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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사의 일본날조 스크랩 韓日 동족론
앱솔 추천 0 조회 54 13.10.01 20: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고대일본 지배한 스이코 천황은 백제의 여걸

 

홍윤기 한국외국어대 연수평가원 교수·문학박사

필자는 한일동족설(韓日同族說) 연구를 위해 20여년에 걸쳐 일본의 수많은 고대문헌들을 수집했다. 또 일본의 역사문헌 연구 분야에서도 권위있는 학자들의 논술 등을 비교연구· 분석검토하는 등 다각적인 방향에서 객관적으로 한일동족설을 고증해왔다. 필자는 한국외국어대학을 졸업했으며 일본 센슈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뒤, 센슈 대학의 연구원과 교원으로 장기간 근무하다가 근년에 귀국해 모교인 외국어대 강단에서 일본문화사와 일본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저서에 ‘일본문화사’(서문당, 1999) 등이 있다.

 


 

한일 동족론의 발자취
 

대 한국인들은 일본에 지속적으로 진출하여 일본 열도를 정복하였다. 이것은 일본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과 옛 문헌 등이 명백히 입증해주고 있다. 뒤에서 밝히겠거니와 일본의 저명한 고증학자· 역사학자·고고학자 등은 이에 대해서 진솔하게 기록해오고 있다.

고대에 일본 열도는 미개한 선주민들의 터전이었다. 그곳으로 한반도의 삼국(신라·백제·고구려) 사람들이 대형 선박을 이용해 잇따라 건너갔다. 이때부터 미개의 터전인 일본 열도에 한반도의 선진문화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삼국 사람들과 선주민 간 혼혈(混血)도 이루어졌다.

먼저 한반도 남쪽에서 일본 남쪽의 북규슈(北九州) 지역으로 건너간 세력이 지배의 터전을 일구기 시작한 때가 바로 ‘야요이(彌生)시대’(BC 3세기~AD 3세기경)다. 이 시기에 한반도인들은 서서히 일본 열도의 동쪽으로 밀고 올라갔다. 이처럼 한반도의 선진국 사람들이 동진(東進)함으로써 일본 내해(內海) 일대며 오늘의 오사카(大阪) 지방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한국인 지배자들로는 오우진(應神, 4세기경)천황과 그의 아들 닌토쿠(仁德, 5세기)천황 부자를 꼽을 수 있다. 이들에 의해서 고대 일본의 가와우치왕조(河內王朝)가 세워졌다. 이들 정복왕은 백제인이었다(井上光貞 ‘日本國家の 岩源’ 巖波書店 1967, 水野裕 ‘日本古代國家の 形成’ 講談社 1978). 백제의 정복왕들에 의해 성립된 가와우치왕조는 오사카 지방을 중심무대로 삼았다.

한일동족설은 이와 같은 역사 전개 과정에 필연적으로 부각된다. 필자는 한일동족설의 진원부터 새로이 캐기 시작한 이후 현대 일본 사학자들의 학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검토해왔다.

 


칸무천황의 분서


 

 

일본 역사상 최초로 한일동족설을 세상에 공표한 사람은 일본 남조(南朝, 14세기)시대의 유력한 정치· 사상 지도자였던 기타바타케 치카후사(北白田白親房, 1293~1354년)였다. 필자는 그의 저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14세기)’를 25년 전에 처음 대했다. 그때 나는 이 책을 읽다가 눈을 번쩍 떴다. 몹시 놀랐다. 거기에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옛날에 일본은 삼한(三韓)과 동종(同種)이라고 전해 왔으며, 그 책들을 칸무(桓武, 781~806년 재위) 천황 때에 불태워버렸느니라.”

칸무천황이 백제인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사실이다(北山?夫 ‘王朝政治史論’ 岩波書店 1970). 그런데 한반도인의 피를 이은 일본왕이 어째서 전국 각지의 관원들을 동원해서 한반도인 (三韓人)과 일본인이 동족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옛 서적들을 모두 분서시킨 것일까.

 

이 사항에 관해서는 지금 현재까지 한일 양국 학자들 간에 전혀 논의된 바가 없다. 그래서 이 사항은 아무래도 필자에게 주어진 몫이라 생각하고 이 분야 연구에 몰두하게 됐던 것이다.

 

‘신황정통기’의 저자 기타바타케 치카후사는 당대에 예리한 역사관을 가진 학자였다. 그는 14세기 일본의 전제군주 치하에서도 감히 역사 비판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가 칸무천황 때의 한일동족 역사기록 분서 사건을 지적할 수 있었던 근거로는 9세기 초엽의 ‘코우닌시키(弘仁私記)’였다고 본다. ‘코우닌시키’는 9세기의 일본왕인 사가(嵯峨, 809~823년 재위)천황의 지시로 성립된 기록인데, 거기에 칸무천황이 명령을 내려 책을 불사르게 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 이후 한일동족설은 에도(江戶)시대(1603~1867년)의 도테이칸(藤貞幹, 1732~1797년)을 비롯해서 메이지 (明治)시대(1868~1912년)의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 1839~1931년), 일제 군국주의 치하에서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 가나자와 쇼사브로(金澤庄三郞, 1872~1967년) 등의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돼 왔다. 이들의 연구내용은 앞으로 본고를 통해서 그때 그때 출전(出典)과 함께 상세하게 엮기로 하겠다.

 

다만 한 가지 미리 밝혀두자면 그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연구를 했건 간에 ‘한국인과 일본인은 동일 민족’이라는 근본에는 변함이 없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사카구치 안고(坂口安吾)의 다음과 같은 역사관은 매우 설득력 있는 논리다.

 

“고대에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한(三韓)과, 중국대륙 및 남양 방면으로부터 끊임없이 씨족적 (氏族的)으로 집단 이주해왔다. 그들은 이미 도호쿠(東北)지방의 변경지대며 이즈(伊豆)의 7개 섬에 이르기까지 각지에 흩어져 토착(土着)해 살았다. 또한 그 당시는 아직 ‘일본(日本)’이라는 나라 이름도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주해온 사람들은 어느 특정한 나라 사람들이라기보다는 부락민 또는 씨족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집단들과 뒤섞여 살게 되었다고 본다. 그런 가운데 그들 속에서 유력한 호족(豪族)이 나타나게 되고, 본국으로부터 유력한 씨족들이 계속해서 건너옴으로써 차츰 중앙정권을 이루기 위한 다툼이 생기게 되었다고 본다. 특히 바로 코앞에 있는 한국으로부터 이주해온 사람들이 호족을 대표하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坂口安吾全集’ 第12卷 講談社 1983)

이와 같이 일찍부터 일본 열도에서 조직적이고 강력한 세력을 장악한 한국인 호족들은 그들이 모시게 된 한국인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열도 식민지 경영에 임했던 것이다.

 

교토(京都)의 히라노신사와 백제신
 

본 교토시 기타구(北區) 히라노미야모토쵸(平野宮本町)에는 ‘히라노신사(平野神社)’라는 큰 사당이 있다. 그러나 독자 여러분 중에서 이곳을 아는 이는 아마도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인들조차도 이 히라노신사가 고대부터 백제인 천황가의 신사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일본 고대 역사학자들이나 겨우 알고 있을 정도라고 하겠다.

일본의 교토 관광안내 책자 등에도 히라노신사는 소개돼 있지 않다. 교토의 관광회사들도 관광버스의 명소 순회 코스에 히라노신사를 넣고 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히라노신사는 백제인 칸무천황이 8세기부터 그의 백제 조상신(祖上神)들을 모시고 궁중 제사를 지내온 유서 깊은 터전이다. 그런데도 오늘의 일본인들은 이 유명한 신사를 모르거나, 알아도 외면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백제신을 모신 신사이기 때문일까.

사실 교토라는 일본의 유명한 문화유적 도시가 생긴 것도 바로 칸무천황에 의해서였다. 칸무천황은 794년에 교토 땅을 새로운 왕도로 삼고, 나가오카경(長岡京)에서 천도해 왔다. 칸무천황은 당시 교토의 새 명칭을 헤이안경(平安京)이라 칭하고, 백제신의 신사도 이곳으로 옮겨 모시게 한 것이다. 그러니 이 히라노신사야말로 장장 1200년이나 이어온, 참으로 유서 깊은 명소가 아닐 수 없다.

 

“지난날은 해마다 4월2일에 이곳에서 성대한 제례 행사가 거행되었다. 또한 역대 천황가의 황태자며 공주, 조정의 대신 이하 고관 등은 해마다 2월과 11월의 상신일(上申日, 첫원숭이날)을 제일(祭日)로 정해 백제신들에게 제사를 모셨다”라고 저명한 국학자 니시쓰노이 마사요시(西角井正慶, 1900~1971년) 교수는 밝히고 있다(‘年中行事辭典’ 東京堂 1958). 이 제사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10세기 초의 율령세칙인 ‘엔기식(延喜式)’에도 엄연히 기재돼 있다.

 

그렇다면 서기 8세기부터 히라노신사에서 제사를 모셨던 백제신(百濟神)은 누구일까?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히라노신사에 모셔오고 있는 백제신은 “이마기노카미(今木神, 백제의 성왕)를 비롯해서 구도노카미(久度神, 성왕의 선조)·후루아키노카미(古開神, 백제 비류왕과 근초고왕)·히메노카미(比賣神, 백제인 화씨부인, 즉 칸무천황의 모후)이며, 이 신들은 뒷날 헤이씨(平氏)의 씨신(氏神, うじかみ)이 되었다”고 다카야나기 미쓰토시(高柳光壽)교수 등이 밝히고 있다(‘日本史辭典’ 角川書店 1976).

 

참고로 칸무천황의 생모 화씨부인(1789년 몰)은 왜 왕실에서 백제조신(百濟朝臣)이라는 벼슬을 지낸 화을계(和乙?, 야마토노 오토쓰구)공의 딸이었다. 화을계 조신은 백제 무령왕(武寧王, 501~523년 재위)의 직계 후손으로 백제에서 왜왕실에 건너가 근무했었다. 이 당시는 백제 왕실의 왕족 다수가 왜왕실에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벼슬을 하던 것이 관례였다.

 


백제인이 세운 무사정권


 

 

한편 교토의 히라노신사에 모신 백제신들이 헤이씨(平氏)의 씨신이 되었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헤이안 (平安)시대 후기의 최고 무장(武將)인 다이라노 키요모리(平淸盛, 1118~1181년)도 칸무천황과 마찬가지로 백제인 후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다이라노 키요모리야말로 일본 역사상 겐씨(源氏) 가문의 무장 미나모토노 요시토모(源義朝, 1123~ 1160년)를 무찌르고 왕조(王朝)국가의 군사력을 장악한 명장이다. 12세기 일본 무사국가는 백제인 다이라노 키요모리에 의해 시작됐던 것이다. 이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192년 왕도(王都)인 헤이안경(平安京, 지금의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동쪽 태평양 연안의 가마쿠라(鎌倉) 땅에 무사정권(武士政權)을 세웠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무사정권인 이른바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였다. 쉽게 말해서 그 당시부터 천황가(天皇家)는 실권을 빼앗긴 채 다만 상징적 존재로 머물기 시작한 것이다.

 

이 당시인 1192년 7월 고토바(後鳥羽, 1183~1198년 재위)천황은 가마쿠라에 막부를 차린 무장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무가(武家)정치를 승인하면서 그를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했다. 이른바 ‘쇼군(將軍)’이라고 통칭되는 무단 정치는 이렇게 백제인에 의해서 탄생된 것이다. 정이대장군인 쇼군은 전국 각지에 부하 무장인 ‘다이묘(大名)’를 임명했고, 각 지역 다이묘들은 제 고장을 무력으로 관장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가마쿠라막부의 쇼군 시대는 1336년에 두 번째 무사정권인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탄생시킨다. 이것은 무장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년)가 이룩한 것이다. 1338년 그는 초대 ‘쇼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무로마치 무사정권은 200여년이 지난 1573년에 막을 내린다.

 

이후 무장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년)의 군사독재 시대가 이어지고 계속해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년)의 군사독재 시대가 전개된다. 그러다가 1603년 지금의 도쿄(東京)에서 에도막부(江戶幕府)가 탄생한다. 이 당시 무장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 1616년)가 정이대장군에 임명됨으로써 다시금 막부 무사정권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 에도막부 시대는 1867년에 제15대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 1837~1913년)를 마지막으로 끝장난다. 그리고 마침내 천황 친정체제가 부활해서 1868년부터 이른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상과 같이 무사정권 시대의 발자취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결론적으로 무사정권은 백제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그 배후인 천황가 역시 백제인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황가에서 ‘니이나메사이(新嘗祭)’라는 한국신(韓國神) 제사를 거행하고 있는 이유다. 이에 대해서도 앞으로 상세하게 그 내용을 밝히기로 하겠다.

 

백제인 혈통 입증하는 일본 고대문서
 

실 한일동족설을 구체적으로 입증하는 역사시대는 8세기 칸무천황 때를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바로 일본의 문화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는 아스카(飛鳥, 592~645년 또는 710년)문화 시대이다. 이 시기에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는 한번도 알려지지 않은 백제인 여왕이 존재했다. 일본 역사에서는 이 백제인 여왕을 스이코천황(推古天皇, 592~628년 재위)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추고천황’이다.

