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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고전 15:12~13)
1. 시작하는 말
기독교는 일반적인 대중 종교와 근본적으로 차별화될 수밖에 없는 특별한 까닭이 있다. 그 까닭은 다양한 측면에서 일일이 살펴보면 여러 가지로 열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를 언급하자면 기독교가 ‘부활’이라는 특수한 진리를 믿고 가르치는 데 있다. 따라서 혹자들은 기독교를 가리켜 ‘부활의 종교’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렇다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자들이 모두 ‘부활’에 대해 동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각자가 자신들의 신학적인 견해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부활’에 대한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그 결과 기독교 신자들은 ‘부활’에 대한 신앙이 회의적일 뿐만 아니라, ‘부활’은 가장 믿기 어려운 교리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이로 인해 신앙적 갈등과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혹자들은 인간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이미 지나간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그런가 하면 ‘부활’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는 것을 말한다며 소위 ‘정신적 부활’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혹자들은 인간의 ‘부활’ 자체를 아예 부정하며 비웃기까지 한다. 이러한 현상은 초대교회 시대부터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다. 도리어 ‘부활’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이 대중들의 공감을 바탕으로 힘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첨단과학의 발달과 함께 미숙한 과학적 상식에 따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과학과 종교는 궁극적으로 진리를 밝히려는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학은 한편으로 긍정적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목표 달성에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과학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주된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미숙한 과학적 상식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부활’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가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따라서 ‘부활’이 없다는 주장이 대중들의 공감을 얻는 것은 생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과학적 상식이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인간의 ‘부활’을 당당하게 부정할 만큼 성숙한 것으로 보기에는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는 광대무변하고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그 가운데 작은 지구가 속해 있는 태양계의 비밀마저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성경적인 ‘부활’의 진리를 부정한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속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현대과학은 ‘부활’의 진리를 확증할 수 있기까지 가야 할 길이 아직도 멀 뿐만 아니라 요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2. 부활의 어의
일반적으로 지성인들 사이에서 ‘부활’이라는 단어는 톨스토이의 3대 작품 가운데 하나를 연상케 한다. 이는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의미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어 ‘부활’의 어의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부활’의 어의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게 된 요인이 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는 작품을 통해 갖게 된 잘못된 개념으로 인해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부활’을 오해하는 결과를 가져온 경우가 많다는 말이다. 인간의 ‘부활’을 극단적으로 부인하는 자들은 ‘부활’의 어의를 너무 단순화한 무지의 결과로 보인다. 곧 ‘부활’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 때문에 ‘부활’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취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어의에 대한 성경적 규정을 내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부활’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 또는 ‘쇠하였다가 다시 일어남’ 또는 ‘행할 수 없던 것을 다시 행함’ 등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건강이나 사업이나 물건 등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다시 회복된다는 의미로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부활’의 의미는 일반적으로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부활’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죽은 인간이 다시 살아남’을 뜻한다. 그렇다고 성경적인 ‘부활’의 의미가 단순한 것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너무 성급한 처사다. 단순하기보다 도리어 아주 복잡하기 때문에 ‘부활’에 대한 오해가 많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 견해가 있기도 하다.
성경은 구약에서 ‘부활’과 관련된 말을 히브리어 원문으로 ‘하야(hy:j;)’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이는 ‘살다’ 또는 ‘생명이 있다’, ‘되살아나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일어나다’, ‘일어서다’, ‘세우다’는 ‘쿰(!Wq)’과 ‘깨우다’ 또는 ‘일으키다’, ‘각성시키다’의 ‘쿠츠($Wq)’라는 단어가 부활과 관련된다.
신약에서는 ‘부활’과 관련하여 헬라어로 ‘아나스타시스( ajnavs tas" )’를 사용하는데, 이는 ‘다시 일어남’ 또는 ‘죽음에서 일어남’, ‘위로 오름’ 등의 뜻이다. 그리고 ‘에게이로(ejge i vr)’라는 개념은 ‘일어나다’ 또는 ‘죽은 자를 일으키다’, ‘일어서다’ 등의 뜻이다. 이 외에도 ‘부활’과 관련된 단어들이 많이 있는데, 그 의미들은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크게 다를 바 없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인간의 ‘부활’에 대한 다양하고 복잡한 의미들은 일반적으로 그 단어가 사용된 상황적 여건이나 문맥에 따라 이해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부활’의 의미는 성경 전체의 구체적인 논리적 근거에 의해 종합적으로 명쾌하게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인간의 ‘부활’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 정의 역시 앞서와 같은 연구절차가 선행되지 않으면 그에 대한 결론을 얻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부활’에 대한 성경적 정의는 간단하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적어도 성경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를 통한 신학적 근거에 의해 규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3. 부활의 정의
앞에서 ‘부활’의 어의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남’이라고 설명한 것은 단순한 재생(再生)을 의미한다. 곧 육신적으로 기절해서 숨이 멈췄다가 다시 소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부활’의 의미에 대해 일반 대중이 대부분 알고 있는 견해이기도 하다. 그리고 ‘쇠하였다가 다시 일어남’이라고 설명한 것은 국가나 집단이 쇠퇴했다가 부흥(復興)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곧 어떤 국가나 단체가 국난이나 어려움을 만나 쇠퇴했다가 다시 세력을 회복해 번영하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행할 수 없었던 것을 다시 행함’이라고 설명한 것은 개인 활동의 재기(再起)를 의미한다. 곧 어떤 개인이 힘이 부족해서 어떤 일을 포기했다가 다시 시작하는 경우다. 따라서 ‘재생’이나 ‘부흥’ 또는 ‘재기’ 등은 모두가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의미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개념들이다.
