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비열전 19-1
제19대 숙종(이순)의 여자들
정비, 인경왕후 김씨!
제1계비,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
희빈 장씨 등 후궁 6명
자녀 6남 2녀
ㅎㅑ~ 숙종 때문에 왕비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쓰느라 힘든 시간.
게다가 조선왕조실록이 인정한 조선
최고의 미녀 장옥정(희빈)까지 있으니..
그래도 우짜나!
다 써야지. ㅠㅠ
숙종은 적장자 정통성을 가지고
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왕이다.
효종ᆞ현종ᆞ숙종으로 모처럼 왕위 세습이
본부인 왕후의 외아들로 되었다는 것이다.
14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한가락 하신 군주이셨는데 또이또이해서
어마마마 민경왕후 수렴청정도 받지않았다.
어미인 민경왕후도 아들인 숙종
임금의 성깔을 예측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내가 낳은 아들이지만,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다르니 애미인 나도 감당이 안되는구나!"
민경왕후의 말이다.
그런데...
민경왕후님 자신도 한성깔 하신 분이다.
'母傳子傳(모전자전)'이다.
숙종은 엄마의 불같은 성격을 닮았다.
온화한 아버지 현종을 닮지 않고..
숙종은 재임기간이 아들인
영조 52년에 이어 두번째로 긴 46년 이었다.
46년 그 많은 세월을
지멋대로 살았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숙종은 쎈 임금이었다.
환국(換局 : 국면을 바꾸다)정치를 했다.
맘에 안들면 막말로 내각을 총사퇴 시키고
자기 마음대로 새내각을 구성해버린 것이다.
환국(換局)의 목적은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을 왕이 결정하면서,
그 가운데 신하들의 대결을 이용해서 맘에
안 드는 자는 숙청 하고 신권을 약하게 하여
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즉 정치의 주도권을 왕이 쥐고
사대부의 목숨줄을 쥐기 위한 것이다.
조선왕조를 세울 때 정도전은
신하들의 권한(신권)을 강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왕권을 너무 강하게 하면 나라가
한 인물(왕)에 의해 좌지우지 되기 때문이다.
임금 하나 잘못 나오면 국정이 파탄난다.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루어야 되는데,
말이 쉽지 그렇게 되기는 어려웠다.
숙종은 순금수저 출신이니 당근 힘이 쎘다.
게다가 대담하기도 하고 성깔도 있었으니
신하들이 감히 엉겨붙을 수가 없었다.
말 안 들으면 북한의 김정은이가 고사총으로
박살을 내듯이 아낌없이(?) 사약을 내렸다.
"One shot(완샷)"하라고...^^
숙종은 크게 세번 환국정치로 왕권을 강화했다.
1. 경신환국 (숙종 6년, 1680년)
남인 허적의 역모사건으로 남인 Out !
2. 기사환국 (숙종 15년, 1689년)
장희빈 아들 세자 반대로 서인 Out !
3. 갑술환국 (숙종 20년, 1694년)
인현왕후 복귀하고 장희빈계 남인 Out !
이 세 환국을 알아야 되는 이유는
숙종의 여자들에 관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사건들은 늘
여자가 끼지 않으면 재미가 없다.
약방의 감초처럼 여자가 꼭 있어야
그 스토리가 흥미진진하다.
숙종!
풍운아(?)였고 여색을 밝혔다.
그래서 사극에 가장 많이 등장한 왕이기도 하다.
저 유명한 장희빈(옥정)이 덕(?)으로...
길고 긴 숙종의 왕비열전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론이 기냐고 불평할지 모르겠다.
그 이유는?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에 대해
크게 언급할 에피소드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면을 채우기 위한
'고육지계'였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참 글쓰는 것도 쉽지 않다. ㅠㅠ
인경왕후 김씨!
숙종의 No.1 여인이다.
현종 2년(1661년) 9월 광산 김씨인
김만기와 어머니 청주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날 때부터 울음소리가 약하고 조용했으며,
자라서도 말수가 적고 존귀함이 있었다고 한다.