 

스이코천황은 백제 왕족의 순수한 혈통을 이은 일본 최초의 정식 여왕이다. 신라의 선덕대왕(631~647년 재위)이 즉위하기 3년 전인 628년에 세상을 떠난 빼어난 여왕이었다. 선덕여왕이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여러 가지 업적을 쌓았다면, 백제인 스이코여왕 역시 당시 왜나라에서 한국불교문화의 든든한 터전을 이루었다.

 

그녀는 백제불교를 바탕으로 ‘아스카(飛鳥) 문화’를 일으킨 주인공이다. 이 아스카 문화가 한반도에서 왜나라에 심어준 불교문화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서기 8세기 초에 왜왕실에서 편찬한 역사책인 ‘일본서기’(712년)에도, 백제 불교가 일본에 건너와서 일본 불교 문화를 꽃피웠다는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을 정도다.

 

특히 스이코여왕은 백제의 관륵(觀勒)스님을 모셔다가 천문지리학을 일으켰는가 하면, 백제의 음악가 미마지(味摩之)를 모셔다가 일본땅에 처음으로 한반도의 아악(雅樂)을 이식했다. 어디 그뿐인가. 고구려의 담징(曇徵)스님을 모셔다가 호류지(法隆寺)의 금당벽화 등 미술 문화를 일으켰으며, 신라 진평왕(眞平王, 579~632년 재위)의 환심을 사, 대신라외교(對新羅外交)를 통해서 신라 불교도 도입했다. 이처럼 스이코여왕은 모국인 한반도 3국(백제·신라·고구려)의 힘으로 아스카(飛鳥)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운, 슬기로운 여걸이었다. 그렇게나 출중한 그녀가 지금까지 한국에는 알려져지 않았던 것이다. 스이코여왕을 빼놓고는 ‘한일동족설’은 물론이고 ‘한일관계사’조차도 논할 수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스이코여왕에 관한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이른바 친일 식민지사관이 아직도 잔존함을 입증하는 것일까.

 

스이코여왕이 백제 왕족의 피를 이은 여왕이었다는 사실을 한 가지씩 차근차근 밝혀보기로 하자. 먼저 스이코여왕의 남편이었던 비다쓰(敏達, 572~585년 재위)천황이 ‘백제인 왕족’이었다는 사실을 고대 문서를 통해 밝히는 것이 첫 순서가 될 것 같다.

일본 고대 왕실의 족보라고 평가되는 귀중한 고문서가 있다. 815년에 일본 왕실에서 편찬한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이 바로 그 책이다. 이것은 왜왕실의 만다친왕(萬多親王, 788~830년) 등이 엮어낸 것인데, 만다친왕은 바로 칸무천황의 제5왕자이기도 하다.

 


백제인의 족보 ‘신찬성씨록’

아무튼 칸무천황의 왕자인 만다친왕이 편찬한 ‘신찬성씨록’에는 1182씨족의 가계(家系)가 일목 요연하게 기록돼 있다. 이 책에는 815년 7월20일자로 만다친왕의 상표문(上表文)이 맨앞에 씌어 있다. 그 다음에 서문이 나오고, 당시의 왕도였던 교토(京都) 등 게이키(京畿)지방의 신족(神族)·왕족(王族)· 귀족(貴族)들의 역대 계보가 30권으로 엮여 있다.

 

이른바 신족은 신별(神別)로 표시하고 있다. 이는 일본 개국신화에서 등장하는, 인간이 아닌 신의 후손들의 족보다. 또 왕족은 황별(皇別)로 그 가계를 기록하고 있고, 귀족들은 제번(諸蕃)으로 분류해 놓았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책에 수록된 대부분의 씨족들은, 설령 신족(神族)이라고 하더라도 한반도 사람들이 주축임을 알 수 있다. 황별인 왕족은 두말할 나위 없이 한반도에서 건너온 정복왕들의 계보다. 그리고 제번으로 구별된 귀족 계보에는 한반도 사람들이 그 대종을 이루는 가운데 소수의 중국인 계보도 함께 실려 있다.

 

‘신찬성씨록’의 내용 및 분석은 차후에 상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왜냐하면 이 고대 문헌이야말로, 한일동족설의 입증은 물론이고 왜나라의 지배자가 한반도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역력히 고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스이코여왕의 남편이었던 비다쓰천황이 백제인 왕족이었다는 사실도 ‘신찬성씨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황족 항목에서 백제왕족인 대원진인(大原眞人, 오호하라 노마히토)의 계보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다. 원문과 필자의 번역을 살펴보기로 하자.

 

“오호하라 노마히토(大原眞人)의 출신은 비다쓰(諡敏達, 시 비다쓰)천황의 손자이며, 백제 왕족이니라 (大原眞人, 出自 諡敏達孫 百濟王也).”

원문에서 ‘시 비다쓰(諡敏達)’의 시(諡)는 왕의 시호이므로 ‘비다쓰천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원문의 ‘백제왕’이란 백제왕족을 가리키는데, 일본 역사서는 ‘백제왕족’을 ‘백제왕’으로 일관해서 기술해 왔다. 즉 오호하라 노마히토는 비다쓰천황의 친손자이며, 백제왕족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본인 학자들도 동의한다. 사에키 아리키요(佐伯有淸)교수는 현재 일본의 대표적인 ‘신찬성씨록’ 연구가인데, 그 역시 “비다쓰천황은 백제인이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일본서기’라는 역사책에 비다쓰천황이 제30대 천황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생부인 킨메이 (欽明, 539~571년 재위)천황은 제29대 왕이다. 여기서 몇가지 주목되는 사실을 미리 지적해두자. 그것은 ‘신찬성씨록’에 등장한 일본 천황 중에 백제왕족이라는 혈통 계보가 완전히 드러나 있는 사람은 비다 쓰천황뿐이라는 점을 먼저 들 수 있다. 즉 다른 일본 천황들은 ‘신찬성씨록’에서 백제왕족이거나 또는 신라왕족과의 혈연관계가 전혀 밝혀져 있지 않다.

 


최초로 ‘백제궁’ 세운 비다쓰천황


 

 

더구나 눈여겨 볼 것은 ‘부상략기’(扶桑略記, 14세기경)라는 일본 고대 왕조사(王朝史)에 기술된 비다쓰천황의 행적이다. 이 통사에는 “비다쓰 천황이 즉위한 뒤에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을 야마토 (大和)의 도읍에 마련했다”고 밝혀져 있다. 비다쓰천황 시기에 이르기까지 역대 일본 천황 중에 왕도에 ‘백제궁(百濟宮)’이라고 호칭하는 왕궁(王宮)을 지은 이는 비다쓰천황이 최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최초의 백제인 지배자였던 정복왕 오진(應神, 4세기 말경)천황 이래 15대(代)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고, 왜나라에 최초의 백제왕궁이 당당하게 선 것이었다.

 

비다쓰천황이 백제왕궁을 지었던 나라(奈良)땅 야마토의 대정(大井)은 백제인 왕족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던 지역이다. 그런 유서 깊은 곳이기에 백제인 왕족인 비다쓰천황은 그의 궁궐인 백제왕궁을 떳떳하게 세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일본서기’에도 나타나 있다. 즉 “비다쓰천황은 즉위 원년인 572년 4월에 백제대정궁을 지었다(元年夏四月, 是月宮于百濟大井)”고 밝혀져 있다.

 

스이코여왕의 남편이었던 비다쓰천황만 백제왕궁을 지었던 것은 아니다. 또 다른 백제인 천황도 ‘백제왕궁’을 지었다. 바로 비다쓰천황의 친손자인 죠메이(舒明, 629~641년 재위)천황이 그 주인공이다. ‘일본서기’는 “죠메이천황이 백제궁을 짓고, 백제궁에서 살다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고 전한다. 14세기 초의 ‘부상략기’에도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다.

 

또한 매우 중요한 사실(事實)은, ‘일본서기’가 “죠메이천황은 비다쓰천황의 친손자로 백제강(百濟川) 강변에다 백제궁을 짓고,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으며 구중탑(九重塔)도 세웠다”고 기록한 일이다. 즉 백제인인 죠메이천황이 나라 지방 백제강이 흐르는 터전에 일본 역사상 두번째로 당당하게 백제 호칭을 붙인 왕궁과 사찰을 건설했다는 것은, 이 고장이 그 당시까지 엄연히 백제인의 식민지요, 백제왕부(百濟王府)였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그 옛날의 ‘백제강’은 오늘날 ‘소가강(曾我川)’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백제강의 명칭이 이렇게 바뀐 것은 메이지유신 때로 알려지고 있다. 1868년 메이지유신 때 유독 백제강의 이름만 없앤 것이 아니다. 지명 등 일본 각지에서 한국과 관련된 각종 명칭이 대부분 바뀌어버렸다.

 


발굴로 증명되다

그러나 과연 명칭을 바꾼다고 역사 자체가 바뀌는 것일까. 역사의 사실(史實)은 끝내 밝혀진다. 1997년 3월 일본 고고학자들은 나라현 사쿠라이시(櫻井市)의 키비(吉備) 연못터에서 ‘백제대사’의 옛 터전을 발굴했다. 이로써 ‘일본서기’에 기록된 대로 백제인 죠메이천황이 639년에 백제대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입증됐다.

 

그뿐 아니라 1998년에는 역시 같은 지역에서 죠메이천황이 지은 구중탑 터도 발견되었고, 금년 5월에는 드디어 ‘백제왕궁’ 터도 발견되기에 이르렀다. 나라현 일대의 이름이 6세기에는 ‘백제(百濟, 구다라)’ 그 자체였던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 기타 사다키치(喜田貞吉, 1871~1939년)는 “비다쓰천황의 백제대정궁은 지금의 기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의 구다라손 구다라(百濟村 百濟) 땅에 있었다”고 밝힌 바 있다 (井上正雄 ‘大阪村全志’ 卷四 1922).

 

비다쓰천황의 친손자인 죠메이천황이 백제왕궁을 세운 터전도 바로 친할아버지가 백제대정궁을 건설했던 곳과 똑같은 고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현대의 저명한 역사학자 가토 에이코(加藤瑛子)교수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서기 641년 10월에 죠메이천황은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백제궁은 소가씨(蘇我氏)의 본거지였던 소가(曾我) 땅의 북쪽인 구다라(百濟, 백제), 지금의 키타카쓰라기군(北葛城郡 廣陵町)에 있었다. 그 당시의 구다라강(百濟川, 백제강)이 지금은 소가강(曾我川)이고, 그 강변에는 옛날에 백제궁(百濟宮)이 있었다.” (‘大化改新の 眞相’ 1967)

 

한편 죠메이천황이 백제인이라는 것과 관련해 ‘부상략기’에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기록도 나와 있다.

“642년 2월에 백제 사신이 내조(來朝)하여, 선제(先帝)의 상(喪)을 조문하였다.”(壬寅二月, 百濟使來朝, 弔先帝之喪).

이것은 무슨 소리인가. 백제사신이 왜왕실에 와서 ‘선제(先帝)의 상’을 조문했다는 것은, 현재의 백제 본국의 왕보다 승하한 왜나라의 왕(죠메이천황)의 서열이 백제왕 가계상 윗대라는 뜻이다. 이 당시의 백제왕은 의자왕(義慈王, 641~660년 재위)이므로, 죠메이천황은 의자왕보다 윗대의 일본땅 백제 왕족인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해야 할 대목이 ‘일본서기’에 기록돼 있다.

 

“641년 10월9일에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하시다. 18일에 왕궁 북쪽에 안치하고 빈궁을 만들었다. 이것을 ‘백제의 대빈(百濟の 大殯)’이라고 부른다.”(十三年冬十月己丑朔丁西, 天皇崩于百濟宮. 內午, 殯於宮北. 是謂百濟大殯).

죠메이천황의 장례를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다는 뜻이다. 이것은 백제 본국 왕실의 3년상 국장의례를 가리킨다. 어째서 그의 장례를 ‘백제의 대빈’으로 모셨을까. 바로 죠메이천황이 백제인 천황이기 때문에, 마땅히 모국인 백제국 왕실의 국장 절차를 따랐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비다쓰천황과 아내 스이코여왕은 이복남매
 

이코여왕의 남편이었던 비다쓰천황과 그의 손자 죠메이천황이 모두 백제인이었다는 것을 앞에서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비다쓰천황이 백제인이라고 해서 그의 아내이자 뒷날 천황의 자리에 오른 스이코여왕마저 백제인이라고 단정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밝히자면 이 두 사람은 이복남매간이다. 즉 아버지가 똑같고 어머니가 다르다.

 

이 대목을 좀더 자세히 지적해보자. 비다쓰천황은 병환으로 585년에 서거했다. 그래서 그 뒤를 이은 것은 비다쓰천황의 이복동생인 요메이(用明, 585~587년 재위)천황이었다. 요메이천황은 다름아닌 스이코여왕의 친오빠였다. 그러나 요메이천황은 몹시 허약해서 병에 시달렸고, 불과 2년간 왕위에 있다가 세상을 등졌다. 그후 그의 뒤를 계승한 사람은 스?(崇峻, 588~592년 재위)천황이었다. 스?천황은 요메이천황의 이복동생이다. 즉 스이코여왕과는 이복남매간이며 비다쓰천황과도 이복형제간이다. 스?천황의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스이코여왕이다. 따라서 이복 남매 4명이 번갈아 왕위를 계승한 것이다.

