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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 드는 법
(예)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 뜰 앞의 잣나무
조주선사가 마당에 서 있는데 어떤 스님이 와서 물었다.
“달마조사 서래의西來意(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입니까?)”
마침 조주선사는 뜰 앞에 있는 잣나무를 손으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이니라.”
“뜰 앞의 잣나무니라.” 는 말을 듣는 순간 근기가 예민하고 수승한 사람들은 이 대목에서 생각이 “탁!” 하고 막혀서 화두에 대한 강한 의심이 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초심자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를 모른다.
의심이 돈발 되어서 모르는 게 아니라 정신이 몽매夢寐하고 화두에 대해서 생소하고 개념이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어떤 스님이 조주선사에게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이냐?” 고 물은 것은 “달마대사가 서쪽(인도)에서 가져온 불법의 종지宗旨는 무엇이냐?” 고 물은 것이다.
불법의 종지는 “마음을 깨닫는 것” 에 있는바 “마음은 곧 부처”이니 이 말은 바로 “여하시불야如何是佛也 (무엇이 부처입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위에 말을 요약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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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으니
조주선사는 “뜰 앞의 잣나무니라” 고 말했다.
"무엇이 부처냐"고 물으니 조주선사는 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했는가!
일반적 소견이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난해難解 한 대답이다.
그 당시 중국에는 성인成人이면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서 호패號牌를 몸에 지니는 제도가 있었는데 일반 백성들은 잡雜나무 또는 흔한 소나무로 호패를 만들어 차고 다녔다. 그러나 지체 높은 황족皇族이나 귀족들은 귀한 잣나무(측백나무)를 깎아서 호패를 만들어 몸에 차고 다녔다.
그렇다면 조주선사는 잣나무는 나무 중에서 제일 으뜸이니까 불법은 모든 법중에서 가장 수승한 법이니 잣나무를 빗대어서 부처라고 했는가?
이런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잣나무는 항상 푸른 사철나무(상록수)이니까 부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니 항상 변함이 없다는 뜻으로 잣나무라 했는가?
이것 역시 물론 아니다.
또한 부처님말씀에 무정 유정이 모두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는데 잣나무 역시 불성이 있으니까, 그래서 부처라고 했는가?
그것도 물론 아니다.
이런 식으로 이론으로 캐면 종국에는 모르는 고로 더 이상 이론으로 캐는 것을 중단하고 어째서 조주선사는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얻은 성인인데 거짓말 할리는 없고 부처를 물으니 잣나무라고 했는가? 하며 간절히 의심을 해야 된다.
화두를 방편이라고 생각하거나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잣나무”라는 말 속에는 어떠한 현묘玄妙한 이치나 깊은 의미가 내포內包된 것이 아니다.
<잣나무는 바로 부처이다.> 직설直說인 것이다.
잣나무가 부처라니 참으로 궁금하고 의심스럽다.
잣나무가 부처라는 것은 오직 깨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의심하기를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적당히 의심해서는 화두에 대한 의심이 돈발頓發되지 않는다.
간절한 마음이 없으면 혼침이 오고 망상이 들어오게 되는데 화두를 참구하는데 있어 간절함과 철저한 마음이 없으면 안 된다.
의심하기를 보름 굶은 고양이가 쥐 생각 하듯 해야 된다.
고양이가 보름동안을 굶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프겠는가?
고양이가 살기위해서는 오로지 쥐를 잡아야한다.
쥐구멍 앞에서 눈을 반짝이며 쪼그리고 앉아서 오직 쥐구멍을 집요하게 주시하면서 쥐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이때에 고양이 옆으로 닭이 왔다 갔다 하던 개가 왔다 갔다 하던 일체 신경을 쓰지 않고 오로지 쥐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그 간절한 마음으로 의심해야한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으니 조주선사는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 라고 말도 안 되는 동문서답을 했는가! 하고 의심에 의심을 거듭 해야 된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자면 팔십 먹은 노파가 외아들 생각하듯이 화두를 들어야한다.
팔십 먹은 노파에 외아들이 있는데 나라에 전쟁이 일어나서 얼마 전에 젊은 장정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전장戰場에 징집되었다.
예외 없이 노파의 외아들도 전쟁터로 나갔는데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어서 참으로 걱정되고 궁금하구나!
더욱이 옆집에 사는 장정은 전쟁터에서 죽었다고 전사戰死통지서가 왔는데 내 아들은 어떻게 됐단 말인가!
노파는 밥맛도 없고 잠도 안 오고 앉으나 서나 오로지 외아들 걱정뿐이다.
