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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33:1-33) 돌이켜 살기가 잘 안 되는 이유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참 좋은 아침입니다.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 에스겔 33장 말씀으로 함께 합니다. 1-33절로 기록되었는데, 우리는 10-12절을 같이 읽습니다.
10. 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가운데에서 쇠퇴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
11.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1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오늘 읽은 말씀중심으로 <돌이켜 살기가 잘 안 되는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돌이켜 살기가 잘 안 되는 이유’
우리가 ‘돌이킨다.’라는 말을 ‘회개’라는 말로 달리 표현 할 때 사용하지 않습니까? '회개'라고 하는 것은 한 번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우리의 존재 안에 죄악 됨이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에서 죗값을 용서받은 후에도 죄의 힘이우리 안에 살아있기 때문에, 회개는 우리의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신앙 속에서 돌이키는 것인데 돌이키는 것이 잘 안 되고 이제는 돌이키려고 하는 자도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이 확인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키는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돌이키는 것이 잘 안 되는 이유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제가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을 입학할 때에 저는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았는데 어느 두 분 교수님께서 입학 사정회 때에 제가 신학대학원에 들어와서 목사가 되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하십니다. 그 분들이 누구냐 하면 제가 대학교 3학년 학생회 일을 볼 때 신학대학교 4년과 신학대학원 3년이 이어져서 공부가 될 때에 커리큘럼상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군대에 있을 때 미군들이 훈련받을 훈련프로그램의 커리큘럼을 작성했던 사람이라서, 들어와 보니까 학부 때 배운 과목이 대학원 때 또 반복되고, 하나도 그 내용이 심화되거나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반대학에서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을 들어온 사람들과 같이 공부를 하게 되니까. 우리는 대학에서 배운 것을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온 분들 때문에 또 다시 배워야 하는 그런 불합리한 일이 학교가 세워진 이래 계속되고 있는데도 교수님들이 손을 안 대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커리큘럼상의 문제와 학제문제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면서, 교수님께 시정을 7차례 요구했는데 전혀 고려가 안 된 거예요. 만나서 의논조차 안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데모가 시작이 됐습니다. 그 데모가 시작되는 과정 중에 전혀 뜻하지 않게 그야말로 사고처럼 두 분 특정 교수님의 명예가 훼손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일부 학생들이 주도되고 있는 시위와는 상관없이 개인적인 행동을 한 겁니다. 그런데 거기서 두 분 교수님께서 앙심을 품으시고, 제가 그 문제가 끝나고 일 년 휴학하고 다시 돌아왔는데, 이제 졸업하고 신학대학원 올라가는 입학 사정회 때에 도저히 다른 교수님들이 저항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제 입학을 반대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입학을 했어요.
어떻게 입학을 하게 되었느냐? 제가 복학했을 때 독일에서 유학을 마치고 오신 신약학 교수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어떻게 그 분하고 인연이 돼서 그 분이 하시는 일을 도와드렸습니다. 독일어를 번역하고, 독일어 신학 강독 책을 만드시는 것을 돕고 또 그 분이 원하시는 자료들을 한국말로 번역을 해드리는 그런 일들을 대학교 3학년 2학기 때부터 그 교수님을 만나서 했는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렇게 도우면서 1년 반을 함께 교수님께 잘 협조했던 저를 교수직을 담보로 하고 저를 껴안고 ‘이 학생이 신학대학원에서 문제를 일으키면 내가 교수직을 내놓겠다.’라고 까지 말씀하시면서 저를 입학을 시키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신대원에 입학해야 목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그 분이 저를 살려주신 것이지요.
그 분이 누군 줄 아십니까? 제가 그 분의 존함을 직접 언급을 하진 않겠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가 얽혀 있습니다. 요즘 유명한 걸 그룹이 있잖아요. 걸 그룹의 원조가 핑클 이에요. 그 핑클의 멤버에 이효리 씨도 있고 옥주현 씨도 있고 성유리 씨도 있었어요. 성유리 씨의 아버지 되십니다. 재미있지요. 성유리 씨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 신학대학교 장신대 교수님이신데 그 분께서 교수직을 담보로 저를 신대원에 들어가게 해 주셨습니다. ‘나는 지금 독일에서 와서 교수직에 종사하고 있는 동안에 이 학생처럼 성실하고 모범적인 학생은 본적이 없다.’라고 하시면서 끌고 가셨다는 거예요. 성실하지도 않고 모범적이지도 않았는데. 하여간 저 자신도 그 교수님을 만나면서 정말 학교에서 보람찬 생활을 보낸 겁니다. 처음부터 제 나름대로 그 커리큘럼에 대한 시각이 있었으니까, 그걸 보면서 불만을 갖고 있던 학생이 그런 불만 없이 아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생활을 했던 것이지요. 그것이 토대가 되어서 그 분께서 저를 신학대학원으로 입학을 시켜주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돌이킨 삶이 살려준 거예요. 계속 학교에 대해서 불만이 있었고, 시정을 요구하고 그런 학생입장이었다가 다 잊어버리고 교수님 한 분 만나서, 그 분이 시키시고 원하시는 일을 충실하게 해드리면서 기쁘게 생활한 그 생활이 저를 살려서 그렇게 한 것이지요. 돌이킨 거예요. 학교생활의 패턴이 바뀐 것이 저를 살려낸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에 너무 은혜로운 구절이 나와요. 11절 다시 한 번 읽어볼게요.
