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직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편성되어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였으며 1920년 6월 7일에는 독립군을 추격해 들어온 일본군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이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가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일으켜 독립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간도에 출병하였다. 독립군부대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 고동하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특히 장군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은 청산리대첩의 대표적인 전투인 백운평, 천수평, 어랑촌전투 등에서 큰 전승을 거두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주력부대였다.
청산리대첩 후 대한군정서의 서일 총재는 임시정부에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의 부하 300여 명이 일본군 1300여 명을 격살”하였다고 보고할 정도로 일본군의 피해가 막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청산리 전투는 한국독립군이 벌인 전투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였다. 또한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저지시켰으며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전투였다. 이처럼 장군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사관연성소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훈련이 잘 된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총기 약 800정, 기관총 4정, 수류탄 약 2,000개, 박격포 2문을 갖추고 있어 무장이 구비된 정예부대였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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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머리 바람이 센데 관산 달은 왜 밝은가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그리운 고국이여'
이리도 차가운데 어찌 도를 논할 수 있겠는가
도는 무위에 이르렀을 때 평등하게 진의를 말할 수 있거들...
나라를 지키는 충정께 당신의 진의는 무엇인가......
어떤분하고 관련이 있는듯 하네요^^
=3 =3 =3 = =3
이민족을 위해 헌신했던 김좌진 장군님의 불굴의 의지가 보입니다
여기계신 누군가의 전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ㅎㅎ
누구지요..
장군의 필체에 그분의 정신이 느껴집니다..그 의지..우리 자천자도 세우고 또 세웠을 것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