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저는 합천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진주에서 열린 서부경남3기 아버지학교를
수료한 소인섭형제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서
저의 삶이 변화되고
교회 형제님의 소개로
아버지학교를 수료하고
저의 가정이 회복되며
하나님 앞에 경건하며
행복하게 사는 계기가 되었기에
부끄럽지만 우리 하나님과
형제님들 앞에 고백하고자합니다.
저의 선친은
산청 어느 서당까지
업혀 다니시며 공부하셨다는데,
학식이 상당하셨습니다.
면사무소에 근무하시면서
말술과 노름을 즐기시다가
유산을 날리고 면사무소 일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우리 집이 파산하였는데,
조금이라도 돈 되는 것은
빚쟁이들이 다 쓸어 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비싼 글 솜씨로
사주단자 쓰고,
초상집 부고장 쓰는 일에 바쁘셨습니다.
우리에게는 따뜻하셨고,
말년에는 돈을 벌려고
평생 일을 하지 않으시던
그 고운 손으로 대를 깎으며
대바구니를 만드시기도 하셨습니다.
당신께서 만드신 바구니는 예뻤습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음식장사를 하시고,
풋나물을 이고 상점들을 기웃대시며
팔아서 생계를 꾸리셨는데,
원래 못 배우신 분이,
시장바닥에 국수 몇 그릇,
막걸리 몇 사발,
상점들에 나물 언제 얼마치,
외상거래를 전부 외우고,
웬만한 간판은 읽기까지
하실 정도로 영특신 분이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초하루,
보름 때 우물에 촛불 켜고 손을 비비며
6남매 자식 하나하나 이름 불러가며
한 두시간은 기도 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께서는
신기(神氣)를 대물리지 않으려고,
예수 믿는 며느리 맞는 것도 찬성하셨습니다.
제가 합천중학교를 졸업할 때
동기생 360명 중에 우등생이 4명이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저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힘들게 장사하는 것이
얼마나 창피하고 싫던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 했습니다.
이런 저를 딱하게 본 고종형이
자기가 공부했던 책을 한보따리 주면서
검정고시를 권했습니다.
울분도 있고 부끄럽기도 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이듬해
첫 시험을 쳐서 전 과목 합격을 했습니다.
독학으로 공무원시험에 합격하니
제가 잘나서 다 된 줄 알았습니다.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나를 택하시고
필요한 지혜와 직장을 갖추어 주시면서,
나를 오라고 부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직장과 생활이 안정된 저는
가난한 표시 절대 안내고,
오로지 세상을 이기려고 노력했습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동료들과 어울려
술, 담배로, 화투, 카드를 하면서
아버지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덧 아버지와 닮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삶과 가정은 피폐해져 가고 있었습니다.
1984년, 첫아들이 탄생했습니다.
튼튼했는데 3일 만에 갑자기 죽었습니다.
근처 야산 땅을 파고 묻을 때,
아버지로서 어떻게 해보지 못한
안타까움도 같이 땅속에 묻었습니다.
아내가 많이 울었습니다.
비가와도 울고, 날이 추워도,
바람만 불어도 울었습니다.
이 일로 아내는 혼자 다니던 교회를 떠났습니다.
이듬해 11월 말에 지수가 태어날 때였습니다.
첫애의 실패가 두려워서
대구에 있는 산부인과병원에서 지수를 낳았습니다.
초저녁에 출산을 하는데,
갓난애의 온몸에 몽고반점,
푸른 점이 퍼져서
시간이 지나도 없어지지 않고 시퍼랬습니다.
밤 12시에 원장님을 깨웠습니다.
"첫애가 죽었습니다.
둘째가 이렇습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습니다.
아내 모르게 핏덩이를 안고
인근 대학병원으로 옮기는데
그 밤은 살을 에는 듯 추웠습니다.
밤 1시에 대학병원 응급실에서부터
X-ray실로 가는 그 길고 어둡고 텅 빈
복도를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응급실은 비틀린 나무문짝과
다급하게 드나드는 사람들로 밤새 반쯤 열려 있었습니다.
아내는 시내 산부인과에,
갓난애는 경북대학병원에 눕혀 놓고
택시를 타고 오가면서,
그 밤에 하늘 우러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고쳐 주세요.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기도를 한 후 보름 만에
지수가 정상 판정을 받아 퇴원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순간 서서히
애타게 기도하며 매달리던 일은
까맣게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지수가 초등학교 3학년일 때
자반증을 앓았습니다.
작은 혈관들이 터져서 온몸에 피멍이 들었습니다.
간이나 콩팥 같은 내장에도
피멍이 터져서 붓고,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자반증은 자주색 반점이 생기는
증세의 줄임말로서 이런 증세를 일으키는 원인이
불확실하고 치료제가 없습니다.