“너는 그들에게 말하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돌이켜서 떠나면 삽니다.'
이 '산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죽은 뒤에 심판을 면하고 천당을 갈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돌이켜서 떠나면 산다'는 이 말은 지금 우리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우리 삶 전체의 영역에서 평강을 느끼고 천국을 맛 볼 수 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 마음이 불만이 있거나 근심걱정이 있거나 우울하고 행복함이 없고 한 마디로 기분이 좋지 않아요. 기분이 좋지 않다면 돌이켜 떠나야 한다는 거예요.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는 돌이키지 않고 있기 때문인데 돌이켜 떠나는 것이 잘 안 됩니다.
왜 안 되느냐면, 우리가 본문 16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본래 범한 모든 죄가 기억되지 아니하리니”라고 나옵니다. 돌이켜 떠나면 죄가 기억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가 반드시 살리라 이는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 하라”라고 하시는데 여기서 딱 걸려버리는 거예요. 어떤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면 산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복음이에요. 그런데 그 돌이킨다고 하는 것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였음이라고 말하는 데서 딱 걸려버리는 겁니다. 도대체 내가 정의와 공의를 어떻게 행하느냐는 겁니다. 무슨 수로? 더군다나 산상수훈까지 읽다보면 무슨 수로 내가 정의를 행해서 이전의 삶의 모습에서 돌이켜 떠나는 것이 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고 오른편 뺨을 치면 왼 뺨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벗어주고 이러한 삶을 살아야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공의와 정의는 하나님 마음의 기준에 합한 삶을 말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요? 그리고 돌이키라고 할 때 설교를 들으면, 저도 그렇게 설교를 했습니다만, 늘 그렇게 공의와 정의라고 하는 행동으로 표현되는 돌이킴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우리가 못해요. 회개하는 것이고 돌이키는 것이고 그것이 살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만 못해요.
저는 제일 두려운 말씀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사람들에 의해서 붙잡혀서 예수님께 끌려오지 않습니까? 그것을 용서 받습니다. 기가 막힌 거예요. 그 여자가 유대 땅에서는 그 어디를 가도 살길이 없어요. 친정집에 가도 살 길이 없고 어머니께 가도 살 길이 없고 형제에게 숨어도 살 길이 없습니다. 현장에서 붙잡혔기 때문에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하필이면 사람들이 그 여자를 예수님 앞으로 끌고 옵니다. 나쁜 뜻에서 끌고 왔고 이 여자는 본의 아니게 끌려 왔어요. 그런데 예수님 앞에 끌려오는 바람에 이 여자가 삽니다.
여러분! 그런데 무서운 말씀은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간음 죄 뿐만이 아니에요. 죽음에 해당되고 사형에 해당되는 죄가 있는데, 그 모든 죄를 짓지 말라는 겁니다. 여기서 마음이 턱 걸려버려요.
왜냐하면 죄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내가 죄의 힘을 이길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이 말씀이, 이제 돌에 맞아 죽을 뻔했던 현장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여자의 마음을 헤아려 봐요. 이제 내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해요. 좋아요. 간음은 안 하겠어요. 그러나 그거 안한다고 죄가 없어지겠습니까? 무서운 부담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금 돌이킨다고 하는 말을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곧바로 돌이킴이 행위로 직접 나가면 안 됩니다.
