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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니츠(이어짐)
제6절 불가분적 실체란 용어와 변신론
– La notion de substance individuelle et la théologie 216
라이프니츠의 체계 속에서 모든 것은 세계의 무한성에 의해, 그리고 그 세계에서 자기 방식으로 무한하다는 실재성을 자르는 것의 불가능성에 의해, 즉 이런 무한성에서 자기 방식으로 요소를 자르는 것의 불가능성에 의해, 지배되어 있다. 심지어 물체들의 세계에서 사람들이 보았듯이 너비는 유한하고 정의된 물체로 나누어질 수 없고, 이 물체들의 각각은 그 자체로 현실적으로 무한히 하부 분할된다. 그리고 실재적 실체들 가운데 각각은 자기 속에 자기 방식으로 무한한 우주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각각은 자기의 전 과거의 흔적들과 자기 전 미래의 배아들을 간직하는 실체의 상태일 뿐이다. (216)
그러나 동시에, 모든 사물로 되어 있는 무한에 대한 일종의 요청은 결코 만족되지 않는다. 우리가 우주에서 비견하는 무한은 이런 “종합범주학적(syncatégorématique)” 무한들 중의 하나이다. 수학적 계열은 이 종합범주학적 무한의 전정이며, 또한 본질적으로 진행의 마지막 항들 도달하지 못하는 불가능성에 있다.이런 종합범주학적 무한들은 필연적 보충(채움complément nécssaire)으로 삼으면서, 계열의 법칙이면서 또한 필연적으로 그것의 바깥에서 발견되는 하나의“종합범주학적 무한”을 갖는다.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감각적 우주 속에 무한성의 고찰은 일련의 변화들의 법칙들을 필연적 보충으로 삼는데, 라이프니츠에게서 우리가 곧 보게 될 것이지만, 이 일련의 변화들의 법칙들이 불가분적 실체들이다. 그러나 실체들 또는 주체들은 이들의 차례가 되어 실재적 존재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되지 않는 다양성(une multiplicité indéfinie, 무한정한 다양성)을 형성한다. 무한한 실체들 그 위에, 따라서 하나의 무한을 생각해야만 한다. 이 무한은 어떤 의미에서는 무한한 실체의 법칙, 즉 “과잉종합범주학적(hypercatégorématique)” 무한이며, 이것은 우리를 신속에 무한성의 고찰로, 다시 말하면 신학으로 이끈다. 신적 무한성 또는 완전성이 우주에서 여전히 완성되지 않은 무한성의 관계이며, 이는 수학에서 계열의 법칙이 이 항들의 무한성의 관계와 같다. 따라서 형이상학과 신학은 따로 떼어낼 수 없다. 형이상학적 용어의 진리는 실체의 용어인 한, “나의 의존관계를 표시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이나 신을 언급하지 않고서도” 아마도 증거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용어를 끌어내면서 이런 진리를 보다 강력하게 표현한다. 그 용어에 대해 마치 용어의 기원이 문제인 것처럼 신적 인식이 문제거리이다[중요하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의 모든 용어들도 마찬가지이다. 이 용어들은 피조물들에게서는 용어들의 하부 수준에 따라 또는 용어들의 기원에서는 이 용어의 상부 수준에 따라, 분석이 [다음에, 미래에] 스스로 멈추어야 하는 신 속에서 파악될 수 있다. (217)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오래전에 알았던 학설적인 도시를 만난다. 그것은 신플라톤주의 도식이다. 이에 따르면 동일한 전체적 실재성은, 다양한 수준에서, 저기에서는 온일자의 보다 집중되고 보다 가까운 실재성으로, 여기에서 보다 분할되고 보다 희석된 실재성으로 표현된다. 사람들은 그 도식이 르네상스시기에 널리 퍼졌다는 것을 안다. 예를 들어 라이프니츠가 쓰기를. “예전부터 언제나, 알렉산드로스(Alexandre, Ἀλέξανδρος, 전356-323)의 영혼 안에서, 그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의 나머지들과 그에게 일어날 모든 것의 표시들이 있다.”또는 “실체 전체는 마치 전 세계와 같고 마치 신이 거울(miroir) 또는 우주 전체의 거울과 같다”사람들은 플로티노스의 알 수 있는 세계를 생각한다. 그 알 수 있는 세계 속에서 “각 사물은 모든 사물들이었다.” (217)
