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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 1
▣ 진중권
중앙대학교 겸임 교수와 한국예술종합학교 초빙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미학자.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표작으로 『미학 오디세이 1, 2, 3』,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이 있고 『춤추는 죽음 1, 2』, 『앙겔루스 노부스』,『천천히 그림 읽기』(공저), 『진중권의 현대미학 강의』, 『레퀴엠』외 다수가 있다.
▣ Summary
『미학 오디세이』로 미학을 우리에게 친숙하게 만들어주었던 저자가 미학과 미술사를 접목하여 쓴 새로운 개념의 서양미술사이다. 대부분의 미술사가 다양한 양식에 속하는 작품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서술하는 데 그친데 반해 이 책은 여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구성을 시도한다. 대상 영역을 미술사의 맥락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몇몇 주요한 양식으로 한정하되, 선택된 양식들 각각에 대해서 구체적인 조형의 원리 및 그 바탕에 깔린 예술의 의지까지 드러내는 깊이 있는 접근이다. 이 깊이를 확보하기 위해 미술사학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꼽히는 저서와 논문을 선택하여 선형적으로 배치하고 있다. 서술 방식은 서양미술의 원리와 역사를 하나로 묶어내, 서양미술의 원리를 그 시대 상황 안에서 설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서양미술의 역사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살피는 것이다. 형태, 색깔, 빛깔 등 미술의 구성요소들을 통해 각 시대 예술의 형상화 원리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고, 더 나아가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각 시대의 미학적 관념을 명쾌하게 알 수 있다. 시대에 따라 변하는 예술 감각을 체득하면서 미술 흐름에 대한 한층 깊이 있는 이해에 닿을 수 있다.
▣ 차례
1. 아름다운 비례를 찾아서
객관적 비례와 제작적 비례 / 이집트의 비례론 / 예술가의 전설 / 영원의 상 아래서
콘트라포스토 / 단축법 / 확대법 / 감각의 세계 / 오네쿠르의 포트폴리오
우주론적 비례론 / 비트루비우스의 인간 / 뒤러의 비례론 / 비례론의 종말
황금분할 - 파이 구하기 / 피보나치 수열 / 황금분할을 이용한 작품들 / 황금분할과 아름다움
2. 색과 빛의 황홀경
아르테스 메카니카에 / 형태에서 빛깔로 / 플로티노스의 반론 / 비례, 원인이야 결과냐
재료의 미학/ 빛의 상징주의 / 알레고리 / 사물과 기호 / 이미지와 텍스트
실재와 환상 / 실재란 무엇인가
3. 자연을 내다보는 창문
날개 달린 눈 / 알베르티의 눈 / 알베르티의 그리드 / 올바른 구성 / 신적인 힘
물감에서 나오는 빛/ 또 하나의 신 / 자연의 수정과 완성
최고의 작업 / 아펠레스의 모함 / 자연으로부터 배워라
4. 상징 형식으로서 원근법
원근법의 탄생 / 다 빈치의 노트북 / 원근법의 붕괴?
소실점과 소실축 / 고대의 원근법?
5. 물구나무 선 원근법
소실점이 아래로 / 직선을 곡선으로 / 이미 굽은 곡선은? / 중심에서 주변으로
공중부양 / 감추어진 역원근법 / 오목거울과 볼록거울 / 투시법의 천재지변
큐비즘 / 프리미티비즘인가 / 왜곡상
6. 도상학에서 도상해석학으로
전도상학적 단계 / 교정 원리로서의 양식사 / 도상학적 단계 / 교정 원리로서의 유형사
도상해석학적 단계 / 교정 원리로서의 상징사 / 중세 속의 프로토-르네상스
카롤링거 르네상스 / 고대의 부활 / 트롱프뢰유 - 회화 속의 눈속임
건축 속의 눈속임 / 예술인가 오락인가
7. 엘 그레코, 신학적 가상현실
초월적 세계로 / 영혼을 보는 자 / 얼마나 많은 피가 드는지 / 비전의 현현
물질주의와 정신주의 / 도취와 황홀경 / 정신사로서의 예술사 / 그는 미쳤다
8. 시(視) 형식으로서 미술사
개인과 민족의 시대 / 시형식으로서의 예술사 / 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으로
평면에서 깊이로 / 닫힌 형태에서 열린 형태로 / 다원성에서 통일성으로
명료성에서 불명료성으로 / 외적 미술사와 내적 미술사 / 유화 - 피그먼트 / 결합매체 / 회화적인 것
9. 예술을 다는 저울
아카데미의 전횡 / 라파엘로냐 티치아노냐 / 형태냐 색채냐 / 푸생이냐 루벤스냐
로코코를 향하여 / 근대적 예술비평의 탄생 / 문학으로서의 비평 / 화가들의 저울
10. 고대인의 자연은 어디로?
