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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릴 적 이해하지 못했던 말들 중에, 목욕탕에서, 뜨거운 탕에 들어가는 어른들이 “아, 시원하다”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 장사하시는 분들 곁에 있다보면, 분명 이득을 남기면서도 “내가 손해보고 파는 거야”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생 때, 친한 친구가 국수집을 하였습니다. 하루는, 그 친구랑 함께 귀가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네 국수는 밀가루가 얼마인데, 얼마에 판다고 하였습니다. 보아하니, 밀가루 값에 몇 배가 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서, 장사를 하면 되니?” 했더니, 그 친구가 “네가 몰라서 그래. 장사는 본래 그렇게 하는 거야.” 해서는 옥신각신을 하면서 귀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또, 어른들을 따라 잔치 집에 갔더니, 상다리가 휘도록 잔뜩 차려놓고 하는 말이, “차린 것은 없지만, 많이 드세요. 얘야, 너도 많이 먹어라”하시는 것이었어요. 저는 속으로, ‘차린 것은 없다면서 많이 먹어라는 것은 또 뭐야? 이렇게 차려놓고도 없다니, 도대체, 어른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네.’ 그렇게 생각하며, 옆에 앉아서 주는 대로 받아먹고 있는데, 주인이 오니까, 한 분이 “참으로 음식 솜씨가 좋습니다.”하자, “그러세요. 과찬이십니다. 맛있다니 좋네요. 많이 드세요.”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제 옆에 있던 아주머니들끼리 조금 전 주인이 없을 때, 분명, 이것저것을 가리키며, “맛도 없네. 도대체 이 집은 맛을 낼 줄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하며, 투정했거든요. 정말 세상은 요지경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차암 머리 고생 꽤나 했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그 때를 생각하고, 친한 사람들을 만나면, 꼭 그렇게 장난을 치면서, 한바탕 웃곤 합니다.
만나서 상대를 칭찬하고, 칭찬받은 사람은 겸양을 하는 것이, 우리의 미덕이라는 것을 훗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풍습이 사라지는 것을 봅니다. 자랑거리가 있으면, 겉으로 드러내 놓고, 자랑하며, 그 기쁨을 함께 나누고, 축하받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자랑’이란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 자신이나 자기와 관련이 있는 일을 드러내어 칭찬하다.” 입니다. 그래서, 실제적으로 보면, 무엇을 알리고자 할 때, 사용하거나, 또는, 무엇을 나타내고자 할 때, 사용합니다. 이렇게 자랑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니, 우리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자랑거리가 생각납니다. 여러분 중에 아시는 분 계십니까? 기독교인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자랑거리가 뭔지 아시는 분?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본문 속의 바울은, 어딜가든지 예수님을 자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예수님을 나타내고, 예수님을 알리고, 전파하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 뿐만 아닙니다. 그 당시의 초대 교회는, 어딜가나 간증을 많이 했습니다. 간증도 엄밀히 따져보면, 예수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어딜가나 둘러앉아 서로가 받은 은혜를 나누며, 예수님을 자랑하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초대교회 당시엔 어딜가나 기독교인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예수님 자랑 잔치가 열린 것 같습니다. 초대 교회는 두 사람 이상만 앉으면, 예수님을 자랑하는 간증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생활을 기록하면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혼자 있을 때는 기도하고, 둘이 있을 때는 받은 바 은혜를 나누고, 셋이 모이면 찬송하고, 넷이 모이면 둘씩둘씩 짝지어 전도를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의 기독인들은, 혼자 있으면 고민하고, 둘이 있으면 불평하고 흉보고, 셋이 있으면 싸우다가, 넷이 모이면 두패가 되어 나누어진다고 하더군요. 우리 교회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넘치며, 지난 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어딜가나 평화를 만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성경 속의 초대교회 모습은, 우리나라 초대교회의 모습이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추구하는 데서 벗어나 물질적으로, 상업적으로 조금씩 변하면서, 이 아름다운 모습도 변질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자랑이 없는 교회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기도는 있어도 눈물이 없고, 찬송은 있지만 감사가 없고, 설교는 홍수를 이루는데, 보혈이 없는 교회로 변질되었다고 어떤 목사님이 날카롭게 지적한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신문사의 논설위원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자기가 사는 동네에서, 교회 부흥회가 있어서 갔더니, 부흥강사가 예수님 이야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공자와 소크라테스 이야기만 하더랍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무조건 웃고 기쁘면 좋은 거죠? 우리는 예수님을 자랑함으로 예수님을 나타내야 하고, 예수님을 자랑함으로 예수님을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망 합니다.