그의 형이상학의 중심은 실체의 용어(la notion)이다. “사람들이 진실로 완성된 무엇 또는 실체를 분간하지 않을 것인 한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멈출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듯이, 적어도 이법들의 질서에서는 스스로 멈추는 것이 필연적이다. 데카르트는 창조된 실체를 자기에 의헤 생각된 것이라고 그리고 현존하기 위해 신의 유일한 협력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말하자면, 한편으로 실체의 본질은 유일한 속성(너비 또는 사유)으로 환원되며, 속성에서 결과적으로 실체 속에 어떠한 변화도 있을 수 없다. 다른 한편 실체는 창조된 다른 실체들과는 어떠한 관계를 감싸고 있지 않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말브랑쉬에게서 그렇게 보았듯이, 세계의 현존 자체를, 다시 말하면 상호 연관 속에서 실체들의 모둠의 현존 자체를 의심하게 한다. 진실로 실체는 술어들 또는 우발사고들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실체의 술어들의 주어이며 실체는 다른 실체들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데카르트주의는 (그리고 그것이 스피노자주의를 배아로서 품고 있기 때문에) 실체들의 불가분성을 하찮게 여겼으며, 영혼을 마치 사유와 너비의 양태들로 되기 위하여 실체들이기를 그만 둔 물체인 것처럼 여겼다. (218)
실체의 개념은, 라이프니츠의 언어가 “불가분적 실체”를 지적하듯이, 다른 많은 전통들에서도 결부되어 있다. 그가 형이상학 서설(Discours de métaphysique, 1686)에서 말하기를, “불가분적 실체”에 대하여, 이렇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또한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처럼 개별자들(주어일 뿐인 것) 속에서 진실한 실재성들을 탐구하였다. 그가 말하는 “모나드”에 대하여, 나중에 아마도 브루노(Bruno, 1548-1600)에게서 이 신플라톤주의의 항목(ce terme)을 빌려왔으며, 프로클로스(Proclos, Πρόκλος, 412-485)는 이 항목으로 하부질서에서 최고 온일자로 통일성들(ces unités)을 지칭했다. 이 통일성들은 다양한 국면들 하에서 우주의 다양성[다양체] 전체를 포함한다. 그러나 그의 물리학의 동력학은 아직도 실체라는 그의 용어의 기원이며, 또한 우리가 그걸 보게 될 것이지만, 틀림없이 그의 생명주의(son vitalisme) 이다. (218)
우선 그 용어가 형이상학 서설(1686)에 나타나는 대로, 불가분적 실체라는 용어를 고려해 보자. 거기서 라이프니츠의 사유는 신학적 문제의, 즉 신과 피조물들의 협력의 문제의, 해결을 향하는 전체이다. 라이프니츠는 거기서 분석적 방법을 따라가면서, 어떻게 불가분적 실체의 용어가 그리고 신적 속성들의 용어들이 사람들이 우연한 진리(une vérité contingente)라고 부르는 것의 조건들의 탐구를 따라가는지를 제시한다. (218)
동일적인 것들에 환원가능할 수 있고 그것의 반대가 모순을 함축하는 이법의 진리들(les vérités de raison)에 대립하여, 우연한 진리들(les vérités contingentes)은 즉 사실의 진리들은 그 반대가 모순을 함축하지 않는 진리들이다. 영원한 진리들의 “형이상학적 필연성”에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부재가 대립된다. 그러나 이런 필연성 부재가 가득 찬 비규정작용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충분 이유율에 반대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정된 존재는 필연적이지 않는가? 말하자면 달리 도달할 수 없지 않는가? 만일 사정이 그러하다면, 우연성(contingence)은 필연성과 다르지 않다.규정작업이 필연성을 가정하지만, 그러나 형이상학적 또는 논리적 필연성은 아니다.또한 가설에 의하여(ex hypothesi)귀결의 또는 논리의 필연성이 있다.이 필연성에 따라서 한 사물은 다른 사물이 앞서서 현존하는 조건에서 현존한다. 