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살아온 이야기들을 글로 좀 잘 쓰고 싶어서 국문과공부를 시작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입학을 했으니 시작을 해보렵니다. 저는 평생을 건설회사에서 일한 덕분에 우리나라, 남의 나라 참 많이도 돌아다녔습니다. 저는 23년 전에 카자흐스탄에 있었고 아래 글은 그때의 이야기로 9년 전(2017년)에 써놓은 글입니다. 제 이야기의 큰 제목은 '흐르는 강물처럼'입니다. 흐르는 강물처럼은 먼저 카작(Kazak/카자흐스탄)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렵니다.
[Kazak이야기(1)]
아띠라우(Atyrau)
문득 낮선 러시아어(語)가 눈에 들어온다. 잠시 멈칫하다 순간, 나는 아! 샤샤(Sasha)로구나. 했다. 멀리 카자흐스탄의 서쪽 끝 카스피해(The Caspian sea)에 잇닿아 있는 석유도시 아띠라우(Atyrau)에서 샤샤가 안부를 전해온 것이다. 내가 아띠라우를 떠난 지 어언 14년, 샤샤는 어떻게 내 전화번호를 알았을까? 앞자리가 019였고 다음이 319였던 내 번호는 알고 있었겠지만 벌써 오래전에 010 2319로 바꿨는데도 용하게도 카톡이 들어온 것이다.
샤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오십 대 후반쯤 돼 있을 샤사, 그는 연변에 살던 조선족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해서 카자흐스탄의 아띠라우까지 흘러가서 고려인 ‘이라(Ira)'와 결혼을 했고 세 자녀를 두고 이제는 카자흐스탄 사람으로 산다. 벌써 큰 아들이 내년이면 대학을 졸업 한단 다. 내가 좋아했던 루디밀라집사님이 벌써 두 손자의 할머니가 됐다는 소식도 전해왔다. 루디밀라집사님, 서툰 한국말로 아직은 마흔아홉이라고 했고 ’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를 좋아하며 즐겨 부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는 맑고 유난히 푸르렀던 아띠라우의 하늘을 무척 좋아했다. 오늘 샤샤는 아띠라우의 하늘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아마도 우랄강에서 낚시를 하다가 푸른 하늘을 보니 내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나는2003년3월부터 2005년 9월까지 2년 반 동안 아띠라우에 있었다. 2003년 초에 지인으로부터 카자흐스탄의 정유공장건설현장에 가지 않겠느냐 는 제안을 받았었고 나는 카자흐스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뛰었었다. 그래서 아끼타(Mr. Akita)라는 일본건설사 JGC의 ARR(Atyrau Refinery Reconstruction)프로젝트 현장소장을 만났고 그가 받아들여 아띠라우현장으로 가게 된 것이다. 그때, 그냥 넘길 수 없는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 JGC의 ARR건설현장의 Manager급 Staff은 거의가 일본인이었고 전기(이태리인), 품질(말레시안) 매니저만 외국인이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보직이라고 할 수 있는 배관매니저(Piping Manager)를 왜 한국인으로 택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답은 내가 일을 하면서 자연히 알게 됐다. 발주처(Owner)인 카자흐스탄 국영석유공사인 카스 무나이 가스(Kaz Munai Gas)의 배관담당 감독이 ‘오가이’라는 고려인이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JGC는 나 같은 한국인을 ‘오가이’의 상대로 택한 것이었다. ‘오가(家吳)이’는 한국인 성씨인 오 씨를 부르는 고려인들의 표현이다. 그는 가끔씩 나를 부를 때 “아버지”라고 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단 한마디 한국말은 “아버지”였던 것이다.