아름다운 자연 / 바로크에서 신고전주의로 / 색채에서 윤곽으로 / 자연미와 이상미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 / 제작의 테크놀로지 / 그림 속에 숨은 고대의 조각들
남자를 사랑하는 눈으로 / 화면 구성 - 소실점 / 대칭과 균형 / 바로크
11. 혁명의 예술, 예술의 혁명
저물어가는 로코코 / 다비드의 신고전주의 / 혁명의 화가 / 다비드의 후예들
낭만주의의 시대 / 낭만적 고전주의 / 낭만적 초기 바로크
낭만적 성기 바로크 / 회화적 현대성
12. 인간, 신을 닮기를 거부하다
해체의 전주곡 / 주도적 과제 / 예술들의 분열 / 신을 닮은 인간
인간의 영원한 상 / 총체예술과 퇴폐예술 / 중세인가 포스트모던인가
아름다운 비례를 찾아서
이미지는 보통 형태와 색채의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그림을 그리는 것도 소묘와 채색의 두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대개의 경우 그림을 그리는 것은 소묘로부터 시작한다. 그림을 그릴 때 화가들은 먼저 신체 부위들 사이에 적절한 비례를 찾으려 했다. 아름다움이 수적 비례에 놓여 있다는 것은 인류의 아주 오래된 믿음이었다. 이 장은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 1892~1968)의 논문을 토대로, 각 시대와 문화가 인체의 묘사에 각각 어떤 비례론을 사용했는지 살펴본다. 우리의 여행은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출발하여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로 이어진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리글(Alois Riegl, 1858~1905)의 말대로 ‘솜씨’가 아니라 ‘의지’다. 시대와 문화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양식은 그저 각각 다른 ‘예술의지’를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파노프스키의 비례론은 ‘예술적 묘사의 대상이 되는 한에서 살아 있는 생물, 특히 인간 신체의 비례관계에 관한 이론’이다. 비례론의 관점에서 양식에 접근하면 예술사에 등장한 양식들의 바탕에 깔린 예술의지들을 객관적으로, 그것도 수학적 엄밀성을 가지고 기술할 수 있다.
이집트의 장인들은 조상(彫像)의 제작에 있어 ‘카논(Kanon)’을 사용했다. 아득한 고대에 인체에 대한 실측을 통해 제정된 카논이라는 신체 비례의 표준이 있어 이집트의 장인들은 모델 없이도 조상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인체를 묘사할 때, 이집트인들은 먼저 모눈을 그린 후 그 위에 신체 부위를 배분했다.(이집트 예술의 후기 카논의 묘사. 좌측 사진) 자세와 각도, 위치에 따른 신체 길이의 변화는 무시했다. 평면을 모눈으로 모듈화하고 정해진 수치에 따라 형을 만드는 방식. 이런 몰(沒)개성적인 제작에서는 장인들이 창의성을 발휘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스 예술가들도 물론 ‘카논’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들은 달랐다. 인체의 묘사에서 신체의 길이는 모델의 자세와 시선의 각도,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졌다. 그리스 조각을 보면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는 듯하다. <쪼그리고 앉은 비너스>(기원전 200~150년경. 우측 조상)를 보라. 방금 목욕을 마친 듯 몸을 살짝 옆으로 비틀면서 일어나려는 여신의 우연한 동작을 포착했다. 이집트에서라면 이런 기묘한 자세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스의 조상은 예로부터 어느 정도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이집트와 그리스의 이러한 차이는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이집트인들이 영원불변하는 내세를 지향했다면, 그리스인들은 변화무쌍한 현세를 긍정했다. 시간의 영원성을 지향하는 이집트 사회의 보수성은 혁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집트인들은 신체를 늘 불변적이고 필연적이며 획일적인 모습으로 그리려 했다. 게다가 이집트는 전제군주의 나라였다. 예술에서 개개인에게 창작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다. 그 결과 양식의 변화는 지극히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일어날 수 있었다. 반면 그리스인들은 우연적이고 가변적이며 개별적인 감각의 세계를 존중했기에 자세와 각도, 위치에 따른 변화를 묘사하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한마디로 이집트 조상의 제작 방식이 ‘기술’에 속한다면, 그리스의 그것은 ‘예술’에 속한다.
