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이제는 무더위가 꼬리를 내리나 봅니다. 폭염과 후덥지근한 날이 계속되어 불쾌지수 타령을 하던 것이 엊그제인 듯한데, 섬돌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와 삽상한 아침 공기는 가을을 머금고 있습니다. 한적한 토요일 오후 시간이라 근처에 있는 향천사(香川寺)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향천사는 충남 예산군 예산읍 금오산(金烏山) 자락 아래에 자리 잡은 절로서 백제 의자왕 15년(서기 655년)에 의각대사(義覺大師)가 창건했다고 전해집니다. 향천사 돌계단 오른 편에 세운 창건비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의각대사는 백제의 고승으로 의자왕 12년에 일본으로 가서 잠시 백제사에 머물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九子山(지금의 九華山)에서 옥으로 3053불상과 16나한상을 조성하고 전단향나무로 삼존불상을 조성하여 배에 싣고 백제로 돌아왔다. 마땅한 절터를 잡지 못하고 배에서 종을 치던 중 어느 날 금까마귀 한 쌍이 날아와 산 아래 향기 가득한 샘물에서 자취를 감추니 그 영험함을 좇아 마침내 절을 세우고 향천사라 하였으며 산은 금까마귀를 뜻하는 금오산으로 불렀다. 의각대사가 조성한 불상 중 1510여 위를 천불전에, 나한상은 나한전에 각각 모셨으며 9층 석탑과 부도탑은 천년의 향기를 머금고 있다.’
양쪽에서 가운데를 향하여 두 마리 용이 마주보는 형태로 되어있는 일주문에는 ‘금오산 향천사’라는 현판 글씨가 자못 단아하면서 정겹습니다. 일주문을 지나 단풍나무들이 내뿜는 초록향기를 맛보며 절 마당으로 들어서다 보면 금세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더욱이 법당으로 오르는 길은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로 계단을 만들어 놓아 여간 운치 있고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콘크리트나 화강암으로 일정하게 깎아놓은 계단과는 달리 자연스럽고 넉넉하며 높이 또한 부담을 주지 않으니 오른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몸과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절 마당에서 법당을 향해 합장한 후 법고, 운판, 범종, 목어에 차례차례 눈길을 주고는 오랜 세월 풍파에 시달리면서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구충 석탑을 쓰다듬어 봅니다. 여기저기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지만 온갖 기쁨과 슬픔, 사바의 우비고뇌를 온몸으로 맞고 보낸 세월의 흔적을 새삼 생각해봅니다. 이윽고 극락전 문을 엽니다. 마침 법당엔 아무도 없어서 호젓한 마음으로 촛불을 밝히고 일심향(一心香)을 사른 후에 108배를 올립니다. 절 한 번에 참회 하나, 자만심 대신 하심(下心)을 생각하며 108배를 마친 후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좌선(坐禪)에 들어봅니다. 마음 속 밀려오는 상념들로부터 온전한 내 본래 모습을 생각해봅니다. 이따금 바람결에 풍경소리만 적막을 깨울 뿐 인기척이 없어서 혼자 절을 다 차지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 한결 가벼워진 마음에 법당에서 내려와 섭진교(涉塵橋-마음의 티끌을 씻어버린다는 뜻의 돌다리, 섭진교 아래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이 흐릅니다)를 지나니 마음이 씻겨 지는 듯합니다.
예전에는 드나들 수 있었던 천불전(千佛殿)이었지만 요즘은 스님들이 정진하는 천불선원으로 바뀌었는지라 입구는 아쉽게도 막혀있고 둘러친 대나무와 한 그루 홍매화 나무만이 옛 기억들을 일깨워줍니다. 천불전에서 예불을 드리다가 눈을 뜨고 맨 처음 눈이 마주치는 부처님이 자신의 모습이라던 얘기에 호기심과 일종의 묘한 신비감으로 내 눈에 처음 띄는 부처님 상을 살펴보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납니다.
천불전(千佛殿) 앞 바위터럭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주위를 살펴보니 촐랑대는 청설모, 매미와 쓰르라미, 베짱이, 이리저리 바쁜 개미며 나비의 애벌레까지 온갖 생명들이 제 주위에서 서로 어울리며, 다투며 늦여름을 보내고 있습니다. 청설모는 바로 제 앞에 사람이 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여기에서 저기로 긴 꼬리를 세워 흔들며 다니고 매미와 쓰르라미, 베짱이들은 서로 화음이라도 맞추려는 듯 소리를 뽐냅니다. 개미들은 늘 바삐 이리저리 움직이고 아까부터 저쪽에서 엉금엉금 기어오던 등푸른나비 애벌레는 잠시도 쉬지 않고 땀을 뻘뻘 흘리며 기어옵니다. 찬바람이 나기 전에 어서 고치를 만들고 나비로 거듭나 또 다른 생명을 전달해야 할 일 때문에 마음이 무척 바쁜 것 같습니다.