 

이렇듯 4명의 남매 천황을 둔 친아버지는 누구였던가. 바로 킨메이(欽明, 538~571년 재위)천황이다.

백제인 킨메이천황. 그는 본래 6명의 왕비를 거느렸으며, 슬하에 25명이나 되는 왕자와 공주를 두었던 인물이다. 킨메이천황의 황후인 석희(石姬, 이시히메)가 낳은 왕자가 비다쓰천황이다. 두 번째 왕비인 견염원(堅?媛, 기타시히메)이 낳은 남매가 요메이천황과 스이코여왕이다. 스이코여왕의 공주 때 이름은 취옥희(炊玉姬, 가시키야히메)였다. 따라서 스이코여왕에게는 백제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킨메이천황이 백제의 성왕(聖王, 523~554년 재위)과 같은 인물임을 밝히는 일본의 저명한 고대 사학자가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다.

 

두말할 나위 없이 킨메이천황은 백제인이며 동시에 왜국왕이다. 그런데 킨메이천황이 백제인일 뿐 아니라, 그가 다름아닌 백제의 ‘성왕’이라고 한다면 얘기의 진폭이 커질 수밖에 없다.

우선 백제의 성왕이 고대 한일 관계 역사상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부터 살펴야만 할 것 같다. 성왕은 백제본국왕으로서 일본에 최초로 불교를 포교한 사람이다. 이 사실은 ‘일본서기’등 일본의 옛 문헌들이 상세하게 전한다. 불교 관계 전적(典籍)에서는 백제국 성왕의 업적이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성왕이 일본에 불교를 포교한 것은 서기 552년(538년 설도 있다)의 일이다. ‘일본서기’와 ‘부상략기’에 따르면 “그해 10월13일에 백제국의 성왕이 킨메이천황에게 금동석가상과 불경 등을 보내주었다. 성왕은 ‘불교가 이 세상의 모든 법(法) 중에 으뜸가는 것이므로 불교를 믿으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금동석가상은 당시 왜나라의 최고위 대신이었던 소가노 이나메(蘇我稻目, 505~570년)이 킨메이천황으로부터 하사받아 그의 저택에 모셨다. 소가노 이나메 대신은 백제국에서 포교된 불교를 돈독하게 믿게 되었다. 그는 자기 저택을 불전으로 개축해서 코겐지(向原寺)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사찰이 왜나라 최초의 절이다.

 

이와 같이 왜나라 킨메이천황에게 최초로 불교를 공전(公傳)시킨 백제국의 성왕(聖王)이 뒷날 왜(倭)에 건너가서 왜왕이 된 킨메이천황(欽明天皇) 바로 그 사람이라니, 어찌된 까닭일까.

고대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는 그의 저서(‘二つの顔の大王’ 大藝春秋社 1991)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성왕 18년(서기 540년)에 고구려 우산성(牛山城)을 공격하다 패전한 성왕은 즉각 왜국(倭國)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왜국의 가나사시노미야(金刺宮)에 거처를 삼고, 왜국왕(倭國王)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이 일본으로 망명한 서기 540년이, 킨메이 원년(欽明元年)이 되는 것이다.”

 

가나사시노미야라고 일컫는 궁의 위치는 지금의 나라현 사쿠라이시 가네야(櫻井市 金屋) 부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서는 백제국 성왕이 “성왕 18년(서기 540년) 9월에, 왕은 장군 연회(燕會)에게 명해서 고구려의 우산성을 공격했으나 승리하지 못했다”라고만 기록돼 있다.

또한 백제 성왕이 붕어한 시기는 그 후 14년 뒤인 554년으로 기록돼 있다. 즉 “성왕 32년(서기 554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서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이끌고 밤중에 구천(狗川)에 도달했다. 그러나 신라의 복병(伏兵)이 달려들어서 난전이 벌어졌고, 왕은 부상당해 승하했다”는 것이 ‘백제본기’의 기사다.

 

한편 같은 시기에 관한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안원왕(安原王) 10년(540년) 가을 9월에 백제가 우산성을 포위했기 때문에, 왕은 정예 기병 5000을 파견하여 이를 토벌해서 도주케 했다.”

이처럼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를 보면, 서기 540년에 백제국 성왕이 고구려국 우산성을 공격했으나 패전한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백제본기’에서 540년에 성왕이 왜국으로 망명했다는 기사는 없다. 더구나 그는 14년 후인 554년에 신라에 기습 작전을 감행하다가 전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반면 ‘일본서기’를 살펴보면 539년 12월5일에 킨메이천황이 등극하고, 서기 540년을 원년(元年)으로 삼아 1월에 정비(正妃)를 정하게 된다. 그런데 원년 2월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 있다.

“2월에 백제사람 기지부(己知部, 코치후)가 건너왔다. 그를 왜국의 소후노카미코호리(添上郡)의 야마무라(山村, 현재의 나라시 터전)에 살게 했다. 그는 지금(서기 720년경)의 야마무라의 코치후(己知部)의 선조다.”

즉 이 당시 백제인들이 왜나라 백제인 왕실에 건너와 고관으로 활약한 사항들이 기록돼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같은해 7월에, “왕도(王都)를 시키시마(磯城山島, 지금의 나라현 사쿠라이시 가네야)에 천도했다. 그리하여 왕궁의 호칭을 시키시마의 가나사시노미야(金刺宮)로 부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고바야시의 주장에 따른다면 고구려에 패해서 왜국으로 망명한 백제의 성왕은 이 금자궁을 새로운 왕궁으로 삼고, 서기 540년 7월에 킨메이천황으로서 왜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주목되는 사항이 있다. 그것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왜국왕인 킨메이천황이 실제로는 백제국 무령왕(武寧王, 501~523년 재위)의 조카(생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삼국사기’는 “백제 성왕은 무령왕의 친아들이며, 무령왕이 승하하여 성왕이 왕위를 계승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백제 성왕이 서기 540년에 일본에 건너와 킨메이천황이 되어, 나라땅 금자궁에서 왜왕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고바야시의 설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즉 백제 성왕이 무령왕의 왕자인 것만은 틀림 없는데, 그 성왕이 왜나라 쪽에서는 무령왕의 생질이 되는 킨메이천황이기 때문이다. 왜나라 킨메이천황이 백제 무령왕의 생질(조카)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앞으로 본고(本稿)를 통해서 상세하게 그 계보를 밝히기로 하겠다.

 

혼자 된 황후를 넘본 이복오라비
 

메이천황과 이시히메 사이에서 태어난 비다쓰천황은 당연히 백제왕족이다. 그의 첫 번째 왕비는 히로히메(廣姬)였다.

비다쓰천황은 왕4년(575년) 1월에 히로히메를 맞아 황후로 삼았는데, 불과 10개월 만인 그해 11월에 히로히메가 죽었다. 히로히메의 사인(死因)은 밝혀져 있지 않다.

 

히로히메 황후가 죽은 이듬해인 576년 3월에 비다쓰천황은 이복 여동생인 어여쁜 가시키야히메(스이코 여왕)를 두 번째 황후로 맞았던 것이다. 이로써 왜나라 백제인 왕실에서 이복 남매간의 근친 결혼이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그 당시 배다른 남매간의 결혼은 흔한 일이므로 가시키야히메 공주로서도 타당한 과정을 밟아 결혼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것이 오늘날 일본 사가들의 시각이다.

‘일본서기’는 스이코여왕이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즉 “용모가 아름답고, 예의 바르고 절도 있는 여성이었다(姿色端麗, 進止軌制)”고 지적하고 있다.

 

이와 같이 아름답고 총명한 공주였던 가시키야히메는 그녀 나이 18세 때 상처한 이복오빠 비다쓰천황과 결혼했던 것이다.

스이코여왕과 비다쓰천황의 사이는 원만했던 것 같다. 물론 비다쓰천황은 가시키야히메황후 이외에도 여러 왕비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시키야히메황후가 2남5녀로 가장 많은 자녀를 낳았다. 이렇듯 둘의 금실이 좋았으나 비다쓰천황은 서기 585년에 48세로 죽고 만다. 그때 황후의 나이 32세였다. 32세에 미모인 과부는 남편과 사별한 후 즉각 거센 풍우에 휘말리게 됐다. 죽은 남편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자들이 피비린내나는 다툼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비다쓰천황이 승하하자 장례가 거행됐다. 일단 시신을 모시는 빈궁(殯宮, 모가리노미야)이 마련됐다. 왕릉을 마련하고 매장을 하기 전까지 그 당시 본국 백제에서는 3년간 빈궁에 시신을 가매장하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의 ‘백제의 대빈(百濟の 大殯, 구다라노 오오모가리)’이라고 일컫는 3년 국장(國葬)이었다.

 


왕위 둘러싼 암투

비다쓰천황의 시신은 히로세(廣瀨) 땅에 마련한 빈궁에 가매장됐다. 히로세는 지금의 나라현 (奈良縣北葛城郡)의 코료쵸(廣陵町)였다.

가시키야히메황후는 이 히로세의 빈궁 안에서 승하한 비다쓰천황의 명복을 빌면서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조정 신하들도 빈궁에 찾아와서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조상했다.

 

이때 왕실 쪽에서 볼멘 소리를 하는 왕자가 한 명 있었다. 아나호베(穴穗部)왕자였다. 그는 이렇게 고함치면서 다녔다.

“어째서 죽은 왕의 빈소에만 모여들고 살아 있는 왕인 나에게는 얼씬도 안 하느냐?”

혈수부왕자, 즉 아나호베는 스스로가 왕위 계승권자라고 떠벌리고 다니면서 모두들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울분을 터뜨렸던 것이다.

 

자칭 왕위 계승권자인 아나호베왕자는 킨메이천황과 그의 세 번째 왕비인 오아네키미(小姉君) 사이에 태어난 왕자였다. 즉 가시키야히메황후의 이복오라비였다. 그는 행동이 난폭하고 경솔한 데다 엉뚱한 짓을 잘하는 인물이었다.

이 무렵 아나호베왕자는 모노노베노 모리야(物部守屋, 515~587년) 대련(大連, 조정 제2위의 벼슬)과 은밀하게 결탁하고 있었다. 즉 모노노베노의 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 계승을 획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당시 조정의 최고 권력자는 소가노 우마코(蘇我馬子, 550~626년) 대신이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원수지간이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불교(佛敎)를 놓고 대립하고 있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백제 불교의 숭불파였고,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배불파였다.

 

날이 갈수록 궁 안팎은 시끄러웠다. 마치 어두운 먹구름이 낀 폭풍 전야와도 같았다. 미모의 과부 가시 키야히메 황후는 사태가 험악해지는 기미를 이미 알아차린 듯, 빈궁에서 죽은 남편의 명복만 빌 따름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시간을 버는 일이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심각한 대립을 저지시킬 만한 묘수가 달리 없었다. 선왕(先王)의 상중에 감히 누구도 함부로 일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또한 왕위 계승의 결정권은 실제로 황후에게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녀는 빈궁에서 잘도 버텼다. 복상한 지 어느덧 반년이 지났다. 그런 사이에 새로이 왕위를 계승한 것은 아나호베왕자가 아닌 요메이(用明)천황이었다. 즉 그녀의 친오빠가 남편 비다쓰천황의 뒤를 이은 것이었다.

 

요메이천황을 옹립한 것은 최고대신이자 숭불파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가시키야히메 황후가 협의한 결과였다. 백제 불교의 철저한 옹호자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바로 백제 성왕이 준 금동석가상을 자기 집에 모신 소가노 이나메의 아들이었다. 게다가 소가노 우마코는 가시키야히메 황후의 친외삼촌이기도 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친누나가 황후와 요메이천황의 모친이었던 것이다.

5월의 일이었다. 드디어 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여름 5월에, 아나호베왕자는 가시키야히메 황후를 강간하려고 강제로 빈궁에 들어가려고 했다. 이때 비다쓰천황의 총신 미와노 키미사카후(三輪君逆)가 경비병들을 불러 아나호베왕자의 빈궁 침입을 막았다. 왕자는 고함을 지르며 가시키야히메 황후가 혼자서 정숙하게 지키고 있는 빈궁에 침입하려고 했으나, 그는 언쟁 끝에 쫓겨나고야 말았다.”

 

가시키야히메는 미와노 키미사카후로부터 배다른 오라비인 왕자의 난동을 보고받았다. 어느새 왕궁 안팎으로는 “왕위를 노리던 아나호베왕자가 선왕의 황후를 성폭행하려고 빈궁에 난입을 꾀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돌았다.

발끈한 아나호베왕자는 제 앞을 가로막은 미와노 키미사카후를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조정의 배불파(排佛派) 우두머리인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에게 미와노 키미사카후의 살해를 명령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는 부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미와노 키미사카후의 거처를 기습해 결국 죽여버렸다.

드디어 왕궁을 둘러싸고 거센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아나호베왕자는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 일당과 반역을 모의해 마침내 왕권을 뒤집기로 작정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자신의 본거지인 아도(阿都, 현재 오사카의 야오시)에서 반란군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때 요메이천황은 병석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친누이동생인 가시키야히메 황후의 옹립을 받아왕으로 등극했으나 왕위에 오르자마자 곧 병상에 눕게 되었던 것이다.