팔십 먹은 노파에게는 이 세상을 다 준다고 해도 아무 소용없다.
오로지 외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그 마음뿐이다.
어떤 스님이 “무엇이 부처입니까?” 하고 물으니 조주선사는 왜 “뜰 앞의 잣나무”라고 말 했는가? 팔십 노파가 외아들 생각하듯 간절하고 또 간절한 마음으로 의심을 하여 잡념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된다.
이 의심을 의지해서 잡념은 물론이고 망상 잠재의식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일체의 념念이 없는 정신을 지속해야 된다. 그러다가 자기도 모르게 잡념이 들어오면 또 정신을 차리어 “어째서 잣나무라고 했는가?” 하고 강하게 의심을 하여 잡념을 제거하는 것을 반복하다보면 궁극에는 생각의 길인 의로意路 꽉 막혀 몸과 마음이 오로지 하나의 의심덩어리가 되나니.
온몸의 삼백육십 골절과 팔만사천 모공毛孔이 의심 그 자체가 되어야한다.
그렇게 하기위해서는 아침부터 밤까지 하주종일 용맹정진을 해야 되는데 도량 내에서라도 될 수 있으면 움직이지 말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면서 정진을 해야 된다.
여기서 용맹정진이란 잠을 자지 않고 계속 정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면시간과 공양시간외에는 빈틈없는 정신으로 투철하고 철저하게 정진하는 것을 말한다.
밥도 먹지 말고 용변도 보지 말고 계속 공부하면 좋겠지만 몸이 지탱해야 정진도 할 수 있는 것이니 공양을 한다든가 용변을 보는 것도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움직인다 생각하고 시간이 아까운줄 알고 촌음을 아껴서 정진해야 된다.
그렇듯이 꼭 필요한 일 이외는 움직이지 말고 좌복에 앉아서 지속적으로 정진을 해야 되는데 비록 몸은 앉아있지만 정신 차리어 화두 드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중노동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좌선할 때는 수면과 식사의 조절을 지혜롭게 잘해야 된다.
수면은 기본적으로 하루 4시간에서 6시간정도는 자둬야 맑은 정신으로 정진할 수 있다. 내가 권장한다면 하루에 6시간 정도는 푹 자고 정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자리에 눕지 않고 오래 앉아있는 이유는 될 수 있으면 많은 시간을 정진하기위해서이다. 그러나 사람의 몸은 기계와 달라서 하루에 최소한도 4시간 이상은 수면을 취해야 된다. 사람이 잠이 부족하면 간肝과 신장腎臟에 독毒(암모니아)이 쌓이게 되는데 성인 건강한 사람이 하루에 4시간을 잠을 자게 되면 80%가 해독이 되지만 20%는 아직 해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 따라 한 시간이던 두세 시간 이던 잠을 더 자야 완전히 해독이 될 수 있다.
산승山僧은 처음에 도솔암에서 하루에 세 시간씩 잠을 자고 정진했다.
하루 종일 정진하고 밤에 잠을 자려고 자리에 누우면 그동안 정진했던 것이 뒤로 후퇴하는 것을 몸소 느꼈다. 잠자는 시간이 아까워 하루에 세 시간씩 잠을 자고 정진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었다. 6개월 정도는 그런대로 버티었다.
그 당시 산승은 젊고 건강한 상태였다. 그러나 아무리 젊고 건강한 상태라해도 하루에 세 시간씩 잠을 자고 정진을 하니 머리가 “띵”하고 정신이 맑지못하며 혼미昏迷한것이 어떤 때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정진 중에 졸거나 잠을 자기도 했다. 물론 잠이 오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서서 정진도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수각에 가서 찬물을 한바가지 마시고 와서 정진을 했다. 그러나 정진을 며칠만 할 것도 아니고 일정기간 동안 정진하려면 마음을 차분히 먹고 잠도 충분히 휴식을 취하며 맑은 정신으로 정진을 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선방과 토굴에서 장좌불와 하며 정진하는 사람들을 봤지만 눕지 않고 앉아서 고개를 떨어뜨리고 졸거나 수면을 취할 바에야 차라리 누워서 편하게 충분히 잠을 자고 누적된 피로를 푼 다음에 쾌적한 정신으로 정진하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다.
특히 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졸거나 잠을 자게 되면 폐를 압박하여 폐 건강에 좋지도 않고 척추에도 무리를 주어 득得보다는 실失이 많아 비경제적인 방법이다.
그것은 그냥 앉아있는 것이지 정진이라고 볼 수 없다.
