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정개는 1934년, 복건혁명이 실패한 후 남양 등 지에서 계속 반일반장운동에 종사하면서 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항일전쟁시기 국민당 제6군 총사령을 맡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에는 중앙정부 국방위원회 부주석, 전국 체육운동위원회 부 주석으로 있다가 1968년에 사망했다.
일군이 홍구공원에서 기념행사를 굉장히 한다는 소식을 들은 장광내와 채정개는 분을 참을 수 없었다.
“현초(賢初: 채정개의 호) 장군, 이거 분통이 터져서 어디 견딜 수 있겠나. 저 놈들이 감히 우리 땅에서 버젓이 천장설을 쇠구 전쟁승리기념행사까지 한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꼴인가. 세인들이 알면 우리를 무어라고 여기겠나?”
“정말 아닌 게 아니라 이가 갈립니다. 이대로 놔두면 더욱 기고만장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세상이 우리를 동아병부라고 하면서 기시하는데 이후엔 또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예 요정을 내야 하는데…… 장 위원장이 연약한 처사가 참 말이 아닙니다.”
“현초, 안 되겠네, 무슨 방도를 찾아야 하겠네. 우리 함께 어른을 찾아가세.”
그들이 말하는 <어른>이란 19노군의 창시인이며, 이전의 그들의 직계상급인 진명추(陳銘樞)를 말한다.
1889년에 광동성 합포(合浦)에서 출생한 진명추는 자가 진여(眞如)이고 한쪽 다리를 전다고 하여 별호가 아피(阿跛)다. 진명추는 19노군의 창시자이며 1.29사변 시, 경호위수총사령관, 송호경비사령관으로 있었다. 그는 저항하지 말라는 장개석의 명령을 거부하고 19노군에 총 반격을 명령하여 장개석의 배척을 받았다. 하여 인차 행정원 부원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19노군이 실패한 후 복건에 가 장광내, 채정개, 이제심 등과 같이 중화인민혁명정부를 조직한 그는 실패하자 홍콩에서 계속 장개석을 반대하는 운동과 애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부터 그는 국민정부 군사위운회 고급참의로 있으면서 무한과 중경에서 항일민족운동에 종사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후 진명추는 중앙인민정부 위원, 중남행정위원회 부주석 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있다가 1965년에 사망했다.
장광내와 채정개가 찾아갈 때 진명추는 행정원 부원장이었다. 장과 채가 장개석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천장절에 홍구공원을 공격하여 일본 놈들에게 본때를 보이고 치욕을 씻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진명추도 그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로서는 정부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장군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오. 그러나 나도 이젠 입장이 난처하오. 지금 정전협상이 의논 중이고, 장 위원장은 협상의 파열을 우려하여 절대로 공개적인 군사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였소. 우리가 강행하여 천장절에 소란을 피운다면 국제여론의 비난과 더불어 일본인들에게 전쟁을 재도발할 구실을 제공하게 되오. 그리고 자네들도 면직을 당하고 전체 19노군이 해산될 위험도 있을 수 있소. 우리 정부에서 모르게 비밀적적으로 큰 소란을 피우면 좋소.” 진명추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장광내는 왕아초를 떠올렸다.
“원장 각하, 방법 있습니다. 암살대왕 왕아초 사령을 내 세워야 합니다.”
그제야 진명구도, 채정개도 왕아초가 생각났다. 왕아초는 그 당시 송호의용군 사령으로 19노군을 협조하여 일군과의 싸움에서 용감하게 싸워 소문을 떨쳤고 세 사람 모두 왕아초와는 지기였다. 이리하여 진명구가 왕아초를 찾아갔다.
왕아초는 어떤 사람인가.
1887년 안휘상 합비에서 출생한 왕아초(王亞樵)는 항일영웅이자 민족지사이며 전설적인 인물이다. 자는 구광(九光)이며 상해에서 『도끼방』(斧子幇)을 조직하고 친일분자, 한간, 토호열신, 친장파(親蔣派) 등을 닥치는 대로 죽여 『살인대왕』,『살인마귀』 등으로 명성이 높았다. 소문에 의하면 국민당의 특무 총 두목이자 살인마귀인 대립, 그리고 독하기로 소문난 상해의 『청방』(淸幇)두목 두월생(杜月笙)도 왕아초를 두려워했단다.