 


숭불파와 배불파의 대립


 

 

이때에 요메이천황의 어린 아들인 마구간왕자(뒷날의 성덕태자, 574~622년)는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며 병구완에 힘썼다. 마구간이라는 명칭은 그의 어머니(간인공주)가 마굿간 앞에 이르렀을 때 낳았다고 지어진 이름이다. 남달리 효성이 지극한 마구간왕자는 어린 몸에도 밤을 지새우며 부왕이 쾌유하기를 부처님에게 기원하고 분향했다.

 

병상의 요메이천황은 조정 신하들을 머리맡으로 불렀다. 천황은 이때 조신들에게 “짐은 삼보(三寶, 佛·法·僧)에 귀의하려 하오. 경들은 의논하도록 하시오”라고 하며, 숭불(崇佛)할 것을 분명하게 선언했다.

그 순간 신하들은 뚜렷하게 두 패로 갈라서게 되었다. 즉 최고대신 소가노 우마코의 숭불파와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의 배불파로 확실하게 갈라섰다. 두 파는 감히 왕의 병상 앞에서 언쟁을 벌이고 말았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대부(大夫) 벼슬의 나카토미노 카쓰미(中臣勝海) 대부와 함께 숭불파의 거두 소가노 우마코 대신에게 대들었다.

 

“어찌하여 국신(國神, 왜나라의 신)에게 등을 돌리고 이신(異神, 남의 신)을 믿는다는 것이오? 도대체 모를 일이오!”

이들 배불파는 감히 병석의 요메이천황마저 거역하며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목청을 한껏 가라앉히고 타이르듯 말했다. “전하께서 조칙을 내리신 대로 불교를 따르도록 해야 합니다. 다른 계책은 용납하지 못하겠소.”

 

이때 왕의 병상이 있는 침전으로 풍국법사(豊國法師, 도요쿠니노 호후시)가 안내를 받아 들어왔다. 풍국 법사란 한국법사라는 뜻이다. ‘풍국’이라는 말은 고대의 한국을 보배나라(寶國)인 재보국(財寶國)으로 부른 데서 생긴 표현이다(中田祝夫, ‘靈異記’ 講談社 1995).

요메이천황은 병상에서 풍국법사를 맞이해 불교에 귀의하는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서 착착 준비를 했다. 13세의 소년 마구간왕자는 크게 기뻐하면서, 외할아버지이기도 한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손을 덥석 잡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삼보의 묘리(妙理)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설(異說)을 허망되이 생각하면서 사견(邪見)을 함부로 좇고 있습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마구간왕자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 것을 듣자, “전하의 성덕을 입어서 삼보는 이제 크게 일어나 번창할 것입니다”라고 위로했다.

이때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에게 급히 다가가 귀엣말을 전하는 자가 있었다. 오시사카베(押坂部)의 관리인, 그는 허둥대면서 말했다.

“어서 피하세요! 지금 궁궐 밖에서는 군사들이 퇴로를 막기 시작했어요.”

이미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배불파 일당의 반역 모의를 알아차리고, 이들을 체포할 구실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일파는 지체하지 않았다. 그들은 급히 궁궐을 빠져나갔다.

 

삼보에 귀의한 요메이천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승하했다. 서기 587년 4월의 일이었다. 요메이천황이 세상을 떠나니, 아도땅에서 반란군을 모으던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환호성을 올렸다. 그들은 벌써 아나호베왕자가 등극이나 한 듯 기뻐 날뛰기 시작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재빨리 손을 썼다. 그는 조카딸인 가시키야히메 황후에게 달려가 의논했다. 그러자 가시키야히메 황후는 신하들에게 단호하게 명했다.

 

“경들은 서둘러 군사들을 보내 아나호베왕자와 야카베(宅部)왕자를 주살(誅殺)토록 하시오!”

선왕의 상중에 감히 그 황후를 폭행하려고 난동을 피운 아나호베왕자를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나라를 뒤엎고 또 어떤 흉악한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또 야카베왕자는 아나호베왕자의 친동생인데, 그 역시 반란 모의에 깊숙이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처형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황후의 명을 받은 니후테(丹經手) 등 신하들은 아나호베왕자의 궁을 기습했다. 군사 하나가 궁의 누상에 올라가서 활로 아나호베왕자의 어깨를 쏘아 쓰러뜨렸다. 날렵하게 담장을 뛰어내린 또 다른 군사는 도망치던 아나호베왕자를 일거에 창으로 찔러 죽였다. 6월7일 밤이었다. 이튿날인 6월8일에는 야카베왕자가 독살됐다.

 

스스로 천황이 된 황후
 

역의 무리와 결탁한 두 왕자를 단호하게 제거한 가시키야히메 황후는 이제 더 이상 나약한 과부가 아니었다. 남편 비다쓰천황의 시신을 안치한 빈궁에 칩거하고 있고, 친오빠 요메이천황이 또 다른 빈궁에 안치되는 험난한 시기에도 그녀는 허둥대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왕위를 계승하는 과감한 결단이라도 내릴 것인가. 그러나 현명한 여걸은 그렇게 서두르지 않는다. 등 뒤에 강력한 지도자인 외삼촌 소가노 우마코 대신이 딱 버티고 있지 않은가. 더구나 지금 반역의 무리가 아도땅에 진을 치고 한창 군세를 확장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사태를 두고 보며 나라가 안정되는 날을 차분하게 기다리기로 한 것이다. 난중(亂中)의 등극은 결코 달갑지 못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당당하게 정부군을 정비했다. 조정의 대소 관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쓰세베 (泊瀨部) 왕자를 비롯한 여러 왕자들이 자진해서 소가노 우마코 대신 휘하 군열에 가담했다.

마침내 정부군은 반란군을 무찌르는 전쟁터로 진군했다. 이 대열에 어린 마구간왕자도 따라나섰다. 불과 열세살의 홍안 소년이었다. 그는 삼보에 귀의한 채 승하한 아버지 요메이천황을 거역한 모노노베노 모리야를 섬멸시킬 것을 사천왕(四天王)에게 맹세한 것이었다. 마구간왕자는 붉나무(옻나무과)를 꺾어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만들어 높이 받들면서 맹세했다.

“이제 만약 우리가 적과 싸워서 이기게 된다면 반드시 호세(護世) 사천왕을 위하여 절과 탑을 세우겠나이다.”

이때 총사령관인 소가노 우마코 대신도 함께 맹세했다.

“모든 천왕(天王)·대신왕(大神王)께서 우리를 도와 지켜주신다면, 그리하여 이로운 것을 이루게 된다면 실로 모든 천왕과 대신왕을 위하여 절과 탑을 세우며 삼보를 받들겠나이다.”(‘부상략기’)

 


불타오르는 증오


 

 

이렇게 맹세하는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모노노베노 모리야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2년 4개월 전에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 일당은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저택인 석천정사 (石川精舍)에 병력을 몰고 쳐들어갔던 것이다. 그들은 석천정사를 불질렀으며 백제의 미륵석상을 때려부쉈다. 그뿐 아니라 오오노노카(大野丘) 북쪽 언덕에 대신이 몸소 세웠던 불탑마저 파괴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끔찍한 훼불 사건뿐만 아니다. 모노노베노 모리야 일당은 석천정사에서 수도하던 비구니 수도생 젠신(善信) 등 소녀 3명의 법복을 난폭하게 찢었으며, 수도생들을 끌어다가 볼기를 치는 태형마저 자행했던 것이다.

 

이들 모노노베노 모리야 대련은 본래 국신파였다. 그런데 백제 불교가 왜나라에 들어와 재래의 토속 신앙 등 이른바 국신 세력을 압도하게 되자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당연히 불교 포교에 앞장선 소가노 우마코 대신에게 앙심을 품었던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가노 가문도 백제인이라는 사실이다. 소가노 우마코의 고조부는 백제 개로왕 때의 대신이었던 목리만치(木力力力滿致)다. 목리만치 대신은 백제에서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의 군사들에게 살해당하자 개로왕의 왕자인 문주왕(文周王, 475~477년 재위)을 등극시킨 뒤에 왜나라로 건너와서 왜나라 조정에서 조신이 되었던 인물이다. 목리만치는 백제왕족들이 살던 백제강(百濟川) 일대의 이시카와(石川)에 자리를 잡고 성씨를 소가(蘇我)로 바꾸었다고 가토와키 테이지교수는 밝히고 있다.

 

아무튼 소가노 우마코 대신의 정부군은 고전 끝에 승리했다. 모노노베노의 동조자들은 완전히 소탕됐다. 서기 587년 7월의 일이었다.

8월에는 승하한 요메이천황의 후계자로 하쓰세베왕자가 왕위를 계승했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가시키 야히메 황후가 상의해서 결정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하쓰세베왕자, 즉 스?(崇峻, 587~592년 재위) 천황이 등극했다.

어째서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조카딸 가시키야히메 황후를 왕위에 올리지 않았던 것일까. 슬기로운 가시키야히메가 소가노 우마코의 천거를 일단 거절했을 것이라는 게 사가들의 견해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스?천황이 된 하쓰세베왕자는 소가노 우마코와 가시키야히메가 제거한 아나호베왕자와 야카베왕자의 친동생이었다. 하필이면 왜 반역자들의 동생을 옹립한 것일까. 살해당한 아나호베왕자의 생모를 위안하려는 뜻도 담겨 있다는 게 사가들의 견해다. 즉 죽은 두 왕자의 생모인 오아네키미(小姉君)왕비는 아나호베왕자가 반역에 가담했다가 살해당한 것을 매우 비통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오아네키미왕비, 그녀는 실은 가시키야히메 황후의 이모였다. 즉 오아네키미왕비는 기타시히메왕비 (가시키야히메황후의 생모)의 친여동생이었다. 킨메이천황은 두 자매를 나란히 왕후로 삼았던 것이다.

 


꽃피우는 백제불교


 

 

스?천황이 등극한 이후. 왜나라의 백제인 왕실은 백제 불교의 재건에 활기를 띠게 됐다.

이제 배불파가 완전하게 제거되었으므로 백제 불교가 나라의 아스카 땅으로 대거 진출해오게 된 것이다. 스?천황 원년인 서기 587년에 7당가람인 호코지(法興寺)를 세우기 시작했다.

 

왜나라 최초의 대가람 건설을 위해서 이 해에, 백제의 사신과 승려와 사원 건축가들이 대거 아스카땅으로 건너왔다. 그 사실은 ‘일본서기’와 ‘부상략기’ 등에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전하고 있다.

 

“이 해(587년)에 백제국의 사신을 비롯해서 승려 혜총(惠總)·영근(令斤)·혜식(惠 ) 등이 왔으며 부처님 사리도 보내주었다. 백제국의 은솔(恩率) 벼슬의 수신(首信)·덕솔(德率) 개문(蓋文)·나솔(那率) 복부미신(複富味身) 등 사신과 부처님 사리, 승려 영조율사(聆照律師)·영위(令威)·혜중(惠衆)·혜숙(惠宿)· 도엄(道嚴)·영개(令開) 등과, 사찰건축가 태량미태(太良未太)·문가고자(文賈古子), 노반박사 (金盧盤博士)인 장덕(將德)벼슬의 백미순(白味淳)·기와박사(瓦博士)인 마나문노(麻奈文奴)·양귀문(陽貴文)· 능귀문( 貴文)·석마제미(昔麻帝彌), 화공(畵工)인 백가(白加)를 보냈다.”

 

이 사람들이 백제왕부인 아스카땅에 본격적으로 건너옴으로써 호코지(법흥사)라는 7당가람의 건설이 시작된 것이다. 이 대가람의 건설은 장장 8년이 걸려 서기 596년 11월에 준공을 보게 된다.

이 당시에 왜나라에 건너왔던 사신인 은솔 수신은 백제로 귀국하는 길에, 소가노 우마코 대신이 불법을 전수시켜 달라고 간청한 젠신 등 3명의 비구니 수도생을 데리고 백제에 건너갔다. 그후 2년이 지난 589년 3월에 젠신 등이 백제에서 수계(受戒)하고 왜나라 아스카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서기 592년 11월3일이었다. 호코지 건설 공사가 5년째 계속되고 있던 시기에 왜나라 왕실에서는 끔찍한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야 말았다. 소가노 우마코 대신은 스스로가 옹립했던 스?천황을 부하를 시켜 암살한 것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그해 10월4일에 있었다.

10월4일에 신하가 스?천황에게 사냥해온 멧돼지를 바쳤다. 스?천황은 그 멧돼지를 손가락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언제쯤에야 이 멧돼지의 목을 자르듯이, 과인이 미워하는 자의 목을 칠 것이런가.”(‘일본서기’)

 


천황의 암살


 

 

스?천황이 미워하는 자란 다름아닌 소가노 우마코 대신이었다. 스?천황은 그만 저도 모르게 큰 실언을 하고 말았다. 한번 쏟은 물은 다시 물통에 주워담을 수 없는 노릇이다.

이 말이 즉각 소가노 우마코 대신 귀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1월3일에 스?천황은 살해당하고야 말았다.

 

드디어 스? 천황의 이복 여동생, 가시키야히메 황후가 왕위를 계승했다. 왜나라 최초의 여왕인 스이코천황의 등극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백제여인 스이코여왕을 옹립한 것은 소가노 우마코 대신이었다. 스이코여왕이 등극한 것은 서기 592년 12월8일로 그의 나이 39세 때였다.

