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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18일. ‘무스타파’를 기다리며
어제, 11시 넘어 배에 도착해보니 새로운 배를 내 배에 붙여 계류 중이다. 44피트 알루미늄 배다. 배 주인이 인도에 둔 것을 프랑스로 딜리버리 해주는 중이라고 한다. 어제 도착 오늘 휴식, 내일 출발. 3일만 머물고 떠난다고 한다. 포트사이드 거치지 말고 이스마일리아에서 바로 가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계류 줄을 살피고 배 상태를 확인하다보니 의자 커버 고정 걸쇠가 떨어져 나갔다. 계류 하면서 누군가 걸쇠를 풀지 않고 잡아당긴 모양이다. 무스타파에게 말하니 미안해하면서 내일 수리해준다고 한다. 수리는 내가 해도 되니 주의 당부한다고 했다.
아침 일찍 리나와 아내에게 감자 고기 볶음밥을 해주고 수리하러 나섰다. 알루미늄 배에 처음 보는 사람이 있다. 그는 인디아에서 선장을 만났고 여기까지 함께 항해중이라고 한다. 호주 사람이다. 외국인들은 이렇게 이배저배 얻어 타고, 또는 약간의 돈을 내고 세계일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상당히 편리한 것 같다. 조금 불편한 점은 있겠지만, 책임은 없고 항해만 남는다. 다음엔 나도 이런 것 좀 해봐야겠다. 지부티는 좀 비싸지만 좋았다고 말했다. 미국, 프랑스 군함들이 있다고도 한다. 아무래도 지부티는 반드시 들러야 할 코스 같다.
마리나에 미소를 짓고 돌아다니는 조그만 아저씨가 있다. 늘 초록색 점퍼를 입고 다닌다. 아침에 찾아와 쓰레기를 치워준다며 약간의 돈을 요구한다. 쓰레기를 주고 20 이집션파운드 주니 잠시 후 이집트 국기를 100 이집션파운드로 사랜다.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마리나의 아침도 이래저래 분주하다. 커피 한잔 하려다 보니 이런 저런 일로 다 식어 버렸네.
어제 피라미드를 둘러보고 있을 때 해외안전지킴센터에서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수단영사님이 22.7월 사와킨 다녀오셨는데 닫혀있다고 하는데요, 혹시 다른 요티들에게 사와킨항에 대해 확인하신 것인가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톨스에게 다시 확인하니 자기 네덜란트 친구가 2주전에 거기 있었다고 한다. 나도 에이전트에게 문자를 해보니, 지금 12척의 세일 요트가 앵커링 중이라고 사진을 보내 준다. 해외안전지킴센터에 알려주고 마리나로 돌아 왔을때, 이 프랑스 배도 사와킨에 들렀다 왔단다. 그런데 일부러 간 게 아니라 바람이 미친 듯 불어 피항한 것인데, 하루 저녁에 200달러를 냈다고 열 받아 한다. 아무래도 세일러들의 세계일주 항해는 점점 더 어려워 질 듯하다. 중동 지역 국가들 마리나가 세일러들에게 무리한 금액들을 요구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일부를 제외하고 대다수 세일러들은 부자가 아니다. 꿈과 모험을 찾아 떠난 사람들이다. 이들을 착취하는 나라들은 더 큰 것들을 잃게 될 거다. 날씨가 괜찮으면 나도 사와킨을 패스할까? 아직 결심이 안선다.
해외안전지킴센터에서 또 다른 문자가 왔다.
'제네시스호 선장님, 청해부대입니다. 오늘아침 UKMTO에서 0430Z 시에 1413N 04244E(밥엘만데브 해협인근) 에서 라이베리아 국적 상선 1척이 미상선박에 의해 공격받은 상황이 전파되었습니다. (현재는 상황이 종료되어 선박과 선원은 안전한 상황입니다.)
제네시스호도 당 해역 통과예정이니, 각별히 주의 당부 드립니다.'
좋지 않은 소식이다. 주변 선장들에게 알린다. 이 메시지를 받은 유일한 국가의 선장이 나다. 걱정이 되면서도 쫌 자랑스럽기도 하다. 다른 나라 선장들이 다들, 해적이냐? 라고 묻는다. 하지만 미상선박 이라고 답해준다. 선장과 선원 모두 안전하다고도 알려준다. 해적 사건인지 아닌지 궁금해, 각자 자기 나라 뉴스를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다. 한국 뉴스에도 없다. 이대로 조용히 지나가면 정말 좋겠다고 기도한다.
오전 9시. 스턴 의자 커버를 고치고, 아내 임시 노래방 설치를 도와주고, 연료 필터를 분해해 지퍼백에 포장한다. 오전 10시. 아내가 챙겨준 세제와 빨래를 들고 마리나 화장실을 찾는다. 화장실 세 칸, 샤워실 두 칸의 초미니 화장실이다. 한국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거의 방치 된 수분이다. 이집트라는 국가, 수에즈 운하의 공식 마리나가 이 정도라니. 내부엔 아주 낡아, 이게 과연 돌아갈까? 의심스러운 아주 작은 세탁기가 하나 있다. 일단 세탁물을 넣고 돌려본다. 이제 한 시간 후에 다시 와 봐야지. 무스타파는 온다는 말만하고 아직 오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현실 판이다.
