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자의 질문2346-목사님 대답해주세요! 교회의 정통과 비정통과 이단을 확증하는 절대 기준이 무엇입니까?(2) 부제-마음의 할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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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십계명회복선교교회 이소자입니다. 오늘 말씀 제목은 「목사님 대답해주세요! 교회의 정통과 비정통과 이단을 확증하는 절대 기준이 무엇입니까?(2) / 부제-마음의 할례」입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이어 두 번째 질문을 위한 설명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할례’의 영적 의미를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롬2: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②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흠정역-‘영 안에 있는 마음의 할례니라’)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를 흠정역(KJV)은 ‘영 안에 있는 마음의 할례니라’ 하였습니다.
28절의 ‘육신의 할례’는 ‘유대인들’이 아브라함 혈통의 자손이라는 육체의 표식인데 본래 하나님께서 모세로 할례를 말씀하실 때 ‘마음에 할례’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신10: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30: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는 ‘육체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인 것입니다.
‘육체의 할례’는 ‘육체적 행위’이고, ‘마음의 할례’는 ‘마음을 칼로 베다’는 의미로 ‘옛사람은 죽고 하나님의 영으로 새사람이 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세상의 이방 민족들에게서 구별되어 거룩하다’는 표식이 할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를 따르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해야 한다’는 증거의 표식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3:5로 ‘사람의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6절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2:29로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靈)에 있고’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할례를 한 사람은 영(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흠정역 성경(KJV)은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靈)에 있고’를 ‘영 안에 있는 마음의 할례니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사람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는 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靈)’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믿음을 가진 그 사람이 ‘성령으로 난 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러함을 다음 말씀이 보증해줍니다.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라고 합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난 영이 된 성도’는 ‘마음에 할례가 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번 첫 번째 질문을 이어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질문 ② ‘성령으로 난 영’은 ‘마음에 할례가 된 거듭난 사람’인데 ‘마음의 할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기독교인이면 이 질문을 ‘자신에게’ 해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교회들이 ‘마음의 할례’를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마음의 할례가 어떤 의미인지 사도 바울이 증언하였습니다.
『[골2: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니까 ‘손으로 하지 아니한 마음의 할례’는 ‘그리스도의 할례’로 ‘침례’를 의미하고, 그 의미는 ‘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되고 ...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는 것에서 ‘육으로 난 육체의 옛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십자가의 희생이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이 마음의 할례인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의 할례’는 ‘마음을 베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을 좇아 살든 육으로 난 육체의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성령으로 난 영으로 새사람’이 되었으니 ‘새 마음’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으로 난 육체의 옛사람’으로 살지 않고 영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의 성도로 거룩한 마음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들은 ‘마음의 할례’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면서 나사렛 인자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주여주여! 믿습니다” 합니다.
가톨릭도 예수 믿고, 안상홍교, 이만희교도 예수 믿는다고 합니다. ‘마음의 할례’를 말하지 않는 교회는 이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면 ‘마음의 할례’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자기가 ‘마음에 할례가 된 영으로서 영이신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확인하여야 합니다. ‘마음의 할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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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증언한 롬2:24~29에 답이 있습니다. 지난번 말씀에서 살펴본 롬2:27~29 다시 듣습니다.
『[롬2:27]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儀文=율법 조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겠느냐 [28]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29]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흠정역-영 안에 있는 마음의 할례니라) 율법조문에(흠정역-글자 안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
무엇이? ‘마음의 할례가’
예수님은 요3:6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말씀하신 이 말씀을 롬2:27~29을 비추면 “마음의 할례는 어떻게 합니까?”라는 질문의 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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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의 답)-‘육신의 할례’는 육체의 표피를 베는 표면적 행위로서 ‘표면적으로 기록된 율법 조문(의문)을 따라 행하는 것’을 의미하고,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라는 것은 ‘내면적(이면적)’인 것으로 27절의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이라는 말씀과 29절의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흠정역 -‘영 안에 있는 마음의 할례’)를 연결하면 ‘마음의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십자가의 희생이 되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즉 성령으로 난 영이 된 성도가 ‘율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롬1:1로 ‘하나님이 자기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하셨다’고 하면서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롬1:2] 이 복음(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러면 ‘마음의 할례’를 하나님께서 ‘아들을 증언하신 하나님의 복음’이 기록된 구약성경으로 상고해보면 분명해집니다.
① 애굽에서 유월절 희생 ->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희생을 의미
② 이스라엘이 유월절 희생을 믿음으로 ‘침례’를 의미하는 홍해 바다를 건넘은 ‘애굽에서 살든 옛사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에서 죽고 죽음의 바다를 건너므로 ‘새사람’이 된 출애굽 이스라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신자(信者)가 침례를 받음으로 유월절의 희생이 되신 십자가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이 죽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남을 의미
③ 유월절의 희생과 홍해 바다의 침례를 믿음으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 사는 율법을 받음! 이것은 -> 십자가의 희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침례를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영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가 ‘하나님으로 사는 율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을 의미
이것이 ‘마음의 할례’입니다.
이렇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外)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은 구약성경의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그래서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 받은 것, 즉 하나님의 복음으로 증거 받은)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성경이 말하는 ‘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죄’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어긋난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 죄이고, 그래서 ‘죽어 썩어 멸망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 죄’입니다.
따라서 ‘율법으로 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율법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기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선물인 이 ‘믿음’은 ‘마음의 할례’ 즉 ‘율법이 마음에 기록되어야’ 하나님으로 살지 못하는 죄를 깨닫고 구원의 소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할례’를 증언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로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갈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율법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고 합니다. 율법이 ‘폐기’되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율법을 ‘있으나 마나하게’ 여기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입니다.
초등교사, 곧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닙니다. ‘죄가 하나님의 계명의 율법을 이용하여 정죄하는 죄의 정죄’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롬7: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것으로 나를 죄가 되게 한지라’
이 ‘죄’를 하나님의 율법으로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하였고, ‘율법을 거룩하다’ 하였습니다.
『[롬3:30] 할례자도(유대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이방인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7:12]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으로 거듭난 영 안에 있는 마음에 율법을 기록’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롬2:29로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흠정역 은 “영 안에 있는 마음의 할례니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것이지만 그것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말하지 않는 교회’는 어떤 교회이고, ‘율법이 없는 기독교인’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율법을 말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죄’를 바르게 깨닫도록 말하지 않는 교회이고, 이런 교회의 믿음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율법이 마음에 없는 기독교인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것입니다.
로마서로 율법과 믿음을 논증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롬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그러면 ‘율법폐기론’을 말하는 칼뱅주의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폐기’하는 말을 하는 것이 되고, 율법폐기론은 아니지만 율법을 행해화(形骸化)한 웨슬레주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형해’하는 것입니다. 있으나 마나 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 말씀도 아무것도 아니게 됩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으니까 ‘율법이 없는 교회’와 ‘율법이 없는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질문으로 말씀을 마칩니다. 그러면 ‘왜’ 교회들은 ‘율법폐기론’을 말하고, 폐기는 아니지만 ‘있으나 마나 하게’ 여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유대인들이 지킨 ‘의문(儀文)의 율법 조문’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울일 때 그랬습니다. 그래서 간증의 편지를 쓴 것이 바울 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이 증언한 롬2:24~29로 ‘하나님의 율법’과 유대인들이 지킨 ‘의문의 율법 조문’을 살펴보시고, 고후3:3~6의 ‘먹으로 쓰고, 돌에 새겨진 의문의 율법조문’과 ‘율법을 영으로써 육의 심비에 새긴=마음의 할례’를 상고해보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권하며 말씀을 마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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