왕차초는 1923년에 직계군벌 경호경찰 청장 서국량(徐國梁)을 암살했고, 1927년 장개석이 4.12반혁명정변을 발동하자 장개석과 송자문, 왕정위를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1930년 7월, 그는 장개석의 친신 조철교(趙鐵橋)를 살해했고 1931년 대련에서 국제연맹조사단의 영국대표 이둔(李屯)을 죽이려다가 실패했다. 사건이 있은 후 장개석이 포상금 백만 원을 내걸고 왕아초를 체포하게 하였다. 1935년, 홍콩에서 이제심, 진명구 등이 밀약을 하고 여산(麗山)에서 국민당 제4기6중전회를 할 때 장개석과 왕정위를 죽이려 계획하였다. 왕아초가 손봉명(孫鳳鳴)을 파견하여 사진기자로 변장하고 안전하게 회장에 들어갔으나 장개석이 보이지 않아 왕정위를 겨누고 사격하였는데 왕정위는 당장에서 죽지 않고 크게 부상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듣고 장개석이 대노하여 대립(戴笠: 국민당 특무조직의 수령)에게 “ 왕아초를 죽이지 못하면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소리쳤다.
대립이 몇 년 동안 왕아초를 찾아 헤매던 중, 마침내 행방을 알고 20여 명의 사복경찰을 휘동하여 홍콩에 가 그의 뒤를 밟은 뒤 살해하였다. 그해 왕아초의 나이는 49세였다. 모택동은 왕아초에 대해 “적을 죽인 데는 잘못이 없다. 작은 일에선 실수가 있었으나 큰일에선 두뇌가 명석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진명구의 말을 듣고 왕아초는 대단히 기뻤다. 이런 일이라면 백 번 해도 성차지 않는 그였다. 헌데 토론 중 두 사람은 벽에 부딪쳤다. 일본인들의 진행하는 큰 행사엔 일본인 외 특별외국사절들 내놓고는 출입이 불가했던 것이다. 이에 왕아초가 의견을 내놓았다.
“제가 한국임시정부의 도산 안창호 선생과 이전부터 교분이 두텁습니다. 임시정부 내에 한국애국단이라는 것이 있는데 아주 무서운 조직입니다. 일본인들도 한국애국단이라 하면 벌벌 떱니다. 지난 2월 8일 날, 도쿄에서 거행된 천장절에 일본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사람이 바로 애국단의 이봉창 의사입니다. 제가 즉시 안창호 선생을 찾아뵙겠습니다. 그네들은 일본 놈들을 철천지원수로 생각하니 꼭 발 벗고 나설 것입니다. 한국애국단 단장인 김구 선생과 안창호 선생도 아주 친밀한 관계입니다.”
후에 두 사람은 한국인들이 일본교민으로 변장한 뒤 회장에 혼입하여 기회를 보아 거사하는 것을 상책이란 결론을 내리고 한국애국단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하였다.
그날로 왕아초는 상해 장안서로(오늘의 남경로)에 있는 창주판점에 안창호를 모셔다 자초지종을 말한 뒤 도움을 청했다.
“도산 선생, 이 동생을 도와주게. 일본 놈들이 노는 꼴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네. 하지만 이번엔 날개가 돋쳤다 해도 이 동생의 힘으로 할 수가 없구만.” 안창호는 듣고 난 뒤 두 말 없이 응낙했다.
“구광 선생, 안심하시오. 일본은 우리의 철천지원수요. 일본 놈들을 타격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나.”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왕아초가 부랴부랴 상해 우원로(愚園路)에서 기다리는 진명구를 찾아가 안창호를 만났던 과정을 이야기했다. 그날 저녁에 진명구가 즉시로 장광내, 채정개, 대극(戴戟) 등을 불러 하책을 상론했다. 진명구와 왕아초한데서 각각 건네받은 만 원, 19노군 위로금 중 2만 원 등 모두 4만 원을 모아가지고 거사의 활동경비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왕아초가 돈을 안창호한테 넘겨주었다.
그 후 왕아초와 작별한 안창호는 김구를 찾아갔다.
“백범 선생, 좋은 일이 생겼구려. 하늘이 도우나보이.”
안창호가 왕아초를 만났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돈 4만 원을 내 놓았다.
이에 김구는 무등 기뻐하였다.
“도산 선생, 정말 큰일 하였습니다. 이 것이야말로 동풍입니다. 주유가 적벽대전 때 ‘조조를 이기려면 동풍을 써야 하리. 만사가 구비되었으나 동풍이 빠졌구나’고 하였는데 오늘, 우리가 바라던 기회가 마침내 왔습니다. 이는 하늘이 준 기회입니다. 이제 구체 장소만 알면 끝입니다.”