오늘 앵커 체인과 연료필터를 준비하고 오후에 마켓에 가서 장을 보면 대강 출항준비는 끝난다. 내일 갈까, 모레 갈까만 결정하면 된다. 지금까지는 마리나에 들를 때마다 수리 때문에 5-6 일씩 걸렸다. 앞으로는 알루미늄 배처럼 1-2일 만에 바로바로 출항 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입출항 비용은 아깝지만, 그래도 안전이 제일이다. 갑자기 하늘이 잔뜩 흐려진다. 오늘 세탁한 빨래를 말릴 수 있을까?
호주 사람이 샤워 시설과 세탁기 등을 묻는다. 어차피 나도 거기로 가니, 같이 가자고 하고 마리나 상황들을 설명해 준다. 나는 이 세상에 어떤 것도 내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잠시 머물고 갈 뿐이다. 내 것도 아닌 것을 빌려 주거나, 친절하게 알려주거나 하지 못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부수지만 않으면 된다. 어제 러시안처럼 무뢰배만 아니라면 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 호주 사람은 밖의 식당을 이용하고 싶어 하지만, 비자를 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그럼 식당에는 갈 수 없다. 그들은 어제 디젤을 잔뜩 샀으니 출항에는 별 문제가 없을 거다. 같이 샤워실에 가니 그가 기뻐하며 말한다. 나는 진짜 샤워를 거의 두 달 만에 하는 거야.
세탁기가 덜거덕 거리며 힘겹게 돌아간다. 앉을 자리 하나 없이 서서 세탁이 끝나길 기다리다 화장실을 사용한다. 볼 일을 마치고 물 내리는 스위치를 찾다보니 갑자기 찬물이 똥꼬를 씻어준다. 이집트식 비데다. 시원하긴 하네. 잠시 후 보니 호주 친구가 갑자기 음식물 봉투를 들고 지나간다. 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놀라니, 예의 그 초록색 점퍼 아저씨가 심부름 해 준 것이라고 한다. 모처럼 만찬이니 즐기라고 한다. 화장실 등이 하나 타버렸다. 비슷한 것을 구해 달라고 마리나 관리인에게 말했더니, 그가 그 초록색 점퍼 아저씨에게 심부름을 시킨 모양이다. 40분 후에 초록색 점퍼 아저씨가 왔다. 등을 못 구했으나, 자기가 택시 타고 돌아다닌 택시비를 달란다. 거절한다. 무스타파와 이야기 해보고 알려준다고 했다. 구하지도 못하고 택시를 타고 다녔다고? 문화가 다르니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다. 사람 바보 되는 느낌이다. 잠시 짬이 나서, 물탱크를 가득 채웠다.
무스타파는 잠깐 마리나에 와서 세탁물은 오후 2시 30분에 온다. 디젤 기름 값은 9,600 이집션파운드다. 하고 앵커 체인은 오늘 중에 해결. 연료 필터를 사러 나갔다. 어차피 자주 갈아야 하니 같은 사이즈의 디젤 자동차용으로 10개 구해 달라고 했다. 오늘 저녁이나 내일 중 다 정산하고 출항 준비를 마쳐야겠다.
세일러들은 모두 윈디라는 기상 예보 앱을 사용한다. 내가 써보니, 직접 바다에서는 20~30% 정도 맞는 것 같다. 하지만 풍랑이나 태풍은 50~70% 맞는다. 내가 부주의한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바다에서는 부딪치고 해결해야 한다. 며칠 뒤, 풍랑이나 태풍이 예보되어 있다면 출항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출항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머물면 편하다. 편하면 게을러진다. 언제 한국까지 갈지 모른다. 위급 시 피항 할 곳들만 체크하고 곧 출발하자. 나는 지금도 ‘고도’가 아닌 ‘무스타파’를 기다리고 있다.
잠시 옆의 allures 44 알루미늄 세일 요트에 구경하러 갔다. 2004년 형이다. 좋은 배인데 낡았다. 전자 시스템은 거의 다 죽었다. 오토파일럿은 고장 나서 외부에 간이로 하나 설치했다. 레이더도 죽었다. 인근해역에서 낚시 배와 충돌했을 때 레이돔이 날라 갔단다. 실내는 공간을 상당히 효율적으로 구성했다. 이런 게 진짜 세일 요트지! 하고 느껴진다. 연료탱크와 물탱크는 똑같이 549 L리터라고 한다. 차터 테이블의 복잡한 전자 시스템을 보여 주면서 ‘아주 심플하다.’ 고 말한다. All Gone! (모두 다 고장 났다.) 하지만 이리듐 고와 애플 아이패드를 가지고 있다. 이것으로 날씨도 보고 배 방향도 절정하고, 전체 거리와 언제 엔진을 켤지 까지 도움을 받는다. 일기 예보를 종합 판단하여 언제 출항하라는 것도 알려준다. 한국에도 이리듐 고를 파는 대리점이 있었다. 한국에서 출발 전 전화해 보니 한 번도 사용이나 판매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만약 샀어도 지금 이 프랑스 선장처럼 사용법을 잘 알지 못했을 거다. 그저 문자, 위성전화, 일기예보나 보고 말았을 거다. 이런 첨단 항법시스템을 잘 교육해주는 전문 대리점이 절실하다. 배의 시스템이 다 고장나도 이리듐 고만 있으면 세계일주를 거뜬히 하는 거다.
