다시 상해에 은거했다가 1923년에 광주에 가 다시 대원수부를 세우고 중국국민당 제1차전국대표대회를 열었으며 연소(聯蘇), 연공(聯共), 공농부조(工農扶助)의 3대 정책을 선포하였다. 1925년에 그는 북경에서 사망했다. 사망 직전에 그는 “반드시 민족투쟁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와 평등하게 지내려는 전 세계의 모든 민족들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싸우라!” 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신해혁명 때 신규식과 깊은 우의를 맺었으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방조하였다.
서로 수인사가 끝난 후 신규식이 말을 꺼냈다.
“작년에 상해에서 총통과 고별한 후 남쪽으로 내려와 인사드리려고 여러 번 생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실로 죄송합니다. 이번에 저는 우리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손 총통께 인사드리려고 왔습니다.”
손중산이 머리를 숙여 감사를 표시했다.
“귀국 정부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귀국의 대통령과 정부의 전체 각료들의 건강을 축원합니다.”
신규식이 재삼 감사하다고 말했다.
손중산이 이어서 말했다.
“선생은 나의 동지입니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주시니 실로 고맙습니다. 국사 자격으로 서로 만나니 더욱 기쁩니다. 오늘의 회견이 비록 정식 회견이 아닐 지라도 서로 속을 터놓고 한껏 깊은 정을 나눕시다.”
신규식이 온 뜻을 밝혔다.
“규식이 이번에 온 뜻을 호선생에게 이미 상세히 여쭈었습니다마는 규식은 신해혁명 때에 중국에 망명하여 중국혁명을 겪었습니다. 동맹회에 참가하여 손총통을 따라 제1차 혁명에 참가하였습니다. 중국의 혁명이 곧 우리의 혁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귀국의 혁명이 성공하는 날이자 한국이 독립하고 해방되는 날일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항상 중국혁명에 기여하려 했지만 규식이 무능하여 크게 한 일이 없으니 참괴할 뿐입니다. 민국이 성립된 10년 사이에 변고가 많았으니 원세개(袁世凱)[4]가 황제로 자칭하였고 장훈(張勛)[5]이 복벽하였으며 정객이 나라에 재앙을 가져오고…… 한 마디로 내우외환이 그칠 새 없었지요. 하지만 오늘 다행히 손대총통이 호법정부를 세워 천지정기를 지키고 국가의 기틀을 바로 잡았으니 우리 임시정부는 진심으로 경하합니다. 이젠 중국의 통일이 희망이 있게 되었고 동아에 서광이 비치게 되었습니다. 고로 규식은 손대총통과 호법정부 제공들에게 숭고한 경의를 드립니다. 저는 이번 걸음에 우리 임시정부를 대표하여 귀국에서 우리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해 주시고 평등호혜의 원칙에서 우리 광복운동을 지원해 달라는 청구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 정부에서 작성한 5항 조약을 가지고 왔으니 총통께서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신규식이 문건을 꺼내 손중산에게 넘겨주었다.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호법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정식정부임을 승인하며 그 원수와 국권을 존중해 주기를 바란다.
2. 호법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해 주기 바란다.
3.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경비로 500만원을 빌려주기 바란다.
4. 한국의 청년들이 중국의 군관학교에 입학하는 것을 허락해 주기 바란다.
5. 한국독립군이 훈련할 훈련 기지를 제공해 주기 바란다.