장좌불와는 질質보다는 양量이다.
혼미한 정신으로 앉아서 10시간 정진하는 것보다 단 10분이라도 맑은 정신으로 정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이 공부 처에서는 장좌불와 한다는 것은 정진에 오히려 손해이다.
하루에 6시간씩 수면을 취해도 충분히 용맹정진 할 수 있다.
눕지 않고 오래 앉아 있거나 잠을 안자는 것이 능사能事가 아니다.
산승은 도솔암에서 하루 2식을 했는데 아침공양은 10시에 저녁공양은 오후4시에 먹었다. 저녁은 될 수 있으면 해가 떠있을 때 일찍 먹는 것이 좋다.
저녁을 늦게 먹게 되면 음식물이 위속에서 소화되는 동안 날은 어두워지고 식곤증이 나타나서 수마를 물리치려면 애를 먹는다. 그러나 해가 있을 때 일찍 저녁밥을 먹게 되면 아무리 식곤증이 온 다해도 비록 석양이지만 훤한 낮에는 잠을 물리치기가 쉽다.
음식물이 소화된 상태에서는 늦은 밤 까지 정진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도솔암은 하루 밥 두 끼뿐 일체 먹을 것이 없어서 밥의 양은 포만감 있게는 먹지는 않았지만 배고플 정도로는 먹지 않았다.
식사량은 정진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본인의 몸에 맞춰서 조금 부족하다고 느낄 정도면 된다.
하루세끼 공양하고 용변 보는 시간이외는 자복에 앉아 정진한다 해도 자복에 앉아있는 시간은 하루 24시간 중에 12시간에서 14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
이 경계 처에서 특히 주의해야 될 점은 정진을 하다 말다 하던가 느슨하게 한다면 결코 득력得力할 수 없다.
평생을 공부해도 득력하지 못하면 집에 도달할 수가 없다.
[광학다지 신식전암:廣學多知 神識轉暗] 이라고 했다.
“널리 배워서 아는 것이 많으면 마음이 점점 어두워진다”는 말이다.
생각이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면 알고 있던 정보나 숙지된 지식들이 야뢰야식에 저장 기록되어 우리의 청정한 본성을 가리어 어둡게 한다.
그래서 화두를 들 때는 경전이나 조사들이 써놓은 참선어록도 보지 말아야한다. 이러할진대 필요 없는 독서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값지고 귀한 금가루나 다이아몬드 가루도 눈에 들어가면 진물이 나고 눈병을 나게 하는 것과 똑 같다.
야뢰야식에 입력된 정보情報와 숙지된 지식들이 잡념이 되어 정진할 때 수시로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화두의 기운을 뺏어가기 때문에 화두가 뭉쳐지지를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화두를 여일如一하게하려면 용맹정진을 하여 의정을 생기게 하고 그에 따라 의단이 형성되게끔 하려면 애를 써야 된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 공부처에 해당되는 <고봉선사의 선요>에 나와 있는 대목을 소개한다.
고봉원묘선사는 조사선과 간화선의 대표적인 선지식이다.
若論實參實悟(약론실참실오)인댄
만약 진실로 참구하여 깨달음을 말한다면,
正如八十翁翁(정여팔심옹옹)이 向逆風逆水裏(향역풍역수리)하야
마치 80세의 늙은이가 맞바람을 맞으며 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牽一隻(견일척) 無底鐵船相似(무저철선상사)리니
한척의 배, 밑 빠진 철선(鐵船)을 끌고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니,
不問上與不上(불간상여불상)과
배를 끌고 올라가던가 끌고 가지 못하는 것을 관여 하지 말고,
徹與不徹(철여불철)하고
철저히 깨닫거나, 철저히 깨닫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直須心心無間(직수심심무간)하며
바로 모름지기 마음과 마음 사이에 틈이 없어야 되며,
念念無虧(념념무휴)하야
생각생각에 이지러짐이 없게 하여서,
一步一步(일보일보)에 盡平生伎倆(진평생기량)하며
한걸음 한걸음에 평생의 기량을 다하며,
睚將去(애장거)하니라.
끝까지 밀고 나가야 되느니라.
睚到着脚(애도착각) 不得處(부득처)에
끝까지 밀고나가서 더 이상 밀 곳이 없는 곳에서,
筋斷骨折時(근단골절시)하면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밀어붙이면.
驀然水轉風回(맥연수전풍회)하리니
돌연히 갑자기 물 흐름과 바람의 방향이 돌리게 되리니,
卽是到家消息(즉시도가소식)이니라
이는 곧 집에 돌아 온 소식이니라.