서양의 중세에 들어오면 비례론에 대한 또 한 번의 급격한 변화가 찾아온다. 그 흔적을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오네쿠르(Villard de Honne-court)의 앨범(1235년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양피지 앨범은 중세의 장인들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먼저 자와 컴퍼스로 기하학적 도형을 그린 후, 그 추상적 프레임에 구상적인 형태를 붙여 나가는 방식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몸통과 사지는 별 모양의 프레임, 또 머리 부분은 동그라미와 십자가를 이용해 처리하곤 했다. 쉽게 작업하기 위해서였다. 이미지들은 예술이 아니라 기술의 산물이었다. 현세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중세인들은 가시적 세계의 생생한 묘사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르네상스에 오자 다 빈치는 인체에 대한 관찰과 측정으로 비례론을 경험과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흔히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이라고 불리는 다 빈치의 펜화(1487년. 우측 그림)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많이 복제되는 그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이미지는 아름다움을 자연스러움과 동일시하며 실제 인체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통해 이상적 비례에 도달하려 한 노력의 결과를 보여준다. 손마디, 손가락, 손바닥, 팔의 아랫부분, 팔 전체 등의 길이를 황금분할(대략 1: 1,618에 해당하는 비율. 아름다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속성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사용된다)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르네상스가 끝나자 비례론의 예술적 호용은 의문에 부쳐지게 된다. 회화에 대한 시대의 관념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회화의 본질을 사물의 ‘객관적 재현’보다는 예술가의 ‘주관적 표현’에서 찾게 되자,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절대적 의미를 가졌던 비례론이 별 의미가 없게 된 것이다. 이어지는 바로크는 어차피 형보다는 색에 주목하는 시대였다.
색과 빛의 황홀경
소묘가 끝났으면 채색을 해야 한다. 이 장에서는 로사리오 아순토의 저서를 토대로 미와 예술에 대한 중세인의 생각을 살펴본다.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시기에 서구의 미감에는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고대인들이 형태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면 중세인들은 무엇보다도 색채와 광채에서 아름다움을 보았다. 중세의 예술은 우리를 감각의 세계를 넘어서 저 높은 곳에 있는 초감각의 세계로 고양시킨다. 그것을 감상할 때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 아래로 눈에 보이지 않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다.
중세인의 눈은 현세보다 내세에 맞춰져 있다. 그 시절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은 감각적 세계가 아니라 초월적 세계에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 것은 그 바탕에 신에게서 흘러나오는 빛이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감각적 세계보다 초월적 세계를 중시한 중세에는 예술로 감각적 세계를 재현하기보다는 그 너머의 초월적 세계를 표현해야 했다. 문제는 그 초월적 빛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보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중세의 장인은 그 과제를 재료로 해결했다. 즉 값비싼 재료의 찬란한 색채와 광휘를 그 초월적 빛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중세의 공예는 온통 번쩍 이는 황금, 은은하게 비치는 은빛, 형형색색의 보석, 몽환적 효과를 내는 다양한 색깔의 희귀한 염료 등으로 뒤덮여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실제(reality)’란 합의된 세계인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눈에 보이는 세계가 유일한 실재지만, 중세에 그것은 유일한 실재도, 중요한 실재도 아니었다. 중세에 ‘합의된’ 진정한 실재는 감각 너머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세계였기에, 가시적 세계를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는 현대 예술이 처한 상황을 닮았다. 카메라의 등장 이후 현대 예술에서도 재현은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미술사가 아순토는 여기서 중세 예술과 현대 예술 사이의 평행선을 본다. 실제로 둘은 닮았다. 가령 중세 예술이 가시적인 것을 넘어 비가시적인 세계를 드러내려 했다면, 현대 회화 역시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게 아니라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파울 클레)하려 한다. 중세 예술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형식(빛과 색)에 담아 전달했다면, 현대 예술에서도 ‘내용은 형식 속에 침전’(아도르노) 된다.