손중산이 5항 조약을 본 후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중한 두 나라는 형제입니다. 같은 문화권에서 다 같이 한자를 씁니다. 우리는 한차에 앉은 처지고 순치관계로서 서로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마치 미국과 영국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광복을 위해 중국은 응당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만청(滿淸)을 뒤엎고 공화국을 세웠지만 군벌, 정객들이 서로 자기의 이익만 챙기려고 혼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내가 세운 국가정신의 실질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여 민중이 도탄에 빠지고 민족이 위기에 임했으니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중국을 건질 혁명정부가 필요합니다. 이리하여 호법정부가 창립된 것입니다. 허나 목전, 북벌은 아직 성공하지 못했고 국가가 통일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광동성 하나의 힘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경제적으로 원조하기가 사실상 어렵습니다. 귀국정부에서 요구한 제4항과 5항에 대해선 지금 당장 답장을 드릴 수 없습니다. 적어도 북벌전쟁에서 무한을 점령한 다음에라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제 2항은 아무 문제도 없습니다. 중국에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진행하는 임시정부에 대해 우리는 깊이 동정하며 추호의 고려도 없이 그 정부를 인정합니다. 귀 정부에서 제기한 세 번째 조항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자제들을 유능한 군사인재들로 배양하겠습니다. 이 일에 대해 제가 인차 결정하겠습니다. 각 군사학교에 명령을 내려 될수록 귀국이 많은 학생들을 입학시키게 하겠습니다. 훈련기지는 북방이 가장 적합합니다. 목전 정부의 힘이 아직 하북에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허니 지금 말해 보아야 빈 소리고 선생께서 실망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은 저의 진심의 말입니다……”
신규식이 말했다.
“아니, 손총통의 마음을 이해할 만합니다. 우리 정부를 인정하고 지지하는 것만 해도 만족입니다. 한 가지 더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금후 호법정부와 우리정부 사이에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전에 저와 귀 정부 사이는 사인 관계였고 정부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일 처리에서 여러 모로 편리할 것 같습니다.”
“선생의 말씀이 지당합니다. 이후 귀 정부에서 광주에 상주대표를 파견하여 우리정부와 수시로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합시다. 경비는 우리가 전담하겠습니다……”[6]
김구가 신문을 다 본 후에 이동녕을 보고 말했다.
“손중산선생의 말이 아주 도리가 있습니다. 중국은 목전 군벌들이 할거 하고 제국주의가 침범하고 호법정부가 북벌을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경제적 지원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정치상에서 우리 정부를 인정하고 지지하니 우리로서는 너무나 반가운 일입니다.”
이동녕이 개탄조로 말하였다.
“헌데 소련과 미국은 우리 임시정부를 승인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일본과 척을 짓고 싶지 않아합니다. 보건대 우리 임시정부는 아마도 자력갱생의 길을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김구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황혼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주]
[1] 민석린(閔錫麟1898년-1963년): 독립운동가. 경기도 여주 사람. 원명은 민필호(閔弼浩), 호가 석린(石麟). 1921년 신규식의 수행비서로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는데 공헌. 1938년 중국군사위원회 장개석의 시종실의 암전연구소(暗電硏究所) 총무, 군사위원회 기술연구실 제3조 조장(소장급)으로 근무. 1939년부터 김구 주석 판공실 실장 겸 외교차장,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임명. 처음으로 임시정부 무장경비대를 조직. 광복이 되자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환국 경비 6억 원을 얻는데 성공함.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부단장이 되어 단장 박찬익과 함께 임시정부의 잔무(殘務)를 처리. 1948년에 대만주재 총영사로 임명됨.
[2] 호한민(胡漢民1879-1931): 중국국민당 영도자 한 사람. 자 전당(殿堂). 광동성 번우(番禹)사람. 1914년에 손중산과 같이 중국혁명당 창건. 1924년 국민당 우파수령이 됨. 대리 대원수 겸 광동성 성장을 역임. 1927년 장개석과 함께 4.12반혁명 정변을 발동. 남경국민정부 정치회 주석, 입법원 원장. 1935년 중상회(中常會) 주석으로 당선. 그해 광주에서 병사. 상해에서『신아동제사』에 입사해 신규식, 박은식 등과 교분이 두터웠음.
[3] 청산리전투: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길림성 화룡현 청산리 일대에서 일군을 대패한 싸움. 1920년 10월 김좌진을 총사령관으로 홍범도를 부 사령으로 한 독립군이 일군 3천 3백여 명을 사살, 독립군의 피해는 100여명에 불과함. 세계전쟁사상 희소한 전과로서 한국독립군이 거둔 최대 승리.
