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 충격 -
너만 시인인가
김준식
슬플 때 슬프고
기쁠 때 기쁘고
외로울 때 외로우면
그리울 때 그리우면
시인이다
겸손하면 시인인가
배고프면 시인인가
잘난 체하면 시인인가
큰소리치면 시인인가
시가 묻는다
눈빛으로 묻고 있다
심장으로 묻고 있다
너만 시인인가
*김준식 : 경남 창녕 출신. 제16회 국제문학 신인작가상 <시>부문 수상. 제11회 한국아동문학회 신인문학상 <동시>부문 수상. 시집으로 ‘움직이는 나무’, ‘보물찾기’ 등, 현재 필봉문학회 사무국장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슬펐다. 나는 그녀가 왜 영화관에서 지리산 이야기를 꺼냈는지 알 것 같았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는 퇴근 전에 받았던 엄청난 스트레스를 내게 내색하지 않고 혼자 감당하려 한 것이었다. 아아, 나는 아내의 존재에 대해 치가 떨리면서 두렵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마, 지난 주말에 나 혼자 지리산에 갔다 온 것을 믿지 않은 것 같았다. 여자의 촉으로 그녀와 함께 갔으리라 추측한 끝에 그녀를 추궁할 심산으로 전화를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내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다가, 막상 영화관에서 아내를 보자, 그만 질려버린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떠올리자, 바보같이 그의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날 강압적으로 몰아붙이던 그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한번 흘린 눈물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나는 아예 그와 사람들이 보기나 말거나, 그 자리에서 속 시원하게 울고 말았다. 한참 울고 나니 오히려 마음은 편했다.
“영화관에서 와이프를 만났어. 그래서 유희는 집에 갔고, 나 혼자 이곳으로 온 거야.”
내 말에 그는 깜짝 놀란 모양이었다.
“넌 이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그는 찔리는 게 있는지 잠시 움찔했다. 그러더니 지금껏 자작하던 그는 얼른 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친구야. 미안하다. 난 단지 네가 나처럼 가정을 깨뜨리는 게 안타까워서 그랬어. 사실, 유희 책상 위의 달력은 오늘 낮에 내가 확인했어. 제수씨가 아침에 전화 와서 좀 확인해달라고 해서. 정말 미안하다.”
대충 그럴 것으로 예측했지만, 그가 사실을 말해주니 가슴이 먹먹했다. 그의 태도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아니야. 우린 친구잖아. 네게 조만간 말을 하려 했는데, 이렇게 되었어. 그런데 넌 언제 눈치챈 거야?”
“얼마 되지 않았어. 직원들 데리고 저녁 먹으러 갔는데, 그날따라 유희는 없었어. 술이 몇 잔 들어가자 직원들이 조심스럽게 그 자리에서 말을 해. 너와 유희가 예사롭지 않은 사이라며 대표님은 알고 있었냐고 묻더군. 자네도 알다시피 난 눈치가 없잖으냐? 내가 못 믿겠다고 하자, 그들은 중앙동 일대에서 자네와 유희가 술 마시는 장면을 목격한 것만도 여러 건이라면서, 결정적으로 한 친구가 사진을 내놓더라고. 그 녀석은 유희를 짝사랑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아마 미행을 했겠지. 순간, 내가 얼마나 부끄럽던지. 어쨌든 이 빌딩 안에서 자네와 내가 친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은가. 알아도 친구인 내가 먼저 알아야 뭔 변명이라도 할 텐데 말이야. 그게 난 좀 속상했어.”
그때 일단의 술 취한 손님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순식간에 술집은 난장판이 되어 그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엔 너무 시끄러웠다. 나는 그에게 조용한 곳으로 옮기자며 일어섰다.
근처에 비교적 조용한 카페가 있었다. 맥주 두어 병과 간단한 안주를 시켰다. 실내에는 클래식 음악이 흘렀다. 취기가 오른 그는 그제야 내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오자 나는 비로소 그가 친구임을 새삼 확인했다.
“그래, 유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거야?”
그의 눈빛을 보니 진정으로 날 걱정하는 것 같았다.
“많이.”
“유희는?”
“내 생각이지만 그녀도 날 많이 좋아하고 있어.”
그는 내 말에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어디까지 갔어?”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의 그의 물음에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하고 잠시 갈등했지만, 친구로서 솔직하게 말하는 게 맞다 싶었다.
“잤기는 해.”
그러자 그는 한숨을 쉬었다.
“친구로서는 사실, 축하할 일이야. 매력적이고 예쁜 그 정도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여기는 미국이나 유럽이 아니잖나. 이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네 사장의 귀에 들어가 봐. 고지식한 그 사람은 널 당장 해고할 수도 있어. 지금 넌 사랑이라고 주장하지만, 타인들에겐 젊은 여자와 바람난 유부남의 ‘불륜’이라 치부하지.”
그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내가 어떡해야 할까?”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문제는 네 처야.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제수씨가 이미 유희를 압박하고 괴롭히고 있는데, 유희가 어떻게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직 네게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너의 둘 관계가 계속되면 계속될수록 엄청난 반격을 할 거라고 난 봐.”
“그렇겠지.”
나는 그에게 어떤 반박도 내지 못할 정도로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최악의 경우, 넌 제수씨로부터 이혼을 당할 수 있고, 유희는 그녀대로 떠날 수 있다는 거야.”
“뭐?”
나는 그가 말한 최악의 경우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너무 심한 말을 하나 싶었다.
“아내와 이혼하면 잘 되었지. 그러면 바로 유희랑 결혼할 수 있잖아.”
“정말 이혼까지 생각한 거야? 그럴 경우, 아이들은.”
