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백제의 영웅 미완의 영웅 동성왕(東城王) 이야기
아들아, 공산성에서 만난 역사와 역사인물..두번째 이야기로,
백제의 시련기인 웅진백제 시절, 백제의 부흥을 이끌어낸 잊혀진 영웅,
백제의 제24대 왕인 동성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해.
위기의 백제를 다시 강국의 반열로 올려놓은 영명한 왕으로 동성왕과 무령왕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리고 동성왕과 무령왕,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들 사이에 또하나 흥미로운 인물이
있는데 일단 이 사람 얘기부터 해야할 것 같구나.
그의 이름은 곤지.
곤지(昆支,?~477.7)란 인물은 역사에 수수께끼 속 인물인데..
일본에서는 곤지왕으로 불리고 신사(神社)에 1500년 넘게 신으로 모셔져 추앙을 받는
인물이기도 하지.
우리와 중국 측 사서엔 개로왕의 아들, 일본 측 사서엔 개로왕의 아우로 나오지.
곤지(昆支, ?~477)
그런데 곤지는 개로왕의 명으로 일본으로 파견되어 떠나게 되었지.
개로왕이 곤지에게 회임한 그의 후비를 주어 보냈다는 말도 있고,
곤지가 개로왕에게 그 후비를 그에게 줄 것을 청했다는 말도 있어.
개로왕이 곤지에게 내린 임무는 일본내 백제계 유민들을 관리하고,
일본내의 백제의 영향력을 키워 백제의 우군으로 삼고 유지하는 것이 아닐까 해.
곤지는 항해길 도중 후비가 산기를 느껴
지금의 일본 사가현 가라츠시의 작은 섬, 가카라시마(各羅島)에 내려 그곳의
한 해식동굴에서 출산하였으니..
이때 태어난 아이가 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이름을 사마(斯摩,斯麻)라 했단다.
훗날, 백제의 제25대왕인 무령왕(武寧王)이 될 아이의 남다른 탄생이었지.
아빠가 앞에서 얘기했지만, 이때 백제의 상황은 날로 악화되어서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공으로 전사하였고, 엄청난 피해를 입고 쫓겨 나라의 상황이 말이 아니었단다.
개로왕의 뒤를 이은 문주왕이 일본에 있던 곤지를 불러들여 내신좌평에 임명하고
병관좌평 해구를 견제하게 했지만, 결국 문주왕이 시해되고 얼마후 곤지도 죽는데,
곤지의 죽음에 대해 사서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병관좌평 해구에 의해
살해된 것이 아닐까 하는 가능성이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지.
이 곤지란 인물이 왜 중요한가 하면..웅진백제시대 제 명에 못죽고 시해된 왕들..
문주왕과 삼근왕의 다음을 잇는 동성왕과 무령왕이 곤지와 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곤지란 인물이 또 현재 일본 왕가와 상당히 관련성이 깊은 인물이기 때문이야.
비명에 간 문주왕과 삼근왕의 뒤를 이어 곤지의 아들, 모대(牟大)가 백제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고, 모대는 일본의 츠쿠시의 군사 5백의 호위 속에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게 되었단다.
모대, 즉 동성왕(東城王,?~501, 재위479~501)은 사서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풍채가 남다르고, 키도 크고 체구가 남다르게 컸던 모양이야.
담력도 있고 무예도 출중했다고 하니..왕으로서 상당히 뛰어난 자질을 타고 났지.
그리고 백제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위협인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웅진성 북쪽에
산성을 쌓아 방비를 굳게 하였고,
신라와는 신라의 왕족과의 결혼을 통해 동맹을 강화하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신라와 협력하는 한편, 그러는 중에 또 신라의 침입에 대비해 요충지인 탄현(炭峴)에
목책성을 쌓아 대비하는 주도면밀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탄현은 후에 백제가 멸망할 때 좌평 성충(成忠)과 흥수(興首)가 의자왕에게 외적의
침입시 반드시 막아야 할 곳으로 언급하며 다시 나오는데..
그걸 보면 동성왕의 선견지명이 대단했다고 볼 수 있지.
고구려 수군의 방해를 뚫고 서해를 건너 중국의 남제와 통교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상당한 치적을 쌓았지.
이런 동성왕의 노력은 상당 부분 성과를 내었고, 왕권은 강화되고 나라도 안정되면서
백제가 다시 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찾아가고 있었단다.
아들아, 우리나라 최고의 정사(正史)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남북조 시대 남조인..남제(南齊)의 정사(正史)를 기록한 사서인 남제서(南齊書)를
보면.. 동성왕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가 나온단다.
남제서(南齊書) 동이 백제전, 동성대왕편
'490년 북위(北魏)가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의 국경을 넘어왔다.
이에 동성왕은 장군 사법명(沙法名), 찬수류(贊首流), 해례곤(解禮昆),
목간나(木干那) 4장군을 보내 북위군을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당시 중국은 양장강 북쪽엔 북방민족 선비족 계열의 북위(北魏)와 양자강 남쪽
한족(漢族) 왕조인 남제(南齊)가 대립하던 남북조시대였다.
백제는 바다 건너 남제와 교류했고, 그 남제가 백제와 북위 사이의 전쟁을 기록한 것인데...
언뜻 이해가지 않는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위진남북조 시대 (북위-남제)
북위가 기병(騎兵)을 동원한 대군으로 침공해서 백제가 대응한 전투인데..