중세가 저물어가면서 현실에 대한 관념도 바뀐다. 사람들은 서서히 감각적인 현세가 유일한 세계라 믿게 된다. 이에 따라 사물을 초월적 의미와 연결시켰던 중세의 상징적 사유가 물러가고, 그 자리에 사물과 사물의 현실적 연관을 찾는 근대의 인과적 사유가 들어서게 된다.
자연을 내다보는 창문
‘부활’이라는 어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르네상스 시대에 서구인의 미감은 고대 그리스 취향으로 돌아간다. 이 장에서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의 저서를 토대로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시기에 서구 미술에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살펴보게 된다. 알베르티가 중세의 미론을 무너뜨려 나가는 것을 주목하라.
중세에 예술은 그저 기예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중세의 장인들이 형을 만드는데 적용한 기하학적 프레임은 그저 ‘쉽게 작업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이 불과했다. 그들이 연출한 화려한 색채 효과 역시 빛의 신학에 대한 이론적 이해에서 나왔다기보다는 그저 주문자의 요구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에서 비롯된 것에 더 가깝다. 르네상스에 들어오면 상황이 달라진다. 지적 교양을 갖춘 화가들은 이제 자신들의 작업에 이론적 표현을 주려고 한다. 알베르티의 『회화론』은 이 새로운 정신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예다. 창작을 이론으로 뒷받침하려는 화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예술은 비로소 정신노동으로 인정받는다. 기능공에 불과했던 장인들이 어느새 교양인으로 부상한다.
중세 예술이 초월적 세계를 가시화하려고 했다면, 르네상스 ‘화가의 임무’는 가시적 세계를 재현하는 데 있었다. 알베르티는 회화를 ‘자연을 향해 난 창(窓)’으로 규정했다. 회화는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효과를 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알베르티에 따르면 화가는 ‘평면적으로 관찰한 어떤 물체를 화면이나 벽면 위에 선으로 그리고 색을 입혀야’ 하는데, 그렇게 그려진 물체는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적당한 시점에서 보았을 때 마치 부조처럼 돌출하여 실물을 방불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묘사에는 놀라운 힘이 깃들어 있다. “회화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볼 수 없는 사람들을 우리 눈앞에 데려다 주고, 이미 몇 백년 전에 세상을 떠난 사람들일지라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신적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원격현전(tele-presence)의 능력을 알베르티는 ‘신적인 힘’이라고 부른다. 이 힘이 무서운 사람도 더러 있었던 모양이다. 가령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장수인 카산드로스는 대왕의 초상 앞에서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고, 자신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케다모니아의 아케실라오스는 후세인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제 얼굴을 그리거나 새기지 못하게 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회화의 본질을 환영 효과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회화의 환영주의가 그저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알베르티는 화가라면 때로 자연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가상’이라는 고전 예술의 원칙은 이렇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창술경기에서 한 눈을 잃은 몬테펠트로 공작을 그릴 때, 눈이 성한 쪽을 취해 초상을 프로필로 처리했던 것이다.(<우르비노 최초의 공작 페드리고 다 몬테펠트로> 1472년. 우측 그림) 회화는 실물을 방불케 하는 ‘가상’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동시에 그것은 아름다워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고전주의 미학은 모사의 생생함만 추구하는 자연주의와는 구별된다.
엘 그레코, 신학적 가상현실
왜 시대와 문화마다 양식이 달라지는 것일까? 여기에서는 막스 드보르작의 저서에서 ‘마니에리스모’(화가들이 매너리즘에 빠져 영감을 얻기 위해 자연에 의뢰하기보다는 전적으로 전통 형식들을 재활용하는 데 의존하던 시기)에 관한 장을 취하여, 사회의 정신적 분위기가 어떻게 회화의 묘사에 영향을 끼치는지 추적한다. 범람하는 물질주의에 반발하는 엘 그레코의 정신이 어떻게 현실 공간을 오늘날의 가상현실(VR)과 비슷한 곳으로 바꾸어놓았는지 주목하라.
화가로서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명성은 이 한 장의 그림에서 비롯된다. 크레타 출신으로 스페인에서는 그냥 ‘그리스인’으로 불렸던 마니에리스모의 거장. 그는 이 그림이 아직도 걸려 있는 그 장소, 즉 톨레토의 산토 토메 성당에서 일어났던 어떤 기적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1586~1588, 좌측 그림)이란 이 작품의 화면은 크게 위아래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단은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는 매장 의식(儀式)을 보여준다. 백작의 사체를 입관하는 두 성자는 찬란한 복장을 입고 있어, 검은 상복을 입은 세속의 인물들과 시각적으로 구별된다. 상단은 백작의 영혼이 천국에 받아들여지는 ‘상상’을 보여준다. 천사 하나가 구름 사이의 비좁은 틈으로 백작의 영혼을 집어넣는다.
