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昌慶宮의 正門인 홍화문(弘化門)
다른 宮闕의 正門은 남쪽을 향하고 있는데 반해, 昌慶宮의 正門인 弘化門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홍화문(弘化門, 寶物 제384호)은 처음에는 성종(成宗) 15년(1484)에 만들었으나, 壬辰倭亂때 全燒됐다.
지금의 門은 光海君 8년(1616)에 다시 지었고 그 뒤로도 여러 차례 수리를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홍화문(弘化門) 규모는 앞면 3칸, 옆면2칸의 2층 樓閣形 木造 建物로 좌우에 한 쌍의 十字閣을 세웠다.
창경궁이 동향이기 때문에 이 문 역시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지붕은 앞쪽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만든 공포(栱包)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세개씩 있는 多包양식으로 꾸몄다.
아래층은 기둥 사이마다 2짝씩의 문짝을 달아 사람이 드나들게 하였으며
위층은 마루를 깔고 앞뒤 벽면에 조그만 널문들을 달아 여닫을 수 있게 만들었다.
지붕 꼭대기 양끝의 조각과 부드럽게 굽어 내린 내림마루 부분의 조각상이 건물의 위엄을 한층 더 돋보이고 있다.
弘化門은 여러 차례의 수리와 丹靑으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었지만, 17세기 초반 목조건축의 연구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弘化門은 임금이 친히 나가 백성들과 대면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英祖는 1750년 均役法을 시행하기 전에 弘化門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직접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이때 大臣들은 대부분이 균역을 반대했지만 백성들이 찬성하자 英祖는 백성들의 의견을 따랐다.
正祖는 1795년 어머니 惠慶宮의 回甲을 기념하여 弘化門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는데,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라는 記錄畵에 그 정경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昌慶宮으로 돌아온 仁祖의 맏아들인 昭顯世子는 丙子胡亂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9년 만에 돌아왔다.
이때 백성들이 弘化門 앞까지 길을 가득 메우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昭顯世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外交官의 역활을 해냈으며,
西洋의 發展된 文物을 접하면서 장차 조선을 새롭게 변혁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러나 歸國한 지 두 달 만에 갑자기 병이 나, 병석에 누운 지 3일 만에 昌慶宮 환경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弘化門을 들어가면 곧바로 앞에 옥천교(玉川橋)라고 하는 石橋가 있다.
옥천교(玉川橋 : 보물 제386호)는 弘化門 앞을 흐르는 금천(禁川)인 玉流川을 가로질러 놓여 있는 돌다리로,
당시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이었던 서거정(徐居正)이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다리의 길이는 9.9m이고 너비는 6.6m이며, 正門인 弘化門과 正殿인 明政殿의 大門인 明政門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다리 앞쪽 난간에는 石獸가 좌우에 있다.
하류쪽에서 본 옥천교(玉川橋).
창경궁 전체 약도.
명정문(明政門)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385호로 지정되었다.
명정문(明政門)은 昌慶宮 外殿의 中門이며 行閣은 문의 좌우로 연결되는 回廊이다.
1484년(成宗 15년) 昌慶宮 건립 당시 지은 것으로 壬辰倭亂 때 불에 타 燒失된 것을 光海君 때 중건했다.
回廊 중 남쪽과 북쪽 일부분은 日帝强占期 때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에 복원했다.
明政門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다포 양식을 띤 팔작지붕건물로, 구조와 규모에 있어서 景福宮의 근정문과 비슷하다.
회랑은 2칸 규모로 기둥 윗부분에 새부리 모양으로 뻗어 나온 장식인 익공을 설치했다.
천장은 뼈대가 훤히 보이는 연등천장이지만 일부는 천장 속을 가리는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昌慶宮의 正殿인 明政殿과 明政門은 東向을 하고 있는것이 특징이다.
건물의 짜임이 착실하고 알차며 짜임새가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어 궁궐 중문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明政門의 안쪽 모습.
明政殿과 조정(朝庭)
명정전(明政殿)
明政殿은 국보 제226호로 앞면 5칸, 옆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이다.
1484년에 처음 세웠으나 壬辰倭亂 때 燒失된 것을 1616년에 다시 지은 조선 중기의 건축물이다.
화강석의 장대석(長臺石)을 바른층쌓기한 2단의 높은 월대(月臺) 위에 長臺石 한벌대의 基壇을 쌓고,
다듬은 초석들을 놓은 다음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 월대(月臺) 앞으로는 봉황(鳳凰)을 조각한 면석(面石)을 놓은 어계(御階)가 있고
그 앞으로 어도(御道)가 명정문(明政門)까지 뻗어 있다.
어도의 좌우에는 文武百官이 조하(朝賀) 때 品階에 맞추어 늘어섰던 品階石들이 있다.
