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대화상"과 "쉼터"사이를 지나면 주차장을 겸하는듯한 넓은 마당앞에 "중악단"(中嶽壇)이 있다.
"중악단" (中嶽壇) 은 계룡산 산신을 모시는 제단으로, 보물 제1293호로 지정된 목조 건물이며, 전국 최대 규모의 산신각이다.
조선 시대에는 북쪽 묘향산을 상악(上嶽), 남쪽 지리산을 하악(下嶽), 중앙 계룡산을 중악(中嶽)으로 하여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상악단"(上嶽壇)과 "하악단"(下嶽壇)이 없어져 그 유적의 내용을 알 수 없으나, "중악단"(中嶽壇)이 잘 보존되어
국가적으로 산신에게 제사지내던 남아있는 유일한 유적으로써 역사적 의미가 있다.
무학 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 하여 계룡산 신원사 경내에 계룡단을 쌓고 조선 태조 3년(1394)에 제사를 올린 것이 시초이다.
이후 "효종" 2년(1651)에 폐지되었으나, "고종" 16년(1879) "명성황후"(明成皇后)의 명으로
중악단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던 중 일제강점기에 끊어졌다가 1998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중악단"(中嶽壇)은 신원사(新元寺) 경내에 있지만 사찰과는 별도인 "국행제"(國行祭)의 처소였기 때문에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관료가 향축(香祝)을 받들어 계룡산 산신에게 국가의 안위를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대한제국이 망한 후 국가 "사전"(祀典)이 폐지되면서 방치되었다가 1998년에 공주시가 복원하여
지금은 해마다 4월에 "향교"에서는 "유교식"(儒敎式)으로, "신원사"에서는 "불교식"(佛敎式)으로,
"계룡산 산신제 보존회"에서는 "무속식"(巫俗式)으로 혼합된 형태의 "계룡산 산신제"를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중악단 앞에 세워진 이 "명성황후"(明成皇后)노래碑는 아주 최근에 세워진 것이다.
내가 10월4일에 답사를 했는데 이 碑의 건립 날자가 10월 8일로 써져있다.
중악단 앞 촛불을 봉헌(奉獻)하는 곳에 가득한 촛불.
중악단 대문간채.
중악단 중문간채.
네개의 문에는 각각 "사천왕"인듯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가운데로는 신도(神道)가 만들어져 있다.
"靈山昔日如來囑" ( 영산석일여래촉)
그 옛날 영산에서 부처님의 부촉(咐囑)받아
"威振江山度衆生" ( 위진강산도중생)
강산에 위엄 떨치시어 중생을 제도하시며,
"萬里白雲靑嶂裡" ( 만리백운청장리)
만리에 뻗어있는 흰구름은 푸른 산봉우리를 싸고도니
"運車鶴駕任閑情" ( 운거학가임한정)
구름수레 학을 타고 한가로이 오가시네.
이 현액(縣額)도 어사 이중하(李重夏)의 글씨다.
앞에는 "계룡산 신위"(鷄龍山 神位)를 모셨고, 뒤로는 "산신도"(山神圖)가 그려져 있다.
우측으로는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어진(御眞)이 있다.
앞 제단에 놓인 예물로 보아 이제는 국가적인 제(祭)보다는 개인의 뜻을 기원하는 곳으로 변형되어 있는듯하다.
담장은 수(壽), 복(福), 강(康), 령(寧), 길(吉), 희(喜) 등 무병(無病)과 장수(長壽), 복록(福祿)등을
기원하는 문자와 기왓조각으로 아름다운 무늬들을 만들어 장식하였다.
"중악단" 뒤쪽의 담장.
대문간채를 나가면서 보면 "현액"이 또 있다. "낙은재"(樂隱齋)라고 씌어 있다.
자세히 보면 왼쪽 끝에 "석파궁"(石坡宮)이라고 씌어 있다.
"석파"(石坡)는 "흥선대원군"을 말함인데 "흥선대원군"이 여기에다 현판(懸板)을 써 주었을리가 만무하고,
또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라면 문뒤에 붙였을리가 만무하다.
이 현판은 대원군이 중악단에 내린 글씨가 아니라
1897년 청송으로 낙향한 "낙은 배학순"(樂隱 裵㶅舜)에게 써 준 "낙은재" 현판을 모각한 것이다.
대원군은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아끼던 신하 "배학순"(裵㶅舜)이 1897년 고향 청송으로 낙향하자
그의 호 "낙은"을 딴 집 이름을 써줬고, 배학순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학당 이름으로 내걸었다고 한다.
청송에 있는 그 편액을 왜 본을 떠서 어찌하여 여기에 걸었을까?
"중악단"의 지붕을 보면 궁궐에만 있는 잡상(雜像)이 있다.
그리고 용마루 양쪽에는 궁궐의 그것보다는 생략된 모양이지만 "취두"(鷲頭)가 올려져 있다.
다만 조금 다른 것은 용마루 양쪽 끝에 있지않고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와 있다.
이렇게 절과는 다르게 궁궐 건축의 상징적 모양으로 지붕을 꾸민 것은 이 건물이 조정에서 직접 기도를 올리기 위해 만들은 제단(祭壇)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중악단" 앞 광장끝으로 가면 "오층석탑" 외롭게 서 있다.
이 석탑의 자리가 옛날 신원사가 있던 자리가 아닐까 한단다.
근처에 또 다른 석탑이 있는데 온전한 제모습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돌아나오면서 보는 곳은 "벽수선원"(碧水禪院)이다.
그 오른쪽에는 "계룡선원"(鷄龍禪院)이란 현판도 붙어있다.
1982년에 이건물의 원래의 이름이란다.
"벽수선원"(碧水禪院)은 1988년 숭산 스님이 국제선원으로 문을 열면서 지은 이름이란다.
숭산스님은 미국에 가서 "간화선"(看話禪)을 전파해 미국 불자들이 "한국에서 온 달마"로 추앙하는 대선사였다고 한다.
세탁소에서 일하며 짧은 영어로 화두를 던지는 숭산 스님에게 미국의 지식인들이 매료돼
앞다퉈 한국으로 건너와 정진한 곳이 이곳 "벽수선원"(碧水禪院)이라고 한다.
하버드대를 나온 "현각 스님"도 1990년 이곳에서 90일을 동안거 하며 수행했다고 한다.
지금은 국제선원이 옮겨가 국내 불자들이 수행하는 곳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경내를 다니다보면 곳곳에 숨은 그림처럼 기왓장에 그려진 재미있는 그림을 볼 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