이듬해인 593년 1월15일에, 스이코여왕은 당시 건설공사중인 아스카(飛鳥)의 호코지에서 목탑(木塔)인 찰주(刹柱)를 세우는 법요를 거행했다. 이때 찰주의 기초 속에는 부처님 사리함을 모셨다.

 

이 법요 때 소가노 우마코 대신과 만조백관은 백제옷(百濟服)을 입고 도열했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고 ‘부상략기’는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에는 “만조백관은 백제옷(百濟服)을 입고 도열했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기뻐했다”는 대목이 빠져 있다.

필자는 ‘부상략기’에서 이 대목을 처음 대했을 때 한동안 눈을 의심했다. 그 다음 순간 뜨거운 것을 가슴에 느꼈다. 백제여인 스이코여왕의 등극은 대신 이하 만조백관이 백제옷을 입은 가운데 백제 왕족의 터전인 나라땅 도유라궁(豊浦宮)에서 거행되었으며, 곧 해가 바뀌자 이번에는 아스카의 호코지 건설 공사장에서 백제국을 상징하는 목탑인 찰주를 세웠던 것이다.

이 감동이 넘치는 시간부터 일본 땅에는 ‘아스카 문화 시대’가 개막되었다. 백제 불교를 바탕으로 하는 스이코여왕의 눈부신 새 시대가 열린다

 

 

백제 무령왕과 게이타이천황은 형제였다

형 무령왕과 아우 게이타이천황이 각각 한반도 백제와 일본열도의 왜를 지배한 이후 그 후손들은 서로 교류하면서 양국의 문화를 꽃피웠다. 그리하여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나당연합군에 의해 위기에 처하자 왜의 텐치천황은 구원병까지 보낸 것이다.


 
의자왕과 죠메이천황은 숙질간
 

난 호에서 필자는 왜나라의 죠메이천황(舒明皇, 629~641년 재위)이 백제 의자왕(義慈王, 641~660년 재위)의 선대(先代) 혈족임을 지적했다. 말하자면 죠메이천황이 백제 왕족이라는 사실인데, 그 근거로 일본의 고대 통사인 ‘부상략기’(扶桑略記, 13세기경의 왕조 불교사) 기록을 예시했었다.

 

우선 ‘부상략기’(죠메이천황 11년, 12년 조)에는 죠메이천황이 서기 641년 10월9일 백제궁(百濟宮)에서 서거한 것으로 나타난다. 죠메이 천황 서거와 관련해 일본의 관찬 역사책인 ‘일본서기’(720년 편찬)도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죠메이천황은 백제강(百濟川) 옆에 백제대사(百濟大寺)를 지었고, 구중탑(九重塔)을 세웠으며, 640년 10월에는 백제궁을 지어 이사했고, 이듬해인 641년 10월9일에 백제궁에서 붕어했다.”

그런데 ‘부상략기’에는 아주 묘한 말이 나온다.

“642년 2월에 백제 사신이 내조(來朝)하여 선제(先帝)의 상(喪)을 조문했다.”(皇極王皇 원년 2월 조).

서기 642년은 백제 의자왕이 왕위에 오른 지 2년째 되던 해다. 의자왕은 전 해인 641년 3월에 아버지인 무왕(武王, 600~641년 재위)이 승하하자 후사를 이었던 것이다.

 

죠메이천황이 서거했을 때 왜왕실에서는 즉각 본국인 백제로 사신을 보내는 한편으로, 죠메이천황의 국장(國葬)은‘백제(百濟)의 대빈(大殯)’이라는 백제왕실의 장례법에 따라 3년상으로 모시게 되었다.

이 슬픈 부보가 왜의 사신에 의해 백제왕실에 알려진 것은 죠메이천황이 서거한 지 약 2개월 뒤였으며, 이에 의자왕은 황급히 조문사를 왜로 보낸다. 조문사가 백제를 떠나 뱃길로 약 2개월이 걸리는 왜국의 왕도(王都) 나라(奈良)의 백제강 옆 백제궁에 당도한 것은 642년 2월의 일이었다. 그 당시 한일간 항로는 선박편으로 왕복 약 4개월이 소요되었다.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백제의 의자왕과 왜나라 백제궁의 죠메이천황은 어떤 관계였던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두 사람 사이는 숙질(叔姪)간이다. 서로는 똑같은 백제 왕실의 혈족이면서 의자왕은 죠메이천황의 조카다. 즉 죠메이천황은 의자왕의 아저씨로 ‘부상략기’에 기록된 ‘선제(先帝)’인 것이다.

 

일본에서 건너온 백제 동성왕
 

기서 먼저 백제 의자왕과 왜나라 죠메이천황이 숙질간이 되는 계보를 자세하게 밝혀 두는 게 순서일 것 같다. 이 계보는 시간을 한참 거슬러올라가 백제 제21대 개로왕(蓋鹵王, 455~475년 재위)대에서 시작한다.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아 살해된 개로왕에게는 두 왕자가 있었다. 장남이 개로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문주왕(文周王, 475~477년 재위)이며, 차남은 곤지왕자(昆支王子)였다.

 

곤지왕자는 그의 장남 모대왕자(牟大王子)와 함께 일찍부터 왜국의 백제왕부에 건너가 살고 있었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왜나라의 백제왕부가 오우진천황(應神天皇, 4세기 말경~5세기 초엽) 때부터 이미 나라(奈良)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우진천황 때에 백제 근초고왕의 아들인 아직기(阿直岐)왕자, 오경박사 왕인(王仁) 등이 왜왕실에 건너가서 왕자들을 가르치는 스승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백제 본국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연이어 발생한다. 제22대 왕인 문주왕이 재위 2년 만에 살해되었고, 이어서 문주왕의 장남인 삼근왕(三斤王, 477~479년 재위)이 제23대 왕으로 등극하는데, 그마저 재위 2년 만에 후사도 남기지 못한 채 서거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되자 왜 왕실에 살고 있던 문주왕의 생질이자 삼근왕과는 사촌간인 모대왕자(牟大王子)가 백제 제24대 왕인 동성왕(東成王, 479~501년 재위)으로 추대된다. 이에는 모대왕자의 아버지인 곤지왕자(문주왕의 동생)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추정된다. 즉 곤지왕자는 장남인 모대왕자를 백제 왕도인 웅진(熊津, 곰나루, 지금의 공주)으로 보내 백제 본국의 왕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곤지왕자는 아들인 동성왕이 서거한 후에는 그의 둘째 손자인 사마(斯麻, 동성왕의 차남)를 다시 백제 본국에 보내 동성왕의 후사를 잇게 했다. 바로 그가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武寧王, 501~523년 재위)이다. 또한 곤지왕자는 셋째 손자인 오호도(男大迹, 동성왕의 삼남)를 왜 왕실의 천황으로 앉혔는데, 바로 게이타이천황(繼天皇, 500~531년 재위)이다.

 

무령왕과 게이타이천왕은 친형제
 

령왕과 게이타이천황이 친형제임은 고대 금석문이 입증하고 있다. 무령왕이 서기 503년에 아우인 게이타이천황을 위해 왜나라로 보낸 청동거울인‘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이 그것이다. 이 청동거울이 ‘인물화상경’이라 불리는 것은 왕이며 왕족 등 말을 타고 있는 9명의 인물이 거울에 양각돼 있기 때문인데, 백제의 기마문화적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무령왕이 아우에게 보내주려고 만든 ‘인물화상경’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돼 도쿄국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일본에서는 이 ‘인물화상경’을 처음에는 ‘스다하치만신사화상경(隅田幡神社畵像鏡)’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한동안 우에노의 국립박물관 전시장에 내놓고 전시하더니 근자에 와서는 전시대에서 찾아볼 수 없다. 박물관 어디엔가 비장해 놓은 것 같다.

 

아무튼 ‘인물화상경’은 지름이 19.8cm인 둥근 청동제 거울인데, 바깥 둘레를 따라 빙 돌아가면서 다음과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癸未年八月日十, 大王年, 男弟王, 在意柴沙加宮時, 斯麻, 念長壽, 遺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銅二百旱, 作此鏡.’

이상과 같은 한자어 명문은 현대의 일본 역사학계가 판독하고 있는 글자들이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서기 503년 8월10일, 대왕(백제 무령왕)시대, 남동생인 왕(게이타이천황, 오호도)이 오시사카궁(忍坂宮)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의 이름)께서 아우의 장수를 염원하여 보내주시는 것이노라. 개중비직과 예인 금주리 등 두 사람을 파견하며, 최고급 구리쇠 200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도다.”

 

이 명문은 무령왕이 친동생 게이타이천황이 건강하게 오래도록 잘 살라는 염원을 담은 것으로 형제간의 뜨거운 우애가 물씬 느껴진다.

그런데 일본학자들 중에는 이 명문에 대해 엉뚱한 주장들을 펼치면서 본말을 전도하는 이도 있다. 대표적인 게 명문에 나타난 계미(癸未)년이 서기 몇 년을 가리키느냐 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서기 503년의 계미년을 서기 433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水野裕說), 서기 263년 설을 내세우는 사람도 있다.

 

서기 263년 설을 주장한 사람은 다카하시 겐지(高橋健自, 1871~1929년) 박사였다. 그는 청동제 거울을 와카야마현 하시모토시(橋本市)에 있는 스다하치만신사(隅田八幡神社)라는 사당에서 찾아낸 당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이 거울을 찾아낸 후 1914년에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일본 사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서기 263년 설은 오늘날 일본학계에서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묵살당하고 있다.

 

또 후쿠야마 토시오(福山敏男) 교수는 필자처럼 서기 503년 설을 지지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가 명문의 ‘남제왕(男弟王)’은 게이타이천황이라고 말하면서도 그의 형인 ‘대왕(大王)’은 백제의 무령왕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왜나라의 닌켄(仁賢)천황이라고 엉뚱하게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무령왕과 게이타이천황이 친형제 관계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무령왕의 이름(諱)이 ‘사마(斯麻)’라는 것은 일본의 어느 역사학자도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다. 그것을 입증해주는 소중한 기록인 금석문이 있다. 1971년 7월8일에 발굴된 무령왕릉(충남 공주 소재)의 묘지석(墓誌石)이 바로 그것이다. 묘지석에는 무령왕의 휘가 ‘사마’라고 새겨져 있어 확고하게 입증됐던 것이다.

여기서‘일본서기’의 잘못된 기록도 밝혀둘 필요가 있다. ‘일본서기’ 461년 조에는 “백제 무령왕은 개로왕의 동생 곤지왕자의 아들이다. 곤지왕자가 새부인과 함께 백제로부터 왜나라로 가던 중 쓰쿠시(筑紫)의 카카라노시마(各羅島)라는 섬에서 태어난 아기가 백제 무령왕이다”라고 씌어 있다.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무령왕은 곤지왕자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다.(‘三國史記’)

 

백제왕가와 왜왕가의 계보
 

무튼 곤지왕자의 후손인 무령왕과 게이타이천황의 혈연관계를 밝힌 문헌과 고고학적 유물을 근거로 백제왕족과 왜왕들의 계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백제 본국에서는 곤지왕자의 아들이자 문주왕의 조카인 동성왕(제24대)→동성왕의 차남인 무령왕(제25대)→무령왕의 왕자인 성왕(제26대)→성왕의 장남인 위덕왕(제27대)과 차남인 혜왕(제28대)→혜왕의 장남인 법왕(제29대)→법왕의 왕자인 무왕(제30대)→무왕의 장남인 의자왕(제31대)으로 법통이 이어진다.

 

백제왕부인 왜나라 쪽에서는 동성왕의 삼남인 게이타이천황→게이타이천황의 장남인 안칸천황, 차남인 센카천황, 또 다른 아들인 킨메이천황→킨메이천황의 형제 자매들인 비다쓰천황, 요우메이천황, 스천황, 스이코천황→(한 대를 건너뛰고) 비다쓰천황의 손자인 죠메이천황→죠메이천황의 태자인 텐치천황으로 혈맥이 이어진다.

 

한일 양국의 왕 계보에 따르면 동성왕의 7대손이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되고, 동성왕의 6대손이 왜나라의 죠메이천황이 된다. 죠메이천황은 ‘신동아’ 99년 10월호에서 밝혔다시피 나라의 백제강가에다 백제궁을 지었던 사람인데, 그가 바로 의자왕의 아저씨뻘이 되는 것이다. 또 죠메이천황의 아들인 텐치천황은 당연히 의자왕과 같은 항렬의 형제간이 된다.

그렇기에 의자왕의 백제가 망하게 되자, 텐치천황은 그 당시 왜 왕실에서 살고 있던 의자왕의 왕자인 부여풍(扶餘豊)을 본국 백제로 보내 왕위를 계승하도록 지원했다. ‘일본서기’에서는 서기 661년 5월 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5월에 대장군 히라부(比邏夫) 등이 선사(船師,선장) 170척을 이끌고, 풍장(豊璋,부여풍 왕자) 등을 백제국에 보내고, 조칙으로서 풍장 등으로 하여금 그 위(位)를 계승시켰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본서기’가 기록한 시점보다 약 반 년이 이른 시기인 ‘서기 660년 말에 풍장 등이 백제에 당도했다’고 아오키 가즈오(靑木和未) 교수는 ‘일본서기’(岩波書店, 1979)의 본문 주석에서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 정사인 ‘삼국사기’도 백제본기 660년 조에 “왜국에 있다가 온 옛왕자 부여풍을 맞이해서 왕으로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에는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망할 당시 백제와 왜왕실의 깊은 유대 관계를 묘사하는 글귀도 적지 않다.