[4] 원세개(袁世凱): 1859년 호남성 상청(相靑) 출생. 정치가, 군인, 임진왜란 이 후 조선에 주재하면서 청나라 황제를 대신해 내정 간섭을 수행. 무술변볍(戊戌變法)을 계기로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 손원과의 타협으로 선통제를 끌어내리고 임시대통령이 됨. 황제를 꿈꾸다가 전국이 반대하자 포기함. 1916년에 지병으로 사망.
[5] 장훈(張勛): 1854년에 강서성 규신현(奎新縣) 출생. 북양군벌이며 중국근대 군사가. 청말 운남, 감숙, 강남제독, 신해혁명 후 강소성 독군, 장강순열사(長江巡閱使). 1917년 정변을 발동하고 황제제도를 회복하려고 하다가 실패. 그 후 천진에 은거. 부하 장병들에게 머리태를 기르라고 명령하였기에 일명《변수(辨帥)》라고 불리움.
[6] 『국민신보』 1921년 3월 31일.『중국호법정부가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한 시말기(中國護法政府承認 韓國臨時政府始末實記)』
모택동과
『장사중한호조사 』
20세기 20년대 초에 건립된 『중한호조사』 는 한중 두 나라 인민들이 관내지구에서 조직한 공동항일을 목적으로 한 우호단체이다. 1921년 3월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황연희와 호남문교신문계의 진보인사들이 연합으로 조직한 『장사중한호조사』는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된 조직으로서 그 후에 육속 성립된 각 지방의 중한호조사의 본보기로 되었으며 한중우호관계사와 호남신문화운동에서 모두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모택동은 장사중한호조사의 주요한 발기자고 조직자다. 반일구국과 원한(援韓)사상이 중한호조사를 조직한 사상기초다. 모택동은 소년시대부터 일본이 조선과 대만을 침략한 내용을 서술한 책을 읽으면서 일본제국주의를 증오하게 되었고 한국독립운동을 지지하게 되었다.[1]
모택동은 중국의 역사를 새로 바꾼 위대한 인물이다. 모택동은 중국무산계급 혁명가고 정치가고 군사가며 중국인민해방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한 창시자다. 1893년에 호남성(湖南省) 상담현(湘潭縣) 소산충(韶山沖)에서 출생했고 자는 윤지(潤之)다. 1918년, 호남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찍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접수하였다. 1921년 7월에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대표대회에 참가하였고 1923년에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1926년에 광주에서 농민운동강습반을 꾸리고 농민운동골간을 배양하였다. 1927년 한구에서 열린 중공중앙정치국 확대회의에서“총에서 정권이 나온다”는 저명한 논단을 제기하였다. 1927년에 정강산에서 혁명근거지를 건립하고 홍군 제4군을 창설하였는데 모택동이 정치위원을 맡고 주덕이 군장을 맡았다. 1928년부터 선후하여 “중국의 홍색정권은 어찌하여 존재할 수 있는가 ”, “한 점의 불꽃이 요원의 불길로 타오른다.” 등 저작을 썼다. 1935년 장정 도중 준의에서 열린 정치국확대회의에서 모택동의 영도적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는 1936년에 군위주석에 임하여 사망할 때까지 맡았다. 1943년에 중앙정치국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주석, 중앙서기처 서기로 선거되어 사망 전까지 연임하였다. 1945년, 항일전쟁이 끝나자 주은래 등과 함께 중경에 가 장개석과 평화담판을 하였다. 1949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에 선출되었다. 1957년부터 점차 주관주의와 개인 독단주의가 심해져 대약진, 인민공사 운동을 단행했고 1966년에는 『문화대혁명』 을 발동하여 나라에 엄중한 피해를 주었다.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은 북경에서 사망했다.
