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의 전설, 수국
서서한 바람이 부는 것도, 햇살도 잠깐, 어김없이 비가 온다. 찬란한 섭지코지도, 온평포구도, 우도도 뒤덮인 장대비로 어찌할 방도는 없다. 한 치 분간할 수 없는 마음 또한 같으리라. 생각들로 어수선하다. 잊기 위해 어수선하다. 비처럼 넘친다. 표정이 흘러내려 길게 늘어지고 혼자 우두커니 확장된다.
그 틈을 뚫고 찬란하게 솟아오르는 노랑과 분홍으로 날카롭게 눈을 찌르는 몸꽃, 엉겅퀴, 무장다리꽃의 색채감만은 어찌하겠는가. 아찔한 이 순간을 잠깐이라도 더 누리기 위해 틈만 나면 부지런히 발걸음을 어디인가 돌릴 수밖에 없지 않는가.
이참에 꽃을 일일이 호명한다. 마치 책 한 권을 읽고 나서 지적인 감흥을 흠뻑 일으켰을 때와 같은 기분이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한갓진 곳에, 지극정성으로 핀 꽃을 보면서 세상에 헛으로 핀 꽃은 없다는 것을 느낀다.
노루오줌, 사랑초, 마리골드, 개당귀, 자주달개비, 달맞이꽃, 그리고 문주란. 이름도 익숙지 않는 꽃들 사이, 한 곁에서 수국을 발견하고 털썩 쪼그리고 앉는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니 붉은 꽃차례로 빽빽이 모여 하나의 꽃을 이루고 있다. 원색적으로 몽글몽글하게 핀 꽃은 어디선가 낯이 익은 여인을 보는 듯하다.
그 모습을 뻔한 묘사로 표현 할 수도 있지만 “살며시 입을 벌린 듯한 꽃 한 묵음 피고 있다.”라고 할 때 이 부분은 당신의 심증 있는 진술에 해당한다. 한 발짝 앞서 나간 묘사일까. 뻔한 얘기라고?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역설적이다. 조금도 뻔 하지 않다. 아! 함박 같은 꽃, 이게 바로 수국이구나. 무거운 짐에 덜미를 잡혀 머물렀던 옛 기억이 떠오를 수 있다. 가슴에 머물다 떠오르는 추억도 추억이 된다. 그렇다면 당신은 여기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즈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몸 둘 바를 모른다. 이 마음을 어떻게 고백할지 잊어버렸다. 그때 사랑했다고, 아직 잊지 못했다고. 한때 추억을 엿보는 설렘일 수 있다. 이는 가슴이 헛헛한 당신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 치자.
그러니 일상의 힘겨운 삶에 지친 당신. 사람들이 모두가 더불어 진정한 휴식 그리고 내일을 위해 휴식을 소망한 이곳에서 당신이 꽃을 보고 있는 자리는 미래의 삶이 현재의 삶을 바라보는 자리이다. 삶의 인위적인 경계가 무너지고 시간의 얼레도 풀려서 고요한 시간이 오는 그러한 당신의 특별한 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종다리, 보롬왓에서나 볼 수 있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깨닫는 순간이다. 외진 이곳에서 볼 수 있다니 점점 마음이 더욱 깊어진다.
갑자기 머리 위로 분홍색 또는 흰색 꽃비가 쏟아져 내려도 좋을 듯하다. 황홀하게 그 꽃비는 당신의 마음을 흠뻑 적시고, 눅눅한 기운을 신선하게 가슴까지 퍼뜨렸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린다. 어제처럼 살아온 흐르는 시간. 시간의 상처에 고개를 파묻고 돌아보지 않는 것도 꿈꾸는곳이다.
꽃말에서 인생을 생각하고 우주를 본다. ‘진심’, ‘변심’, ‘냉담’, ‘무정’, ‘변덕’, ‘거만’ 따위의 어휘들이 뒤섞여있다. ‘사랑’, ‘헌신’, ‘의지’ 등 긍정적인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당신은 당신도 모르게 탄성을 지른다. 세상에는 꽃 같은 인생이 있고 인생 같은 꽃이 있다. 누구나 간절하게 피워낸 꽃의 생명을 느낄 수 있다.
‘탐라산수국’, ‘꽃산수국’, ‘떡잎산수국’, ‘등수국’, ‘나무수국’, ‘바위수국’ 당당하게 이름에서도 당신의 관심을 불러들이다니... 아름다움의 극치다…. 그때는 당신도 몰랐을 진데. “조만간 여기를 떠날 거고 여기에서 벗어나게 될.” 날갯짓의 기억들이다. 시간이 흐르고 현실에 잠길 것이다.
이름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음을 알고 놀란다. 자세히 보면 모양도 가지각색이다. 다양한 색깔로 존재하는 수국은 토양 때문일까. 그러니 ‘진심’, ‘변심’의 꽃말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다. 화려하면서도 자연스럽고 탐스러운 모습을, 동시에 변심한 여인을 생각했다면 아직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곧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할 때쯤 이내 시들고 마는, 짧지만 아름답고 눈부신 존재. 수국을 당신이, 당신은 수국을 아니 만나도 좋았을 것이다.
나는 몸을 숙이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당신 앞에 다가선다. 그리고 꽃 한 송이를 전해 주고 싶다. 당신의 몸에 떠난 기억을 되짚으며 기록하는 6월의 전설, 수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