한명제의 형이상학적[기하학적] 또는 논리적[분석적] 필연성은 무매개적으로 또는 매개적으로 명제의 항들의 검토에서 흘러나온다. 사실 명제의 필연성은 다음과 같다: “케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넜으며, 앞선 사건들에 기인한다. 그러한 것은 권력을 보장받는 케사르의 의도와 같다, 등등. 마치 앞선 사건들은 이 사건들의 조건들 덕분에 그 자체로 필연적이고, 이처럼 다음도 무한히 이어진다. 사람들은 케사르가 [과거에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것을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219)
여기서부터 만들어졌고 또는 우연적인 진리들의 실증적 정의(la définition positive)가 나온다. 이것은 인간 정신에서는 불가능한 무한한 분석에 의해 적분적 이법(raison integrale 이유)이 도달될 수 있을 진리들이다. 반면에 이법의 진리들을 증명하기 위하여 유한한 분석으로 충분하다. (219)
불가분적 실체의 용어는, 주어로서 개체를 갖는 진실한 명제들에게 이법 원리의 적용에 의해 얻어진다. “모든 진실한 술어기능은 사물들의 자연 속에서 어떤 토대를 갖는다, 그리고 한 명제가 동일하지 않을 때 말하자면 술어가 주어 속에서 표현적으로 포함되지 않을 때, 술어는 잠재적으로 주어에 포함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은 철학자가 내부존재(inesse)라고 부른 것이다. 이리하여 주어의 항은 항상 술어의 항을 가두고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주어의 항을 완전히 이해했던 사람은 또한 술어가 주에 속한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불가분적 실체의 자연 또는 가득 찬 존재의 자연은, 실체가 이해하기에 그리고 주어에 맞는 모든 술어들을 주어로부터 연역하기에, 충분할 만큼 매우 완성된 용어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런 용어는 주어에 속어로 되어 있었다.” 이것이 중대한 원리의 적용방식이다: 즉 모든 진실한 명제는 선천적으로(a priori)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우연적인 진리들의 가설에 의한(ex hypothesi) 필연성은 이렇게 형이상학적 필연성으로 변형되지 못하는가? 만일 거기에서 용어들의 검열[면밀한 조사]로부터 이것들의 진리가 흘러나온다면 말이다. (219)
이런 이유에서 사람들은 그에게 그의 편지교환자들이 말했던 반대들을 고려해 보자. 우선 신학자로서 아르노(Arnauld, 1612-1694)가 있다. 개별자 속에서 모든 변화들은, 마치 그것의 정의의 영역에서 속성들처럼, 그것의 용어로부터 연역된다고 말하는 것은, 우연성과 자유와 더불어, 일종의 진실한 개체성(불가분성) 전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닌가? 그 다음 기하학자로서 드 볼더(de Volder, 1643–1709)가 있다. “사물의 자연을 따라가는 모든 것은, 그것의 자연이 영속하는 한, 이런 사물 속에 불변하는 방식으로 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은, 자연에 의해 전혀 능동적[작용적]이지 않는 불가분적 실체의 용어를 따라갈 것이다. 왜냐하면 능동[작용]은 항상 피조물의 변화방식이기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해결할 수 없었던 반대들과 비슷한 종류의 반대들과 싸운다. 필연적인 명제들에게만 속하는 가지성[인식가능성]과 알 수 있는 것을 회피하는 개체성[불가분성] 사이에 선택하도록 도전 받았다. (220)
기하학자들을 위하여 라이프니츠는 개별적 실체의 자연을, 이 계열의 항들의 무한정한 진행을 감싸고 있는 계열의 법칙에, 그리고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무한히 많은 점들을 규정하게 허락하는 곡선의 방정식에, 비교하였다. 그러나 그는 또한 덧붙였다. “그것은 기하학적 정신들을 위하여 내가 더욱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선들이[술어들의 무한한 풀림이 그 속에 있는 선들]한 인간 정신이 이해할 수 있는 선들을 무한히 통과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220)