먹을 것이 있으면 기다렸다가
모두 모인 뒤 나누고 화려함을 자제하고
품성을 갖춰 사가에서는 인경왕후를
“천제(天帝)의 누이동생 같다”
하면서 극찬했다.
왕실에 들어와서는 가언(嘉言·좋은 말)과
선행을 즐겨 듣고 삼궁(三宮)과
사성(四聖)을 모시는 일에 정성을 다했으며,
몸이 아플 때도 혼정신성(昏定晨省:저녁에
부모의 이부자리를 보살펴드리고 아침에
안부를 묻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 효부였다.
인경왕후 아버지 김만기는 김장생 4대손이고,
서인을 대표하는 송시열의 문하생이었으며
아주 침착하고 후덕했다.
특히 딸이 왕비가 된 뒤 더욱 더
말을 삼가고 행동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김만기의 형은 ‘구운몽’을 지은 서포 김만중이다.
이들은 대제학을 지내고 현종과
숙종 대의 공신으로 종묘에 올라가 있다.
암튼, 인경왕후는 당대 최고 명문가 규수였다.
1670년 열살의 어린 나이로 숙종과 가례를 올려
세자빈이 됐고 1674년 숙종이 즉위후 왕비가 됐다.
처음에는 인경왕후가 싫어하는 서인들
집안이라서 숙종이 멀리했으나 그녀가 이쁘고
성품이 착해서 점점 정이 들었다.
하긴 이쁘면 다 용서가 된다!
"휘~익!"
"이크~" 짱돌 날라오는 소리다..
그런데 14세에 머리가 채 여물기 전에
숙종은 장렬왕후 조대비를 시중들던
장나인(옥정)과 눈이 맞아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러니 인경왕후는 찬밥신세가 된다.
장옥정은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노골적으로
접근했고 숙종은 넋이 나간 넋빠진 왕이 된다.
표현이 좀 거시기해서 숙종에게 쏘리다.
우리의 착한표 인경왕후님!
장렬왕후 조대비에게 찾아가,
"주상이 장나인의 처소에서 침소를 드는 것은
왕실에 누가 될 것 같사오니 장나인에게
처소를 따로 정해 주시도록 하시옴이
옳을까 아뢰옵니이다." 이랬단다.
그래서 장나인의 처소는 '응향각'으로
옮겨져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갖게 된다.
참 본부인 잘 둔 덕에...
참 훌륭하고 현명한 중전이셨다.
만약 시어머니 민경왕후 같았으면 숙종 얼굴에
오선지 자국을 그리고 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장나인, 장옥정은 이 훌륭하신
인경왕후를 헐뜯고 이간질을 하다가 장렬왕후
조대비에 걸려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때 장나인은 스물하나, 숙종은 열아홉이었다.
장나인과 숙종,
불같은 사랑을 하다가 찬물을 뒤집어 쓴 격이다.
거기에서 그쳤다면 어찌 재미있는
사극이 드라마로 나왔겠는가?
사랑에 눈이 멀면 보이는 것이 없는 법이다.
참, 배은망덕한 장나인과 숙종이다.
인경왕후,
속으로 얼마나 열받았을까?
명문 양가 규수라 성질도 못부리고..
그렇게 그렇게 살다가
인경왕후는 왕실 생활 10년째인 1680년 두창(痘瘡·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20세에 만삭의 몸으로 갑자기...
이 세상에 괜히 여행와서 장나인(옥정)에게
모함과 질시에 시달리다가 가셨다.
장나인의 첫번째 희생물이 되셨다.
우짜나?
참 청순가련한 인경왕후!
저 세상에서 편히 살기를 바란다.
오늘의 교훈이다.
호의를 베풀 때는 상대를 보고 베풀이야 한다.
그래야 험한 꼴을 안 보고, 안 당한다.. ㅠㅠ
내일 또 계속 됩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