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원석의 삼위일체]육상 단거리② '아시아의 스프린터' 장재근을 말한다
기사입력 2018.08.09 오전 09:25최종수정 2018.08.09 오전 09:25
<장재근(가운데)이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200m 결승에서 1위로 골인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그는 1980년대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프린터였다. 아시아에서는 적수를 찾기 힘들었던 한국 육상의 대들보였다. 1990년대에는 에어로빅 붐을 타고 인기 방송인으로 맹활약했다. 지금은 선수 출신 방송 스타가 드물지 않지만 1990년대에 방송을 통해서 대중적 인기를 크게 구가했던 이는 그와 축구의 신문선 정도였다. 2000년대에는 육상계로 복귀해 지도자와 행정 업무에 도전했지만 주변과의 불화로 큰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지금은 19명의 제자와 함께 매일 땀을 흘리면서 화성시청 육상팀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장재근(56·화성시청 감독)은 한국 육상에 '최초'의 족적을 많이 남겼다. 한국 육상 단거리 최초의 아시안게임 메달과 금메달, 최초의 아시아게임 2연패, 아시아 육상 최초의 유니버시아드 대회 메달 등의 업적이 그의 발에서 나왔다. 1985년 그가 수립했던 200m 한국 신기록(20초41)은, 지난 6월 후배 박태건(27·강원도청)이 20초40으로 불과 100분의 1초를 단축하기 전까지 무려 33년간 유지됐다. 한 세대를 건너 뛸 정도로 탁월한 기록이었다.
그는 폭발적인 스퍼트를 자랑했던 스프린터답게 성격도 화통하다. 말에 거침이 없고, 주의주장도 강렬하다. 이런 강한 개성이 오랜 시간 육상계와의 불화를 가져왔는지도 모르겠다. 전성기 시절 184㎝의 훤칠한 키에 77㎏의 근육질 몸매를 가지고 있던 그는 체형 자체가 '한국적'이지 않았다. 머리가 작고, 팔 다리가 무척 길었다. 육상계에서 흔히 말하는 단거리를 잘 뛸 수 있는 체형을 타고 났다. 탁월한 스프린터가 되기 위해서는 '선천적 요소'와 '후천적 노력'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을 말한다. 그는 전자의 요소는 당대의 국내 선수 기준으로는 최고 수준이었고, '한번 마음 먹으면 엄청나게 훈련하는 기질'도 겸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두가지 요소들이 잘 결합했을 때 이런저런 최초의 기록들이 쏟아졌다.
장재근과의 인터뷰는 지난 7월 초 그가 지도하는 화성시청 육상팀의 근거지인 화성종합경기타운에서 진행됐다. 공교롭게도 그가 보유했던 200m 한국기록이 깨진 뒤 불과 일주일 정도 지난 후였다. 장재근은 "(후배의 기록 경신으로)이제 내 이름이 지워지는 것이냐"고 반문하면서 "지도자로 새롭게 마음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제 도전자의 입장에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제부터 '아시아의 스프린터' 장재근의 이야기를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더듬어 보겠다.
-원래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기골이 장대했는지 궁금하다. 운동은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가.나는 1962년 1월 광주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집안이 매우 어려웠다. 원래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검정 고무신을 신고 학교에 가고 그랬다(웃음). 광주 수창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우리 학교에 운동부라고는 배구부가 유일했다. 4학년때부터 배구부에 들어가 운동을 시작했는데 그 계기도 사실 가난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운동부 다니는 친구들을 보니 추리닝(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는데 그렇게 좋아 보였다. 또 간식도 먹을 수 있다는게 부러웠다. 그래서 배구부에 들어가 운동을 하게 됐다. 당시 우리 학교는 학급마다 50명 정도 있었는데 대략 뒷줄에 앉는 정도였지 내가 친구들보다 특출나게 크지는 않았다. 배구를 할 때도 세터를 했다. 6학년까지 계속 배구를 하다가 마침 그때 배구부가 없어졌다. 계속 배구를 했다면 배구하는 중학교로 스카우트될 정도는 됐는데, 운동부가 없어졌으니 그냥 일반 중학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육상은 어떻게 입문하게 됐는가.초등학교 시절 배구를 했으니 배구부가 있는 중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팀이 해체되면서 그럴 수 없었다. 전남중에 들어가서 2학년 말까지 운동은 안했다. 전남중에는 운동부가 육상부만 있었다. 2학년 말쯤 됐나? 교내 체육대회에서 달리기 경주를 했는데 내가 꽤나 빨리 달렸던 것같다. 최송진 선생님이 육상부에 들어오라고 권유를 하셨다. 생각해보니 초등학교때 배구를 하면서 공부를 등한시해서 (중학교 공부를)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배구도 운동이고, 육상도 운동인데 그냥 운동이나 계속 하자는 마음이 있었다(웃음).