본문 속의 사도바울은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 총독 앞에서도 당당했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 앞에서도, 이방인들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이유는, 사도바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아선 뒤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일에만 몰두했고, 거기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데만 몰입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지식과 기술, 그리고 건강을 통해서, 오직 복음만을 전파했습니다. 그랬기에, 사울로 불려질 때의 바울을 알던 유대인들은, 바울을 보고, 미쳤다고 했습니다.
본문에서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이 뭐라고 하죠?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라고 소리치죠? 베스도 총독은, 사도바울이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인재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전합니다. 요셉의 아들이었던 인간 예수, 십자가에 달려서 처형당한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고 전하는 것을 들으니, 참으로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한 것입니다. 베스도 총독의 입장에서 보면, 사도바울이 얼마나 탐나고 아까운 인재였겠습니까? 어쩌면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바울을 자신의 수하에 두고 싶어 했을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유태인이었고, 당대 최고의 스승인 가말리엘의 지도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경제적으로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사형당한 예수에게 미쳐서, 어딜가나 누구 앞에 있거나 때와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라 전하기만 하니, 완전히 미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을, 바울은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바울을 바라본 베스도 총독의 입에서 결국 “네가 미쳤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안 나오는 것이 기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결코 미치광이가 아니었습니다. 신약 27권 중 대부분의 서신서를 기록한 자가 바울입니다. 만약, 베스도 총독의 말처럼 미쳤다면, 미친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는 기록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가 기록한 서신서를 통해, 신학의 한 분야인 주제별로 정리한 조직신학이 형성되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를, 또 기독교를 변증하는 변증학이 형성되었습니다. 또, 선교학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는 결코, 미친 것도 아니고 정신이상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가진 그 좋은 기득권을 다 버리고, 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전하는 데만 몰두했을까요?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을까요?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본장 전체의 내용이,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기서, 자신도 처음엔 철저한 바리새인으로서, 기독교인을 핍박하던 자였으나, 다메섹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살아계신 나사렛 예수를 만난 뒤로는,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16절에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본래 바울의 희망은, 자기 스승인 가멜리엘처럼, 유명한 율법학자가 되는 것이었고, 유대 종교에서,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의 이러한 희망은, 율법에 대한 열정 속에서 타 올랐고, 그 열정 속에 바라본 기독교인들은, 거짓의 무리들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살아계시고, 지엄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단체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세력을 완전히 박멸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길을 막고, 다른 길을 주신 것입니다. 잠 16: 9을 보시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신 것처럼, 사도바울이 고집하는 그 길은, 어둠으로 가는 길이었기에, 어둠에서 빛으로 가는 길로, 사단의 권세를 벗어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로 가도록, 예수님께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다메섹 도상에서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서 믿고 난 이후,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고, 결국,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들에 의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복음전파의 메니아로 변신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미쳤다”는 말을 헬라어로 표현하면, “마이네”입니다. 