선들[(elle, 무한히 풀리는 선들]은 선들[les 한 인간이 이해하는 선들]을 무한하게 지나간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한 실체의 용어가 그것의 모든 술어의 발생적[생산자]이라고 안다면, 우리 자신은 그러한 용어를 전혀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사람들이 앞선 상태에 따라서 그리고 다음차례에서도 그 앞선 상태에 따라서, 이후 상태를 이유 있게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결코 지난[앞선의 앞선 등등] 이유에, 계열의 내부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성되지 않는 또 결코 완성되지 못한 이런 무한한 항들은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종합범주학적(syncatégorématique)이라 부른 것인데), 계열의 바깥에 항들과 그 항들의 의존을 단번(한방)에 알 수 있게 하는 이법[이유]이 있다는 것을 (종합범주학적 무한을) 가정한다.이 때가 오류불가능하게 또한 선천적으로(a priori) 실체에 속하는 술어들의 각각이 인식된다. 개별적 실체의 무매개적인 이런 통찰(cette vision)은 신에게만, 즉 사물들의 주인(l’auteur, 작자)에게만 속할 수 있다. (220)
따라서 우리가 우연적 진리들의 뿌리를 탐구해야 하는 것은 신 속에서 이다. 말하자면 이런 수준에서 라이프니츠는 아르노의 반대에 대답하기 위하여 자기 위치를 정한다. 우연적이거나 또는 필연적인 모든 진리로부터, 항들의 용어로부터 끌어낸 선천적인(a priori) 증거가 있다. 만일 진리가필연적이라면, 이런 증거는 유한한 정신에접근할 수 있다. 만일 진리가 우연적이라면, 증거는 신 속에서만현존한다.데카르트의 신학에서, 그 신학은 영원한 진리이거나 또는 현존들과 같은 본질들을 신적인 의지에 의존하게 하는데, 실재적인 것은 가능적인 것과 구별되지 않는다. 있다는 모든 것은 동일한 질서로된 필연성이다. 그리고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진실한 계승자이다. 데카르트의 오류는 오직 두 개의 큰 원리가, 즉 동일성의 원리와 충분 이유율의 원리가, 신학적 재료로 적용되기를 끝낸다는 것을 믿는다는 사실에서 온다. 이런 이유로 우리가 이 두 원리를 적용해보자. 그리고 우리는 필연적인 진리들과 우연적인 진리들이 신의 구별된 속성들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신의 오성에 의하여, 신은 가능한 모든 것을, 말하자면 모순을 함축하지 않는 모든 것을 생각한다. 신의 의지에 의하여, 신은 자기의 오성이 그에게 소개한 가능한 세계들을 창조하기로 결심한다. 이어서 신이 실재적 실체들과 이것들의 술어들을 갖는 오류가능성없는 통찰은, 신이 동일한 실체들을 가능성으로서 갖는 인식과 동일한 자연으로 되어 있는 줄 알 것이다. 그리고 신이동일한 실체들을 가능성으로서 갖는 인식은, 말하자면 실체들의 본질로부터 갖는 인식은, 우리가이법의 진리들을 갖는 인식과 구별된다. 실체의 인식은 (그리고 결과적으로 우연적 진리들의 인식은), 결국 신적 오성이 의지에 연관되어 있다는 한에서, 신적 오성에 속한다. 가능한 실체들의 인식은 가능한 의지 자체에 연관되어 있다. 실재적 실체들의 인식은 그 인식이 효과적인 한에서 동일한 의지에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법의 진리들에 대한 인식은 단지 오성에만 속한다. 이리하여 신의 오류가능성없는 통찰은, 신이 그의 의지에 의해 창조하기로 결심했던 실체들의, 즉 그의 오성에 의해 알게 된 실체들의, 인식들이 어떠한 인식들인지를, 신이 안다는 사실로부터 온다. (221)
따라서 우연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 사이에 구별은 실재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 사이의,현존과 본질 사이의 구별과 동일하다. 그리고 구별은 신적인 두 속성들 사이에 구별에서, 본지에 연관있는 오성과 현존에 연관 있는 의지 사이의 구별에서, 그 구별의 근원(sa source)을 갖는다.