실내 바닥은 전(甎)을 깔았으며, 어칸의 안쪽에는 어좌(御座)를 만들고 어좌 뒤쪽으로 일월오악병풍(一月五嶽屛風)을 둘러쳤다.
천장은 우물천장인데, 특히 보개천장(寶蓋天障)을 만들고 봉황 1쌍을 목조로 깎아 걸어두었다.
명정전(明政殿)좌측으로 돌아 후원(後園)으로 가는 통로.
좌측 이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이고 앞에 석주(石柱)만 보이는 건물이 숭문당(崇文堂)이다.
우측의 정전(正殿)인 명정전(明政殿)의 둥근 기둥과 좌측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의 사각 기둥을 봐야 한다.
그리고 문정전(文政殿)은 남쪽을 바라보고 있다.
끝에 보이는 문이 明政殿의 後門이자 昌慶宮의 內殿으로 들어가는 빈양문(賓陽門) 이다.
明政殿부터 빈양문(賓陽門)까지 복도각(複道閣)이 쭉 연결되어 날씨가 궂을 때도 간편히 행차를 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崇文堂은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政事와 學文을 토론하던 곳으로 지금의 건물은 1830년에 다시 세운 건물이다.
걸려있는 현판은 英祖임금의 친필이라고 한다.
빈양문과 숭문당.
빈양문(賓陽門)은 외전과 내전 공간을 연결하는 통로에 있는 문이다.
빈양문(賓陽門)을 들어서면 왕의 일반 생활 공간이기 때문에 왕의 가족이나 특별한 용무를 제외하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함인정(涵仁亭)
사면이 모두 트인 형태의 정자로 정자로서는 규모가 큰 정자다. 1833년에 다시 세운건믈이다..
英祖는 이곳에서 문무과에 급제한 인재들을 만나보기도 하였다고 한다.
정자 안에는 중국 시인 도연명이 지은 사계절에 관한 "사시"(四時)가 춘하추동 한 구절씩 방위에 맞춰 동남서북에 배치되어 있다.
함인정(涵仁亭)
함인정(涵仁亭) 옆에는 고려시대 5층석탑이 있다.
이 昌慶宮의 5층 석탑에 대해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시행한 조선 궁궐에 불교 石塔을 설치한 점,
조선 궁궐에 高麗시대의 石塔을 설치한 점, 등으로 봐서
日帝가 고의로 昌慶宮을 훼손하려는 과정에서 설치된 조형물인 점 등을 들어 문제가 대두됐다.
이에 문화재청(文化財廳)은 창경궁 함인정(涵仁亭) 옆의 오층석탑은 고려 중엽 제작된 것으로 보여 지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일제시대에 창경궁으로 이건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현재 조사가 완료(2013년 11월)되면 중앙박물관 등 적정 장소를 협의하여 이전을 추진 할 예정이라고 한다.
함인정(涵仁亭)을 마주보고 있는 환경전(歡慶殿)은 昌慶宮의 내전(內殿) 건물 중 하나로 世子나 王이 생활하던 곳이다.
환경전(歡慶殿)은 成宗 때(1484년) 창건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불타 全燒되고, 1616년( 光海君 8년)에 중건했다.
그러나 仁祖 2년(1624) "이괄의 난" 때 다시 불타버렸고 난이 평정되면서 곧바로 중건되었다.
그후 1830년(純祖 30)에 화재를 당한 후 1834년(純祖 34)에 다시 중건되었다.
침전(寢殿)이므로 남·서·북쪽에 행각(行閣)을 두르고 동쪽에 담장을 둘러 독립된 구역을 설정했던 곳이다.
日帝 이후 주변의 부속건물은 모두 없어진 채 主건물인 환경전(歡慶殿)만 남아 있다.
중종(中宗)과 昭顯世子가 승하(昇遐)한 곳이며, 孝明世子(익종)가 승하했을 때는 빈궁(殯宮)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內殿 건물중 유일하게 동쪽을 보고있는 경춘전(景春殿)은 正祖와 헌종(憲宗 : 孝明世子의 아들)이 탄생한 곳이다.
昌慶宮을 처음 지을 때인 1484년(성종 15)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때 불탄 것을 1616년(光海君 8)에 다시 지었다.
成宗의 어머니인 인수대비(仁粹大妃), 장희빈(張禧嬪)의 피해자 인현왕후(仁顕王后)등이 이곳에 거주했으며,
正祖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도 이곳에 거주하며 한중록을 집필하었다고 한다.
그후 1830년(순조 30)에 일어난 큰 불로 인하여 타버렸다.
이 후 1834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 현재까지 보존되어오고 있다.
日帝에 의해 일부 변형된 후 복원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지금은 바닥 전체가 마루로 되어 있다.