하단은 다시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의식의 현실, 다른 하나는 기적의 환영이다. 저 놀라운 사건은 세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기적을 보는 것은 오직 두 사람, 성자들 바로 왼쪽의 어린 아이와 그 반대편에 등을 돌리고 있는 신부뿐이다. 아이는 그림 밖의 관람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손가락으로 이적의 현장을 가리키고, 신부는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고 놀라 두 팔을 벌린 채 놀라운 은총을 내려준 하늘을 바라본다. 아마도 아이는 천진난만함 때문에, 신부는 독실한 신앙심 때문에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의 손가락이 향한 곳, 그리고 신부의 눈이 향한 곳에는 세인이 보지 못하는 세계가 있다. 죽은 백작의 영혼은 지금 그리로 간다. 감각의 눈으로 보는 물질적 세계에서 영혼의 눈으로 보는 초월적 세계로. 백작의 영혼이 향하는 길은 또한 르네상스에서 마니에리스모로 넘어가는 시기에 예술이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다시 <오르가스 백장의 매장>으로 돌아가 보자. 엘 그레코가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초현실의 비전이다.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의 환상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그들의 영혼을 구름에 난 좁은 틈새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만든 것이다. 교회와 세속에 범람하는 물질주의를 참을 수 없었던 영혼은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만 볼 수 있는 초월적 비전의 세계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그 때문에 오로지 물질의 세계만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엘 그레코는 종종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순수한 이상주의의 화신,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와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마니에리스모의 작품들에게서 형태의 아름다움이라는 르네상스의 이상은 파괴된다. 비례의 완벽함이 포기되어 인물의 형태는 해부학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왜곡된다. 원근법으로 재현하던 3차원 공간의 자리에 현실을 넘어선 초월적 세계의 비전이 들어선다. 마니에리스모는 창안 없이 르네상스 기법을 이리저리 고쳐 반복하는 매너리즘이 아니다. 그것은 르네상스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감정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양식 변화의 원인을 정신사에서 찾는 견해를 미술사학에서는 ‘정신사로서의 예술사’라고 부른다. 막스 드보르작이 같은 제목의 책을 썼을 때, 마침 세계는 엘 그레코가 살던 당시와 비슷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광인’으로 여겨져 오랫동안 미술사에서 잊혔던 이 마니에리스모의 거장이 다시 주목 받게 된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게다.
예술을 다는 저울
예술가와 대중 사이에서 비평가는 예술가에게 대중의 취향을 전달하고, 대중에게는 예술가의 메시지를 이해시키면서 사회의 예술적 취향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 장에서는 알베르트 드레스드너의 저작을 바탕으로 미술사에서 비평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본다. 화가가 아닌 아마추어 딜레탕트들의 비평이 어떻게 견고한 프랑스 아카데미의 고전주의를 무너뜨리고, 18세기의 ‘로코코’라는 바로크의 관능적 양식을 낳았는지 살펴보게 될 것이다.
‘예술가를 재는 저울’이 있다. 근대 미술비평의 선구자 로제 드 필(Roger de pile, 1635~1709)이 고안한 것이다. 그 ‘저울’은 정확히 말하면 사람을 올려놓는 체중계가 아니라, 예술가들의 능력을 평가하는 원리를 다룬 저 비평가의 저서 이름이다. 이 책에서 그는 미술 작품을 구성, 드로잉, 색채, 표현의 네 측면으로 나누어 다면적으로 평가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재미있는 것은 그가 이 기준으로 당대에 이름이 알려진 모든 화가의 작품에 점수를 매겼다는 점이다. 미술사의 거장들을 졸지에 시험을 마치고 학교에서 성적표를 받는 학생들 처지로 만들어버린 것이 흥미롭다.