링겔과 비타민c에 의지해서
요양하고 한 달 만에 퇴원했습니다.
지수가 아프게 되자,
아내와 딸들은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에는 내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갈비뼈가 몇 개는 부러지고
몇 개는 금이 갔었습니다.
그 이듬해에는 지수가 자반증이 재발해서 또 입원하고,
평상시에도 흔히 피멍이 번졌습니다.
지수가 6학년이 되던 해
2월에는 아내가 쓸개를 떼어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채찍을 실컷 맞다가
지수의 애원으로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온 지 며칠 후
지수가 학생회장후보로 추천 되었습니다.
추천된 것으로 만족하면 좋겠는데,
지수는 꼭 회장을 하겠다고 합니다.
계속된 장기 결석은
악조건이었습니다.
떨어졌을 때의
실망하는 모습이 상상 되었습니다.
새벽기도 갔던 아내가
지수가 회장이 될 거라고
자신하는데 전혀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말대로 지수가 학생회장에 뽑혔습니다.
지수가 다니는 초등학교에
첫 여자 학생회장이 되었습니다.
불가능 가운데서 창조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지수는 저의 염려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로 1년 동안
감기한번 안하고 씩씩하게
학생회장의 일을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성가대원이 되고,
1대1 성경공부도 하고,
신앙생활도 틀이 잡히면서,
직장에서도 진급을 하게 되어서
군청에 환경과장을 지내다,
고향인 대양면 면장이 되었습니다.
2년 과정 영남성경대학을
약 1년 반 정도 다녔습니다.
담배도 끊고, 술도 줄였습니다.
평안한 가운데
지수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2년 전 10월에
큰 파도가 덮쳐 왔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네가 제일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쳐라.” 하시고,
마지막 칼을 내리치는 순간까지
점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꼭 점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지수가 다니는 학교는
경북 청도군의 이서고등학교인데
기숙사와 독서실을 갖추고 생활하면서
2주에 한번씩 집에 다녀가는 학교입니다.
담임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는데
지수가 이상하니까
큰 병원에 데려 가라고 하였습니다.
간밤에 세수한 것을 기억 못하고,
아침을 굶고 누워있어서
죽을 쑤어 먹였다고 합니다.
대구 영남대학병원에
입원하고 검사받던 이튿날,
지수가 큰 경련과 함께 혼수에 빠졌습니다.
바이러스성 뇌염으로 의심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병은 처음에는 감기처럼 오는데,
뇌에 염증이 생겨서
뇌의 일부가 손상되는 무서운 병입니다.
뇌염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치료제를 쓰기 위해서는
뇌척수액을 뽑는데 아주 위험합니다.
병원에 비슷한 환자가 몇 분 있었는데,
꽃다운 나이의 여대생은
하반신이 마비되고 실명이 되었고,
아주머니 한분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며
최근 6개월간의 기억을 잃었습니다.
뇌염환자 중에는 겉보기에도
정상인 분이 없었습니다.
우리 지수도 그렇게 될까봐
하늘이 깜깜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수는 큰 경련 때
이빨로 아랫입술을 깨물어서
맞구멍이 났습니다.
겉보기에는 창백한 피부와
맞구멍 상처만 보이는데,
혼수상태 속에 간혹 경련이 계속되었습니다.
중환자실에는
50대 후반의 남자가 의식불명 상태인데
3일내에 운명하실 것이라는 진단이 났습니다.
그분의 아내가 마지막 작별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얼굴을 닦고, 머리를 빗기고, 손발톱을 다듬고,
망설임 끝에 자식들과 의논해서 장기기증을 결정하셨습니다.
아직은 살아있는 남편의 심장을 쪼개서
간, 콩팥, 쓸모 있는 장기를 도려내는
그 수술 중에, 남편이 죽고 있는 그때에,
수술실 밖에서 눈물을 흘리며,
내 남편은 하실 일을 다 마치고 가신다고
안도하시던 중년의 부인을,
하나님은 직접 만나보게 하셨습니다.
뇌척수액 검사에서 최종 확인되기는
역시 바이러스성 뇌염이었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사형 선고 받은 사형수처럼
저는 멍하니 서서 온몸이 마비가 되고
경련이 일어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아내를 위로하며 정신을 차릴 수 있었습니다.
지수가 다니던 학교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단체생활 하는 기숙사의 열악한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지수가 다니던 학교로 전화해서
“지수가 학교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그동안 지수에게 잘 대해준
여러 선생님과 사감에게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따뜻한 죽을 쑤어주신
그 선생님의 은혜에도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학교 친구들이 보는데서
경련하며 쓰러지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좋은 모습으로 친
구들과 헤어지게 하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지수의 혼수상태가 계속되고
의사들은 이대로 깨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경련이 계속되는 것은 아주 나쁜 현상으로서
깨어나더라도 뇌가 손상되어
당연히 후유증이 있겠다고 했습니다.