-육상부에 들어가서 처음부터 단거리를 한 것은 아니라고 하던데.나를 육상부로 데리고 간 최 선생님 전공이 장거리였다. 당시 중학교는 3000m가 가장 긴 장거리였다. 선생님의 권유로 장거리를 시작했는데 이리 해보고 저리 해봐도 잘 안됐다. 당시 또 내 동기였던 김필호가 3000m에서 중학교 기록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잘 뛰는 친구였다. 이런 친구랑 내가 경쟁을 했으니 제대로 됐을 리가 있는가. 소년체전을 나가야 하는데 도저히 안되는 거다.
<장재근이 화성종합경기타운에서 '삼위일체'와 인터뷰를 마친뒤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사진=삼위일체>
-그러면 주종목인 단거리는 언제부터 하게 된 것인가.이야기를 더 들어봐라. 3000m를 아무리 해도 안되니 중 3때 허들로 주종목을 바꿨다. 되는 것을 찾아보자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허들도 잘 안되더라(웃음). 이런 상황에서 고교 진학 시기가 왔다. 내 실력으로는 도저히 고등학교에 가기 힘들 것같았다. 그런데 마침 광부 사레지오고에서 육상을 맡고 계셨던 김응식 선생님(나중에 광주육상경기연맹 회장을 역임)이 전남중에서 한 선수를 스카우트하면서 일종의 '원 플러스 원'으로 한 선수를 더 데리고 가기로 했다(당시에는 종목마다 우수 선수에 기량이 좀 떨어지는 선수를 붙여서 스카우트해가는 관례가 성행했다). 다행히 김 선생님이 '더 데리고 가는 한 선수'로 나를 뽑아주셨다. 그런 점에서 김 선생님은 정말 내 육상인생의 은인이고 은사이시다. 고교 진학뒤에도 1학년때 까지 계속 허들을 했는데 당시에는 운동부가 체벌도 많던 시절아니었나. 내가 실력이 안되니 자연스럽게 야단도 많이 맞았다. 내가 이러면서 계속 운동을 해야 되나, 하는 회의도 많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운동을 그만두면 할 게 없었다. 불량청소년이 될까봐 걱정도 됐다. 육상을 계속해야 되겠는게, 되는 것이 없으니 정말 답답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 보통 사람들에게 흔히 달리기라고 하면 "100m 몇초에 뛰어?"라는 것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 아니냐. 이것저것 다 안되니 그럼 100m를 해보자, 이렇게 된 거였다(웃음). 그래서 2학년때부터 단거리에 집중했다.
-선수 시절 기록을 찾아보니 고교 2학년때 전국체전에 출전해 200m에서 동메달을 딴 것이 첫 수상으로 나온다.당시 전국체전이 인천에서 열렸다. 200m 레이스가 열리는 날에 마침 비가 많이 왔다. 운동장 트랙도 그냥 맨땅이었다. 맨땅에, 비마저 내려 운동장이 미끌미끌하니 어떻게 됐겠는가. 한마디로 실력있는 선수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깡 좋은 놈'이 이길 수 있겠다 싶었다. 아마도 그라운드 컨디션이 좋았다면 메달을 못땄을 지도 모르겠다. 우당탕탕, 뛰어서 3등을 했다. 기분이 좋았다기 보다는 '앞으로 정말 운동을 열심히 해야겠구나'라는 다짐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마침 부친께서도 '이왕 시작한 운동인데 무언가는 해봐야 되지 않겠느냐'고 압박을 하시기도 했다. 운동 제대로 안하려면 차라리 기술을 배우라고 하시기도 하고(웃음). 그래서 고 2에서 고 3으로 올라가는 겨울에 정말 열심히 운동을 했다. 무엇을 체계적으로 했다기 보다는 아무튼 무진장 많이 뛰었다. 그렇게 열심히 운동한 적은 이전까지 없었던 것같다. 그 덕분에 고 3때는 200m 레이스는 나가는 대회마다 모두 1등을 했다. 전관왕이었다. 100m 레이스에서도 10번에 3번 정도는 1등을 한 것같다.