‘회개하라 돌이키라’라는 말씀을 행위를 바꾸라는 말씀으로 직접 받아들여 버리면 안 돼요. 반드시 행위가 고쳐져야 돼요. 행동이 달라져야 돼요. 죄악 된 행동으로부터 벗어나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접근해 들어가면 ‘내가 무엇을 행했습니다. 그러니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라고 접근해서는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돌이켜 집니까? 제가 40명 교수님이 계시는 그 학교에서 아무 교수님도 어떤 분도 학부에서 배운 과목을 신대원에서 또 배우면서도 그 오랜 기간 동안 학생들이 참고 지냈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자기들이 손해 볼 것을 인정하고 손해를 당하면서 지나간 겁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주지하지 않으신 것이에요. 당신들의 제자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커리큘럼을 맞이해서 손해를 보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아무도 인지하고 들추어내도 개선을 하려고 접근해 들어오는 교수님이 안계십니다. 그러니 교수님 전체에 대한 불신이 생겼었어요.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는 새 교수님이 독일에서 오십니다. 그 분하고 인격적으로 맞아 떨어진 거예요.
여러분! 여기서 행동이 바뀝니다. 학생의 행동이 적극적으로 그 분을 돕는 거예요. 교수님을 좋아하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돌이킨다는 게 뭐 같습니까? 행동이 바뀌었지요. 행동이 바뀌기 전에 무슨 일이 먼저 일어납니까? 한 교수님을 좋아하게 됩니다. 거기서 행동이 바뀌어 지는 거예요. 행동이 바뀌려면 내 마음이 좋아하는 대상을 바꿔야 된다는 겁니다. 마음이 향하고 있는 대상을, 40명 기존 교수님으로부터 새로 오신 교수님께로 향했을 때 그 분이 좋아지면서 학교의 생활패턴이 달라져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자꾸 마음이 향하는 곳을 바꾸려하지 않고, 행동을 바꾸려 하니까 안 되는 거예요.
자, 본문 33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이키라, 돌이키라’라는 말씀을 하나님께 계속 듣게 되는데,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돌이키라는 말씀입니까? 무엇을 지금 향하고 있는 것입니까?
본문에 보면 이런 구절들이 있어요. 24절에 보면 “인자야 이 이스라엘의 이 황폐한 땅에 거주하는 자들이 말하여 이르기를 아브라함은 오직 한 사람이라도 이 땅을 기업으로 얻었나니 우리가 많은즉 더욱 이 땅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되느니라 하는도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1차, 2차 바벨론 침략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가고, 나머지 사람들이 B.C. 586년에 망하기 직전까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느냐 하면 '하나님의 성전이 예루살렘 이곳에 있으니까 하나님이 지켜주실 거라고 생각했고 아브라함 혼자서 이 땅을 기업으로 약속을 받았는데 지금 우리는 사람이 몇 명이냐? 그러니까 더욱 더 이 땅이 잘 지켜질 것이다.' 라는 말을 했다는 겁니다.
이 말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뭐예요? 이 사람들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무엇에 붙들려 있습니까? 가나안 복지에 붙들려 있습니다. 가나안 복지가 이들에게 뭘 의미합니까? 생활의 터전이고 기업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의 터전, 삶을 위한 기업, 이 세상에서 사업, 돈 벌이, 이 세상에서의 삶에 마음이 매여 있었다는 겁니다.
돌이키라는 말은 행동을 바꾸라는 말 이전에, 지금 너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너희가 향하고 있고 붙들고 있으면서, 너희가 그 삶을 멋지고 풍요한 삶을 만들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마음을 너희가 이 땅에서 잘 살 것인가에 두지 말고, 복지라고 하는 땅과 기업에 두지 말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이키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너희가 땅을 좋아하고 복지를 좋아하고 삶의 터전에서 잘 살기를 좋아한 것처럼,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면 행동도 나오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예요. ‘공의와 정의를 행하여야 살 것이다.’ 라는 얘기는 공의와 정의가 맺혀지려면 돌이켜라. 떠나라. 마음이 떠나라는 겁니다.
지금 자식에게 마음이 붙들려 있느냐? 떠나라는 겁니다. 돌이키라는 겁니다. 왜 자식을 좋아해서 자식 문제 때문에 걱정이 한 바가지냐는 겁니다. 자식을 떠나서 나를 좋아하라는 거예요. 돈 좋아하듯이 나를 좋아하라는 겁니다. 이렇게 돌이키지 않으면 행동도 나오지를 않아요. 그런데 이렇게 돌이킨다고 하는 것을 알아도 쉽지 않아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좋아합니까? 좋아할 수가 없잖아요. 돈은 보여요. 자식은 보여요. 내 사업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려요. 만져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어떻게 돌이켜서 좋아합니까?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40명 교수님 중의 한 분 교수님께 마음을 돌립니다. 그 분과 긍정적인 관계가 맺어지면서 대학생활의 패턴이 달라지고 그것이 나를 구원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지구위의 그 누구를 향해서 돌이켜도 살 길이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님만이 우리 마음이 볼 수 있는 분이시고, 우리 마음이 돌이켜 향해도 될 수 있는 분이고, 돌이켜 향해야만 하는 분입니다.