이것이 홍구폭탄사건의 첫 발단이었다.
중국의 사이트 『바이두(百度)』에서는 왕아초가 1932년 4월 29일, 홍구 천장절 행사에 잠입해 들어가 폭탄을 던지고 도망친 것으로 되어 있고 한국에서는 19노군과 왕아초의 말이 언급되지 않고 애국단의 윤봉길이 혼자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천장절 행사에 실은 19노군에서 거사 자금을 마련했고 왕아초를 시켜 임시정부 애국단과 연락 닿았을 뿐이다. 한 마디로 세계를 진감한 홍구폭탄사건은 두 나라 항일지사들이 함께 만든 공동작품이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아침이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솔솔 불어와 커튼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커튼 사이를 비집고 아침 햇살이 뛰어 들어오자 방안은 삽시에 아침의 입김으로 싱싱해졌다.
김구가 단정히 앉아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근래에 중대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낡은 신문지에다 글쓰기 연습을 한 그였다.
엄항섭이 신문 한 장을 들고 들어왔다. 상해 『매일신문』이었다. 펼쳐보니 첫 면에 “4월 29일 천장절에 홍구공원에서 성대한 의식을 거행”이라는 표제가 눈에 확 안겨왔다. 김구는 계속 읽어 내려갔다.
“……일본 육해공군이 송호대전에서 휘황한 승리를 취득하였다. 이를 경축하기 위해 일군과 일본 거류민들이 홍구공원에서 전에 없던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제국의 거류민들이 용약 참가하기 바란다. 안전을 위해 참가자들은 도시락과 물통, 일장기 외 다른 물건을 휴대하지 못 한다……” [1]
신문을 다 본 김구가 일필휘지로 네 글자를 썼다.
“天助我也(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김구가 머리를 돌렸다.
“자네가 홍구시장으로 가 윤봉길을 불러 오게.”
이 시각, 김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엄항섭은 급히 떠났다.
한 시간 후에 윤봉길이 총망히 달려왔다.
“윤군, 하늘이 우리에게 좋은 기회를 주었소.”
윤봉길은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물끄러미 김구를 쳐다보았다.
“윤군, 나의 눈을 보시요.”
두 쌍의 눈이 마주쳤다. 둘은 눈으로 서로의 기대와 서로의 믿음을 충분히 말해주고 있었다.
김구가 창 앞으로 걸어갔다. 창밖에서는 봄비가 보슬보슬 내리고 있었다. 길가의 오동나무 잎들이 함초롬히 물기를 머금고 푸름을 반사하고 있었다.
“윤군, 이쪽으로 오시오.”
윤봉길이 창가로 갔다.
“상해에 비가 내리고 있소. 중국대지에 봄비가 내리고 있소. 우리 조국에도 봄이 왔을 것이요. 거기에도 비가 오는지 모르겠구만. 자네도 고향을 기억하고 있겠지? 봄이 오면 진달래꽃이 피고 도라지꽃이 피는 고장, 자네 도라지 노래를 아나?”
김구의 말이 윤봉길의 가슴에 향수의 물결을 일렁이게 하였다. 윤봉길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전 도라지 노래를 제일 좋아합니다. 다섯 살 때 도라지를 캐면서 어머니가 저에게 배워주었습니다……”
윤봉길이 눈물을 닦고 노래를 불렀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심심산천에 백도라지
한 두 뿌리만 캐어도
바구니 반실만 되누나
……
김구도 함께 불렀다.
노래를 부르면서 두 사람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노래가 끝나자 김구가 물었다.
“4월 29일, 무슨 날인지 아오?”
“천장절이지요.”
“옳소. 그날 일본 놈들이 상해에서 미친 듯이 노래하고 춤출 거요.”
“선생님 뜻은?……”
“자네 홍구공원 알지?”
“네. 가 봤습니다. 공공조계지 안에 있습니다.”
“그날 놈들이 경축대회를 하오. 회의에 상해의 일본 군정요인들이 거의 다 참가하오. 일본군 상해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외교관, 그리고 일본거류민 회장…… 모두가 거물급 인물들이오……”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게 놈들이 상해를 침략하고 상해에서 경축대회를 한단 말이요. 분통이 터질 일이지. 이건 주권국에 대한 도전이고 중국인민에 다한 능욕이요. 놈들이 너무나 창궐하단 말이요. 내 뜻을 알만 하오?”
“네. 잘 알만 합니다. 놈들을 때려야지요.”