한국에서 일어난 1919년 3.1운동은 중국의 5.4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모택동은 한국 민중의 항일투쟁을 광범하게 선전하면서 호남인민들의 항일투쟁을 고무하였다. 그는 자기가 주필로 발간하는 『상강평론』(湘江評論)잡지에 한국 민중이 영용하게 항일하는 정황을 소개하였다. 그는 『동방대사술평』(東方大事述評)이란 글에서 “조선인민의 3.1운동은 일본군경의 진압을 받아 겉으로는 독립운동이 잠시 정지된 것 같지만 조선인민이 불요불굴의 투쟁정신을 갖고 있기에 그 어느 날인가는 꼭 독립할 것이다.”고 단언했다. 모택동은 학생들을 조직하여 거리에서 강연하거나 연극을 하는 형식으로 조선인민의 독립운동정신을 선전하고 중국인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상조』(湘潮)주간에서는 조선의 망국사를 제재로 『안중근』, 『망국루』(亡國淚),『망국감』(亡國鑒) 등의 연극을 만들었다.
반일반봉건사상을 고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모택동이 영도하는 5.4운동은 호남인민들이 한국독립운동을 동정하고 지지하는데서 큰 작용을 놀았다. 장사중한호조사는 한중 두 나라 인민들이 공동 항일하는 사회기초를 닦아놓았다. 한국임시정부도 한국독립투쟁에 대한 중국인민의 동정과 지지에서 중한호조사가 큰 기여를 하였다고 인정하였다.[2]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원들의 호남에서의 활동이 모택동이 신속히 장사중한호조사를 조직하게 한 요인으로 작동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성립된 후, 외교사업의 목적을 “세계열강들에게 한국의 독립이 세계평화를 유지하는데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시키고 이로부터 우리나라를 동정하고 지지하게 하는 것이다.”고 확정하였다.[3]
그 방침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의 만행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이 세계평화에 미친 영향과 한국민족이 충분하게 독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선전하고, 둘째, 아시아와 유럽, 미주 각국에 선전원을 파견하여 임시정부의 견해를 선전하며, 셋째, 아시아, 유럽, 구미의 각 정당을 통해 한국이 독립해야 한다는 여론을 일으키고 넷째, 한중친목회를 조직하는 것을 방침으로 확정한다.
한국임시정부는 미국과의 외교선전에서 실패하고 소련과의 외교가 미미해지자 외교의 중점을 중국에 두었다. 1920년 9월, 임시정부는 상해의 독립신문에 『한중 친우회를 설립할 필요성 』이란 글을 실어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아울러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의 선진적인 인사들도 한중공동항일의 필요성을 의식하게 되었다. 중국의 각 사회단체들이 한국독립운동을 원조할 단체를 건립하자고 호소하였다. 전국 각계 연합회가 『한인들을 원조할 데 대해 국민들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중국의 각지에서 중한호조사가 건립되었다.
『중한호조사 』는 일정한 의미에서 함께 항일하자는 국제주의 통일전선으로서 한중 두 나라 인민들의 공동항일의 염원을 대표하였고 민족독립에서 공동한 이익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단체 중에서 1921년 3월 14일에 모택동이 참여하고 발기한 『장사중한호조사』 가장 먼저 성립된 단체로서 본보기의 역할을 하였다. 한국방면의 발기인으로서는 이우민(李愚망), 황영희(黃永熙), 이기창(李基彰)이고 중국방면에서는 역배기(易培基), 도의(陶毅), 임공극(任恭克), 모택동, 하숙형(何叔衡), 하민범(賀民范), 광일휴(匡日休), 사환남(謝煥南), 성욱동(省旭東) 등 26인이었다.
간부로서는 선전부 주임에 이기창(한국인), 하숙형(중국 인), 통신부 주임에 황영희(한국인), 모택동(중국인), 경제부 주임에 이우맹(李愚氓)(한국인), 하민범(중국인).[4]
『장사중한호조사』 성원들 중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그들 모두가 중국교육계와 언론계, 사상계에서 위망이 있는 인사들이었다.
모택동은 북경도서관에서 사업할 때 이대소의 추천으로 한국의 혁명지사들과 접촉하였고 그들을 통해 한국의 혁명정황을 깊이 요해하게 되었다. 이런 연고로 모택동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더욱 동정하고 지지하게 되었다. 후에는 또 장사에서 한국임시정부의 특파원과 적지 않게 내왕하였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모택동이 『장사중한호조사』 의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되었고 통신부 주임까지 맡았던 것이다. 모택동을 비롯하여 당시 『중한호조사 』 성원들이 많은 활동을 하였지만 자료가 산실되어 전면적이고 구체적인 것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만 대략적인 것만 알려지고 있을 뿐이다.