-3학년때 경쟁자가 없을 정도로 200m 최강자로 떠오르자 대학들의 스카우트 경쟁이 대단했다고 들었다.그 당시만 해도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육상을 배울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질보다는 훈련량으로 승부를 거는 시절이었다. 정말 죽도록 훈련했던 것같다. 그러다보니 여러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서울대에서도 영입 제의가 왔다. 그때는 서울대도 육상 특기생을 뽑았다. 그런데 나를 (서울대)학교 관계자에게 소개시켜주신 분이 '장재근을 내가 가르쳤다'고 말씀하시는 거다. 그 분이 나를 가르쳐 주신 적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그게 기분 나뻐서 서울대를 가지 않겠다고 했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에게 엄청 혼났다. '가문의 영광'을 걷어찼다고 말이다(웃음). 성균관대에 있던 교수 분이 고교 선배였다. 그래서 성대로 가기로 대략 이야기가 마무리 된 상황이었다. 내 고교 동기 중에 전남대 체육과에 10명이 진학하게 됐는데, 결과적으로 나만 성대에 가게 된거다. 혼자 서울에 가려니 기분이 좀 그랬는데, 친구들이 같이 전남대에 가자고 꼬셨다. 전남대에서도 운동 잘할 수 있게 지원해주겠다고 해서, 결국 막판에 전남대 진학으로 마음을 바꿨다.
-그러다가 나중에 성균관대 체육교육과에 편입하게 됐는데.대학교 1학년(1980년)때 국가대표 후보선수로 태릉선수촌에 입촌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전남대)수업을 들어갈 수가 없었다. 1학년 두학기 동안 19학점이나 '빵꾸'가 났다. 이렇게는 학교를 졸업할 수 없겠더라. 그래서 다시 성대로 편입을 하게 됐다.
<성균관대 재학시절이던 1983년 장재근이 200m 레이스에서 당시 한국신기록을 수립하는 장면. 사진=연합뉴스>
-국가대표에 첫 발탁돼 태릉선수촌에 입촌했을 때의 기억이 생생할 것같은데.태릉선수촌에 들어가보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선수촌이 천국같았다. 고 2때 키가 178㎝였는데, 대학에 진학해서도 키가 계속 컸다. 나중에 184㎝까지 됐다. 그 이유를 나름 생각해 보면 대학 진학뒤 태릉선수촌에서 마음껏 먹을 수 있었던 것이 영향이 컸던 것같다. 고교 시절에는 고기를 기껏해야 한달에 한번 정도 먹을 수 있었다. 제대로 못먹으면서 운동한 셈이다. 대학들어가서 태릉선수촌에 들어가니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잘 먹고, 잘 운동하면서 대학 2학년때까지 키가 계속 컸다. 처음 태릉선수촌에 들어가니 선배들이 막내를 놀리기 위해서 식사때 밥은 한판만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정말 그런줄 알았다. 그래서 밥을 한판 안에 산처럼 담아오거나, 한번 먹고 후다닥 밖으로 나가서, 덩치 좋은 선수 뒤에 숨어서 몰래 두번 타먹기도 했다(웃음).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다.
-태릉에 처음 갔을 때 한국 육상 단거리의 전설이자 30년 이상 100m 기록을 보유했었던 서말구 선배가 최선참이었다고 하던데.당시 태릉선수촌은 한 방에 6명씩 잤는데 서말구 선배가 우리 방의 '방장'이었다. 방 구석에 구식 히터가 있는데 최고참이 히터 옆에서 자고, 나같은 막내는 문 옆에서 잤다. 막내가 빨래를 해서 히터에 선배들 옷을 말리곤 했다. 군대랑 똑같았다. 태릉선수촌에 들어가서 웨이트 트레이닝장도 처음 봤다. 잘 먹으면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을 키우다보니 2년 사이에 62㎏의 마른 체구에서 10㎏이 늘어난 72㎏의 근육질 몸매가 됐다. 태릉선수촌이 나를 많이 변화시켰다.