“일체 준비 사업은 내가 할 테니 자네는 기다리게.”
“알겠습니다.”
“긴장 되지 않나?”
“선생님, 왜인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아주 평온합니다.”
“명심하오, 냉정하면 성공하고 흥분하면 실패하오.”
“알겠습니다.”
“자넨 안전에 주의해야 하오. 우리 주위엔 밀정들이 많소. 지금부터 자넨 신사 차림을 하고 신사처럼 행세해야 하오.”
윤봉길을 보낸 다음 김구는 김홍일(왕웅)의 집에 갔다.
“선생님이 오실 걸 알고 기다렸습니다.”
김홍일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김구가 웃었다.
“자네야 말로 제갈량이구만. 자네도 천장절을 아오?”
“저는 전문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이 아시는 것보다 더 자세히 알지요. 이번 경축대회에 참가하는 사람들로는 총사령 시라카와 대장, 일본군 제9사 사단장 우에다 중장, 해군 제3함대 사령 야부라 중장, 제24여단장 하마토오이(下元雄彌), 일본 주중공사 시게미츠, 상해 주재 총영사 무라이, 일본거류민단 행정위원장 가와바다, 이외 미국, 영국, 프랑스 영사 등이 출석합니다.”
“좋네. 푸짐한 식탁이구만. 자넨 작탄을 준비해야 되오.”
“전 자신 없습니다.”
“왜?” 김구가 정색하고 물었다.
김홍일이 차를 부으며 말했다.
“지난번에 이봉창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며칠 동안 잠을 못 잤습니다. 괴롭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습니다. 전 정말 이봉창 의사에게 미안합니다.”
김홍일은 만약 이번까지 불발탄이 생긴다면 자기는 임시정부와 한국애국단을 볼 면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구는 웃었다.
“옛 사람들 이르기를 어디에서 잃었으면 어디에서 찾으라고 하였소. 이번엔 성공할 거요. 작탄을 만들 때 좀 더 신중하고 좀 더 세심하면 될 것이요. 아무렴, 성공하구말구.”
김구가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성능이 좋아야 할 뿐 아니라 위력도 세야 하오. 두 개 만들되 하나는 도시락처럼 만들고 하나는 물통처럼 만들어야 하오.”
김구는 작탄을 넘겨받을 시간을 약정한 후 인차 떠났다.
며칠 후 김홍일이 김구를 데리고 중국군대 병기공장에 가 작탄기술자 왕백수(王伯修)를 소개하였다.
왕백수가 김구를 보고 말했다.
“전번엔 정말 미안했습니다. 문제가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번엔 폭발장치 성능에 특별히 신경을 쓰면서 완벽하게 만들겠습니다. 위력이 아주 강한 TNT 열성 작탄을 만들겠습니다.”
왕백수가 시험용으로 두 개의 작탄을 만들었다. 하나는 모양이 군용물통과 같았고, 다른 하나는 도시락과 비슷하여 얼핏 보면 폭탄이라는 걸 알아내기 어려웠다.
뒤이어 그들은 시험장으로 갔는데 아주 성공적이었다. 모근 것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4월 26일, 윤봉길이 명령을 받고 안창로(安昌路)에 있는 안공근의 집으로 갔다. 김홍일도 함께 갔다.
김구가 세 사람을 보고 말했다.
“본인의 요구와 우리애국단의 고험을 거쳐 윤봉길이 오늘부터 정식으로 애국단에 가입하였소. 이에 지금 선서의식을 진행하겠소.”
윤봉길이 태극기가 걸려 있는 벽을 향해 선서를 했다.
선서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4월 26일
선서인 윤봉길
선서가 끝난 후 윤봉길은 혼자서 작탄 두 개를 손에 들고 사진을 찍은 뒤 김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것이 한국애국단 단원이 출전하기 전의 선서의식이다[2].
기념촬영이 끝난 후 김구와 윤봉길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김구는 윤봉길에게 돈을 주었다. 김구와 작별한 후 윤봉길은 혼자 황포강으로 갔다. 그는 백사장에 서서 눈 주어 멀리를 바라보았다.
보슬비가 잔잔히 내리고 저 멀리 바다 위에서 외로운 쪽배 하나가 파도를 타고 떴다 갈앉았다 하면서 전진하고 있었다. 윤봉길의 가슴속에서도 비장한 격정이 파도처럼 굼실대고 있었다.
[주]
[1] 상해『매일신문』, 1932년 4월 30일.
[2] 『윤봉길전』, 1933년, 제8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