첫째, 호남의 『대공보』와『장사중한호조사』가 (大公報)와 외성의 신문들에다 한국독립운동을 소개하고 선전하였다. 예를 들면『대공보』에서 1921년 3월에 『국임시정부 신 내각 조직』 이란 글을 실었고 잇따라 『한인교포들 독립운동기념대히 거행』,『한국독립당의 대활동』 등 문장들을 실었다. 둘째, 중한호조사성원들이 박은식선생이 쓴 『한국독립운동혈사』를 대량으로 선전하고 판매하였다. 셋째, 중한호조사는 한인 지사들이 배일주의를 선전하는 활동을 엄호하고 조직하였다. 일본인들은 한인들이 장사에서 배일사상을 선전하는 것을 두려워 천방백계로 저지시키고 반일지사들을 체포하려고 하였으며 호남성정부에 한인들의 활동을 막아달라고 강력히 요구하였다. 1921년 5월 26일 밤, 한국임시정부 특파원 이원익(李元益)이 장사의 선산학사(船山學社)에서 연설하였다. 연설을 듣고 난 후 사각재(謝覺哉)[5]는 “거동이 우아하고 사리가 정연하여 참 사랑스러웠다.” 고 칭찬하였다. 넷째, 장사에 있는 한인독립지사들을 동정하고 지지하였다. 1921년 4월 4일 호남의 『대공보』는 일본영사관에서 한인의 강연을 간섭한 사실을 폭로하였다.
“망국의 인민들은 언론도 자유가 없으니 얼마나 가련한가. 일본인은 증오스럽고 한인은 불쌍하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간섭을 받으니 더욱 불쌍하다.”
총적으로 『장사중한호조사』의 활동은 두 나라 인민의 상호 이해를 가강하였고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일정한 사회적 기초와 사상적 기초를 닦아놓았다. 하기에 김구는 1921년 4월, 광일휴(匡日休)에게 보낸 편지에서 “귀방(貴邦)의 인인군자(仁人君子)들이 공동의 원수 일제를 타도하려고 우리와 손을 잡고 싸우고 있습니다. 이는 귀방 외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이에 우리들은 심히 감격하고 있습니다.”[6] 라고 썼다.
그러나 호조사는 예기했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첫째, 한국 측 혁명가들은 『중한호조사』를 통해 독립자금을 지원받으려고 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일부분밖에 지원받지 못하였다. 둘째, 당시 모택동은 중국공산당건립으로 분망히 보내다 보니 호조사를 미처 돌볼 겨를이 없었다. 셋째, 중방의 호조사 성원들이 정치상의 분기와 생활상의 원인으로 사처로 흩어져 계획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택동이 발기하고 조직한 『장사중한호조사』 는 한중우호관계사에서의 중대한 사건으로서 한중 두 나라 민중들의 반일투쟁을 촉진시키는 촉매제의 역할을 수행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호남신문화운동이나 호남인민의 혁명사나 한국독립운동사나를 막론하고 『장사중한호조사』는 그 자체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갖는다(다음 호에 이음).
[주]
[1] 《1936년에 모택동이 스노와 한 담화》, 인민출판사 1980년판, 제 13쪽.
[2] 양소전(揚昭全) 주편.《중경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제761쪽.
[3] 《독립신문》1920년 3월 14일.
[4] 金正明《관내지구에서의 조선인들의 반일독립운동자료, 1571-1573쪽.
[5] 사각재(谢觉哉):(1884년5월—1971년6월15일),원명:사유균(谢维鋆),자 환남(焕南),별호 각재(觉哉),또 (觉斋)라고도 함.。호남성 녕향현(寧鄕縣) 사람, 1925 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저명한 학자이고 교육자이며 걸출한 사회활동가이고 법학계의 선도자이며 인민사법제도의 정초자.
[6] 趙海州, 趙文健 著,《광호생전(匡互生傳)》 상해서점출판사,2001년 판 제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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