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33> 박선자
“習.업장 소멸시키면 본성 찬연히 드러나”
인간은 스스로 부처임을 자각할 수 있는 존재이기에 위대하다. 지속적인 수행으로 업장이 소멸되면 본연의 자성이 드러나 찬연히 빛을 발한다. 人間은 누구나가 고통이 없는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그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적에 고뇌가 없는 안락한 행복의 경지, 그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된 행복이 가능할 것인가? 그래서 인간은 생, 로, 병, 사 (生老病死)로부터 벗어난 영생(永生)의 안락한 삶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갈구하게 된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이고도 본능적인 추구가 종교와 철학을 낳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와 같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철학계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고, 종교계에서도 제시한 방법이 다양하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의 고액(苦厄)을 구제함에는 먼저 인간의 본질, 즉 참다운 자아(自我)가 무엇인가를 확철하게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바탕을 철두철미하게 밝히고,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안락의 경계에 인도하는 가르침은 역시 불교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불가에서의 수행의 목적은 참 자아, 즉 자성(自性)을 깨달아 성불(成佛)하는 일이다.
초조달마 때부터 닦아오던 순선시대의 禪 큰 효과
일상삼매.일행삼매의 청화선사 수행법서 맥이어
참나(眞我)는 우주의 생명인 동시에 모든 존재의 본질적인 생명자체인 부처를 의미한다. 또한 이 자리가 바로 법신불(法身佛) 자리이기 때문에 이 자리를 체험하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하겠다. 부처님 가르침의 팔만사천법문은 모두가 다 이 마음자리(自性)를 밝히는 가르침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깨달아서, 즉 견성오도(見性悟道)해서 법성(法性), 불성(佛性)을 증오(證俉)하더라도 보임수행(保任修行)을 해서 오랫동안 익혀 온 습관성(習慣性)을 없애야 비로서 성불(成佛)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의 본성(本性)이 바로 부처이고, 우주만유의 근본적인 생명의 본 바탕 그 자리가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우리가 수행을 통하여 업장(業障)이 소멸 되었을 때 이 자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고, 체험된 그 자리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수행, 다시 말해서 불성(佛性)체험을 지속해 나가는 삼매를 통해 그 동안 쌓인 업장을 모두 소멸하여 부처와 하나가 될 때, 그 때 성불(成佛)이라 한다. 아 자리는 이루다 헤아릴 수 없는 만공덕(萬功德)을 갖춘 자리이며, 상락아정(常樂我淨)의 경계이므로 영원한 행복 자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수행(修行)을 통하여 깨달아서 이러한 성불의 경지에 이르고저 하는 것이 불가에서의 수행의 목적이다.
이와 같이 인간존재의 참다운 자유와 행복은 만유의 근원의 세계(본래면목)로 회귀할 적에 가능한 것으 로 보는 것은 비단 부처님의 가르침 뿐만 아니라 서양의 실존철학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하이데거(Heidegger)는 모든 존재자(현상적 존재)가 생(生)하고 멸(滅)하는 그 지평(地平)과 같은 자리를 존재(存在)라 이름하고 인간존재가 고향과 같은 존재의 세계로 회귀할 때에 참다운 자유와 행복이 가능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때에 인간존재는 참다운 순수성을 되찾을 수 있게 되어 모든 무질서로부터 벗어나 순리의 세계를 회복할 수 있으며, 그때 비로소 진정한 행복과 자유, 그리고 평화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수행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고, 성불(成佛)의 첩경(捷徑)이 될 것 인가를 모색하게 된다.
우리가 수행(修行)을 하는 목적은 무상불도(無想佛道)를 성취하고 무량중생(無量衆生)을 제도하여, 그들을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데 있다. 무상불도를 성취하는 방법, 즉 참다운 자성(自性)을 깨닫는 방법으로는 크게 기도와 염불, 참선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수행 방법 중에 가장 수승(殊勝)한 법으로 각광(脚光)을 받고 있는 것은 역시 참선(參禪)법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도 이 법에 의존하여 대도(大道)를 성취하였고 역대의 많은 조사들께서도 그러하셨음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禪)은 근래에 들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염불선, 화두선, 묵조선 등)나뉘어 지고 있으나 여기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선은 순선(純禪)시대의 선이다. 그것은, 달마대사 때부터 육조 혜능대사에 이르기까지 닦아오던 선으로, 아직 수행법에 따라 종파가 갈라지지 않았던 시대에 행해지던 선이다. 그것은 오로지 마음을 밝혀 본래(本來) 성품인 자성(自性), (불성 혹은 법성 부처 진리)에만 마음을 집중하는 선이라 하겠다.