그러나 신에 의해 불가분적 실체들의 통찰은, 만일 충분이유율 덕분에 그의 의지가 임의적이 아니라 오히려 가능한 실체들의 선택에서 규정된 것이라는 경우에, 오류불가능성이다. 완전한 존재를 감당할 유일한 선별(la élection)은 “가능한 세계들 중의 최상의 세계”의 선별이며, 라이프니츠의 유명한 낙천주의(optimisme)의 완전히 선천적인(a priori) 원리이다. 이 원리는 경험에 의해 증거될 수도 반증될 수 없으며, 볼테르(Voltaire, 1694-1778)의 캉디드(Candide, ou l'Optimisme, 1759)에서 조롱거리들도 낙천주의에 상처를 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반스피노자주의를 잘 주장하기 위해 신학자들의 귀에다가 라이프니츠가 매우 자주 말하는 “최상”이라는 단어는 가끔은 “본질의 최대치”의 단어에 의해 대체된다. 결국 하나의 가능한 것의 현존는 다른 가능한 것의 현존과 양립불가능하다. 둘 또는 여럿의 가능한 것들의 현존이 양립할(compatible) 수 있다(말하자면 무모순적이다)는 것에 대해, 사람들은 이것들이 공가능성(compossibles)이라고 말한다. 가능한 것의 모든 조합들 사이에서, 이들 중의 하나의 조합이 분명하게 있다. 그 하나의 조합은 실재성의 또는 본질의 최대치를 포함한다. 그것은 신이 선택한 조합이다. (222) (57LMI)
7절 신학과 단자론 – Theologie et Monadologie 222
형이상학 서설(1686)의 분석적 진술 이후에, 그는 보다 나중에 자기의 체계에 대한 종합적 진술을 하는데, 이 종합적 진술은 모나드란 용어를 포함한 체계에 대해 플라톤주의의 정신을 밝히는 것이 될 것이다. (222)
꼭대기에 신이 있다. “보다 내부적인 철학에서, 신적인 완전함들의 어떤 인식으로부터 자연적 사물들의 최고 법칙들이 도래한다는 결과에 따라서 나는 행한다.” 무한하고 완전한 존재의 현존은 소위 존재론적 증거에 의해서 선천적으로제기 된다. 단지 이런 증거는, 데카르트에게서 증거하는 대로, 불충만하다. 신의 현존은 그의 관념으로부터 연역된다. 사실상 이런 관념이 가능하다는 조건에서 다시 말하면 모순을 함축하고 있지 않다는 조건에서 이다. 증거는 다음과 같다: “신이 자기의 본질 덕분에 필연적이다. 따라서 신이 가능하다면, 신은 현존한다.” 이런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하여, 라이프니츠는 때로는신의 단순성에 도움을 청한다. 왜냐하면 신이 모순으로 현존하려면, 개념의 요소들 그 자체들 사이에서 양립불가능하다는 그런 개념 속에서 이기 때문이다. 때로는세상의 우연성에 의한(a contingentia mundi,세상의 우연적인 것으로부터) 증거에 도움을 청한다. 이 증거는 이리하여 존재론적 증거의 예비적인 것이 된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마치 타인에 의해 현존하는 존재들이 현존하는 것처럼, 유한한 존재들을 인식한다. 만일 이 [유한한] 존재들이 현존한다면, 이 존재들은 더군다나(a fortiori, 보다 더한 이유에서) 가능하다. 그러나 만일 필연적 존재 또는 자기 존재(etre de soi, ens a se)가 불가능하다면, 타인에 의한 존재들도 똑같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222)
신은 세 가지 속성들을, 즉 권능(la puissance, 잠재력), 오성(l’entendement), 의지(la volonté)을 가지고 있다.권능은 창조적이다. 오성은 본질들 또는 가능들의 토대(le fondement)이다. 만일 두 가지 중대한 차이가 없었다면, 오성이 플라톤주의자들의 알 수 있는 세계에 상응한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두 가지란, 첫째로 가능적인 것들 또는 본질적인 것들의 장[영역]은 현존의 장보다 무한하게 더 크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가능성들에서 현존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들과 의지의 결의에 의해 존재에로 통과할 것들을 구별해야만 한다. 둘째로 작동[현실태]에로 통과하려는 가능성들은 사물들의 이상적 원본[모델]들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작은 세부사항까지 피조물들에 속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가 말하기를 “나의 가정은, 신이 하나의 아담을 – 아담이란 용어는 모호하고 불충분한데 - 창조하고자 원했던 것이 아니라, 신이 한 개체로 잘 규정된 아담과 같은 이를 창조하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플로티노스(Plotin)가 말했듯이 신 안에는 개별자들의 관념들이 있다. 결국 신의 의지는 현존들의 토대이다. 이 의지에 의해 신은 가능한 것들에 대한 최상의 조합을 선택하고(choisir), 그리고 최상의 조합을 존재에게 이행하게 한다. (223)