그가 이렇게까지 구체적으로 나오자 나는 서서히 자신이 없어졌다. 아내야 그렇다 치더라고 아이들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솔직히 거기까진 생각 못 해 봤어.”
그는 숨을 고르려는지 각자의 잔에 맥주를 따랐다.
“이혼이 그리 쉬운 게 아니야. 자칫하면 네 성격에 폐인이 될 수 있어. 소송에 들어가면 골치 아픈 게 한둘이 아니거든. 결말이 나기 전에 넌 아마 지쳐서 자빠질 거야.”
그의 말에 내가 반격을 하려 하자 그는 내 입을 막았다.
“그래서 친구로서 하는 말인데, 이쯤에서 그만둬.”
나로선 충격이었다.
“뭐?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그만두라고?”
“그래. 그만두는 게 최선이야. 넌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서 예전처럼 와이프와 아이들과 그럭저럭 살면 돼.”
나는 그의 말에 눈을 감았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 과연 내가 그녀 없이 회사에 출근하고 일을 하며 밥을 먹을 수 있을까. 매일 매일 주고받는 문자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버틸 수 있을까. 그녀의 눈, 코, 입술 그리고 육감적인 몸을 내가 과연 잊을 수 있을까. 그녀의 재스민 향과 비누 냄새를 내가 떨쳐낼 수 있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없었다. 나는 이미 그녀에게 몸과 마음 모두 중독이 되어있었다.
“안 되겠어. 난 지금 그녀 없이 살아갈 수가 없어!”
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는 날 지긋이 바라보았다.
“최 림아!”
그는 날 불렀지만 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최 림!”
마침내 그가 어린아이를 혼내듯 크게 날 다그쳤다.
“넌, 정말로 유희가 너만 만나고 다니는 줄 알고 있어?”
그 말에 나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말았다.
“무슨 말이야? 뜬금없이?”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다 알 수 있는 일 아냐? 스물여덟 살의 예쁘고 매력적인 여성이 과연 주위에 남자가 없어 너만 만난다고 생각하느냐고? 이건 엄청난 착각이야.”
그의 말을 듣자 나는 일부, 수용했다. 그건 내가 이미 아는 사실이었으나, 난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나는 그녀의 남자관계에 관해 묻지도 않았고 또 알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내 나이가 많다는 열등감과 그녀를 누군가에게 빼앗길 수 있다는 상상에서 오는 불안 때문이었다.
“유희는 서울에 만나는 남자가 있어. 그건 내가 확신한다. 너도 생각해봐. 그녀가 어떻게 서울에서 이곳으로 왔는지. 무슨 사연이 있지 않았겠어? 관세사협회장을 설득하여 그녀를 이 조그만 사무실로 내려보낸 사람이 누굴까? 사실, 유희가 이곳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날 때쯤, 서울에서 어떤 남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녀를 잘 부탁한다며 대략 일 년 정도만 근무하게 해달라고 했던 남자가 있었다. 내가 통화 끝에, 누구냐고 물어보니 그는‘약혼자’라고 말했어.”
갈수록 가관이었다.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해?”
나는 충격을 넘어 거의 정신이 무장해제 수준이었다.
“딱히 너와 나 사이에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동안 바쁜 업무 때문에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어.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다 보니 이제야 생각이 난 거야. 잘 들어 봐! 내가 너희들 사이에 관해 직원들에게서 들은 후, 곰곰이 생각해보니, 유희는 전화통화가 다른 직원에 비교해 많았어. 근무시간이었지만 수시로 전화가 오면 밖이나 복도로 나가 전화를 받았어. 설마 대낮에 밀회를 나누려고 평소에 네가 한 짓은 아니라고 봐. 그렇다면 뭐겠어? 분명 그 남자야. 직장동료들에겐 아직 숨기고 싶은 남자였겠지만, 난 그자가 일전에 내게 전화한 약혼자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제 이해가 돼? 이게 네가 빨리 여기서 멈추어야 할 가장 큰 이유야.”
오늘은 이랬다. 원치 않은 아내의 등장으로 상황이 복잡해지면 초장부터 삐걱거리더니, 한술 더 떠 그녀에게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내 친한 친구인 한수에게 들었다. 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지리산에서 그녀와 행복한 시간을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다시 그녀와의 사랑에 관한 의문이 들었고 심한 모멸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이래도 만날 거야?”
그는 자신이 날 완전히 설득했다고 생각했는지 의기양양한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비참했고 지금 당장 그녀를 만나 자초지종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오늘, 내 아내로부터 치욕을 당했고 모멸감을 느꼈다고 생각하니 선뜻 내키지 않았다.
“충고는 고맙다. 생각을 좀 해봐야겠어.”
나는 이쯤 되어서 그만 일어나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의 유희에 관한 말이 사실이라 해도, 더 폭로할 게 있다 하더라도 나는 솔직히 듣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내가 괜히 그를 불렀다는 후회가 들었다.
“술 잘 마셨다. 계산은 내가 할게.”
나는 날 잡는 그를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아까와는 달리 비가 내리고 있었다. 봄비였다. 많은 양의 술을 마셨음에도 나는 거의 취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사는 원룸까지 비를 맞으며 무작정 걸었다. 걷는 와중에 몇 번이나 전화를 걸고 싶었으나, 나는 참았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내 머리와 온몸을 적실 때쯤, 그녀의 원룸 앞에 도착했다. 그녀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전화를 걸었으나, 그녀는 받지 않았다. 집에 가려고 택시를 탔는데 그녀에게 문자가 왔다.
‘그냥 돌아가세요. 내일 새벽에 서울에 올라가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