-대표팀 발탁이후 1981년 도쿄 아시아선수권대회 200m에서 3위를 차지하고, 멕시코 주니어육상대회에서 100m와 200m를 석권하면서 단거리 유망주로 급부상하게 되는데.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3등을 했는데 체계적으로 잘 준비를 해서 입상을 했다는 기억보다는 잘 먹고, 열심히 운동하니 성과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당시 단거리 코치 선생님은 연세가 많으셨는데, "오늘은 100m 30개야"라고 하시면 그대로 우리끼리 뛰었던 그런 시절이었다(웃음). 다만 한달에 한번 고기먹다가 매일 먹으니 절로 힘이 났던 것같다. 가끔 친한 선수들끼리 청량리 맘모스 백화점 근처의 나이트 클럽으로 놀려가는 것이 유일한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그나마 태릉으로 오는 버스가 주말이면 오후 8시에 끊어졌다. 토요일에 제대로 놀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예전 기사를 보면 당신의 첫 소속팀이 해태 타이거즈로 나온다. 프로야구팀 소속 육상 선수라는 것이 너무 특이한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었나.아하, 그것은 이런 사연이 있었다. 내가 광주 출신이고 이 지역 출신으로는 꽤나 괜찮은 육상선수였는데 지역에서 나를 받아줄 육상팀이 아예 없었다. 몇몇 실업팀이 있긴 했는데 거의 마라톤 중심이었고 단거리 전문인 내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전라남도 도지사를 지냈던 고건 전 국무총리가 해태 박건배 회장님에게 나를 부탁했다고 한다. 해태제과에 원래 육상부가 있었는데 당시는 해체한 뒤였고 그룹내에 프로야구팀인 타이거즈만 있다보니 박 회장님이 나를 해태 타이거즈 직원으로만 등록을 해주신 거다. 그래서 해태 타이거즈 직원으로 월급만 받고 운동은 계속 (국가대표팀이 있는)태릉 선수촌에서 했다. 그때 내 월급이 32만원 정도였는데 일년뒤 선동렬이 해태에 입단했다. 당시 선동렬은 한달에 500만원을 받아갔다. 내 일년치 연봉보다 한달 월급이 휠씬 많았다. "운동을 해도, 종목을 잘 선택해야 하는구나"라고 혼자 웃었던 기억이 난다. 가끔 동계훈련때는 이슈를 만들어야 하니까 내가 해태 타이거즈 선수들에게 달리기를 가르쳐주는 모습도 언론을 대상으로 연출하곤 했다. 홈런왕으로 유명했던 김봉연 선배가 "나는 어차피 홈런 아니면 삼진인데 왜 달리기를 배워야 하냐"고 농담을 하던 모습도 생각난다.
<장재근(왼쪽에서 세번째)이 1983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벌어진 유니버시아드 대회 200m 준결승에서 역주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단거리 유망주로 부상하던 1982년 인도 뉴델리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린다. 이 대회가 장재근 육상 인생의 큰 획을 긋게 되는데, 처음에는 어떤 목표로 출전을 준비했는가.개인적으로는 첫 아시안게임이어서 일단 참가하는데 의의를 뒀다. 우리 단거리팀으로는 400m 계주 동메달이 구체적인 목표였다. 서말구 선배가 출전하는 마지막 아시안게임이었고, 호흡을 잘 맞추면 메달권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대회를 앞두고 대한체육회에서 각 언론사에 메달 후보군을 다룬 보도자료를 보냈을 때도 내 이름은 당연히 없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회가 열린 것이다.
-이 대회에서 100m 은메달(10초72)을 따내면서 한국육상 사상 첫 단거리 메달이 나왔다. 이어 200m 금메달(20초89)을 추가하면서 아시안게임 첫 단거리 금메달의 주인공도 된다.