상상도 못했던 질병으로
칠흙 같이 암담한 날들이 계속 되었습니다.
암담했습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주님, 제발 깨어나게만 해주세요.
온전하지 못하더라도 좋습니다.” 하며
온 몸이 담에 흠뻑 젖을 정도로
울부짖으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탈진해 있는 아내를 위로하며
아내와 함께 평생 병구완할 각오도 다졌습니다.
간절함 속에 3일이 지나니까
이 문제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수가 있었습니다.
“주님, 이런 환경을 통하여
우리 가정에 임하신 주님의 뜻을
우리 부부가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부부가 너무 낙심하지 않도록
주님의 크신 은혜를
한 번 더 보여 주시기를 원합니다.”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저희 부부가 병원에서
지수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
합천 삼일교회의 온 성도님들과
이웃 교회 성도님들
삼가 외토수련원 형제자매님들,
예수전도단의 파워mom 형제님들,
영대병원교회 신우회원님들
이서교회 성도님들이
우리 지수를 위해서 눈물 뿌리며 기도로 도우셨습니다.
저는 밤이면 지수 옆에서
조용히 복음송을 부르곤 했습니다.
혼수 5일째 눈이 반쯤 열린 상태에서
생기 잃은 눈동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종이배처럼 움직였습니다.
이쪽으로 떠가다가 저쪽으로 떠가고,
몇 시간 후에는 점차 까만색을 더하면서,
움직이고 소리 나는 곳을 본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어느 순간 고개를 돌리고, 눈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지수가 복음송을 따라 불렀습니다.
얘가 알만한 복음송을 계속 불렀습니다.
많은 날이 흘러서 주사기를 꽂을 데가 없어지자
가슴을 따고 동맥에 주사를 연결했습니다.
검은 은박지에 싼 주사약을 계속 맞고,
한주먹씩 되는 약을 밥 먹듯 먹였습니다.
가만히 누워서 독한 약을 많이 먹으니까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머리카락도 빠지고. 무엇이던 많이 먹어야 고생을 덜 할 텐데.
끼니때 마다 밥 먹이는 것도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아내는 환자를 간호하는 고급 기술자가 다 되었습니다.
새벽기도 시간이나 예배하는 시간이 되면
차도가 확실히 느껴 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수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신다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지수는 꼭 100일 동안 입원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지수가 피곤하다면 쉬게 하고,
수업시간이라도 잠들면 그대로 두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이 장애우인 제자로부터
기증받은 장학금을 2년 연속
지수에게 힘내라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지급했습니다.
지수는 하나님의 은혜와
성도님들의 기도로 상당히 회복되었습니다.
지난 봄부터 고등부주일학교 찬양인도를 합니다.
지난 대입수능시험도 보통으로 쳤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지수가 시험을 쳤다는 것이
저는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시고 역사하십니다.
이웃들은 지수를 보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봅니다.
세상 이웃은 병 나은 것만 보지만,
저는 청색증으로, 자반증으로,
바이러스성 뇌염으로,
그 귀한 병들을 고르고 골라서
지수한테 허락하고 연단하신 하나님을 봅니다.
저에게는 큰딸 지수가 모두였습니다.
많은 시간과 온갖 정성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나, 한쪽만 보고 부지런히 달리다 보니
다른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되었습니다.
막내딸이 점점 반항아로 변해갔습니다.
학교나 이웃과의 관계는 흠 잡을게 없는데,
유독 집에만 오면 왕짜증이고,
대들고, 특히 언니와 만나면
분 이내에 삐쭉거리고, 2
분 이내에 싸우는데 정말 감당하기가 힘들었습니다.
한번은 자매간에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불같이 화가 나서 뺨을 1대씩 때렸습니다.
이 일로 막내와의 관계가 영 틀어졌습니다.
그 후에는 시비를 걸어와도,
‘거저 사춘기니까 그런가 보다. 세월이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건드리지 말고 조심하자.’며
그저 사춘기의 일시적인 반항 정도로 간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에게 아버지학교가 다가왔습니다.
아내는 말했습니다.
“당신은 다닐 필요 없어요.
누구 같은 사람은 몰라도.”하며
저를 최고의 아버지로 남편으로 추켜세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교회에 다니는
형제님의 끈질긴 권유로 안 갈 수가 없었습니다.
진주 성남교회까지 토요일 저녁마다 가는 것은
저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막내와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참석하고 싶었습니다.
2주차를 마치고 자녀가 사랑스러운 20 가지를 적는데
저는 막내를 사랑하는 이유 20 개를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막내의 단점만 보고 살아왔던 저를 발견했습니다.