“(부여풍은) 고구려와 왜국에 사자(使者)를 보내 원병을 청했다.”(백제본기)

“왜병의 배 400척이 백강(白江)에서 불탔고, 왕인 부여풍은 탈출해서 피신했으나 행방을 알 길이 없으며, 고구려로 도망쳤다는 소문이 있다.”(백제본기)

“의자왕의 다른 왕자인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들의 부하와 더불어 왜군과 함께 항복했다.”(백제본기)

이런 기록들은 백제가 공격을 당할 당시 왜왕실에서 모국의 패망을 막기 위해 왜병과 군선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일 양국의 실권자, 곤지왕자
 

편 동성왕의 아들들인 무령왕과 게이타이 천황을 각각 권력의 일인자로 등극시킨 할아버지 곤지왕자야말로 그 당시 한일 양국에 걸쳐 막강한 왕가 세력을 형성한, 매우 중요한 인물이라 할 것이다. 곤지왕자는 그 후에도 계속 왜 왕실에서만 살다가 가와치(河內) 땅에서 서거하게 된다.

 

지금 오사카부(大阪府)의 하비키노시(羽曳野市)가 그 옛날의 가와치 터전인데, 이곳에는 유명한 ‘곤지왕신사(昆支王神社)’가 있다. 이 신사는 ‘아스카베신사(飛鳥戶神社)’라고도 불리는데, 곤지왕자를 제신(祭神)으로 모시고 해마다 제사지내고 있는 사당이다. 이 터전에 대해 옛 문헌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유랴쿠조(雄略朝)에 백제로부터 건너온 백제왕족인 곤지왕은 ‘아스카베노미야쓰코(飛鳥戶造)’의 조상으로서 이 터전을 본거지로 삼았었다. 조선의 ‘삼국사기’의 고증에 의하면 그가 건너온 것은 유랴쿠조보다 좀더 거슬러 올라가 인교조(允恭朝) 무렵(5세기 초)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조상신(백제)을 제사 모시는 씨신(氏神)으로서 아스카베신사(飛鳥戶神社)를 창사(創社)했다. 또한 씨사(氏寺)로는 아스카산 죠린지(飛鳥山 常林寺)라는 사찰을 산의 남쪽 기슭에 조영하고 있었다.”(‘古田文書’).

 

이와 같이 곤지왕자는 생전에 왜 왕실에서 백제왕가의 조상신 제사를 도맡았으며, 죽어서는 왜나라 백제왕부의 제신이 되었던 것이다. 아스카베신사는 곤지왕자의 아들 중 하나인 비유왕(比有王)도 중세 말까지 제사지냈다고 한다.

현재 곤지왕신사가 자리잡고 있는 일대는 곤지왕자의 후손들인 아스카베씨(飛鳥戶氏) 후나씨(船氏) 등 백제인 왕족들이 살고 있던 큰 고장이다. 그렇기에 이 일대에는 백제인 고분 수천 기가 있었고, 1999년 현재까지도 588기의 옛무덤들이 그 옛날의 백제인 자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가와치 아스카(河內飛鳥)’라고 일컬어지는 이 고장에서 주목받는 고분지대(古墳地帶)로는 우네비산(畝傍山) 서쪽 기슭에 퍼져 있는 고분들과 니이자와천총(新澤千塚)을 들 수 있다.

특히 1960년 초 ‘니이자와 126호분’에서 발굴된 ‘방제형 금관(方製形金冠)’은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왜냐하면 이 방제형금관과 똑같은 것이 1971년 우리나라 무령왕릉의 왕비 머리 부분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령왕릉의 방제금관과 똑같은 금관이 발굴된 ‘니이자와 126호분’의 주인공 역시 모름지기 백제계 왜왕비의 무덤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보인다.

 

그뿐 아니라 이 무덤에서는 무령왕릉의 왕비 발 끝에서 나온 것과 똑같은 형태의 ‘청동 다리미’도 출토된 바 있어서, 니이자와 126호분의 장법(葬法)이 모국(母國) 백제왕가의 장법과 동일하다는 것을 웅변해주는 것 같다. 실제로 니이자와천총에서 발굴된 무덤들은 대부분 한반도 양식인 횡혈식(橫穴式) 고분이라는 공통점도 보이고 있다.

 

한편, 니이자와천총 바로 근처에 천황릉(天皇陵)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다음의 보고서를 보자.

“니이자와천총에 들어서면 곧 눈에 띄는 것은 왼쪽으로 보이는 센카천황릉(宣化天皇陵)이다 … 센카천황릉 앞에 서서 서쪽의 도로 양쪽으로 퍼지는 야트막한 구릉들을 바라보자면, 참으로 많은 고분들이 겹칠 듯이 있다.”(奈良縣 敎育委員會‘新澤千塚一二六號墳’)

이 보고서에서 주목해볼 것은 센카천황(535~539년 재위)이다. 무령왕의 동생인 게이타이천황의 차남이 다름아닌 센카천황이기 때문이다. 백제 무령왕릉의 유물과 너무나 흡사한 것이 출토된 니이자와 126호분. 그리고 니이자와 고분에서 바라보이는 센카천황릉은 무령왕 조카의 무덤이고…. 아무튼 니이자와천총은 백제인 왜나라 왕부의 존재를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물인 것이다.

 

닌토쿠천황이 천도한 백제군 터전 '난파진'
 

런데 니이자와천총의 고분들은 언제, 누가 조성한 것일까. 카도와키 테이지(門脇禎二, 1925년~ ) 교수는 전체적으로 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형성된 후 6세기 전반기에 이르면서 쇠퇴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飛鳥’, 1995).

그러므로 니이자와천총은 백제인들이 북규슈(北九州)로부터 일본 내해(內海)인 세코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거쳐 본토인 오사카(大阪)지방으로 상륙해 교두보를 탄탄하게 이루게 된 시기에 조성됐을 것이다.

 

그 당시 오사카 나루터는 그 이름이 나니와쓰(難彼津)였고, 이 나루터의 명칭은 백제인 왕인 박사가 서기 405년에 붙인 것으로 필자는 보고 있다(拙論‘現代文學’, 1977. 2월호). 이노우에 마사오(井上正雄)씨는 일찍이 1922년에 “나니와쓰는 그 무렵 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항구였으며, 이 나니와쓰라는 항구를 본격적으로 건설한 것은 백제인들이었다”고 옛 문헌을 인용해 밝힌 바 있다(‘大阪府全志’, 淸文堂, 1922). 참고로 나니와쓰로부터 동북쪽 인접한 곳에 바로 백제인들의 무덤인 니이자와천총이 자리잡고 있다.

 

또 나니와쓰, 즉 난파진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본국 백제로부터 고대 왜나라 본토에 진입하는 데 가장 좋은 항구였다. 본국으로부터 인력과 물자를 수월하게 지원받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난파진 일대가 백제왕부의 새 터전이 되었다고 본다.

그렇기에 오사카 일대의 옛날 명칭은 ‘백제군(百濟郡)’이었다. 마치 영국 브리타니아의 가장 큰 도시였던 요크(York) 출신들이 대서양(大西洋)을 건너가 아메리카 땅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새로운 항구를 뉴욕(New York)이라고 이름붙였듯이, 고대 백제인들도 험난한 파도를 헤치고 일본 열도에 건너가서 이룬 새로운 식민지 항구를 난파진(나니와쓰)으로 명명하고 이 일대에 백제군(百濟郡)이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했던 것이다.

 

이 백제군이야말로 5세기 초에 가와치왕조(河內王朝)를 시작한 닌토쿠천황(仁德王皇)의 본거지였다. 백제인 닌토쿠천황은 부왕인 오우진(應神)천황을 계승해서 왕위에 등극한 후 곧 왕궁을 나라(奈良) 땅으로부터 지금의 오사카 땅인 난파진으로 천도했던 것이다. 그래서 난파진은 가와치 땅을 포함해 닌토쿠천황의 이른바 ‘가와치 왕조’의 번영의 터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노우에 마사오는 그의 저명한 고대백제 지정학사(地政學史) 격인 ‘오사카부전지’(大阪府全志, 1922)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백제군(百濟郡)에는 그 옛날 남백제촌(南百濟村)과 북백제촌(北百濟村)이 설치돼 있었다. 남백제촌에는 응합촌(鷹合村), 사자촌(砂子村), 중야촌(中野村)이라고 하는 대단위 행정구역들이 있었다. 응합촌의 경우는 닌토쿠천황 43년(5세기 중엽) 9월에, 아이고(阿耳古)가 잡은 매(鷹)를 백제인 주군(酒君, 사케노키미)에게 사냥에 쓸 매로 길들여달라고 맡기면서 닌토쿠천황이 이 터전에다 응감부(鷹甘部)라는 관청을 설치시킨 데서 생겨난 지명이다. 그 당시 닌토쿠천황의 다카쓰궁(高津宮)은 난파진에 있었으며, 이 고장과 거리가 가까웠다. 백제의 주군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 고장에서 장례를 지냈으며, 닌토쿠천황은 그에게 ‘응견신(鷹見神)’이라는 시호(諡號)까지 내렸던 것이다.

 

북백제촌에는 금재가촌(今在家村)을 비롯해서 신재가촌(新在家村), 금림촌(今林村) 등 큰 행정구역이 속해 있었다. 또한 천왕사촌(天王寺村)은 본래 백제군에 속한 큰 행정구역이었다. 그 밖에도 석천백제촌(石川百濟村)과 백제대정(百濟大井) 등의 지역이 난파진에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주군과 닌토쿠천황의 교유는 ‘일본서기’에도 기록돼 있다.

 

“닌토쿠천황 43년 9월1일에 아이고가 이상한 새를 잡아다 천황에게 바치면서, ‘저는 항상 그물을 치고 새를 잡는데, 전에는 이런 새를 잡아본 일이 없습니다. 신기하기에 올리겠나이다’라고 말했다. 천황은 주군(酒君)을 불러서 ‘이것이 무슨 새냐’고 물었다. 주군이 대답하기를 ‘백제에는 이런 종류의 새가 많습니다. 잘 길들이면 사람을 곧잘 따릅니다. 또한 빠르게 날아다니면서 여러 가지 새도 잡아옵니다’ 하고 말했다. 이것은 지금의 매다. 왕은 매를 주군에게 주어서 길들이게 했다. 주군은 얼마 안 되어 길들였다. 그는 가죽끈을 매의 발에 묶고 작은 방울을 꼬리에 달아, 팔뚝에 얹어 천황에게 바쳤다. 천황은 이날 모즈노(百舌鳥野)에 납시어 사냥을 했다. 그때 암꿩이 많이 날았다. 그래서 매를 풀어서 잡으니 금세 수십 마리나 잡게 되었다. 이 달 처음으로 응감부(鷹甘部)라는 부서를 설치했다.”

 

닌토쿠천황이 총애했던 주군(酒君)은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백제에서 건너와서 가와치조정에 근무했던 근신(近臣)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타계하자 천황이 애도하며 ‘응견신’이라는 시호를 내렸던 것이다. 현재 가와치에는 큼직한 주군의 비석이 서 있어서, 그 옛날의 발자취를 입증해주고 있다.

 

최초의 백제인 지배자 오우진천황과 칠지도
 

렇게 고대백제가 본격적으로 왜나라를 경영한 것은 난파진의 가와치왕조 때부터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로 입증된다. 여기서 난파진의 백제군을 개척한 닌토쿠천황과 그의 아버지이자 왜나라 최초의 백제인 지배자인 오우진천황(應神, 4세기경)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먼저 오우진천황이 모국 백제의 후왕(侯王)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은 한일 사학계 초미의 관심사인 칠지도(七支刀)에 나타난다. 일본책 ‘고사기’(712년 편찬)의 오우진천황기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아직기 선생을 통해 암말과 수말 한 필씩을 바쳤다(貢上). 또한 횡도(橫刀) 및 큰 거울(大鏡)도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또 ‘일본서기’(720년 편찬)에는 진구우황후(神功皇后, 오우진천황의 생모) 52년조에 “칠지도(七枝刀) 한 자루, 칠자경(七子鏡) 한 개(一面) 및 여러 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쳐(獻)왔다”고 돼 있다.

 

이와 같이 칠지도 등을 백제 왕이 일본 천황에게 ‘갖다 바쳤다’는 투의 기사는 뒷날 ‘고사기’와 ‘일본서기’가 조작될 당시에 써넣은 것이라는 데는 일본 사학자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학자 오오노 스즈무(大野晋, 1919년~)의 연구논문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고사기’에는 백제 근초고왕이 아직기 선생을 통해서 일본 국왕에게 횡도(橫刀)와 큰 거울(大鏡)을 바쳤다고 돼 있다. ‘일본서기’에는 근초고왕이 ‘칠지도(七枝刀)’와 ‘칠자경(七子鏡)’을 바쳤다고 돼 있다. 이 기사는 서기 367년으로 추정이 되는 곳에 씌어 있다.