침전(寢殿)으로 사용하던 건물이였으므로 온돌방으로 복원해야 할 것이다.
현판은 純祖의 御筆이다.
영춘헌(迎春軒)은 昌慶宮의 북쪽에 있는 寢殿 건물이다.
正祖의 書齋였으며 이곳에서 昇遐했다, 正祖 以後의 王들도 이곳을 書齋로 사용하였다.
동궐도에 그려진 영춘헌(迎春軒)은 집복헌(集福軒)과 붙어 있지만 전면 공간은 담장으로 막힌 별개의 영역이였다.
그런데 1830년(순조 30년) 8월 1일 환경전에서 시작된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
1834년(순조 34년) 낙선재 뒤편 언덕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다 그 재목으로 영춘헌(迎春軒)을 재건했다고 한다.
새로 지을 때 영춘헌(迎春軒)과 집복헌(集福軒)이 이어져 만들어져 현재와 같은 건축 형태가 완성되었다.
집복헌(集福軒)은 昌慶宮에 있었던 後宮들의 居處이므로 영춘헌(迎春軒)과 연결 될 수가 없는 건물이다.
좌측 집복헌(集福軒)과 우측 양화당(養和堂)사이에 있는 풍기대가 있는 곳으로 올라가는 계단.
양화당(養和堂)은 王妃의 생활 공간으로 1484년(成宗 15년)에 지어졌다.
壬辰倭亂과 "이괄의 난", 丙子胡亂으로 인해 불에 탄 것을 매번 다시 지었으며
1830년(순조 30년) 또다시 불에 탄 것을 1843년에 다시 지은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丙子胡亂때 仁祖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돌아와 이곳에 거처하기도 하였다.
1878년(高宗 15) 철종(哲宗)의 비(妃)인 철인왕후(哲仁王后)가 昇遐한 곳이다
현판은 純祖의 御筆이다.
통명전(通明殿)은 昌慶宮의 정침(正寢), 즉 王의 寢殿이므로 궁궐 안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王妃의 寢殿인 환경전(歡慶殿)과 함께 南向을 하고 있다.
앞 뜰에는 박석(薄石)을 깔았고, 건물 남쪽에 행각(行閣)을 두 겹으로 세우고 넓은 마당을 확보한 다음
6단 높이의 계단을 가설한 월대(月臺)를 쌓아 연회를 베풀거나 의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용마루를 없앤 무량각(無樑閣) 지붕으로 되어 있는 것도 궁궐 寢殿 건물의 특색을 그대로 보여 주는 것이다.
통명전(通明殿) 뒤로는 높은 언덕을 층단형으로 깎아 조성한 庭園인 화계(花階)가 있고 그 너머에 자경전(慈慶殿)이 있었다.
이 자경전 자리에는 일본인이 세운 장서각 건물인 2층 벽돌조 건물이 있었지만 지금은 철거되었다.
後園에 있는 통명전(通明殿) 굴뚝
열천(冽泉)
창경궁내에 우물이 많이 있지만 우물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이 열천(冽泉)이 유일하다.
이 열천의 이름을 英祖가 지었다고 하는데 영조실록에 그 내막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통명전(通明殿) 곁에 샘이 있는데, 이름을 열천(冽泉)이라고 부르도록 하라” 하고,
소지(小識)를 불러주어 쓰게 하고, 통명전에 걸게 하였다.(《英祖實錄》, 英祖 33년 5월 29일 己未)
다른 설명에는 英祖가 이 물을 마셔보고 "이가 시리도록 차다"라고 하며 열천(冽泉)이라 했다고 하는데
그에 대한 考證은 없다고 한다.
열천(冽泉)에서 넘치는 물을 끌어 돌확에 담아 석구(石溝)를 통해 지당(池塘)으로 흐르게 만들었다.
통명전(通明殿) 서쪽에는 花崗石으로 아름답게 조성한 지당(池塘)이 있다.
남북 길이 12.8m, 동서 길이 5.2m의 장방형 연못인데, 4벽은 장대석으로 쌓았고, 돌난간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돌렸다.
이 지당의 물은 북쪽 4.6m 떨어진 열천(冽泉)에서 넘쳐나는 물을, 직선으로 설치한 석구(石溝)를 통해 폭포로 떨어지도록 고안했다.
한국의 지당(池塘) 가운데 가장 기발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평가받는다.
지당(池塘) 위에는 길이 5.94m, 폭 2.56m의 간결한 돌다리를 東西로 설치했다.
첫댓글 서울에 처음 와서 갔던 곳이 창경원이였는데,,,
그 후에 창경원을 몇번 간 기억이 나고,,,,
창경국으로 복원하고 가 본적이 두번인가, 가본지가 10년은 넘은것 같기도 하고,,,,
역사 공부를 하고 가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