아띠라우는 카자흐스탄 제1의 도시 알마티(Almaty)에서 서쪽으로 3000km떨어져있고 비행기로 2시간 반이 걸리고 같은 나라지만 1시간의 시차가 난다. 인구는 약 25만 명인데 그중 고려인이 3,000명 정도 살고 있다. 내가 아띠라우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나를 포함해서 한국인이 6명 있었다. 한국에서 파송된 젊은 김선교사님 내외분과 그 아들, 미국시민권자로 사업을 하시던 김사장님 내외분 그리고 나 이렇게 가 한국인 모두였었다. 나는 매주일마다 김선교사님이 사역하는 고려인교회에 출석했었다. 그리고 거기서 샤샤를 포함한 많은 고려인들을 만났다. 교회에서는 선교사님이 한국말로 설교를 하면 현지 고려인이 러시아어로 통역을 하면서 예배가 진행된다. 그 당시 연세가 칠십에서 팔십 가까이 되신 고려인 할머니들이 10여 분 됐고 젊은 고려인들도 있고 어린아이들도 제법 많이 교회에 왔었다.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아, 예. 일 없습니다. (북한식이지요) 그리고 할머니 하시는 말씀, 내 오늘 반찬 좀 같고 왔으니 갈 때 같고 가기요. 반찬은 우리나라 말이다. 그러나 그곳 식품시장에 가서 “반찬” 이라고 말하면 다 알아들 들었다. 무채를 썰고 양배추도 무채같이 썰어서 고춧가루로 비빈 것 같은데 그 안에 물론 젓갈이 들어가 있고 마치 함경도식 생선 식혜처럼 굵직한 생선토막도 들어있었다. 맛이 좋았다는 기억이 있다. 그 당시 예배가 끝나면 교회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여흥을 즐겼다. 고려인들이 덩실덩실 한국 춤도 추고 러시아민요를 부르며 멋지게 군무를 추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띠라우 시내 중심에는 ‘우랄강(Ural River)’이 흘러 가까운 ‘카스피안 해’ 로 흘러 들어갔다. 우랄강(江)은 우랄산맥에서 발원하여 아띠라우까지 흘러왔는데 강폭은 250m에 수심은 약 3m 정도 됐던 걸로 기억된다. 금문교 같은 멋진 아치형 다리가 걸쳐져 있었고, ‘우랄강(Ural River)’동편은 아시아이고 강 건너 서편은 유럽으로 다리 동편입구에는 "ASIA"라고 현판을 달은 작은 종각이 서있고 서편에는 똑같은 크기 모양의 종각에 "EUROPE"이라는 현판이 각인되어 있었다. 나는 휴일이면 강변에서 산책을 즐기며 다리를 넘나들며 유럽과 아시아를 오고 가며 조금은 묘한 기분을 느끼곤 했었다. 우리 숙소는 그린호텔(Green Hotel)이란 곳이었는데 아시아 쪽에 있었다.
아띠라우와 그 주변 지역은 기원전부터 스키타이, 사르마트 등 여러 기마민족들의 활동무대였고, 13세기에는 몽골제국 칭기스칸의 손자 '바투가' 가 세운 '금장한국(알툰 오르두 또는 킵차크 한국)의 수도 "사라이치크(Saraychik)"가 근처에 세워지는 등 실크로드의 요충지였었다. 현재의 아띠라우 역시 1644년부터 교역도시로 크게 발전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석유가 사방으로 흘려 나가고 다른 나라에서 식료품이 이곳으로 실려 오고 있었다. 이 도시 아띠라우에서 파는 과일과 채소들은 주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겐트"에서 기차에 실려서 이곳까지 온다.
수도 아스타나에서 서쪽으로 3천km넘게 떨어진 이 '시골'에는 국제공항이 있고 공항에서는 암스테르담, 이스탄불, 모스크바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등을 오가는 국제선 직항기가 뜨고 내리고, 미국과 유럽인들의 행렬이 늘어서 있다. 비나 눈이 오면 거리는 온통 진흙탕이 되고 흙먼지가 온 시가지를 뿌옇게 만들며 3월 말경, 날씨가 조금 풀리기 시작하면 모기가 밤과 낯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어 길거리를 다닐 수가 없는 작은 도시 아띠라우의 서쪽 유럽지역에는 새로 지은 고층 사무실 빌딩과 값비싼 화려한 호텔들, 깔끔한 고급 빌라촌 등 이 사치스러운 풍경화를 그리고 있는 도시다. -다음에 -
아띠라우의 하늘과 우랄강
4월의 우랄강은 온통 흙탕물이다. 그런데 고기가 얼마나 많은지, 강 옆에서 매미채같은 뜰채만 강물에 담그고 있어도 손바닥만 한 고기들이 툭툭 들어온다. 높은 산에서 눈 녹은 물이 풍부한 유기물질을 함유하고 우랄강으로 흘러내려오므로 그 속에는 영양분이 풍부해서 물고기 산란기와 맞아떨어져서 고기가 많은 것이다.
예배 후 식사를 마친 고려인들은 이렇게 춤을 추곤 했다.
우리 춤을 추고 있는 고련인들
석유도시 아띠라우(Atyrau)는 Caspian sea에 붙어있다.
아띠라우 시가지 일부. 우랄강이 가운데 흐르고 그 오른쪽은 아시아고 왼쪽은 아띠라우 신시가지로 유럽이다.
우리가 묵었던 그린호텔(Green Hotel)이다. 앞에 보이는 작은 범종은 JGC회사가 장기 투숙했던 기념으로 설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