오후 2시 30분 빨래가 왔다. 덜 말랐다. 아무래도 세탁소가 아니라, 무스타파네 집에서 한 것 같은 분위기다. 아내가 배에 빨래를 잔뜩 널었다.
오후 3시 00분 무스타파가 왔다. 체인을 못 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며칠 동안 지켜본 결과, 그가 이런 저런 일로 바빠서 제대로 못 알아본 것 같은 직감이다. 그가 요즘 얼마나 격무에 시달렸는지 내가 목격했다. 마리나는 좁고, 들어오는 배들은 많고, 처리해야할 일들과 선장들의 요청은 넘쳐난다. 나만해도 벌써 대여섯 개의 부탁을 했으니 모든 배에서 그런 식으로 요청할 것 아닌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 수에즈는 국제마리나 규모가 절대 아님에도, 국제적인 업무를 간신히 버텨내고 있다. 지금 이렇게 적는 사이에도 영국 국적 요트가 한 대 들어오고 있다. 무스타파와 마리나는 또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계류와 서류 절차를 해야 한다.
나는 하루하고 9시간만 더 항해하면 도착하는, Hurghade(후루가다) 마리나로 가기로 결정한다. 5년 전 수에즈 운하를 지나가신 김석중 선장님의 강력 추천이다
‘샤워실과 휴계실이 함께 있는데 시설이 좋고, 에어콘 잘 들어오고, 부인과 아이놀기는 최고입니다. 하루 종일 기거하여도 누가 뭐라 하는 사람 없습니다. 관리실 에서 키를 받아 생활 하시면 됩니다 요트 정박을 바로 앞에 하면 20m 거리임. 빨간 3층 건물이 휴게소 겸 화장실입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정박하세요.’
김석중 선장님께 한 번 더 이런 저런 것을 확인하려니, 한국은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라 전화가 안 된다.
일단 무스타파에게 두 가지를 물어본다. 후루가다에서 앵커체인을 구할 수 있는가? 거긴 수에즈보다 훨씬 더 큰 마리나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후루가다에서 식료품을 살 수 있는가? 거기는 마리나 근방에 큰 식품점이 많다. 오케이, 그럼 일단 후루가다로 가서, 앵커체인과 식품을 구하기로 하고 나는 내일 오후에 후루가다로 가겠다. 그럼 펠릭스 에이전트 회사에 먼저 문의하고 절차를 확인해라. 에이전트 회사에 왓스앱으로 상황을 설명하니, 문자로 서류들을 보내준다. 무스타파에서 전달하고 내일 출력해서 가져 오기로 한다.
오후 4시 30분. 무스타파가 디젤 엔진 연료 필터를 한 개 가져왔다. 제네시스의 볼보펜타 D2-75 연료필터와 사이즈가 똑 같은 디젤 자동차용이다. 정품 D2-75 연료필터를 구할 수 없으니 뭐라도 준비해야 한다. 여기는 중동이고 기름 품질도 좋지 않다. 무대책으로 가다 엔진 서면 큰 낭패다. 이건 동네 마실 세일링이 아니다. 일단 장착하고 시동을 걸어본다. 20분간 아이들링하면서 2,000RPM 까지 올려도 전혀 문제없다. 한 가지 문제는 가격이다. 현 상황에서는 부르는 게 값인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연료 필터가 분명히 더 싸겠지만, 지금까지 상황을 보면 그저 그들을 믿고 처분만 기다릴 수는 없다.
여기서 나도 기술 들어간다. 국내 옥션으로 가장 저렴한 디젤 연료 필터들을 찾는다. 대개 9,500원 수준이다. 나는 무스타파에게 그대로 보여준다. 237 이집션파운드 라고 보여준다. 나는 이 비슷한 가격이면 총 10개를 살 거고, 아니면 3개? 4개? 잘 모르겠다. 무스타파가 알겠다고 하고 10분 후에 왔다. 한 개에 290 이집션파운드란다. 개당 11,600원. 오케이 10개를 모두 산다. 또 10분후에 9개를 더 가져온다. 아마 10개를 미리 가져왔던 모양이다. 항해하다 조금만 이상하면 새것으로 갈아버리며 갈 거다. 또 큰 마리나에 정품이 있으면, 몇 개 더 준비할거다. 이제 경유와 필터를 넉넉히 준비하니 마음이 놓인다. 마지막 관문. 후루가다 마리나에서 앵커 체인만 구하면 된다. 내일 오후 떠나자. 수에즈여 안녕이다. 다시 오게 될지는 기약이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