(참고로 이전까지 한국육상은 아시안게임에서 총 6개의 금메달을 땄다. 마라톤에서 1개, 필드 종목에서 3개가 나왔고 달리기에서는 남자 1만m와 1500m 종목에서 금메달이 있었다. 국내 단거리에 관한 기록은 장재근이 거의 '최초'를 독식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아까 말한 것처럼 우리 단거리팀은 당초 400m 계주가 유일한 메달 목표였다. 보통 종합대회가 열리면 계주 경기는 마지막 날에 열리게 되는데 뉴델리 대회때는 희한하게 제일 먼저 벌어졌다. 400m 계주에서 우리 팀은 4위에 그쳤다. 한 등 차이로 메달권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김이 샜다. 그런 상태에서 100m 레이스에 나가게 됐는데 예선과 준결승 레이스에서 연이어 8등을 하면서 간신히 다음 단계에 진출했다. 결승에 오른 8명의 선수 가운데 준결승 기록이 내가 제일 나빴으니 당연히 1레인을 배정받게 됐다. 좋은 기록으로 준결승을 통과한 선수들이 가운데 레인인 3~5번에 배치됐다. 출발 총성이 울리고 나서 최선을 다해서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다. 느낌 상으로는 4등 정도는 한 것같았다. 그런데 우리쪽 코칭 스태프와 동료들이 나를 보면서 두 손가락을 내미는게 아닌가. 처음에는 나는 그것을 'V'자 표시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뛴 것에 대한 격려라고 생각했고, 나도 그냥 똑같이 'V'를 그리면서 화답했다. 그런데 전광판을 보니 내가 2등이었다. 말하자면 'V'자가 아니라 2등이라는 표시를 해준 것이었다. 당시 1등도 이름은 기억안나는데 말레이시아 출신의 무명급 선수였다. 아마도 3~5번 레인에 배치됐던 우승후보들끼리 치고받으면서 삐걱거리는 사이 준결승 기록이 상대적으로 나빴던 선수 두명이 금, 은메달을 차지해 버린 것이다(웃음).
-그리고는 다음 날 열린 200m 레이스에서 내친 김에 깜짝 금메달까지 따내게 되는데.요즘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야 병역 문제가 해결되지만 1980년대 초반만 해도 동메달 이상을 따면 병역 혜택을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은메달로 일단 군 문제가 해결됐으니 마음이 편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당시 대한체육회를 맡고 계시던 정주영 회장님이 육상 100m에서 이변의 은메달이 나오자 나를 불러서 금일봉을 주셨다. 100만원짜리 수표였는데, 이렇게 큰 돈은 태어나서 처음 봤다. 수표도 사실 처음 봤다. 처음에는 왜 돈을 안주시고, 종이를 주시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이전에는 고액 수표를 본 적도 없었다. 군 문제도 풀리고, 금일봉도 받았으니 어린 마음에 주종목인 200m는 걱정없이 진짜 잘 뛸 것같았다. 당시 일본의 도요타 선수가 200m 아시아 기록을 가지고 있었는데, 최소한 그 선수에게는 지고 싶지 않았다. '도요타는 반드시 이기자'라는 생각에 예선부터 죽자사자 뛰었다. 그런 기세로 예선부터 결승까지 내리 일등을 차지했다. 도요타는 은메달을 땄다. 200m 현장에 국내 기자분이 거의 안 나오셨다. 그래서 당시 영상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사진기자 분은 한분 나오셨다. 그분이 나중에 내가 금메달을 목에 거는 사진을 현상해서 보내주셨다. 지금도 화성시청 감독실 내 책상에 그때 그 사진을 올려놓았다.
<장재근이 뉴델리 아시안게임 200m 레이스에서 역동적인 포즈로 스타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뉴델리에서 돌아와보니 세상이 바뀌어져있었을 것같다.젊은 시절 아니었나. 내가 대학교 3학년때였다. 한마디로 세상이 다 내 것같은 기분이었다. 겁도 없던 시기였다. 스포츠에 관심이 많던 전두환 대통령이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를 청와대로 초청했다. 그런데 나는 그 전날 지인들과 금메달 축하연을 하면서 술에 떡이 되도록 취했다. 그 험하던 시절에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청와대에 들어갔으니 말이다. 전두환 대통령과 악수를 하는데 "장재근, 잘했어. 축하해"라고 격려를 해주시는데, 나는 술 냄새가 날까봐 대답도 못했다. 이어 청와대에서 식사 자리를 하는데 장세동 경호실장에게 엄청나게 혼이 났다. 장 실장이 "어린 놈이 미쳤냐? 각하께서 부르시는데, 술을 그렇게 처먹고 나타나다니"하면서 혀를 찼다. 내가 젊었을 때부터 겁이 별로 없는 그런 기질은 있었던 것같다(웃음).
'아시아의 스프린터' 장재근 스토리 하편은 다음주 목요일 오전에 포스팅됩니다. 하편에서는 장재근이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던 1985년 아시아 신기록 수립 과정과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2연패 등이 이어집니다.
기사제공 위원석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