바로크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 때에도 프랑스는 여전히 고전주의의 나라였다. 거기에는 예술 아카데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랑스 고전주의의 대표자 샤를 르 브랭(Charles Le Brun, 1619~1690)은 루이 14세를 만나 아카데미의 설립을 약속받는다. 당시 화가들에게는 중세적 장인조합의 독점에 대항할 근대적 예술조직이 필요했다. 반면 모든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려 했던 절대왕정은 사회의 미적 취향마저 자신의 통제아래 놓고 싶어했다. 이 둘의 이해관계가 만나는 곳에서 1648년 드디어 파리에 예술 아카데미가 설립된다. 원래 르네상스의 고전주의는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자유로운 창안의 결과였다. 하지만 프랑스에 들어와 그것은 졸지에 ‘위로부터’ 강요되는 교조로 돌변한다.
그뿐인가? 프랑스 고전주의는 애초에 권력과 동거관계에서 탄생했기 때문에 강하게 정치색을 띄고 있었다. 절대왕정이 예술에 바라는 것은 분명했다. 군주의 명성, 궁정의 광휘, 국가의 과제를 선전하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예술은 관료주의적 프로파간다(propaganda, 선전 활동)에 가까워진다. 더욱이 예술이 국가와 몸을 섞은 이상, 이 공식 취향에 반대하는 데는 커다란 모험이 따랐다. 자칫 국가에 반역하는 반국가주의 음모로 내몰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에 대한 언급이나 비평도 전문가들의 집단인 아카데미 내의 현상이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아카데미는 예술에 대한 담론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곳이 아니었다. 파리에는 이미 ‘살롱’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고, 거기에는 예술에 대한 관심과 소양을 갖춘 무서운 아마추어들이 몰려들었다. 반기를 든 것은 로제 드 필이었다. 화가도 아니었고, 아카데미 소속도 아니었던 한 명의 아마추어(素人)가 예술가들의 절대왕정을 무너뜨렸다.
고전주의자들은 작품 제작의 합리적 규칙을 제정하여 이를 모든 예술가들에게 법칙으로 부과하려 했다. 모든 규칙은 아카데미의 총회에서 토론을 통해 제정되었다. 예술을 합리적 규칙의 체계 안에 있는 감옥에 가둬놓은 것이다. 로제 드 필은 예술을 규칙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작품을 만드는 것은 죽은 규칙이 아니라, 본성이나 천재, 재능과 같은 살아 있는 요소이다. 비평도 마찬가지다. 비평은 죽은 규칙을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살아 있는 요구들, 사람들의 살아있는 성향에 응답하는 것이며, 여기에 필요한 것은 인위적 규칙이 아니라 ‘자연적인 눈’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훗날 낭만주의자들의 발전시킬 관념을 선취했던 것이다.
로제 드 필은 당대 예술의 고대 귀속성을 정면으로 부인했다. 한마디로 서구 예술의 흔들리지 않는 전범으로 통하던 고전고대 예술 이상 자체를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인간이 신들 아래 있을 필요는 없다.” 이런 태도는 본질적으로 근대주의라 할 수 있다. 그의 비평에 힘입어 그동안 고전주의의 아성으로 남아 있던 프랑스에서도 바로크적 경향이 관철되기 시작한다. 프랑스에서 바로크적 경향의 관철은 로코코라는 이름의 18세기 양식을 낳는다. 화려하고 경쾌한 관능적 탐미주의다. 여기에서 프랑스 회화는 독자성에 도달한다. 이런 급격한 변화가 한 사람의 비평가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인간, 신을 닮기를 거부하다
20세기에 들어와 예술은 고전 예술의 이념이 무너지고 모습을 크게 바꾸었다. 이 장에서는 한스 제들마이어(Hans Sedlmayr, 1896~1984)의 저서를 토대로 고전 예술의 이념이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살펴본다. 돌아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향수로 점철된 이 저서에서 제들마이어는 예술적 현대를 독립 자율화와 탈중심화로 특징짓고, 그것을 예술적 퇴폐의 현상으로 규정하며 중심의 상실을 한탄한다.
르네상스 이후 이른바 ‘대(大)이론’으로서 서구의 예술을 이끌어온 고전 예술의 이념. 그것은 19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하여 20세기에 들어오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에 이른다. 이 변화는 어지간히 예술을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보일 정도로 급격한 것이었다. 회화에서는 재현이 사라지고(추상회화), 음악에서는 조성이 사라지고(무조음악), 문학에서는 의미가 사라지고(무의미시), 연극에서는 개연적 연결이 사라지고(부조리극), 이른바 ‘현대’ 예술은 겉으로만 봐도 그 이전의 예술과 현저히 다르다.
