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8:19-21, 새로운 가족, 24.10.20, 박홍섭 목사
어느 날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몰려 있어서 접근하지 못하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왔다고 전해줍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반문하신 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며 “이 사람들이 나의 어머니와 동생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라고 하십니다. 어찌보면 눈앞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정하는 듯한 충격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이 육신의 가족을 부정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의 정확한 의미를 알려면 먼저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왜 예수를 찾아왔는지부터 봐야 합니다. 이 사건은 누가복음만 아니라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이 가장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고 마태복음은 누가복음과 비슷하며 마가복음이 가장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막 3:20-21을 보겠습니다.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본 사건의 배경을 마가는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가족들은 지금 예수님을 붙들러 왔습니다. 문안하거나 격려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집을 나가서 갈릴리 지역에서 병자들을 낫게 하고 귀신을 쫒아내고 설교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가는 곳마다 바리새인들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그들로부터 귀신 들렸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정신이 나갔지 어떻게 하려고 바리새인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그들과 다투고 있단 말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다투고 싸운다는 것은 곧 유대 사회에서의 축출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자기 몸도 돌보지 않고,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밤낮 그렇게 한다고 하니 정말 바리새인들의 말처럼 미치거나 정신이 이상하게 된 것은 아닌가? 이런 염려의 마음을 가지고 마리아와 가족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붙들러 왔습니다. 강제로라도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서입니다.
누가복음은 이 과정을 생략하고 이 사건을 씨뿌리는 비유와 등불의 비유 다음에 배치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말씀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을 맺는 사람인지, 누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아래 감추지 않고 등경 위에 두어 주위를 밝히는 사람인지를 제시하는 결론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조금 다르게 배치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를 데리러 온 이 시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막 3:31을 보십시오.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그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앞의 3:22-30까지의 상황입니다. 어떤 상황입니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가 바알세불이 지폈고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들을 불러서 너희들은 지금 누구라도 영원히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 모독죄, 성령훼방죄를 짓고 있다고 책망하십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러자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무리들이 기다렸다는 듯 말합니다. 막 3:32입니다.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친절한 설명이 아닙니다. 비아냥입니다. “보시오 당신의 어머니와 가족들마저 당신이 미친 줄 알고 당신을 데리러 오지 않았소. 그러니 뭐 성령 훼방 죄니 뭐니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가족들 따라 곱게 집에 가서 제정신이 들도록 요양이나 하시오” 그런 뜻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은 “누가 나의 가족이냐 누가 나의 모친이며 누가 나의 동생들이냐?”라고 반문하신 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모친이요 형제가 아니냐고 일축하십니다(33-35).
그럼 이게 무슨 의미의 말씀일까요? 지금 예수님은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시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땅에 있는 마리아의 아들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서, 아버지의 나라에 하늘의 가족들을 부르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2:1-11을 보면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의 어머니가 포도주가 떨어진 현장을 보고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답하십니까? 요 2:4을 보실까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놀랍지 않습니까? “여자여”라니요? 그리고 거절하는 듯하더니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시는 표적을 허락하십니다. 지금 하는 이 일이 마리아라는 여자의 아들로서, 그 혈연관계에 근거한 그 무엇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때에 따라서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는 사역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이 충격적인 말을 통하여 “어머니 지금부터는 가족관계에 기초해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식으로 나에게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앞으로 가족관계에 따라서 말과 행동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때에 따라서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라고 당신의 사역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 1-9을 보면 예수의 동생들이 예수님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3-5입니다. “갈릴리에 묻혀서 일하지 말고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서 기적을 행하여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예수의 동생들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으로 세상에 자신을 알려 성공하라고 했습니다. 형제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왜 이 땅에 오셨는지, 왜 그들의 형제로 오셔서 지금 가정을 떠나 갈릴리를 다니면서 이렇게 고생하며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몰랐습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를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서 예수에 대해 떠도는 말을 듣고 정말 미쳤는지, 정말 무엇을 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어머니를 모시고 찾아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혈육의 관계를 소중히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 중에 인간을 향한 가장 첫째 계명이 부모 공경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혈연관계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요 내 동생이냐고 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어떤 관계나 어떤 가치나 내용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더 큰 내용과 가치와 관계에 근거하는 새로운 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가족관계를 형성합니다. 이 나라의 가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누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인내로 지키어 결실하는 같은 은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은 내 감정보다 말씀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같은 DNA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 나의 모친이며 나의 형제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아니냐”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죄로 타락한 이후 인간들은 에덴동산을 쫓겨 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타인들과 끝없이 싸우고 경쟁해서 자기 힘으로 살아남아야 하는 아담적 실존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담적 실존에 속한 인생들은 뭐니 뭐니해도 가장 믿을만한 끈이 혈연과 혈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해서 지연을 만들고 학연을 만들고 무슨 연의 관계라도 만들어서 하나님이 없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들어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인간관계의 구조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믿지 않고 고의적으로 거부하는 성령 훼방 죄를 지으면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혈통에 근거하여 천국 백성이라고 자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혈연, 그것까지고 안 된다고 하십니다. 혈연으로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럼 무엇으로 됩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된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새로운 모친이요 형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말씀이 심령에 뿌려지고 그의 영혼과 인격과 삶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자라서 열매 맺는 사람들이 새로운 가족으로 형성되는 믿음의 공동체 말씀의 공동체입니다. 주님은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들을 육신의 혈육보다 더한 친근감으로 이들이야말로 나의 새로운 가족, 진정한 가족이라고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우리는 그런 새로운 가족이 있습니까? 말씀은 육신의 혈연보다 더 진한 관계를 형성하는 강한 결속의 능력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속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만약 교회 안에서 그 관계를 깨트리는 사람이 있다면, 정치이념이나 지역이나 경제적인 차이로 그 관계를 무시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결속시켜 주는 그 무엇보다 끈끈한 사랑을 경험해본 적이 없는 인생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말씀으로 결속되고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지키고 실천하는 일에 하나 되어 생사를 같이하는 동지의식과 가족의식을 느끼고 있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여기 오셔서 우리를 둘러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겠습니까? “여기에 내 가족이 있다. 나의 모친이 있으며 내 동생이 있고 나의 형제들이 있다” 온 맘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온 힘 다해 말씀에 헌신하는 그런 교회 그런 성도 되어서 주님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