사람들은, 신적 삶의 규정작업을 더 잘 제시하기 위해서 기계론의 방식으로, 이 모든 신적인 삶을 묘사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모든 가능한 것은 현존하려는 경향이 있다(exigit existere)는 것을, 또는 본질은 단지 현존의 요청[경향]일 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창조는 최대치의 균형의 문제가 되며, 각 가능적인 것이 다른 가능적인 것의 방해를 받지 않는 한에서, 말하자면 완전성의 따라서, 각 가능적인 것이 현존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전체적 조합이란 가장 가능한 실재성을 소유하는 조합이다. (223)
최상의 의지에 의한 경향 하에서 마치 힘에 의한 물리학적 기계론과 같은 형이상학적 기계론으로부터, 라이프니츠는 선천적으로우주의 일반적 특성들을 연역했다. (223)
사람들은, 무한성에 대해 동시에 말하지 않고서는, 실재성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너비와 같은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존재들만이 있다. 그 너비에서 사람들은 유한한 부분들을 자를 수 있으며, 그러한 것 자체가 부분들의 상상적 특성의 증거이다. 따라서 라이프니츠는 우주를 발견해야만 했는데, 그 우주 속에는 동시에 무한한 실재적인 것이 아무것도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것으로부터 모나드(monade, 단자)의 용어가 태어났다. 우선라이프니츠는 세속인들이 실재적이라고 부르는 우주 대신에, 우주가 정신 속에서 현존하는 것과 같은 우주의 표상작용으로 대체했다. 소위 실재적인 우주는 실체없는 현장일 뿐이며, 실재성은 정신이며 자기의 표상작용을 갖는다. 더하여, 그는 표현(expression)의 관념과 거의 동등가인 표상작용[재현]의 관념을 일반화하였다. “사물은 다른 사물을 (나의 언어 속에서)나타내는데(exprimer), 이때는 하나의 사물과 다른 사물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 사이에서 항상[상수]적이고 규칙적인 연관이 있다. 표현은… 류이고, 자연적 지각작용, 동물적 감정, 지적인 인식은 종들이다.” 관점과 일반화의 전복으로부터, 이런 결과가 나온다: 우주를 구성하는 모둠으로 된 표상적 존재들은 지적 인식의 재능을 받은 정신들[정령들]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들 자체에 의한 경험을 갖는 표상적 존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 표상작용은 의식을 전혀 함축하지 않는다. 게다가 우리 자체 속에서 우리는 표상작용들을 확인하며, 표상작용들의 각각은 무한한 세부사항을 감싸는데, 우리가 이런 지각작용들을 최소한으로 의식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리하여 파도의 소리는 물의 소립자[작은 물방울]의 각각과 이것에 이웃하는 소립자들 사이에 충돌들에서 나오는 소음들의, 즉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기초적인 소음들의 합계이다.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색깔이나 향기 같은 감각적 성질은, 깨닫지 못한 운동으로 된 엄청난 수의 기본적 지각작용들의 총합의 결과로부터 나온 거짓 단순성이다.그리고 소멸(évanouissement, 사라짐)과 같은 상태들이 있는데, 그 상태들 속에서 우리의 지각작용들은 어떠한 감정도 동반하지 않는다. 그래서 동일한 사물이 무한히 다양한 방식들로 표현될 수 있다. 왜냐하면 판명한 표상작용 속에서 무한한 정도 차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우주를 마치 무한한 우주의 표상적 존재들의 모둠처럼 상상할 수 있고 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주는 가능한 만큼 많은 실재성을 포함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무한한 존재들이 있다. 왜냐하면 우주의 표상작용의 명석성과 판명성 속에 무한한 정도 차들이 있기 때문이다. (224)
이것이 모나드란 용어에서 정신이란 용어의 일반화이다. 라이프니츠의 우주는 어떤 의미에서 플로티노스의 알 수 있는 세계와 엇비슷한 것(analogue)이 있다. 그의 세계 속에서 세계의 전체적 실재성이 각각의 관념 안에서 투명하다(transparaître 비쳐보인다). 이것을 반복해서 말하자면, 이것은 층위로 된 우주들의 용어보다 – 이 층위 우주들의 각각은 여러 집중화 또는 희박화의 정도들에서 다른 모든 층위 우주들을 반복하는데- 플라톤주의 철학에서 보다 더 공통적인 것들의 용어이다. 이것이 바로 모나드들이다. 이것들의 각각은 정신적 우주처럼, 따로(à part, 각자) 모나드이며, “창이 없다”.이 모나드는 그 자체로 완전하게 충분하다. 각 모나드는 또한 동일한 우주의 다른 표현이며, 이 모든 표현들은 가장 완전한 것으로부터 가장 덜 완전한 것으로 위계화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플라톤주의도 더 이상 아니다. 신플라톤주의의 층계로 된 우주들은 단계들의 연속적 하강을 고려해보면, 점점 더 적게 통일성을 갖는다. 