卽今(즉금)에 莫有到家底麽(막유도가저마)아
지금 막 도착한 사람 없느냐?
이글을 읽으면 참으로 모골毛骨이 송연竦然해지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낀다.
이 공부처가 얼마나 중요하고 애를 써야 되는 과정過程인지를 알 수 있다.
[나이 팔십이면 기력이 쇠진하여 거동하기 조차 힘든 나이인데 앞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과 내려오는 물결을 향하여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일이다.
더욱이 보통배도 아니고 무거운 철선을 노를 저어서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젖 먹던 힘까지 다 한다 해도 힘들 것이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멀쩡한 철선도 아니고 밑 빠진 철선이라면 배밑에서 점점 물은 들어오고 배가 가라앉기 전에 어서 목적지에 도달하기위해서는 죽을힘을 다해서 열심히 노를 저어야한다. 노 젓는 것을 조금이라도 멈춘다면 금세 배안에 물이 차서 깊은 물속에 가라앉으니 쉬지말고 부지런히 노를 저어야 할것이다.
80이나 먹은 늙은 노인이 밑 빠진 무거운 철선을 이끌고 강한 맞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거센 물줄기를 거슬러 노저어 올라간다는 것은 죽기 아니면 살기로 결심하고 사력死力을 다해도 힘들 것이다.
이럴 때에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여 힘을 쓰지 않게 되면 밑 빠진 철선과 내몸둥이는 깊은 물속에 빠지고 거친물결에 휩쓸려 내려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내가 이 밑 빠진 철선을 끌고 올라 갈수 있을까, 없을까, 이런 생각 하지 말고, 오로지 끌고 올라가려는 한 마음만 있을 뿐이다.
즉 내가 정말 이 공부를 하면 정말로 철저히 깨칠 수가 있을까, 없을까, 이런 생각하는 것 등은 모두 잡념이니 생각 생각마다 잡념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앞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씩 내걷되,
내 인생의 마지막 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평생의 모든 능력과 재능을 쏟아 부어 끝까지 밀어 붙여야 된다.
끝까지 밀어서 더 이상 밀곳이 없는 곳에 와서는 여기서 멈추지 말고 본인 갖고 있는 온 힘을 다해서 그야말로 힘줄이 끊어지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생명을 걸고 온 정신과 육신의 힘을 쏟아 부어 밀어붙이면,
갑자기 앞에서 거세게 흘러오던 물길이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 흐르고 거세게 불던 맞바람이 등 뒤에서 불게 되나니 그때는 힘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철선과 내 몸이 물줄기 따라 바람 따라 순조롭게 흘러가나니,
마치 그것은 내 자신이 멋진 돛단배를 타고 흐르는 물줄기 따라 순풍에 미끄러지듯 가는 것과 같으니 이때는 집에 도착하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화두를 들 때 간절하게 의심을 하다보면 망상과 잡념이 없어지는데 이러다가도 자신도 모르게 망념이 의심하는 마음을 빼앗아 가버린다.
의심하는 마음을 빼앗기면 또다시 정신을 차리어 간절하게 의심하기를 반복하다보면 머리에 화두의 기운이 생기게 되는 데 이것은 상기병이 아니라 정진을 제대로 열심히 해서 생기는 현상이니 개의치 말고 계속 밀어야 된다.
정진을 열심히 하다보면 당연히 온 몸의 기운이 머리위로 올라와 이상한 기운이 들러붙게 되는데 이것을 고약한 상기병 이니 선병禪病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단전으로 화두를 들거나 화두를 놓아 버리거나 또는 좌선을 중지하고 돌아다니면 공부의 진척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으며 조사선이 될 수가 없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작품 버리게 된다>.
의심이 잘되면 화두의 기운이 잘 일어나는데 본인도 모르게 이 화두의 기운에 의지하게 되나니 이것을 진리의 기틀 이라고 해서 이기理機라고 한다.
간절히 의심하면 화두의 기운이 잘 일어나고 화두의 기운이 바로 의심체이다. 망념에 빼앗기면 온 힘을 다하여 화두의 기운이 빼앗기지 않도록 노력 하다보면 화두의 기운이 서서히 밀려나가기 시작한다.
화두의 기운이 밀려 나가는 것은 정진이 정상적으로 잘되는 것이니 밀려나가는 화두의 기운에 상응相應하다보면 자연히 잡념 망상이 없어진다.