걔네들과 한참 시간을 보내려니 뒤늦게 찾아든 모기 몇 마리가 자꾸 보시를 하라고 달려듭니다. 아직 모기에게 넉넉히 보시하고 ‘허허' 웃을 수 있을 만큼 마음이 넉넉지 못한 처지라 자리를 털고 일어나 금까마귀산(金烏山) 중턱 계곡을 향해 발길을 옮깁니다. 계곡 가는 길 왼편에는 볕이 잘 드는 쪽에 부도 탑 세 기가 고즈넉하게 비바람 맞으며 서 있습니다. 맨 왼쪽의 부도 탑은 검은 이끼가 전체를 싸고 있으며, 가운데 부도는 가장 소박한 모양이지만 정감이 갑니다. 오른쪽 부도 탑은 최근의 것이라 외양은 화려하나 기계로 깎은 것이라 왠지 서먹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합장하고 예를 표한 후 부도에 새긴 무늬와 글을 살펴보며 또한 무상(無常)을 깊이 느낍니다. 문득 옛 어른의 선시(禪詩)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生也一片浮雲起 (생야일편부운기)요
死也一片浮雲滅 (사야일편부운멸)이라.
浮雲自體本無實 (부운자체본무실)이어늘
生死去來亦如然 (생사거래역여연)이라.
산다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는다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이라.
뜬 구름 자체는 본래 실체라고 할 게 없는 것이거늘
태어나고 죽고 오고 가는 것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이 몸 죽으면 한 줌 흙이나 재로 변하여 땅으로, 물로, 불의 기운으로, 바람결에 흩어질 것이거늘 작은 집착과 번뇌로 스스로와 주위를 얽매고 태우는 게 우리 인생의 모습이 아닌가!’
그러나 이렇게 무상한 것이 모든 변화하는 생명체의 모습이기에 우리는 주어진 삶을 정말 아름답고 곱게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역설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부도 탑을 뒤로하고 계곡에 닿으니 엊그제 내린 비로 제법 불어난 계곡 물은 시원한 물줄기로 마음을 시원하게 쓸어줍니다. 계곡 주변에는 온갖 나무와 풀이며 여러 식물들이 저마다 꾸밈없이 제 모습들을 드러냅니다. 용트림을 한 금오산의 청정한 소나무들은 호위하듯 향천사를 감싸주고 있습니다. 큰 나무는 큰 나무대로 작은 풀 한 포기는 또 저대로 그렇게 주위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서 자연이 주는 소중한 가르침을 배우게 됩니다.
‘아! 이런 인적이 드문 곳에서 피어나는 이름 모를 풀 한 포기, 작은 나무 한 그루마저도 이렇게 스스로를 아름답게 지키고 가꾸며 주위의 만물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구나! 얼마나 소중한 삶인가! 얼마나 고운 모습인가!……'
자연은 스스로를 내세움이 없이도 이렇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는 위대한 스승입니다. 자연의 경이로운 변화는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제법무아(諸法無我)의 가르침을 스스로 나타내며 열반적정(涅槃寂靜)의 경지를 몸으로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산에 들면 마음이 이렇듯 고요하고 편안해지나 봅니다.
제법 많은 시간 동안 흘러내리는 물과 그 물줄기를 담고 있는 산과 대화를 나누며 맑은 계곡 물에 얼굴도 씻고 손을 담그기도 하다 보니 번뇌와 티끌이 다 씻겨 내려간 듯 참 평화스럽고 넉넉한 느낌이 듭니다.
절에서 내려오는 길, 어느덧 하늘은 회색 빛 막을 둘러치고 한 두 방울씩 빗방울이 눈앞에 떨어집니다. 윤회, 인연, 구름, 비, 산, 물…… 이런 낱말들이 빗방울이 되어 차창에 한 방울씩 떨어집니다.
* 위 수필은 제가 출가하기 전 교직에 있을 때에 발표한 작품입니다.
저는 현재 세종시 보림사에서 새내기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끔씩 글을 올릴까 합니다.
- 가고싶은 절, 아름다운 절, 머물고싶은 절 보림사에서 수월 합장 -
첫댓글 좋은글감사합니다 앨범란에 보림사 탑점안사진이있습니다주지스님께도보여드리세요
예. 스님! 좋은 사진 촬영하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_()_
이미 부처님과 인연이 있었군요.
스님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