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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체질에 맞지 않는 보약
설교일 / 2007-04-05
본문 / 출 12:37-51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출애굽기 12장 말씀 ‘체질에 맞지 않는 보약’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제 출애굽을 이루는 그런 순간이 되었지 않습니까?
애굽의 모든 첫 태생과 장자들을 하나님이 징벌하시고 그리고 이제 문설주와 문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그 이스라엘의 집들은 건너뛰면서, 그래서 유월절이라고 하지요. 건너뛰면서 심판이 가해진 뒤에 출애굽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유월절 사건은 기독교의 구원사의 어떤 핵심이고 또 구원받은 선민의 삶의 새로운 출발이다 하는 점에서 아주, 아주 중요하고 다시 태어나는 그런 시점이 유월절과 맞물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유월절 사건을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들이 이제 앞으로 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이 유월절 사건은 매년 반복해서 기념하고 지켜야 된다.
너희의 출발점이 어디였는가? 그리고 내가 너희를 어떻게 구원해냈는가? 하는 것을 기억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으로서의 identity를 유지하고 살아라, 이런 중요한 사건을 오늘 특이하게 할례와 연관을 시키십니다. 할례와.
이 유월절사건, 구원사건의 핵심이 되는 유월절과 할례의 연결, 이 이야기를 우리가 체질에 맞지 않는 보약이다, 라는 제목으로 비유적인 이 제목을 통해서 한번 쉽게 이해를 하고 한번 다시 실감나게 이해해보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한방에 있어서 사상체질의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인간의 체질을 네 가지로 나누지 않습니까?
태양인, 태음인, 소양인, 소음인.
네 가지로 나눠서 그 체질에 따라서 약을 처방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인삼을 좋아하고 또 외국에서도 고려인삼을 알아줍니다마는 그 인삼도 혈압이 높은 사람이거나 열이 많은 사람이 먹을 경우에는 탈이 생긴다 그래요.
그리고 심지어는 약재뿐만 아니라 차 같은 것도 몸에 열이 없는 사람들이 설록차를 마시지 않습니까? 이게 설사로 나타난다든지 이게 안 좋다고 하는 것이에요.
체질에 맞아야 된다고 한의학에서는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상체질이라 그러니까 그런 생각나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복음을 씨로 비유해서 말씀을 뿌리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상태를 네 가지로 비유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
돌짝밭이라든지, 가시밭이라든지, 길 가 밭이라든지, 또 옥토.
네 가지로 받아들여서 우리에게 전해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한방에서 사상체질에 따라서 쓰여지는 약재가 다르다, 보약의 재료도 체질에 따라서 다르게 한다는 것이에요.
여러분은 사상체질에 의하면 무슨 체질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상체질을 한번 알아보기 위해서 한의학의 종합검진을 받아봤습니다.
요새는 한의사선생님들도 다 컴퓨터를 사용하고 그러더라고요.
그런데 첫 번째 딱 진맥을 하시면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이“아, 간이 상당히 크시네요.”그러더라구요. 태음인이래요, 태음인.
이 기관지, 폐의 기능이 좀 약하고 간장의 기능이 강한 그러한 태음인이라 그러는데, 진짜 그런 거 같아요.
여러분도 보시면 알겠지만, 기침을 콜록콜록하고 여름철이 되면 기관지에 알레르기성 천식기가 생기고 이러는 거 보면 기관지나 이 호흡기계통이 강하지는 않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긴 들어요. .
그런데 간은 크다는 것이에요. 제가 이래 뵈도 간 큰 남자에요. 여러분.
어쨌든 이런 사상체질을 비유적으로 우리가 생각할 때 구원사건은 이제 그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는 그것이 유월절을 기념하는 그 행사의 내용이 돼요.
설날에 떡국 먹듯이, 유월절이면 어린 양을 잡아먹게 되는데 그 어린양을 잡아먹는다고 하는 것이 나중에는 성만찬으로 바뀌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살과 피를 뜻하는 성만찬에 참여하게 되는 것으로 바뀌면서 양을 먹듯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 이게 이제 믿음이 되는 겁니다.
우리 마음의 주머니 안에, 마음의 주머니 안에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 수용하는 것, 이거 먹는 것으로 표현이 된다고 하는 것이에요.