 

그런데 현재 보면 야마토(大和, 奈良縣 天理市)의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칠지도(七支刀)가 있고, 이 칼에 ‘태화(泰和) 4년(369)에 헌상(獻上)한다’는 대목이 있다. 지(支)는 옛날에 지(枝)와 상통했던 글자이므로, 고사기에 등장하는 횡도(橫刀)나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칠지도(七枝刀)나 이소노카미신궁의 칠지도(七支刀)는 똑같은 칼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까닭에 아직기 선생은 369년에 이 칼을 가지고 왕실에 건너왔다고 하겠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아직기 선생은 경전(經典)에 능통했고 황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도래하여 정주(定住)한 것은 태화 4년이라고 하는 칠지도(七支刀)에 새겨진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서기 369년경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오오노 교수의 주장에 필자도 대체로 공감한다. 단 그의 논술에서 백제왕이 보낸 칠지도를 왜왕에게 ‘헌상(獻上)한다’는 대목은 이 칼에 새겨진 명문을 180도 뒤엎고 있다고 하겠다.

 

헌상인가, 하사인가
 

러면 지금부터 1630년 전에 백제에서 제조된 칠지도의 앞면과 뒷면에 새겨진 한자어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칼 앞면의 한자 명문은 다음과 같다. ‘泰和四年五月十一日丙午正陽 造百練鐵 七支刀 以酸百兵 宜供供供候王 □□□□作’

칼의 뒷면에 새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

‘先世以來夫有此刀 百滋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

이상과 같은 한자어 명문은, 녹이 슨 칠지도의 글자(금상감)들을 일본 학자들이 다각적으로 판독해낸 것이다. 이 한자어 명문을 필자가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앞면) ‘서기369년(태화 4년) 음력 5월16일 병오날 대낮에 무수히 거듭 단금질한 강철로 이 칠지도를 만들었노라. 모든 적병을 물리칠 수 있도록 후왕에게 보내주는도다.’

(뒷면) ‘선대 이후에 아직 볼 수 없었던 이 칼을 백제왕 및 귀수세자는 성스러운 말씀으로서 왜왕을 위해서 만들어주는 것이니, 이 칼을 후세까지 길이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

 

이와 같이 당시 백제 근초고왕과 귀수세자는 전대미문의 훌륭한 칠지도를 만들어서 왜에 있는 백제왕국의 후왕인 오우진천황에게 보내준 것이다. 그 칼로 왜왕은 모든 적군을 무찔러서 백제 식민지의 보전에 힘쓰며 번창할 것을 어명(御命)한 것이었다.

 

이 칠지도의 명문은 누가 읽더라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전하는 하행문(下行文)임을 알 수 있다. 즉 본국 백제의 근초고왕과 귀수세자(貴須世子, 뒷날의 근구수왕, 375~384년 재위)가 왜의 오우진천황과 그의 후세를 축복하며 보낸 보도(寶刀)인 것이다. 실제로 당시 왜국은 백제인 후왕이 거느리던 백제의 터전이었음은 이미 증명된 바 있다.

 

말하자면 칠지도의 명문은 한일고대사에 있어서 백제가 일본을 백제왕부로서 경영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고고학적 증거품인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일본 사학자들이 하사설을 뒤엎으려고 상납한 것이라는 헌상설을 내세우는 등 엉뚱한 주장을 하므로, 그들의 소론(所論)에 대해 부득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일본사사전’(日本史辭典, 高柳光壽·竹內理三編, 角川書店, 1976)의 칠지도(七支刀) 항목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철검. 나라 텐리시(天理市)의 이소노카미신궁의 신역(神域)에서 나옴. 이 칠지도(七支刀)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52년조 기사에 보이는 칠지도(七枝刀)에 해당된다고 여겨지고 있다. 전체 길이 약 75cm. 칼몸(刀身)의 좌우에 각 3개씩 양날의 가지칼(枝刀)을 서로 번갈아 뻗쳐 나오게 만든 생김새이며 실용적인 칼은 아니다. 칼몸체(刀身)의 양면에는 금으로 상감된 60여 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이 칠지도는 그 당시 동(東)아시아 각국의 이해와 깊게 관련되어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까지 정설(定說)이 없다. 서기 369년에 백제왕이 왜왕(倭王)을 위하여 만들었다고 이해되며, 백제에서 온 헌상품(獻上品)으로 보는 설이 있고,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下賜)한 물건이라는 설, 그 밖에 동진(東晋)에서 백제왕을 통해 왜왕에게 하사한 물건이라는 설이 있으며, 명문(銘文)을 ‘고사기(古事記)’ 및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왜왕에게 바쳤다(貢上)는 기사와 단순하게 연결짓는 것은 비판을 받고 있다. 국보.”

 

먼저 교토대학(京都大學)의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1927년~) 교수의 하사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우에다는 칠지도를 연구 검토하느라 3번이나 이소노카미신궁에 찾아가서 칠지도를 만지면서 칼 앞뒷면의 명문을 조사한 학자다. 우에다는 그의 저서(‘倭國의 世界’, 1976)에서 상세하게 백제왕이 일본왕에게 하사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칠지도에 새겨진 60여 글자 중에 판독(判讀)이 곤란한 개소(個所)도 있어서, 전문(全文)을 완벽하게 읽을 수는 없다. 지금까지 고심해서 해독(解讀)해 밝혀진 것을 따르자면 칼의 명문 그 어디에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했다고 증명할 수 있는 글귀는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문제가 있는 ‘일본서기’의 신공황후 52년조 기사를 빙자하여 ‘헌상설’이 별로 의심도 받지 않은 채 지금까지 주장돼왔다. 명문 해석은 우선 명문 그 자체에 의거해야만 한다. ‘일본서기’는 귀중한 고전(古典)이기는 하되,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에 완성된 ‘일본서기’에 의거해 칠지도의 명문을 해독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본다.

 

칠지도의 명문에는 백제왕이 ‘왜왕을 위해서 만들어준 것이며, 이 칼을 후세까지 길이 잘 전해서 보이도록 하라(故爲倭王旨造 傳示後世)’고 되어 있으며, 이 칼을 만든 주체(主體)도 백제왕이다. 그뿐 아니라 칠지도처럼 생긴 칼이 중국에서 단 한 자루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동진(東晋)을 칠지도의 주체(主體)로 보려고 하는 설(說)의 허점이다.

 

반면, 한국에는 칠지도와 유사한 철기가 있다. 내가 실제로 본 것은 1962년에 경북 칠곡군 인동면 황상동 1호 고분에서 출토된 길이 24cm의 철기와, 1971년 부산시 동래구 오륜대유적에서 발굴된 길이 21cm 및 14.3cm의 이형(異形) 철기다. 이것들도 칠지도(七支刀)와 마찬가지로 칼의 좌우 양쪽에 가지(枝)가 3개씩 나와 있다. 경남 함양 상백리의 고분군에서도 그런 것이 출토되었는데 의장용(儀仗用)이라고 한다.

 

그 당시 백제 세력은 한층 막강한 국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위치에 있던 백제왕이 왜왕에게 복속(服屬)해서 칠지도를 헌상(獻上)했다고 하는 것은 백제 쪽 정세를 살필 때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다. 더구나 명문 그 자체에도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헌상했다고 확증할 만한 글귀는 없다. 백제왕이 ‘모든 군사(百兵)를 물리칠 수 있다’고 하는 벽사(僻邪)의 주도(呪刀)를 만들어 왜왕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군사 동맹을 강화시키려는 것이었으리라.

‘고사기’의 오우진천황조(應神天皇條)를 보면, ‘백제국의 근초고왕이 횡도(橫刀) 및 큰 거울(大鏡)을 바쳤다(貢上)’고 써 있다. 그런데 횡도와 큰 거울이 ‘일본서기’에서는 칠지도(七枝刀)와 칠자경(七子鏡)으로 쓰고 있다. 어쩌면 ‘일본서기’ 편찬자들이 칠지도(七支刀)가 실제로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모셔져 있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칠지도(七支刀)에 대한 기사를 쓴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칠지도와 관련해 객관적인 입증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작된 역사서 '일본서기'
 

에다가 지적한 것처럼 ‘일본서기’는 허위 기사가 많이 들어 있어서 매우 악명 높은 역사책이기도 하다. ‘일본서기’에 기재된, 사실과 다른 기사들이 언제 어떻게 씌었는지는 반드시 구명되어야 할 것이다.

아직 일본사학계에서는 ‘일본서기’며 ‘고사기’ 등이 8세기 초에 편찬될 당시부터 허위 기사가 실린 것인지, 아니면 뒷날 원본(原本) 기사들을 붓으로 베끼던 필사(筆寫) 과정에 조작된 것인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단지 지금까지는 기사가 조작되었다는 문헌적 비판이 계속돼왔고, ‘신공황후의 신라침공설’이며 가야 지방의 소위 ‘임나일본부설’이 조작된 기록이라는 몇몇 사실만 확인됐을 뿐이다.

 

필자가 추찰(推察)하건대 ‘일본서기’ 등의 허위 기사들은, 1592년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년)가 무사정권을 집정하던 시기에 조작된 것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왜국이 백제왕국의 지배를 받아온 사실들을 일본 역사 기록에서 뒤집어놓지 않고서는 조선 침략에 대한 위신이 서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백제왕이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한 칠지도(七支刀)를, 칠지도(七枝刀)라고 하면서 공상(貢上)이니, 헌상(獻上) 따위의 글자로 터무니없이 조작하고, ‘신공황후의 신라 침공설’이며 ‘임나일본부설’ 등 사실(史實)이 아닌 한반도 침략설을 들이대는가 하면, 실존하지도 않은 진무천황(神武天皇) 등 9명의 인물들을 왕으로 만들어 일본사 연대를 늘리는 따위의 역사 변조를 주저하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실존하지도 않은 일본왕 조작 기록에 대해서는 나오키 코우지로(直木孝次郞, 1919년~) 교수가 그의 저서(‘日本神話と古代國家’, 1990)에서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천황의 기원(起源)을 가능한 한 오랜 옛날로 만들기 위해서, 있지도 않았던 천황 이름을 조작해 첨가시켰다. 또한 참위설(讖緯說)에 입각해서 스이코여왕 9년(601년)부터 1260년 전(BC 660년)을 진무천황의 즉위년(卽位年)으로 만들었다. 이 제1대 진무천황의 이야기도 천황가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조작한 것이며 사실(史實)로 볼 수 없다.”

이와 같이 현대 일본 사학자들도 ‘일본서기’ 등 역사책들이 조작·변조된 것을 계속해서 논증·비판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군국주의
 

시 칠지도 문제로 돌아가자. 칠지도가 중국 땅 동진(東晋)에서 만들어져 백제왕을 통해 왜왕에게 하사됐다는 설은 쿠리하라 토모노부(栗原朋信)의 주장이다. 그는 칠지도 뒷면 명문에 있는 ‘성음(聖音)’이라는 글자를 ‘성진(聖晋)’이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백제의 어려운 사정을 도와준 왜왕에게 상을 주기 위해서, 백제의 종주국인 동진의 황제 해서공(海西公)이 칠지도를 제작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증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칠지도 명문을 문맥상으로 볼 때 ‘성음(聖音)’을 ‘성진(聖晋)’으로 해독하는 경우, 문장이 전혀 성립되지 못한다. 둘째로 백제가 칠지도를 만들어 왜왕에게 하사하던 전후 시기에 있어서, 백제는 ‘어려운 사정(窮狀)’에 처해 있기는커녕 한반도에서 매우 강력한 국력을 한창 과시하던 시기였다. 이 점은 앞에서 논술한 우에다 마사아키도 지적한 바 있다.

 

우리 나라 역사서인 ‘삼국사기(三國史記)’를 보더라도 백제는 태화(泰和) 4년(서기 369년)에 남하하던 고구려를 맞아 격렬하게 싸우면서 오히려 북진까지 했다. 그뿐 아니라 371년에는 백제군이 고구려 왕도였던 평양에 침입했고, 그 때문에 고구려의 고국원왕(故國原王, 331~371년 재위)이 전사했던 것이다. 따라서 쿠리하라 토모노부의 동진설은 황당무계하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칠지도가 이소노카미신궁에서 발견된 것은 1873년에서 1874년경의 일로 추찰된다. 이 칼을 찾아낸 사람은 스가 마사토모(管政友, 1824~1897년)였다. 역사학자였던 스가가 이소노카미신궁의 관리 책임자인 궁사(宮司)가 된 것은 1873년이었는데, 궁사 직책을 맡은 후 칠지도를 보고(寶庫)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그는 칠지도를 처음 보게 된 확실한 연대는 밝히지 않은 채, 신궁에 부임한 초기에 이 칠지도를 꺼내보니 칼에 녹이 슬어 있어서 스스로 녹을 떼냈더니, 칼 몸체(刀身)에 금상감된 글씨가 나타났다고 발표한 바 있다.

그런데 이 칠지도의 그림을 그대로 본뜬 습본(摺本; 지면을 접어서 펼쳐보도록 한 책)이 나온 것은 1875년 7월15일의 일이다. 당시 니나카와 시키타네(川式胤)가 이 습본을 세상에 펴냈는데, 습본이 공표되자 일본에서는 즉시 큰 화제가 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고대 백제왕이 왜왕을 후왕으로 거느리면서 칠지도를 하사했다는 명문이 습본에 그대로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크게 당황한 것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아닐 수 없었다고 본다. 당시 일본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1822~1877년) 등은 1871년경부터 정한론(征韓論)을 내세워 공공연하게 조선 침략을 획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1872년 11월28일에는 메이지천황(明治天皇, 1867~1912년 재위)의 ‘징병고유(徵兵告諭)’가 포고되었다.