4조 도신대사의 〈입도안심요방편문〉에서 〈문수설반야경〉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부처를 염(念)하는 염불(念佛)하는 마음이 바로 佛이요. 망상하는 마음이 곧 중생이며, 念佛은 곧 念心이며 구심(求心)은 바로 구불(求佛)인데… 왜냐하면 마음은 본래 모양이 없고, 부처 또한 모습이 없기 때문에 마음과 부처가 둘이 아닌 도리를 알면 바로 이것이 안심(安心)이니라.”하였다.
마조도일선사의 〈조당집〉에서도 대중들에게 자주 이르기를 “너희는 지금 각자의 자신이 佛이며, 心이 곧 佛心임을 믿으라. 이 까닭에 달마대사가 남천축국으로부터 오셔서 상승(上乘)의 일심지법을 전하여 너희를 개오(開悟)케 하고자 한 것이니라” 하였다.
상술한 조사들의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중생의 참다운 마음은 불심이고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마음(부처, 불성, 실상, 진리, 정법 등)뿐이라는 것, 그러므로 부처인 진리를 깨닫기 위해서는 부처인, 마음인, 실상을 믿고, 염(念)하라는 말이다.
천태지의선사의 〈마하지관〉에서도 위와 같은 뜻의 수행법을 설하고 있다. 그 법은 부처의 실상, 마음의 실상을 바로 관찰하라는 내용이다. 그 실상이란 공.가.중(空.假.中)을 뜻한다. 다시 말하여 바로 보면 우주는 텅 비어있고, 그러나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묘유(妙有)가 충만해 있다는 말이다. 실상은 공(空)만도 아니고 가(假)만도 아니기에 중도(中道)란 뜻으로 부처의 실상을 표현한 것이다.
〈보적경〉에 이런 말이 있다. “백천만겁 구습결업(百千萬劫 久習結業)이 이실상관 즉개소멸(以實相觀 卽皆消滅)”이라, 백천만겁 동안 익히고 익힌 묵은 업장이 이 실상을 관하는 것으로써 곧 즉시에 소멸한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공덕이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이 무궁무진 하여 이것을 요약하여 상락아정(常, 樂, 我, 淨)으로 표현한다.
즉 常은 우리의 본래의 생명이 영생불멸 하다는 말이고, 樂은 위없는 안락과 참다운 영원한 행복을 뜻하며, 我는 모두를 다 알 수 있고, 할 수 있는 무한한 성능과 지혜를 갖춘 大我, 우주 자체를 말하고, 淨은 번뇌가 없는 청정무비한 맑은 마음을 뜻하므로 그 세계를 우리가 관(觀)하고 염(念)할 적에는 실상의 빛이 우리의 어두운 업을 순식간에 녹이고도 남음이 있다는 뜻으로 실상관법의 중요성과 그 법의 수승함을 역설한 내용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순선(純禪)시대의 수행법은 청화(淸華)선사의 정통선의 향운(正統禪의 香薰)에서 다시 그 맥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를 진리인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하는 참선의 지름길은 우리의 마음을 부처인 실상에다 안주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선이 됩니다”고 설하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서양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참된 철학적 사유란 단적인 가운데 오로지 존재 (모든 존재자를 생하고 멸하게 하는 그 지평과 같은 자리만)을 생각(念)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헤라클레이토스(Heraclitos)도 “참답게 철학함이란 로고스(Logos), 즉 우주의 법칙만을 사유하는 것이며 그러 할 때에 참된 지혜가 나오는 것이다” 하였다.
혜능대사는 그의 〈단경〉에서 “너희가 진직코 구경지(究境地)를 성취하고자 할진대는 모름지기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를 할지니라”하였다. 일상삼매란 천지우주는 하나의 상인 부처, 마음뿐이라는 생각, 다시 말하여 부처인 중도실상의 자리(眞空妙有)에 일념으로 마음을 안주시키는 것을 말하고, 일행삼매란 그러한 상태를 염염상속(念念相續)으로 지속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수행법은 청화(淸華)선사의 〈정통선의 향훈〉에서도 수차 설하고 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해야만이 참다운 선입니다” 혜능대사의 〈단경〉에서 결정 설법한 이 수행법을 통하여 순선(純禪)시대의 수행법이 반야바라밀에 입각한 일상삼매와 일행삼매가 혜능대사 직설대로 최존(最尊) 최상승(最常勝), 제일의 수행법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청정한 계행이 필수적으로 뒷받침 되어져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났음에 대한 감사함은 스스로가 부처임을 자각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 아닐까, 그래서 지속적인 수행을 통해 업장이 다 소멸될 때 그때 우리 본연의 자성이 스스로 그 찬연한 빛을 드러낼 것이 아니겠는가.
박선자/ 경상대 철학과 교수
[출처 : 불교신문 2090호/ 12월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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