이런 비유적인 그런 행동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실 때 우리에게 복음적 의미가 살아나는 성만찬으로 바뀝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사건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사건이 복음이 되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복음이 체질이 맞아야 복음의 효과와 복음의 약효를 낸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바울의 말이 있지 않습니까? (롬 1:16)
그 말씀대로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서의 약발을 내리려면 체질이 맞아야 된다는 것이에요.
이 체질이 맞아야 된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할례체질』
그래서 유월절의 복음사건과 할례의 사건을 연결을 시키시고 계십니다.
이 할례의 규정을 왜 새삼스럽게 말씀하시냐?
이방인들이 있을 것 아닙니까?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살고 있는 거류민들이 있습니다. 또 이방나라에서 들어온 종노릇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그 주인집이나 나그네로 머물게 될 때 자기가 방문하고 있는 이스라엘사람들은 유월절이 돼서 양고기를 막 먹고 있는데,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기도 참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이스라엘사람들이 그때마다 다른 음식을 따로 준비한다는 것도 또 문제가 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유월절 규정을 만들어주십니다.
이방인도 참석할 수 있다. 머슴도 참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할례를 받아야 된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지 않으면 이 유월절의 구원사건이 아무 약발이 없고 효능이 없고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바울선생님도 성만찬에 대한 그런 얘기를 해주지 않습니까?
마음에 거리낌이 있거나 내가 죄가 있어서 합당하지 않을 때라고 생각이 들면 이 성만찬도 받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지 않고는 유월절에 참예하지 못한다.
그럼 할례라는 게 꼭 어떤 육체적인 차원에서의 표피제거를 말하는 거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에요.
할례의 정신을 우리가 창세기에서 배우지 않았습니까?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영원한 언약을 하나님께서 세우시면서 그 장에서 당신의 이름을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계시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계시하시면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그 당신의 계시사건에 이어서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허락해 주십니다.
그럼 그 할례가 뭡니까?
너는 전능한 하나님인 내 앞에서 항상 머물러 있어라.
하나님은 항상 사실은 우리 앞에 계시지요.
그러므로 할례의 의미는 뭐냐 하면, 언제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신다 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할례정신이 없는 마음의 체질은 복음사건이 일어나도 약발이 받지 않는 다는 것이에요.
좀더 우리의 신앙생활로 가까이 끌어당겨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믿을 때 할례정신이 없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사건이 아무런 효능이 없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지금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십자가사건이 일어난 그 사건을 오늘에 되살리자고 하는 것이 고난주간 아니겠습니까?
그걸 지나고 있는데 백날 고난주간을 지내면 뭐하겠습니까?
우리가 그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체질이 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사건, 그 복음사건에 약발이 하나도 맞지 않고 다 무산돼버리고 무효화되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할례정신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에요.
쉽게 말하면, 할례,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앞에 계신다 라고 하는 사실은 쉽게 말하면 그 하나님을 만난다는 얘기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난다는 얘기는, 다시 한번 말해보면 이렇습니다.
전능하시다 라는 것은 절대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의 위치를 말씀하십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입니다.
모든 면에서 절대적이라는 것이에요.
모든 면에서 절대적이라고 하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전능, 모든 걸 다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걸 다 하실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은 못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못하시게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가 없다는 것이에요. 라이벌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것을 구체적으로 우리 생활 속으로 갖고 오면 어떤 뜻이냐?
라이벌이 없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 라이벌이 없는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십자가복음사건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와 유월절을 연결을 시키시는데, 그렇지 않으면 이방인으로써 할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유월절에 참여한다는 것은 뭐냐?
이방인은 뭐냐?
전능하신 하나님, 상대자가 없고, 라이벌이 없는 하나님을 좋아해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종교는 자기의 필요를 따라서 막연한 신을 찾는 것이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도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하나님, 우리 아이들 잘되게 해주세요, 우리 남편 돈 벌게 해주세요, 나 건강하게 해주세요.” 우리의 필요를 따라서 막연하게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찾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는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사건이 아무런 약발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에요.
그럼 어떡해야 되는 것이냐?
전능하신 하나님, 라이벌이 없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그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어야 복음이 복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라이벌이 없는 하나님이 무슨 뜻일까요?
예를 들어서 내 아이들이 내 마음을 괴롭게 한다, 그 말은 내 아이들이 내 마음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아이들과 하나님이 서로 싸웁니다. 무엇을 위해서?
내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일을 위해서 싸웁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내 자녀들은, 내 마음을 즐겁게 해주는 일에 있어서 상대가 안 된다는 겁니다.