우리가 배우는 교과서의 백제와 북위의 영역도를 보면 백제와 북위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서로 국경(國境)을 맞대고 있지 않아.
그런데 이들의 전쟁은 해전이 아니라 지상전이었고, 북위군이 한반도를 침공한
기록은 어느 사서에도 없어.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에서 싸웠던 것일까.
아마도 북위와 백제는 중국 땅에서 전쟁을 벌였을 것이고, 그렇다면 백제가
지분이 있는 요서나 산동성 일대가 전장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지.
백제의 요서경략설, 대륙백제의 존재를 다룬 드라마 근초고왕
아들아, 남제서 속 백제와 북위의 전쟁기사는 백제가 요서와 산동성 일대로
진출해서 경략했다는 하나의 증거가 아닐까 한다.
물론..정설로 인정된 것은 아니지만, 그 시대 중국의 남조였던 남제에서 기록한
사서로 백제와 북위의 전쟁은 분명한 사실이라 볼수 있고..
그렇다면 이것은 백제가 현재 중국 땅 요서와 산동성 일대에 진출해서 개척한
대륙백제의 존재를 증언하는 단서가 아닐까 하고 주목받고 있는 기사란다.
어쨌든..북위라는 북중국을 지배하는 강대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동성왕이
파견한 백제군은 대승을 거두었다.
아들아, 어쩌면 말이다..
삼국 중 가장 먼저 멸망했고, 그 멸망이 너무나 허무해서 백제가 평가절하되고
있지만, 사실 백제는 우리가 아는 이상으로 훨씬 크고 대단한 나라였는지 몰라.
아들아, 백제의 동성왕은 영웅의 면모가 있었어.
그러나 동성왕은 안타깝지만..미완의 영웅이었다 할 것이야.
동성왕 (드라마 제왕의 딸 수백향 中)
동성왕의 최후와 관련한 기사를 살펴보면 안타깝지.
동성왕은 그가 재위해 오르며 이룬 것에 자신감을 가졌고, 또 그 성공을 믿고
교만해졌단다.
그가 왕권강화를 위해 끊임없이 견제를 했으니..그 과정에서 그에게 불만을
가진 귀족이 있을 수 있고, 그의 모반 가능성에 대해 늘 경계하고 대비했어야
했는데 그는 방심했어.
또 하나 동성왕의 실책은..민심을 잃었지. 동성왕이 죽기 1년전인 서기 500년,
웅진성에 임류각(臨流閣)이란 큰 누각을 짓고, 연일 연회를 벌였다고 해.
공산성 내의 임류각..동성왕을 파멸로 이끌다.
마침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삶이 고단하니 신하들이 임류각 건축을 만류했고,
또 연회를 중지하고 곡식을 풀어 백성들을 먹여 살릴 것을 간했지만
동성왕은 그런 신하들의 간언을 무시했고, 또 그렇게 간언하는 신하들이
아예 성 안으로 들지 못하도록 성문을 닫아 걸기도 했다는구나.
백성들의 삶이 날로 피폐해지며 민심이 사나워지고 심지어 고구려나 신라로
달아나는 백성도 늘었다고 해..동성왕은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지.
501년 동성왕은 사비성 인근 벌판으로 나아가 사냥길에 나섰어.
국왕이 사냥을 하는 것은 단순히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왕의 위세를 과시하고
민심을 살피며 또한 군사훈련도 겸해서 하는 것이란다.
공교롭게도 동성왕이 사비성 사냥 때에 폭설이 내려..인근 마포촌에서 묵었는데
이곳에서..동성왕은 자객의 습격을 받고, 중상을 입었고,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었단다.
동성왕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객을 보낸 자는..
다름아닌 인근 가림성(加林城)의 성주이자 위사좌평 백가(苩加)였단다.
위사좌평은 왕의 경호를 책임진 최고의 직위를 가진 사람인데..
사건의 전말을 보자면 동성왕은 백가를 갑작스레 가림성으로 보내어 좌천성
또는 견제용 인사를 하여 불만을 품게 만들고도 방심하여 대비를 하지 않아
스스로 명을 재촉한 것이었지.
아들아, 백제의 동성왕이란 잘 알려지지 않은 묻혀있던 영웅, 위기에 처한 백제를
잘 이끌어 다시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훌륭한 왕에 대한 이야기를 네게 전했다.
그러나 그런 영웅도 초심을 잃고 방심하고, 교만해진 순간 스스로 명을 재촉했던
사실도 네게 그대로 전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고, 만약을 상상하는 것이 의미없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만약 이랬으면 어땠을까, 역사의 흐름은 어떻게 변했을까 하고..
상상해 보는 것은 역사의 교훈을 새기고, 적용해보는 의미있는 행동이라고
아빠는 생각한다.
아들아, 만약에 동성왕이 초심을 잊지않고, 계속 영명한 왕으로 남았더라면...
우리는 그를 동성왕이 아니라 동성대왕이라고 역사에 기록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더라면..백제의 역사는 그리고 한반도의 정세는 또 어떻게 변했을지
알 수 없었겠지. 안타까운 일이야.
열가지 일을 잘해놓고도
초심을 잃어서, 방심해서, 작은 성공만 믿고 교만해져서
스스로를 망친 사례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수없이 봐왔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돌아보며..
아들아, 너는 스스로 경계하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다.
그게 범인(凡人), 필부와 빼어난 인물, 위인을 가르는 결정적 차이란다.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