이 공부 경계처서 화두의 기운을 밀다보면 온 몸과 정신의 힘이 소진되기 시작하는데 여기서 절대로 쉬지 말고 계속 육신과 정신의 힘을 다하여 밀고 또 밀어야 된다. 어떤 사람은 힘이 없어서 공양할 때 손으로 수저들 힘도 없다고 할 정도이다. 그래서 이 공부 자리에서 몸과 정신의 힘이 모두 소진消盡되기 때문에 80먹은 노인에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는 일체 잡념 망상은 물론이고 “나 자신이 정말로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서 화두를 들어야 되는 것인가?, 정말로 이렇게 생사를 떼어 놓고 정진을 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일까?” 하고 별의별 생각이 나는데 이 모든 것 들은 망념이니 잡념이 들어오지 않도록 온몸의 힘을 써서 애를 쓰고 또 애를 써서 정진을 이어 나가야한다.
끝까지 쉬지 않고 밀다보면 더 이상 화두의 기운이 밀려나가지 않을 때가 있으니 이때가 되면 화두가 없어지고 절벽같이 더 이상 밀고 나갈 곳이 없어진다.
어쩌다가 밖에 나가서 공양을 한다든가 용변을 보고 와서 다시 자복에 앉으면 잠깐은 화두가 밀려 나가는듯해도 금세 화두가 밀려 나갈 곳이 없어지고 절벽처럼 되어 화두가 없어진다.
아무리 밀어도 더 이상 나갈 수가 없다.
더 이상 밀려 나갈 수 없는 이 자리에서 멈추지 말고 종전從前에 한 것처럼 쉬지 말고 계속 화두의 기운을 밀어야 한다. 온몸의 힘이 빠지고 탈진상태에 이르더라도 쉬지 말고 계속 밀어 붙이기를 여기서 내 일생일대의 사생결단死生決斷을 내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하여 밀다보면 몸은 녹초가 되고 가슴은 새카만 숯처럼 타들어가니 그래도 여기서 멈추지 말고 몸이 부서지도록 밀어붙이면 갑자기 화두가 “휑”하고 자동으로 밀려 나가는데 이때가 바로 화두에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화두에 발동이 걸리면 화두를 구태여 들지 않아도 行 住 坐 臥 語 黙 動 靜에 저절로 화두가 들리는 경지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 자리에서 좀더 익히면 득력 하게된다. 이 때가 되면 참선하기가 세수할 때 코만지는 것 보다 더 쉽고 비로소 불교가 무엇인지, 왜 부처가 위대한지를 알게 된다.
이 기점으로 해서 동중일여(동정일여) 몽중일여 오매일여가 전개되는데 화두를 들지 않아도 화두가 저절로 들리는 득력得力의 경지가 되면 다시는 뒤로 물러섬이 없는 불퇴전不退轉의 자리로써 성문사과聲聞四果의 첫 단계인 수다원須陀洹과에 오른 것이니 성인聖人의 흐름에 들어선 것이다.
참선공부는 우리가 목숨을 바쳐서 할 만한 성聖스런 작업이다.
그리고 누구나 한번은 꼭 거쳐야 될 중요한 관문이고 해탈에 이르는 가장 빠르고 수승한 길이기 때문이다.
참선이란 사람 몸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다만 절실하다는 생각이 없어서 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마음을 내어 시작하면 금방 참선의 맛을 알게 된다. 비록 참선이 어렵다고는 하나 그 어려운 중에도 신심이 밑바탕에서 받쳐주기만 하면 한걸음 한걸음 나갈 때 마다 그 어려움이 환희심으로 바뀌어 “내가 그동안 왜 이런 귀하고 값진 공부를 안했나” 하고 눈물을 흘릴 때가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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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님 고맙습니다. _()()()_
스님 고맙습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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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팔십이면 육신도 쇠했겠지만 그때까지 살면서 쌓인 업식(번뇌망상)들이 폭풍우처럼 휘몰아치고
행로를 방해놓치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그걸 헤치고 밀고 나가는게 얼마나 힘들런지 조금은 상상이 갑니다.
큰스님. 골수에 절로 새겨지는 말씀 깊이 감사드립니다.
도솔암에서 스님 수행하시는 모습을 그리면서 잘보았습니다
스님 고맙습니다 _()()()_
"一步一步(일보일보)
한걸음 한걸음에
盡平生伎倆(진평생기량)
평생의 기량을 다하며,"
나무석가모니불.나무석가모니불.나무석가모니불.
"내 일생일대의 사생결단死生決斷을 내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하여 밀다보면 몸은 녹초가 되고
가슴은 새카만 숯처럼 타들어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