돈이 있어야 내가 기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과 돈이 싸웁니다.
그런데 이 돈은 나를 기쁘게 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과 상대가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어떻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마음이 기쁘고 즐겁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앞에 계십니다.
하나님과 남편은 서로 싸우실 때,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이유가 되는 일에 있어서 서로 싸우실 때, 남편은 하나님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 때문에 마음이 찌그러지고, 아이들 때문에 마음이 찌그러지고, 돈 때문에 마음이 찌그러지고, 건강 때문에 마음이 찌그러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상대가 안 되는 모든 어떤 적도, 라이벌도 없는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는 것을 우리가 바라고 믿고 그분을 그리워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거든요.
문제가 심각한 겁니다.
믿음은 어디서 출발합니까?
하나님의 상대자가 없다. 항상 기쁘고 범사에 감사하게 하는 그런 가나안 복지를 살게 하시는 그런 능력에 있어서 세상에는 하나님을 상대할 자가 없다.
내가 남편 때문에 불행하다? 있을 수 없다.
남편이 나를 불행하게 한다? 아내가 나를 괴롭게 한다?
이럴 때 우리가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방인과 다른 것은 어떤 것이냐?
하나님이 나를 아내가 괴롭게 하는 이 가운데서도 더 큰 기쁨과 행복감으로 이 괴로움을 물리치실 수 있다. 이렇게 믿는 것, 시인하는 것, 내 마음은 설사 그렇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이 계심을 알아서 그 하나님의 계심을 생각해도 내 마음이 그렇게 괴롭지 않더라도 입으로 시인하는 겁니다.
"지금 내가 돈이 없다고 괴로워하는 것은, 하나님 때문에 기쁠 수 있는 기쁨만 있다면 이게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내가 지금 하나님을 못 잡고 있구나. 아,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좋겠다."
"내가 자식 때문에 괴롭지만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기만 한다면 이 괴로움이 순식간에 없어질 텐데 지금 내가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고 있구나. 아, 정말 이게 안타깝구나."
이 안타까움.
“아,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올 수 있다면, 나는 지금이라도 이런 상황, 이렇게 열악한 조건 속에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을 텐데. 그런데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안 계시는구나.”
이 하나님에 대한그리움.
하나님이 안 계심에 대한 아쉬움. 하나님에의 그리움.
이것이 목말라할 때 십자가 사건은 그 하나님을 우리 안으로 훅 들어오게 해주시는 체질에 맞는 보약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오시면 나는 행복할 수 있어, 하나님만 있으면 돼. 돈 없어도 좋아, 자식이 좋은 대학 못 들어가도 좋아, 몸이 좀 아파도 할 수 없어, 하나님만 있으면 돼. 하나님 그런데 우리 하나님 어떻게 내 마음에 모시지?"
이렇게 하나님을 그리워함이 없이 이런 안타까움이 없으면 복음은 복음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돈이 없어 쩔쩔매는 사람에게는 돈이 복음이지요. 그렇지요?
건강이 없어서 쩔쩔매는 사람에게는 건강이 복음이지요, 그렇지요?
자식의 좋은 대학 때문에 염려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게 복음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이 복음 되는 것은 누구에게 복음 됩니까?
체질이 맞아야 되는데, 하나님이 내 마음 속에 없어 안타까워 몸부림치는 사람에게 복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건강이 없는 사람에게 건강을 주시려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는 사람에게 돈을 주시려는 것도 아니고, 자식의 문제가 산처럼 쌓여있는 사람에게 그 해결사로 오시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없어서 목말라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없어서 죽겠다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주시는 사건이고 그래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과 같은 마음, 내 필요에 따라서 막연하게 GOD, 신을 찾고 있는 그런 마음에는 십자가사건이 아무리 고난주간을 별 행사를 다 하면서 보내봐야 아무런 약발이 없다고 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복음이라는 것은 유한겔리온 eujaggevlion(euaggelion)이라고 하는 헬라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매우 기쁘고 좋은 소식,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유한겔리온이라고 하는 말은 어디서 나온 것이냐 하면, 여러분 다 아시겠습니다마는 이 옛날에 그리스나 로마에서 전쟁을 하지 않습니까? 전쟁을 하면 이제 아빠가 나가고 오빠가 나가고 형님이 나갑니다. 그렇지 않아요? 한 집안에 남자들이 나가서 싸웁니다.