이것들은 층위들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감각적 세계를 특징지우는 공간 속에 병치에 이른다.여기서 그러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나드들은 각각이 위계의 한끝에서 다른 끝까지, 불가분의 동일한 통일성을 간직한다. 라이프니츠가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공간적 세계의 실재론에 의해 조종된 통일성-흩어짐이란 대립에 반대하여, 그는 명석판명 대 모호혼합의 데카르트주의적 대립을 대체했다. 이 데카르트적 대립은 여전히 정신적 자연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모나드들은, 자기들이 동일한 우주에서부터 소유한 다소 분명한 표현에 의해 모나드들 사이에서만 다르다[차이있다]. 신플라톤주의의 층위들 속에 현존하지 않았던 역동론[동역학]을 모나드 속에 또한 도입하는 것은 이러한 정신성이다. 왜냐하면 각 모나드는 매 순간에 어떤 명석함의 정도에서 전 우주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자발적으로 우주를 최상의 것으로 표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각 모나드는 두 가지 속성들을 가지고 있다. 지각작용(la perception)과 욕구작용(l’appétition)이다. 지각작용은 통일성 속에 변이인데, 지각작용을 통해서 사물들의 무한한 세부사항이 각 찰나에 지각작용 [자체] 속에 재현[표상]된다 욕구작용은 모호한 지각작용들로부터 보다 분명한 지각작용들로 이행하는 자발적인 경향성이다. 그리고 “벗은 모나드”에서부터 합리적 모나드까지 모나드들의 위계가 있다. 벗은 모나드는 어떠한 통각 또는 감정 없이 지각작용들만을 갖는다.합리적 모나드 또는 정신은 의식과 반성적 작동들을 포함하여 필연적 진리들을 갖고 있으며, 기억 덕분에 미래 사건들을 예견할 수 있는 동물적 모나드들을 관통하여 지나가면서, 그리고 과거의 사건이 재생산되었을 때 예전에 그 과거의 사건을 따라갔던 사건(경험적 맥락들)을 기다린다. (225)
모든 모나드는 매 찰나에서 그의 과거 전체의 흔적들을 포함하여, 그 모나드는 자기의 모든 미래를 품고 있다. 따라서 전체는 내적 이유들(des raisons)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 우리는 전체를 선천적 이유들 때문에 안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을 믿지 않아야 한다. “내가 여행을 하려고 하는지, 나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내가 여행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간에 내가 항상 나 자신이라는 것은 나에게 불확실하지 않다. 사물들은 우리에게 비결정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전진하는 것들(les avances) 또는 우리의 실체 속에서 그것들로부터 발견되는 표시들(marques)은 우리에게 재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우리가 우연한 것들이라고 부르는 사건들은 비규정적이지 않다. (225)
모나드들은 동일한 우주의 거울들 또는 표현들을 구성한다. 모나드들 사이에 있는 유일한 차이는 표현의 다소 큰 분명성에 있다. 그러나 무한한 모나드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충만과 연속성의 법칙은 형상들에도 너비에도 적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치 한 직선의 두 점 사이에서처럼 무한히 많은 다른 점들이 있듯이, 명석하게 다른 두 표현들 사이에도 무한히 많은 매개적인 표현들이 있다. 그것인 신적인 무한의 표시(la marque)이다. “이렇게 말하자면 신은 모든 측면들로부터 모든 방식들로부터 현상들의 일반적 체계를 돌고 있으면서, 신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 현상들을 생산하는 것이 즐겁다. 그리고 신은 세계의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모든 면들(les faces)을 바라보는데, 왜냐하면 자기의 전지전능을 회피할 연관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장소로부터 보여진 우주의 각 관점의 결과는 이 관점에 부합하는 우주를 표현하는 실체이다.” (226)
무한한 모나드들, 즉 이런 모둠은 하나의 전체를, 즉 사람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실체적 실재성을 전혀 형성하지 않는다. 모나드 그 자체로 파악된, 모나드는 종합범주학적(syncatégorématique) 무한들 중의 하나이며, 이 무한들 중에서 항들을 연결하는 근거는 계열들 바깥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사유는 세계의 영혼의 또는 우주적 정신의 관념에 가능한 만큼이나 대립된다. (226) (57LM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