데이트도 제대로 못하고
계속된 3주차 아버지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듣고
서로 숙제를 나누고
“아버지는 자녀의 삶의 원천으로서 지표가 되고,
자녀의 자부심이 되자.”고 다짐하는데,
속으로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모처럼 만난 딸과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너를 사랑하는 20가지 이유를 가지고 데이트를 시작했습니다.
막내딸을 승용차에 옆에 태우고 진주 가면서,
“아버지학교 숙젠데 들어볼래.”
“흥”하고 미지는 콗방귀를 귀었습니다.
일단 시작을 했습니다.
한 가지를 얘기하니까 “웃기네.”
두 번째를 얘기 하니까 “지수 얘기네.”
세 번째는 “그만해라.”
어쨌든 끝까지 얘기 했는데 반응이 없었습니다.
감히 어떤 표정인가 무서워서
훔쳐보지도 못했습니다.
자식이 제일 무섭덥니다.
오랜 세월 조금씩 쌓인
앙금의 두께가 느껴졌습니다.
앙금의 시작은 초등학생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언니가 아플 때 병약한 언니에 대한 편애가
막내에게는 원망이 되었습니다.
막내의 여린 마음에 새겨진 오랜 원망들은
이제 막힌 담이 되었습니다.
손바닥으로 때린 그 실수가 후회로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나에게도 ‘병약한 언니를 어찌 용납하지 못하나,
열손가락 중에 아픈 손가락 신경 쓰는 것 당연하지,
이 녀석 더 질책해야 되겠네.’ 하는
또 다른 담이 있었습니다.
서로의 담은 높아만 갔습니다.
진주 하숙집에서 7주 연속으로 합천에 오지 않았습니다.
이대로 둘 수 없는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막힌 담이 얼마나 두꺼운지,
아내와 대화도 많이 나누고,
예전 같으면 아직도 이 문제를 피하고 있어서
오히려 이렇게 문제가 커지지도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아버지학교는 이 문제를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내가 먼저 담을 허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낯이 간지러워서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다 간혹 전화도 했습니다.
서경3기 아버지학교가 열리고 있는
성남교회에 막내가 왔는데 만나지 못했습니다.
학생들이 보이길래 혹시 미지도 왔나 해서
문자를 보냈는데 나중에 친구들과 다녀간다고 답이 왔습니다.
병약한 언니에 대한 배려의 불가피를
이해시키려고 하니까 도저히 안 되었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어릴 때 막내가 ‘다리 아프다.’ 하면 꾸중하고,
지수가 다리 아프다 하면 달랑 안고는,
막내한테 ‘빨리가자.’ 재촉했다고.
문제는 나에게 있었습니다.
언니를 편애한 것을 인정하고,
오래된 저의 원망을 존중해 주고 싶어졌습니다.
문자, 전화 회수를 늘이고,
진주까지 가서 만나기도 하고,
내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지를
작은 정성들로 자주자주 보여 줬습니다.
합천서 진주까지 서경3기 오가면서
좋은 아버지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미지에게 감동을 주었나 봅니다..
오랜만에 두 딸이 한꺼번에 집에 왔습니다.
마음을 졸이면서 보니까,
며칠 후 수능시험 칠 언니를 위로하고
자신감을 줄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눈에 보였습니다.
그런 미지가 저는 너무 고맙고 기특했습니다.
나중에 아내가 얘기하는데
언니와 안 싸우겠다고
눈물로 기도하고 집에 왔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결혼 20주년을 맞았는데
아침에 문자가 왔습니다.
“아빠 엄마 결혼 축하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항상 엄마 아빠였는데
최근에 순서가 아빠 엄마로 바뀌었습니다.
미지는 찬양집회를 좋아하고
찬양모임 뵈뵈에 아주 열성적입니다.
얼마 전 진주제일여고 축제에서,
학교 공식동아리로
갓 등록한 뵈뵈가 공연부문에
처녀출전해서 1등상을 탔다고 자랑을 했습니다.
목소리도, 얼굴도 밝아졌습니다.
가족관계 뿐 아니라
껄끄럽던 하숙집 아주머니와의 관계,
교우관계 등 여러 부분이 한꺼번에 회복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학교를 통해서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수신 하늘나라 소 재 식 아버지 앞.
이 편지를 쓰던 날,
비록 많은 원망을 편지에 담았지만,
눈물로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6년 전 예수님을 만나게 된 후에
주님 안에서 변화된 삶을 살고 있고,
이제 아버지학교를 통해서
새롭게 업그레이드되고 있습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하지만,
늘 아내와 아이들을 섬기고,
바른 지표가 되는 아버지 되기를 원합니다.
내 아버지의 나쁜 영향을 답습하지 않으며
우리 가문의 역사를 새롭게 쓰는
아버지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아내와 수지와 미지에게 자부심이 되겠습니다.
여전히 공사 중이며
진행 중인 못난 아버지가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된 귀한 형제님들 앞에
부끄러운 고백을 내어 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