자, 자식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 문제에서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이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의와 정의를 어떻게 행합니까? 내 마음의 죄악 때문에 행할 길이 없어요. 죄악을 보는 자가 할 수 있는 것이 뭡니까? 자식 앞에서 내 죄를 보면서 내가 이 자식 앞에서 행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의 주님께로 가서 그 주님과 함께 연합해서 죽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죄인인걸 알고 주님의 십자가에서 연합해서 죽어 마땅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정의와 공의를 행할 수 있는 것이고 그게 우리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정의와 공의라는 겁니다.
사업문제가 벌어졌습니다. 그 사업문제 앞에서 내가 행할 수 있는 정의와 공의가 뭡니까? 돌이킬 수 있는 길이 뭡니까? 주님께로 향하는 것이고, 주님께로 향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정의와 공의를 행한다는 것이에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이지요. 사업 때문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 사업에서 마음을 돌이켜서 주님을 향합니다. 이게 아버지께로 향할 수 있는 길이니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으니까. 그렇게 돌이켜서 방향을 바꾼다는 뜻이 있고, 또 하나는 주님의 십자가를 향하는 이유는 사업이라고 하는 이 문제를 좋게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나는 지혜도 선함도 없는 자다. 나는 죄인이다.' 라고 생각해서 내 생각과 계획과 의도와 뜻과 소원이 다 죄악에 물든 자라는 것을 알고 십자가에 매달려 함께 죽는 것이 내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정의와 공의입니다.
내가 사랑을 베풀고 내가 선을 베풀고 내가 사업을 많이 해서 자선을 베풀어야지, 이게 다 헛된 것이고 거짓말이에요. 내가 행할 수 있는 정의와 공의는 오직 사업 문제 앞에서 십자가를 기억해내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에요. 죄인 된 나를 자각함에 있어서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정의와 공의입니다. 이렇게 정의와 공의가 행해지고 이렇게 주님 한 분에게로 돌이켜야 한다는 겁니다.
기필코 ‘돌이킨다. 회개한다.’라는 것을 이제 기도를 바꿔야 됩니다. 어떻게 바꾸느냐?
‘하나님 내가 아무개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내가 누구를 미워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원망했습니다.’라고 하는 게 회개가 아니에요.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 내가 돈을 좋아했고, 자식을 좋아했고, 건강을 좋아했고, 인생의 성공을 좋아했습니다. 내 마음이 그것들을 향하고 있었으나,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향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향해서 주님과 함께 연합함으로 죽어서 부활하고 승천해서 아버지께로 가게 해 주세요.’ 이게 회개예요. 왜 그래야 됩니까? 정의와 공의를 행할 수 있는 길은 십자가에서 죽는 겁니다. 내 죄를 보는 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나한테서 먼저 이루어 져야지요. 내 자식에게 이루어지고 내 사업에게 이루어지고 내 인생에 이루어지기 전에, 내 존재에서 먼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일어나야 한다고 한다면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회개라는 것이에요. 날마다 죽는 것은, 날마다 회개하는 것이고 날마다 돌이키는 겁니다. 마음의 방향을 바꾸세요.
오직 이 지구 표면에서 내가 돌이켜서 향할 수 있는 분은 딱 한 분입니다. 40명 교수님 중에 딱 한 분이 나를 교수직을 담보로 삼고 껴안고 입학을 시키셨던 것처럼, 나를 껴안고 평강의 나라로 나를 이끌어 가시고, 이 땅의 모든 삶조차도 당신이 직접 행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시는 유일한 분이 예수님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그러므로 돌이킨다는 것은 행동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를 향하여 마음을 드리고 주님과 함께 죽는 자가 되세요. 그러면 행동은 주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이웃을 향한 사랑의 행위를 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신 주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행해 나가시는 것이지 내가 정의와 공의를 행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행할 수 있는 유일한 정의와 공의는 내 죄를 보고 나 같은 죄인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연합해서 죽어야 마땅하다고 인정하고 죽는 것이 유일한 정의와 공의가 됩니다. 이렇게 돌이킬 수만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하늘에서 여러분의 몸으로 진행되어지는 이 땅의 삶 역시 주님의 행동을 통해서 평강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회개를 우리 마음이 방향을 바꾸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게 해주시고, 그럼으로써 행동까지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행동이 열매 맺혀지는 복된 삶을 사는 자들이 되게 해주시며,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하늘에서, 또 이 몸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평강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