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삐 삐이-이-이-'하는 소리가 병실 안을 가득 메우고 의료진들이 영혁의 침대에 둘러서서 바쁘게 주치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다. 급하게 차를 몰고 영혁의 병실에 도착한 대웅은 보여지는 광경에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서있다. 일자선을 그려보이던 기계에서 조금씩 파동이 이는 모양이 그려지고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듯한 심장박동과 흡사한 소리가 난다. '삐동 삐동'하는 소리와 함께 식은땀을 흘려가며 심실 세동기에 약품을 바르고 펌핑을 해대던 의료진들이 한시름 놓는다. 주변을 정리하고 나가려 돌아서던 주치의가 대웅을 보고 다가선다.
"오셨군요. 다행히도 고비는 넘겼습니다."
"갑자기 왜 이런 거예요?"
"아무래도 심적인 스트레스가 불안함을 만들어 몸 안의 기관들이 제 역할을 못해내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자해도 그 영향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고요... 앞으로는 이런 일들이 더 잦아들 겁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게 되어 유감이지만 마음의 준비를 이젠 정말 하고 계셔야 될 것 같습니다."
목례를 하고 우르르 병실을 빠져나가는 의료진들. 침대위에 가만히 눈을 감고 누워있는 영혁을 바라보며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는 대웅. 지금 보여지는 영혁의 모습이 어느 순간 다신 볼 수 없는 모습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혼미해지는 듯한 대웅.
아직 자리를 뜨지 못한 민영이 꼿꼿이 서서 수재를 기다린다. 차 한대가 전조등 불빛을 비추며 레스토랑 주차장 안으로 들어선다. 차를 세워 창을 반쯤 내리고 민영을 향해 소리치는 수재.
"타!"
대꾸 없이 구두소리를 또각거리며 수재의 차 조수석 문을 열고 몸을 차안으로 들인다. '탁'하고 차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핸들을 틀어 레스토랑을 벗어난다. 아무런 대화 없이 나란히 앉아 도로 위를 달리고 있던 것이 20분 정도 흘렀을 즈음.
"이번엔 식사는 다 하고 간 거?"
"......어."
"아닌가보네 이번에도."
어색하게 대답하는 민영을 슬쩍 보던 수재가 받아친 말. 그 말에 어떤 항변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민영. 6개월 동안 한결같던 대웅의 태도에 민영도 조금씩 지쳐가는 듯한 얼굴이다. 달리는 차 창문을 '지익'하고 열어젖힌 수재가 창밖으로 팔을 쭉 뻗어 보인다.
"하... 이제 공기가 제법 더워지지 않았냐?"
"뭐야 뜬금없이."
"해봐. 이렇게 하는 게 가끔 잡념을 없애주는데 특효더라고."
못이기는 척 창문을 내리고 팔을 뻗어보는 민영. 지그시 눈을 감고 더워진 공기를 피부로 느껴보는 민영. 입 꼬리를 씰룩 올리고 미소를 짓던 수재가 묻는다.
"이런 관계가 좋냐?"
"뭐?"
"김대웅 말야..."
"......"
"개인적으로 난... 네가 뭐가 아쉬워서 이런 푸대접을 받아가면서 만나나 싶기도 하고."
"신경 꺼. 내 일이니까."
"그래 알아. 네 일 인거, 근데 내 일이기도 하지."
"무슨 소리야?"
"넌 싫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우리는 호적상 남매니까, 가족이니까... 오빠가 동생 걱정하는 건 당연한 거야."
"오빠 같은 소리하네..."
마음과 다르게 말을 뱉어버렸지만 진심은 그게 아니란 걸 아는 수재는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가며 웃음을 머금는다. 민영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엔 미소가 옅게 비친다.
종례가 끝나기 무섭게 가방을 챙겨 건물 입구로 냅다 달려가는 서준. 혹시라도 먼저 가버리진 않았을까 마음 졸이며 은예를 기다린다. 이랑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웃음을 가득 머금은 얼굴로 때마침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은예. 은예를 보자마자 팔을 번쩍 들어 올려 휘휘 저으며 반기는 서준.
"가자!"
은예의 어깨에 한쪽 팔을 둘러 얹고는 걸음을 재촉하는 서준. 서준의 팔이 얹혀있는 어깨를 들썩이며 풀라는 시늉을 하는 은예. 아랑곳하지 않고 더 꼬옥 감아쥐는 서준. 은예가 눈을 부라리며 서준을 보지만 그 시선을 애써 피하며 같이 걷는 이랑에게 말을 거는 서준.
"넌 집에 안가?"
"그냥 솔직하게 말해. 은예랑 같이 가게 좀 비켜달라고. 그래, 나 먼저 갈게. 은예 넌 잘 생각해봐 아까 내가 한 말."
"......"
무슨 말인지 궁금한 서준이 등을 보이며 먼저 가버리는 이랑과 은예를 번갈아 보지만 아무런 답도 들을 수 없었다. 한적한 길을 나란히 걷고 있는 서준과 은예. 걷던 걸음을 멈추고 은예의 양어깨를 잡고 돌려세워 자신과 마주하게 만든 서준. 지그시 은예를 보던 서준이 은예에게 묻는다.
"지금 내가 입 맞추면 너 어쩔 거야?"
"죽을래 진짜? 한동안 못 맞아서 네가 좀이 쑤시지 아주?"
"장난치는 거 아니고, 진지하게 들어. 어쩔거야? 내가 그러면 너 나 안볼 거야?"
"......"
"됐어. 그럼 대답 된 거네."
서준의 손이 은예의 얼굴에 닿으며 슬쩍 들어진 고개로 인해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은예의 입술.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인 서준. 지금 이 순간 망설이거나 주춤하다 보면 고백할 수 있는 기회를 허망하게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생각한 서준. 눈을 질끈 감고 은예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댄다. 서서히 입술을 떼어내고 지그시 은예를 보며 말하는 서준.
"이제 난 오늘부로 친구 못하겠다. 알아버린 건 오래전이지만, 제대로 시작됐거든 이제. 한번 밀어내봐, 언제까지 그럴 수 있나."
"......민서준 난...!"
뒷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다시 한 번 자신의 입술로 은예의 입을 막아버린다. 당황한 은예는 서준을 밀어낼 생각조차 못한 듯 멍하니 서준의 행동을 받고 있다. 뒤늦게 정신이 들은 듯 서준을 밀치고 커진 눈으로 보는 은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