성경적인 ‘부활’의 정의는 본 주제에 대한 가장 간단한 서술적 답변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활’의 정의가 본 주제에 대한 제반 내용을 대부분 함축해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부활’에 관한 어떠한 주제도 ‘부활’의 정의에 대한 내용과 맥을 같이 하여 논의해야 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러나 그 논의 자체가 단순하지 않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 계시된 신관을 비롯해 인생관 또는 역사관 및 세계관에 기초를 두고 ‘부활’이 설명되고 그 정의가 규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자들이 겪는 ‘부활’에 관한 온갖 신앙적 갈등은 ‘부활’의 정의가 분명하게 규명되지 못한 결과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부활’에 대한 성경적 정의는 반드시 정확히 규명해야 할 중요한 과제이다.
성경적인 ‘부활’의 정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곧 <영적으로 죽은 타락한 인간이 중생 여부와 관계 없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살다가 죽은 후에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인류의 시조 아담을 흙으로 빚어 생기를 코에 불어넣어 생령이 되도록 하셨다. 그러나 아담은 뱀에 의한 하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고 말았다. 그 결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담은 저주를 받아 영적으로 죽어 육체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나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따라서 영적으로 죽은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저주를 받은 육체로 세상에 출생한다. 그 가운데 택함을 받은 자는 성령의 능력에 의해 영적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러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는 죽은 영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못한 자가 세상에서 살다가 육신으로는 누구나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세상의 종말에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된다.
4. 부활의 시기
기독교의 ‘부활’ 교리에서 그 시기에 관한 학자들의 견해가 분분하다. 이는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천년설에 관한 의견의 차이가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전통적인 천년설에 대한 견해는 전천년설과 후천년설 및 무천년설이 있다. 전천년설은 예수께서 천년왕국 전에 재림한다는 견해이다. 그리고 후천년설은 예수께서 천년왕국 후에 재림한다는 견해이다. 그리고 무천년설은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이나 후에도 천년왕국은 없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들의 차이로 인해 ‘부활’의 시기도 분명하지 않은 채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다. 그러나 성경은 ‘부활’의 시기에 대해 너무 분명하고 간결하게 밝혀주고 있다.
1) 예수님이 장사되신 후
첫 번째 ‘부활’의 시기는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여 무덤에 장사되신 삼 일 후였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살아나실 것을 예고해주신 사실이 있다. 그런데 그 예고대로 예수께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고 장사된 지 삼 일 만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무덤에 장사되신 삼 일 후가 바로 첫 번째 ‘부활’의 시기다.
2)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
두 번째 ‘부활’의 시기는 예수께서 대적을 멸하시려 강림하실 때다. 예수께서는 부활하여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부활 승천하신 예수께서 만왕의 왕권을 가지고 강림하셔서 철장으로 만국을 치시고 다스리신다. 그리고 짐승과 거짓 선지자들을 잡아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신다. 그리고 용을 잡아 일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신다. 이때에 부활에 참예한 순교자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대적을 멸하시려고 강림하실 때가 바로 두 번째 ‘부활’의 시기이다.
3) 예수님이 심판하실 때
맨 나중 ‘부활’의 시기는 예수께서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실 때다. 예수께서는 심판주가 되셔서 선악 간에 심판을 통해 세상의 종결을 맺으신다. 심판주가 되시는 예수께서는 천년왕국이 지난 후에 천사를 통해 무저갱에 결박당한 용을 잠시 놓아주신다. 그리고 그 용의 권세가 전쟁을 일으키고 성도들의 진(陣)과 사랑하시는 성을 포위하자 불로 멸하여 불과 유황 못에 던지신다. 그리고 흰 보좌에 앉으셔서 책들과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심판하셔서 모든 죽은 자들로 심판의 부활과 생명의 부활을 받게 하신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실 때가 바로 세 번째 ‘부활’의 시기이다.
