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 김상욱
이 봄날에 나의 희망은?
우리에겐 말끔하게 정리하지 못한 과거사들이 너무나 많다. 그럼에도 오욕의 과거사를 그대로 깔고 뭉갠 채,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할머니들이 25년간 2016년 3월 9일로 1,221번째의 수요 집회를 열고 있음에도 아랑곳없이 얼마 전 ‘최종적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일본군 성노예 문제만 해도 그렇다. 도대체가 무엇이 해결되었다고 ‘최종적 불가역적’이란 말인가. 김구 선생이 품에 혈서처럼 품고 왔다는 반민족행위자들의 명단에 든 그 어느 누구도 지금껏 단죄 받은 바 없다. 오랜 독재정권을 유지하면서 온갖 반민주적 행위를 일삼은 전직 대통령의 딸이 현직 대통령이 되기도 한다. 심지어 아버지의 어두운 그늘을 ‘올바른’ 역사교과서란 이름 아래 후안무치할 정도로 탈색하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변변한 저항은커녕 묵묵히 제 앞가림에 급급하고 있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다짐하던 나 또한 이렇게 컴퓨터의 자판만 두들길 뿐이다.
어린이문학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원수 선생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음에도 ‘이원수 문학관’은 제대로 된 반성과 사죄는커녕 이원수 선생이 생전에 얼마나 어린이를 사랑했고, 아동문학의 발전에 공이 큰지, 홍보에 여념이 없는 소식지를 계속 보내오고 있다. 심지어 식민지시대 서대문경찰서의 고등계 형사를 지냈고, 광복된 조국에서도 여전히 위세를 떨치며 살던 김영일을 기념하는 김영일 아동문학상을 우리 아동문학계는 16년째 이어오고 있기도 하다. 그 상을 받고 희희낙락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스스로가 어떤 상을 받는지도 모를 것이다. 광주항쟁을 불러일으킨 전직 대통령의 아들이 그 아버지의 돈으로 만든 출판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좋은 작가의 좋은 작품을 거듭 펴내고 있다. 토요타자동차에 이어 국제 안데르센상을 운영하는 IBBY에 2009년부터 매년 거액을 후원하는 남이섬의 실질적인 소유주인 민 씨 일가는 볼로냐 도서전의 중앙 홀을 차지한 채 세미나를 열고, 시상을 하고, 심지어는 안데르센상 시상식장에서 단상에 앉아 우아한 메세나의 여유와 기품을 마음껏 과시한다.
이제 또 4월은 왔건만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우기’는커녕 세월호가 해결될 기미는 한 치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 바닷속 아홉 명과 함께 잠겨 있는 선체의 신세와 다를 바가 없다. 아침 신문에도 새누리당은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으로 애초 사사건건 조사를 방해하다 스스로 사퇴한 황 모 씨를 다시금 특조위원으로 선임했다는 소식을 싣고 있다. 이건 희생자 유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잊지 않겠노라고 거듭 다짐하며 아이들을 떠올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더 한층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이다. 저들은 노골적으로 우리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고 있는 것이다. 그럴진대 올해 4월에는 또 얼마나 울먹일지 나는 벌써부터 마음이 아프고 두렵다. 세상은 희망은커녕 암흑의 진창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가는 듯싶어 봄이 와도 봄을 누릴 수 있을 듯싶지가 않다.
그렇다고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희망이 헬조선이 아닌 미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 아쉬울 뿐. 미국 대선의 예비경선을 치르고 있는 버니 샌더스가 바로 그 희망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20대들이 희망이다. 20대 청년들이 샌더스를 지지하는 까닭의 하나로 어떤 칼럼은 미국의 청소년소설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헝거 게임』(수잔 콜린스, 북폴리오, 2009), 『다이버전트』(베로니카 로스, 은행나무, 2013)를 비롯한 미국의 청소년소설들은 디스토피아의 세계, 좀비들로 득시글거리는 현실 세계, 그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주인공들의 가열찬 기투, 마침내 좌절하든 부분적인 성취를 이루든 그 과정 속에서 보여 준 선과 악에 대한 명료한 자각과 탄탄한 인식, 다가올 미래에 대한 벅찬 전망 등을 공통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들 서사는 한마디로 혁명의 서사이며, 그 혁명적 서사가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혜성같이 나타난 샌더스가 온전히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나에게 문제는 당연 샌더스가 아니라 청소년소설이다. 나의 20대를 뒤흔들었던 『전환시대의 논리』나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통한 비판적 인식을 한 단계 더 뛰어넘어 미국의 청소년들은 청소년소설 속에서 혁명을 경험한다. 혁명의 현실성, 얼마나 벅찬 언어인가. 그렇다면 우리의 청소년소설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난망하다. 지금, 여기에서의 청소년소설보다 오히려 1980년대에 읽었던 만화 김혜린의 『북해의 별』이 오히려 그 범주에 맞는 것은 아닐지. 나는 우리 작가들이 상상력의 지평을 성큼 확장시켜, 혁명을 작품 속에 담아내기를 기대한다. 판타지는 현실의 상징적 전복이며, 적어도 그 작품 안에서라도 우리는 희망을 목도하고 싶다. 그리고 그 희망의 씨앗이 자라고 자라, 청년들의 내면 깊숙이 쉼 없이 출렁거리고 있기를 바란다. 비록 그 출렁거림이 한 장의 투표용지로 표현될 수밖에 없을지라도. 이것이 이 비루한 시절, 내가 발견한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