 

‘…예부터의 군제(軍制)를 보완해서 해군과 육군을 설치하며, 전국의 국민은 누구나 남자 20세가 된 자는 병적에 편입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일본 군국주의의 태동이었다. 급기야 1875년 9월에 일본의 군함 운요호(雲揚號)가 서해에 침공해서 강화도 사건을 일으켰던 것이다. 일본 군부는 이듬해인 1876년에는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 1840~1900년)를 특명전권대신으로 내세우고 군함 6척과 400여명의 군인까지 강화도에 보내 위협 시위를 하면서 조선 정부를 강압했고, 끝내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의 조선침략이 노골화하던 시기에 칠지도 습본이 출판되었으니,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무언가 조치를 취하려 하지 않았을까.

 

칠지도에서 없어진 네 글자
 

지도의 명문을 살펴보면, 명문 끝쪽의 4개의 글자가 깎여 있다. 즉 □□□□作으로 되어 있다. 누가 이 4개의 글자를 깎아버린 것인가. 우에다 마사아키 교수는 그 네 글자는 누군가에 의해서 고의(故意)로 깎인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칠지도 칼몸체(刀身)의 앞뒷면에는 금상감으로 60여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아까운 것은 칼의 아래쪽 약 3분의 1 되는 지점이 부러져 있으며, 명문(銘文)도 깎여 떨어진(削落) 부분이 적지 않으며, 고의(故意)로 깎았다고 생각되는 개소(個所)조차 있다.”(‘石上神宮と七支刀’, 1973).

이 칼을 이소노카미신궁에서 처음으로 찾아내고, 녹을 떼내 금상감이 된 명문을 세상에 알린 것은 스가 마사토모였음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그가 칠지도의 녹만 떼어낸 것이 아니고, 네 글자도 깎아버렸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는 칠지도 앞뒷면이 검게 녹슬어 있어서 모든 녹을 떼내고 금상감이 돼 있는 명문 글자들을 찾아냈다고 했으므로, 그가 녹을 떼내면서 네 글자를 깎아버렸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런데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이상한 점이 눈에 띈다. 그는 1877년에 이소노카미신궁 궁사직을 떠나, 일본 군국주의 내각이었던 태정관(太政官)의 편사국(編史局)으로 자리를 옮겨갔고, 다시 1888년에는 도쿄대학의 편사국 편사관이 되었다. 그는 편사국에서 일하면서 ‘임나고’(任那考, 1893)라는 논문을 써냈는데, 백제왕이 왜왕에게 칠지도를 갖다 바쳤다는 ‘일본서기’의 헌상(獻上) 기사를 들이대는가 하면 ‘일본서기’의 허위 기사인 이른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역설(力說)했다.

 

그가 임나고라는 논문을 발표한 시기(1893년)는 25만명의 일본군이 이미 조선반도에 들어갔고, 머지 않아 청나라로 밀고 들어가기 직전의 일이었다. 역사의 진실을 밝혀야 하는 중책을 맡은 그도 아마 일본 군벌(軍閥)의 중압(重壓)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임나고’가 일본의 조선침략의 역사적 근거를 대는 데 이용됐다고 치부해 두더라도, 백제왕의 신보(神寶)인 칠지도 앞면의 네 글자는 언제 누구에 의해서 깎여버렸던 것인가.

스가 마사토모가 이소노카미신궁의 책임자(궁사)로 근무하던 시기(1873~1877년)였을까, 아니면 그 후의 일일까. 필자는 일본의 군국주의가 날로 팽창하여, ‘정한론’을 구체적으로 보강시킨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이 주창된 1885년 3월16일 이후의 일이 아닐까 추찰한다.

또 이런 일을 저지른 장본인은 군국주의자들이었을지도 모른다. 필경 깎여버린 그 넉 자에는 백제왕국이거나 백제인 도검(刀劍) 제작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명문에 백제왕과 왕세자가 후왕인 왜왕에게 하사한다는 것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닌토쿠천황과 왕인박사
 

제 근초고왕에게서 칠지도를 하사받은 오우진천황이 서거한 때는 서기 402년으로 추찰된다. 그리고 그의 제4왕자 오오사자기노미코토(大雀命)가 태자였던 우지노와키이라쓰코(제3왕자)의 간곡한 권유에 의해 오우진천황을 뒤이은 것은 서기 405년의 일로 본다. 이 당시의 역사적 사실은 905년에 백제인 학자 기관지(紀貫之, 키노쓰라유키, 872~945년, 관료·학자·歌人)가 편찬한 ‘코킨슈우(古今集)’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오오사자기노미코토가 왕자였을 당시다. 그는 제3왕자와 동궁(東宮) 자리를 서로 양보하는 바람에, 등극하지 않은 채 3년이 경과했다. 이때 왕인(王仁)이 딱하게 여긴 나머지 노래를 지어 읊었다. …오오사자기노미코토를 왕위에 오르도록 권유하여 지은 노래는, ‘난파진에는 피는구나 이 꽃이 겨울 잠자고 지금은 봄이라고 피는구나 이 꽃이’라고 했다.”

 

이와 같이 오우진천황 때 백제에서 건너와 왕자들의 스승이 되었던 왕인 박사는 제4왕자를 3년간 비어 있던 왕위에 등극시키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는 왕인이 왜 왕실에서 누렸던 위세도 능히 추찰케 해주는 대목이다.

왕인은 또 이 시가에서 볼 수 있듯이 오늘의 ‘오사카 항구’를 그 당시 이름인 ‘난파진’으로 명명하며, 고대 왜나라 최초의 시가인 와카(和歌)를 지어 불렀던 것이다. 오늘날 일본이 자랑하고 있는 와카라는 시의 효시는 다름아닌 왕인의 시가(詩歌) ‘난파진가’였던 것이다(拙論‘現代文學’, 1997년 2월호).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왕인이 왜나라 최초로 와카를 지었을 당시는 일본 땅에 문자가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왕인은 한반도에서 사용하던 향찰(鄕札)처럼, 한자를 차용어(借用語)로 삼아 선주민의 왜말로 시를 지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주민의 왜말을 한자 차용어로 표기하는 것을 ‘만요우카나(萬葉假名)’라고 일컫는다. 이것은 우리 나라 삼국시대의 이두(吏讀)와 향찰(鄕札)을 합친 것과 같은, 일본 고대어에 대한 한자식 표기법이다.

 

닌토쿠천황릉의 비밀
 

편 닌토쿠천황 묘에서는 왜나라가 백제왕부였음을 증명하는 청동거울도 발견돼 학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현재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전시돼 있는 ‘수대경(獸帶鏡)’이 그것이다. 지름 23.5㎝의 이 수대경은 1908년에 미국 보스턴 박물관 소장품으로 등록됐는데, 1872년 일본 오사카의 닌토쿠천황(仁德天皇, 5세기) 왕릉이 산사태로 인해 왕릉 일부가 부서지면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도쿄대학의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1917년~) 교수는 이 닌토쿠왕릉 출토의 ‘수대경’ 청동거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미국의 보스턴 미술관에는 닌토쿠릉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우수한 유물들이 진열되고 있다. 하나는 후한(後漢)의 ‘수대경’이며, 다른 하나는 남선(南鮮, 한국 남부)에서 많이 제작된 호화로운 칼자루 ‘환두병(環頭柄)’이다. 이 두 가지 유물은 이미 1908년(明治 41년)에 미국 보스턴 미술관의 소장품이 되어 있었고, 미술관 목록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다. 이 유물들은 닌토쿠릉의 앞쪽 석관(石棺)에서 나와 외국으로 유출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가 일반인에게는 의외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분 도굴은 동서고금을 통틀어 일반적인 현상이다. 오늘날 전문가들에게조차도 출입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신엄(神嚴)한 천황릉(天皇陵)조차도 실은 과거에 도굴당한 예가 많다. 헤이안(平安)시대(794~1192년)에는 세이무천황릉(成務天皇陵)이 도굴되는 사건이 발생, 사건에 관계된 코우후쿠지(興福寺) 승려 등 16명이 유형(流刑)당하기도 했다.

 

여하간 이노우에 미쓰사타는 보스턴 미술관의 ‘수대경’이 일본 닌토쿠왕릉에서 출토된 도굴품임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 거울이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노우에의 견해는 보스턴 미술관이 발행한 일본어판 도록(圖錄, ‘ボストン美術館 東洋美術名品集’, SELECTED MASTERPIECES OF ASIAN ART 1890~1990 Museum of Fine Arts, Boston)에 기록된 ‘수대경’ 설명 부분을 그대로 인용한 것 같다. 이 도록은 ‘수대경’에 대해 “후한시대에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는 추측성 설명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편집 등에 관계한 사람들은 일본인들이었다. 보스턴 박물관에는 55년이나 근무했던 동양부 부장(東洋部 部長) 도미타 코우지로(富田幸次良, 1890~1976년)를 비롯해 4명의 일본인 직원이 있었다. 이들 중 누군가가 도록 설명문을 쓰면서 ‘수대경’ 청동거울을 고대 중국의 것으로 추찰한 것 같다.

 

그러나 1971년에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청동거울인 ‘의자손수대경(宜子孫手大鏡)’이 보스턴 미술관의 ‘수대경’과 지름이 똑같을 뿐 아니라, 거울에 주조된 짐승 문양 등도 거의 똑같음을 국립공주박물관(김종만학예사·김영원 관장)이 컴퓨터 그래픽으로 밝혀낸 바 있다.

‘의자손수대경’의 사신(四神) 그림 부조의 경우 주작(朱雀), 청룡(靑龍), 백호(白虎)는 ‘수대경’ 그림 부조와 서로 중복시켜 살펴볼 때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의자손수대경’의 현무(玄武)그림은 부식이 워낙 심해 잘 보이지 않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똑같은 청동거울에는 사신 부조 외에 세 발 가진 새인 삼족오(三足烏)며 두꺼비 등 문양이 7개의 젖꼭지 같은 돌기(突起)인 사엽좌유(四葉座乳) 사이사이로 가느다란 선(線)으로 배치돼 안쪽 테두리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7개의 사엽좌유가 새겨진 백제 청동거울이 백제에서 왜왕에게 보냈다고 하는 ‘칠자경(七子鏡)’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한다.

 

‘일본서기’(神功皇后 52년 조)에 의하면, 백제 사신 구저 등이 칠지도(七枝刀) 한 자루와 칠자경(七子鏡) 한 개(一面) 및 여러 종류의 중보(重寶)를 왜왕에게 보내준 것으로 밝혀져 있다. 또 ‘고사기’(應神天皇 條)는 백제 근초고왕이 아직기선생으로 하여금 암수 말 2마리와 횡도(橫刀) 및 큰 거울(大鏡)을 갖다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학자들은 이 두 기록이 공통성이 있음을 시인한다.

 

현재 보스턴 미술관에 있는 ‘수대경’ 및 무령왕릉 출토의 ‘의자손수대경’이 서로 매우 닮았다는 것은 일본 학자들도 시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의 모리 코우이치(森浩一) 교수는 두 거울(수대경 및 의자손수대경)에 대해 연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모리는 “중국에서는 이런 종류의 거울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 거울이 중국에서 출토된 일이 없기 때문이다”(KBS TV 인터뷰, 1999. 5. 15일 방영)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그는 이 두 거울을 복사(複寫)해서 제작한 장소가 백제냐, 아니면 일본이냐 하는 것이 규명돼야 한다면서 수대경의 일본 제작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문제의 수대경이 ‘일본서기’가 전하고 있는 ‘칠자경’이라면 그것은 명백히 백제가 보내준 것이니 논외의 대상이다.

그런데 ‘수대경’이 단순히 닌토쿠천황릉 출토품이라면 그 청동거울이 일본에서 제작됐다고 하는 가설이 논의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모리의 일본 제작 가설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닌토쿠천황 당시인 5세기에 일본에서는 그 어떤 청동거울도 만들었다는 증거나 보고가 지금까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대경과 함께 1872년에 닌토쿠천황릉의 산사태로 출토되었다고 하는 다른 부장품(환두병, 삼환령 등)의 국적도 살펴보건대, 모두 고대 한반도에서 제작된 것들임이 입증된 바 있다. 이를테면 큰 칼자루인 환두병의 경우 이것과 거의 같은 것이 1971년에 무령왕릉에서 출토되었고 삼환령의 경우도 이와 똑같은 것들이 신라 고분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본래 명칭이 ‘칠자경(큰 거울)’인 ‘수대경’이 오사카 가와치의 닌토쿠천황릉에서 출토된 까닭은 무엇일까. 닌토쿠천황은 오우진천황의 제4왕자로 오우진천황을 계승했으므로 칠자경도 부왕으로부터 전승된 것으로 추찰된다.

이제 이 글의 결론을 도출해보자. 오우진천황대에 백제에서 전해진 칠지도, 그리고 오우진천황의 아들인 닌토쿠천황의 무덤에서 발굴된 청동거울, 그리고 무령왕이 그 아우인 게이카이천황에게 전한 인물화상경 등은 모두 왜나라 야마토(大知)왕조가 백제의 후왕(候王)들이 다스리던 백제왕부(百濟王府)였음을 입증하는 매우 귀중한 고고학적 증거 자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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