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화 가루
황주영
그가 초등학교 동창회에 수소문하여 우리 형제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전화를 걸어온 것은 재작년 가을이었다.
"다른기 아이고, 내가 옛날에 사범핵교 시험 됐을 때 입학금이 없어 울 아부지가 구하러 댕깄는데, 자네 부친이 도와 조서 내가 입학을 안 했더나."
당시의 아버님은 정미소를 경영하셨고, 제헌국회의원이셨던 삼촌과 함께 시골의 유지이셨다.
9남매 막내로 내가 네 살 때 아버님이 별세를 하셔서 나는 아버님에 대한 기억이 없다. 다른 사람들이 아버님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면 나는 잊지 않으려고 내 기억 속 가장 소중한 방에 잘 닦아 보관하였었다. 가장 먼 기억 속에는 어떤 삼베옷을 입은 남자가 나를 업고서 우리 집 대나무 산길을 올라가며 길옆에 있는 산딸기를 따 주었다. 그 남자의 등은 아주 포근했었고, 그의 땀 냄새가 참 좋았던 그런 기억 하나뿐이다. 그가 아버님이셨는지, 아니면 머슴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아버님이었으면 좋겠다. 아버님은 나에게 큰 산이었다. 소나무 숲이 울창했고 노루와 토끼와 꿩들이 뛰노는 그런 산이었다. 6.25 동란으로 황폐해 지긴 했으나 그래도 살아남은 소나무들은 잘 자랐다.
"나는 양촌초등학교 선생도 했고 향촌 고등학교, 참! 니 고등학교는 오데 댕겼노?" "아, 그라모 내가 서울고등학교로 전근하고 나서 니가 댕겼네. 그래서 니를 못 봤고나." "내가 옛날 생각이 나서…, 니 형님 세 분 다 돌아가셨고…, 동생들 혼사라도 있으면 내가 참석할까해서…, 니 아아들 몇이고? 결혼은 다 시킨나? 이 번호로 꼭 연락해라이."
그리하겠다고 하고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곤 잊어버렸다.
그런데 두어 달 전에 또 그가 전화를 하였다. 이제는 내가 빚진 것처럼 되어서, 부산에 사시는 형님도 올라오시라고 해서 며칠 전에 서울역에서 셋이 만나게 되었다.
그는 우리 형제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리곤 마치 옛날 그 자리에 있는 듯이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어르신, 이 아아가 요번에 사범핵교 입학시험에 합격한 장남입니다."
그의 부친이 그의 소매를 당기며 인사 올리라고 눈짓을 했다.
"안녕하십니까."
그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꾸벅 인사를 했다.
"아이구, 그래 니가 그 공부 잘한다는 준섭이구나. 장하다."
내 아버님은 허리춤에서 지갑을 꺼내셨다. 그리고 그야말로 빳빳한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선 듯 내놓았다.
"아이구, 어르신 고맙심더. 입학금은 만원만 있어도 됩니더. 담에 꼭 갚겠심더."
"아이다, 됐다 고마.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해서 큰 사람되라꼬 주는기다."
60년 전에 그렇게 그는 그 당시 수재들만 간다는 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로 출발하여 야간대학을 마치고 중등교사, 국비 유학을 마치고 대학교수, 대학 총장까지 하고서 은퇴를 하였다고 했다. 그 자신의 성공만이 아니라 그의 수많은 제자들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과 그들이 성공한 모습들이 보였다.
봄날의 보리밭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때면 뒷산의 소나무들은 연두색 작은 알갱이들이 뭉친 송화 봉오리를 지천으로 맺었다. 어렸을 적에 뒷산에서 사냥도 하고 전쟁놀이도 하며 뛰어 놀 때 동네 아이들과 곧잘 따 먹기도 했었다.
해마다 5월이면 노오란 송홧가루가 안개처럼 퍼져 나간다. 그는 우리집 뒷산 양지바른 자락에 누워계신 큰 소나무 곁의 또 한 그루의 사철 푸른 소나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