5. 부활의 목적
하나님께서 모든 인류가 육신으로 죽은 후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하시는 데는 그 목적이 있다. 첫 아담은 생령체로 지음을 받았다. 생명과만 먹으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신령한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생명과를 먹기 전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었다. 그 결과 아담은 저주를 받아 육체가 되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아담이 생명과를 먹기 전에 불순종하여 타락함으로 저주받은 육체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세상에서 살다가 육신의 죽음을 통해 저주받은 육체를 벗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타락한 세상의 종말에 이르러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인간의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목적은 무엇일까.
1) 영원한 언약성취
인간의 ‘부활’은 여호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른 언약에 기초를 두고 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죽은 아벨 대신 셋의 출생을 통해 ‘부활’을 언약하도록 섭리하셨다. 그리고 선지자들을 통해 인간의 ‘부활’을 예언하도록 섭리하셨다. 곧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을 뿐만 아니라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깨어 영생을 얻거나 수욕을 받을 자들이 있을 것을 예언하도록 섭리하셨다. 따라서 인간의 ‘부활’은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해 주시려는 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언 성취를 통해 인간들로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깨달아 알고 경외하며 찬양케 하시려는 데 있다.
2) 인간창조의 완성
하나님께서 처음에는 아담을 보시기에 심히 좋게 창조하셨으나 아직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직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곧 생명과를 먹어야 영원히 죽지 않는 상태로 완성되는 피조물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피조물이 아니고 미완성의 존재였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하와는 타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고 타락하여 죽은 영의 상태인 육체가 되었다. 그 결과 모든 인류는 영원히 살 수 없는 육체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인간창조가 완성되려면 반드시 ‘부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부활’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인간창조의 완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완성된 인간들로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깨달아 알고 경외하며 찬양케 하시려는 데 있다.
6. 부활체의 특징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부활의 몸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 특징을 다양한 측면에서 여러 가지로 언급할 수 있겠다. 그러나 여기서는 부활 전 몸의 실재적 상태와 대조되는 특징만을 언급하기로 한다. 부활 전에는 구체적인 육신의 형태를 지니고 있어서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부활한 후에는 ‘육신의 형태를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신령한 몸’이므로 시간이나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부활체의 특징은 형태를 비롯해 시간과 공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1) 형태를 초월한 몸
신령한 ‘부활체’는 육신의 형태를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부활하기 전에는 육신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여러 가지 상황에 대처하는 데는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신령한 ‘부활체’는 육신의 형태를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상황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이 모인 곳에 문들이 닫혀 있는데도 그곳에 갑자기 형태를 갖추어 나타나 보이신 사실이 있다. 그리고 의심하는 두 사람에게 보이셨다가 형태를 초월해 갑자기 보이지 않기도 하셨다. 그리고 도마에게 손의 못 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이 있는 형태를 갖추어 만져보게도 하셨다. 이는 모두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형태를 내재적으로 초월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2) 시간을 초월한 몸
신령한 ‘부활체’는 시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부활하기 전에는 육신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모든 활동에 따라 철저히 시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곧 다양한 일들을 처리하는 데는 반드시 시간의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인간이 육신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만사에 활동하는 시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 후에는 육신의 형태를 내재적으로 초월한 몸을 지니고 있으므로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무덤 곁이나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 또는 거리 등 여기저기 갑자기 나타나서 교훈하신 사실이 있다. 그리고 재림 때는 시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해서 어디서나 동시에 나타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모두 예수님의 부활하신 신령한 몸이 시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3) 공간을 초월한 몸
신령한 ‘부활체’는 공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인간이 부활하기 전에는 육신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각자의 생활에 따라 필요한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곧 처지에 따라 생활하는 데 필요한 공간의 제약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는 인간이 육신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생활하는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활한 후에는 육신의 형태를 내재적으로 초월한 몸을 지니고 있으므로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여기저기 장소에 따라 환경을 가리지 않고 갑자기 나타나서 보이시며 교훈하신 사실이 있다. 그리고 재림 때는 공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해서 동시에 어디에나 나타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모두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이 공간을 내재적으로 초월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7. 끝맺는 말
기독교의 ‘부활’에 대한 진리는 ‘심오한 과학적 진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아직은 미숙한 현대과학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고도의 완숙된 학문이 기독교 과학이라고 한다면 말이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물리적인 전기의 힘으로도 죽어가는 많은 생명체에 대한 재생의 가능성이 높아지는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하물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불가능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아담을 흙으로 빚어 코에 영원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생령으로 창조하셨다. 여기 흙이란 티끌이나 먼지라는 의미도 있어서 현대적 용어로 물질의 최소단위인 아원자를 연상하게 한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아원자들이 물리적인 기(氣)에 의해 결합된 것이 크고 작은 다양한 물질이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기(氣)의 원천이며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죽은 인간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도록 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 아닌가. 어설픈 과학적 상식으로 기독교의 ‘부활’에 대한 진리를 부정하거나 조소하는 행위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들의 우매에 의한 속단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