그러면 싸우고 있는 동안에 그 옛날에 전화도 하나 없던 그런 시절에 이 가족들이 후방에 남아서 마음을 졸이면서 이제 이 전쟁을 지면 남편과 아내가 죽을 뿐만 아니라 집에 있는 어린 자식들까지 다 노예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을 이길 것이냐, 질 것이냐 라고 하는 궁금증은 피를 말리는 것이에요.
그래 여러분 그런 얘기 있잖아요.
2차 대전 당시에 미군이 전쟁터에서 총 맞아 죽은 숫자가 30만 명인데 반해 후방에서 그 전쟁에 나간 가족들을 염려하고 전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심리학적 차원에서 불안과 안정이 깨져서 죽은 사람이 100만 이라는 거 아닙니까?
그만큼 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 후방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정말 사경을 헤맨다는 거예요, 사경을 헤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광장에서 나팔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뛰어나왔습니다.
뛰어나왔는데 전쟁에서 피를 묻히고 막 달려온 병사가 숨을 헐떡거리면서 “우리가 전쟁에 이겼다!” 하면 그 도시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땠겠어요, 여러분?
그때의 그 승전보, “우리가 이겼다”, 라고 하는 그 말이 유한겔리온, 복음이라는 것이에요. 그게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그러므로 생사의 경계를 오가고 있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하나님 아버지만 있다면, 내 마음에 돈 없어도 좋아, 자식이 안 되도 좋아, 남편과 아내가 나를 긁어도 좋아, 뭐 남이 나를 비난해도 좋아.
사도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주님이 그렇게 살았잖아요.
천만인이 나를 반대해도 좋아. 하나님아버지만 내 안에 있으면 좋겠어, 하나님아버지만 있으면 좋겠어.
이런 마음이 있을 때 주님의 십자가는, 십자가에 달려서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이 십자가사건이 바로 네가 그렇게, 그렇게 죽도록 원하는 하나님 아버지를 너에게 주시는 사건이 될 것이야, 네가 십자가에 달려 죽은 이 예수인 나를 너의 죽음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그리워할 때, 영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너의 마음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시게 되고 너는 네가 그토록 사모하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야, 라고 말씀해주고 계시고 그런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할례의 의미라는 것이에요.
언제나 어디서나 상대자가 없는, 라이벌이 없는 하나님.
자식으로 기뻐하려는 마음, 이게 우상숭배에요.
남편으로 기뻐하려는 마음, 이것은 남편 때문에 화내는 마음, 똑같은 마음이에요, 이거 우상숭배에요.
자식 때문에 화내지요?
그러면 자식이 잘하면 기쁠 수 있다, 그건 자식을 섬기고 있는 겁니다.
돈이 없어서 화내고 돈이 있어서 기뻐한다, 돈이 우상이지요.
하나님이 없어서 괴롭고, 하나님이 있어서 기쁘다.
이게 하나님 믿는 거 아닙니까? 이게 하나님 믿는 거예요.
나를 괴롭게 하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상대가 없다.
그러므로 돈이 없는 자리에서도 돈 찾는 거 아니고 하나님 찾고, 자식이 말썽부리는 자리에서도 자식 잘되게 하려고 자식과 씨름하지 않고 하나님 찾고, 남편과 아내가 말썽 부릴 때도 하나님 찾고, 이게 바로 할례의 의미이고 이 할례를 받은 사람, 마음에 할례를 받은 이 사람에게만 주님의 십자가의 복음은 체질에 맞는 보약이 되어서 이 세상이 어떻게 못하는 강력한 하늘의 평강을 갖는 사람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상태 - 내 필요에서 출발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 - 복음이 안 맞아요.
십자가사건이 안 맞고, 그건 믿음의 자리로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입으로라도, 내 마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우리 입으로라도 이렇게 시인하는 겁니다.
"하나님, 돈이 없어 괴로운데 사실은 하나님만 계신다면 이 돈이 없다는 이 사건은 내게 괴로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어서 그런 것이지 돈이 없어 괴로운 게 아닙니다."
입으로 시인하는 거, 여기서 출발하는 겁니다.
자식 때문에 괴로워요.
"자식 때문에 괴롭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없어서 자식의 문제성을 내가 극복할 만한 힘이 없는 것이지 사실은 자식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믿음의 출발이고 이런 마음에 주님의 십자가는 역사하실 것입니다.
†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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