한스 제들마이어 같은 미술사학자는 이러한 현대 예술에서 어떤 건강하지 못한 몰락의 징후를 본다. 그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 예술은 자기 파괴의 길을 걷고 있다. ‘해체’와 ‘퇴폐’로 향하는 이 병적인 취향은 이제까지 서구 예술에 생명을 부여해 주었던 중심, 즉 ‘신을 닮은 인간’이라는 이념이 사라진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질병에 대한 처방으로 다시 과거로 돌아가 ‘영원한 인간의 상’을 회복하자고 주장한다.
제들마이어가 보기에 오늘날 예술의 해체를 초래한 것은 ‘자율성’의 이념이었다. 르네상스 이후로 ‘예술’은 여전히 종교적인 예배와 도덕적 훈시, 정치적 선전과 같은 예술 외적인 기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사정이 달라진다. 이른바 ‘미적인 것의 해방’이 시작된다. 또한 과거 ‘예술들’의 전체성도 해체된다. 예를 들어 중세의 성당은 총체예술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건축이자, 조각이자, 회화이자, 음악이자, 연극이자, 문학이었다. 개별 장르들은 여전히 그 총체예술의 한 부분으로서만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18세기 말 이래로 음악은 교회의 예배에서, 회화는 성당의 벽에서 떨어져나온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아예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는 절대 음악,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추상회화로 자립화해 버린다.
제들마이어는 ‘시대의 꿈’인 예술에서 현대의 병적 징후를 읽은 것이다. “고차원적인 정신 상태를 희생시켜 얻은 한층 저하된 정신 상태의 비대증.” 이것이 ‘중심의 상실’이 낳은 현대의 병적 상태다. “유일한 처방은 새로운 상태 안에서 인간의 영원한 상을 확립해 재형성하는 것이다.” 진단은 처방으로 이어진다. 이 묵시록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과거의 이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얼마 후에 발표한『성당의 탄생』은 매우 시사적이다. 성당을 짓던 시절, 모든 예술은 하나의 주도적 과제 속에서 양식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흘러간 과거에 대한 이 카톨릭 보수주의자의 향수. 하지만 이 시대에 다시 성당을 짓는 것, 총체예술을 재연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실제로 20세기에 제들마이어의 관념을 실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예를 들어 나치 정권에서는 국가가 예술에 주도적 과제를 부여하고, 모든 매체를 결합시킨 총체예술로 신의 형상을 닮은 인간, 즉 국가의 영웅을 예술의 이상으로 내세운 바 있다. 제들마이어는 전쟁 전에 나치당에 가입한 경력도 있다. 제들마이어가 현대 예술을 타락의 상태로 규정하는 것은 나치들이 ‘퇴폐예술’이라 하여 현대 예술을 탄압했던 것을 생각나게 한다. 제들마이어가 현대 예술을 탄압하는 나치의 극단적인 문화 정책에까지 찬성했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한 가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나치의 문화 정책이 제들마이어처럼 현대 예술 자체를 미학적, 윤리학적 타락으로 바라보는 당시 독일 사회의 문화적 보수주의를 먹고 자라났다는 것이다.
현대 예술에 대한 제들마이어의 태도는 지나치게 보수적이어서 때로 그의 언급이 우스꽝스럽게 들릴 정도이다. 하지만 이를 단지 어느 문화보수주의자의 시대착오로 돌려버릴 수 없는 사정이 있다. ‘모던’ 이전에 대한 제들마이어의 보수적 향수가 묘하게 ‘모던’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비판과 합류하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건축에서는 장식과 더불어 건축의 상징적 차원을 부활시킨다. 전통으로 복귀하려는 제스처는 다른 장르에서도 나타난다. 게다가 맥루언에 따르면 전자 매체가 ‘지구촌’이라는 지구적 규모의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낸다. 나아가 최근의 디지털은 새로운 맥락에서 총체예술을 부활시킨다.
제들마이어의 향수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워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르네상스가 고대 그리스를 부활시켰다해도 르네상스가 곧 고대가 될 수는 없는 일. 포스트모던이 비록 중세의 몇몇 측면을 부활시켰다 해도, 21세기 사회가 이제 와서 모던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신이 인간의 삶에 의미를 주고, 예술이 영원한 인간의 상을 추구하던 그 시대는 아마 되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써 서구의 미술사 속으로 들어간 우리의 여행도 하나의 종착점에 다다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