여기서, “메니아 또는, 마니아”라는 말이 파생되었습니다. “메니아”라는 말은 우리 주변에 흔합니다. 이를 테면, “자동차 메니아”, “게임 메니아”, “오디오 메니아”, “영화 메니아”등입니다. 베스도 총독이 볼 때도, 사도 바울은 분명 예수와 복음 전도에 미친 예수 메니아, 복음 메니아였습니다. 하나님도 우리 메니아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미치도록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냈겠으며, 어찌 그를 십자가에서 죽일 수 있었겠습니까? 플라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중에 메니아 - 즉 광기는, 좋은 것 중에서도 가장 좋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보세요. 자기 일에 미쳐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이 이룬 업적과 성취에 의해서, 발전해 온 발자국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바티칸에 있는 시스티 예배당의 천정화를 4년 동안, 누운 자세로 그리느라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미켈란젤로, 10년간의 끈질긴 노력 끝에 에베레스트를 세계 최초로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경, 정복왕 알렉산더, 징기스칸, 탐험심으로 가득했던 콜럼버스, 종교개혁가 루터, 음악의 성인이라 불리는 베토벤,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 자신이 생각한 것을 만들어낸 발명왕 에디슨, 노예해방을 일으킨 링컨등 이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분야에서 광적인 열정을 지닌 메니아들이었습니다. 이들 뿐만 아닙니다. 또 다른 메니아들도 있습니다.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 행정상으로는 ‘외국인 공동묘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가 보셨습니까? 교회와 무덤만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는 자들은, 오늘 복음을 전하고 내일 죽을 사람들처럼 몸서리가 쳐지는 추위와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전도에 미쳐 있었습니다. 과연, 그들은 복음의 메니아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 언더우드 선교사는, 안산읍 장터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알아볼 수 없이 얼굴과 온 몸이 부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아이를 보고는, 그 아이를 위해 3일간 금식기도를 하는 가운데, 아이가 치료되어, 전 가족을 전도합니다.
⊙ 알렌 선교사는, 본국에 “사도행전에 있었던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오늘 한국 땅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귀신은 두려워 떨며 떠나고, 수 많은 병든 자들이 낫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며 보고하였습니다.
⊙ 대구에서 활동하던 아담 선교사는, 본국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2년 동안 나는 단 하루도 편히 앉아서 쉬지 못했습니다. 요즘은 하루에 한 마을씩 방문하는데, 내가 방문했던 마을에는 반드시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러니, 하루에 한 교회씩 세워지는 셈입니다.” 라고 적었습니다.
⊙ 탁월한 한국어 실력으로 사랑을 받던 윌리암 전킨 선교사는, 추운 겨울 자신의 몸을 돌보지 못하고 이 마을 저 마을 뛰다가 급성 폐렴에 걸려 죽었습니다.
⊙ 클랙 선교사와 시릴로스 선교사는, 어린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해, 어린 아이들을 먼저 하나님 곁으로 보냅니다.
⊙ 게일 선교사는, 아내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급성장하는 교회들을 돌보기 위해 뛰어다녔습니다.
⊙ 의료선교사 월리엄 홀 박사를 먼저 천국에 보낸 29살의 로제타 홀 사모님은, 젖먹이 아이와 함께 본국에 가서 선교사로 다시 파송 받아, 우리나라로 다시 와서는, 평양에 ‘여성병원’을 세워, 밤낮으로, 미친 듯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예수 메니아, 복음 메니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들의 순교의 피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들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들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미신적 종교로 받아들였다면, 오늘의 우리는 이 곳에 있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만약 저들이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당당하게 피 흘리기를 주저했더라면, 우리나라에 복음의 불길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코카콜라는 외교관도 들어가지 못하는 나라까지 깊이 들어가서 판매처를 세웁니다. 유럽은 물론, 공산국가든 어디든 다 들어갑니다. 이러한 코카콜라 회사의 사장은, “나는 내 핏줄 속에서 피를 빼고 콜라를 넣고 싶다. 내 혈관 속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다 내 심장에선 코카콜라를 품어내게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는 늘 코카콜라만을 자랑합니다.
바다 위를 항해하던 여객선이 침몰했는데, 이 배가 약 15년 후에 발견되었답니다. 그런데, 그 배에서 바늘이 멈춘 로렉스 시계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을, 탐사자가 습관적으로 흔들었더니 가더랍니다. 가짜는 품질보증도 되지 않고, 오래되면 변질됩니다. 고장도 잘 나지만, 진짜는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신앙은 진짜였고,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니아로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에게,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길을 주셨다는 확신 속에서 나온 것이기에, 사랑하고, 높이고, 자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제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아시안컵 축구가 진행되고 있죠? 저는, 공교롭게 소식만 듣고 있습니다.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작년인가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축구선수들의 훈련과정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국대로 발탁되기 전까지는, 운동하다가 다치거나 하면, 모든 비용은 자기부담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국대가 되기 전까지는 다치지도 아프지도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아마, 축구 뿐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국대로 발탁되면, 그 때부터는 사정이 바뀝니다. 국대뿐 아니라, 기업소속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들이 하는 일은, 오직 모든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만약, 성적이 부진하거나, 경기에서 지면 연봉이 줄고 출전이 제한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돈 받고 선교사가 된 것도 아니고, 연봉 받고 전도자가 된 것도 아닙니다. 그냥 예수님이 좋아서, 예수님이 자신에게 맡긴 일이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무엇을 하든, 억지로 하는 일은 능률도 성과도 오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 일을 즐겨야 합니다. 즐겁게 하는 일은 피곤하지 않습니다. 새벽 예배를 드리려 오다보면, 도중에 스크린 골프장이 있습니다. 몇 시에 열고 닫는지는 모르지만, 여름에는, 새벽에도 차들이 있고, 종종 골프 메니아들끼리 함께 타고 어디론가 가기도 하고, 어디선가 오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만약, 그들에게 “새벽예배에 나오세요.”하면, 어떨까요? 대번, “피곤해서 못 갑니다. 바빠서 못 갑니다”할 겁니다. 만약, 새벽예배가 골프처럼, 그들에게 기쁜 일이요, 즐거운 일이요, 자신에게 유익함으로, 반드시 해야 될 일로 여겨진다면, 교회 문을 잠궈도 열고 올 것입니다. 교회에 석유를 배달하는 집사님과 이젠 친해져서 여러 이야기를 합니다. 주로, 그 분의 신앙상담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한다고 말도 안 했고, 내 비치지도 않았는데, 그 분이, 자기가 새벽예배 나갈 때는 참 힘들었답니다. 교회까지가 어찌나 멀던지 한참 갔답니다. 그런데, 새벽예배에 나가서 졸든 자든 어쨌거나 다니면서, 배달도 많아지고, 자신의 삶에 변화를 느끼면서부터는 기쁨으로 나가니까, 거리도 짧게 느껴지더랍니다.
직전 교회에서는, 오후 예배를 마치면, 정확히 3시입니다. 그러면, 누가 뭐라 말할 것 없이 제각기 집이든, 화장실이든 어디서든, 축구복장으로 갈아입고, 학교 운동장으로 모입니다. 그리고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바람이 불든 모여서 축구합니다. 등산을 갈 때도 마찬가집니다. 처음에는 비가 오는 데 갈까? 말까? 하더니, 이제는 비가 오거나 눈이 와도 갑니다. 모두가 자신이 좋아서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천막을 수리해서 선교비로 사용했기에, 자비량을 “텐트 메이킹”이라고 합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좋기에, 고맙기에, 어디를 가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면 어떻겠습니까? 질투하실 겁니까? 우리 예수님을 더욱 좋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열심히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교회를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교회의 자랑거리가 여러분께는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없는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를 다니면서도, 우리교회 교인이라고 말도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자랑거리를 만들어서라도 교회를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쉴 곳이 없으면, 억지로라도 만들어서, 그 곳으로 초대해서 교회에서 함께 쉼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의 자랑거리를 만들어서 인터넷으로, 카톡으로, 페이스 북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띄우고, 퍼트려서 자랑하고, 소개하시기 바랍니다.
엡 6: 24을 보시면,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잠깐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이 생명 다 할 때까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영원히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시고, 주님을 좋아한다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그 고백대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