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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를 치료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일이다." -레베카 폴즈
1년동안 30만톤급 유조선을 몰고 바다를 항해하다가 돌아온 친구가 설악산 봉정암 1박 2일 여행을 다녀오자고 했습니다. 설악산 봉정암은 2009년도 심장 이식환우들을 인솔하고 다녀 온 뒤로 3년만에 가게되는 여행길어서인지 몹씨 가슴을 설레게 하였습니다.
3월 31일, 새벽 2시에 일어난 나는 잠을 설치며 5시 30분에 집을 나섰습니다. 숭실대역에서 한 친구를 만나 고속버스터미널 역에서 백담사로 가는 <봉찬회>버스를 탔습니다. 봉찬회는 전국의 유명 사찰만 순례를 떠나는 성지순례 여행 버스입니다. 조계사에서 6시 30분에 출발한 버스는 고속터미널을 거쳐 잠실에서 7시에 출발하여 곧장 설악산 백담사로 향했습니다. 새벽인데도 버스에는 남녀노소의 기도객들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3월 31일 도착한 설악산 봉정암에는 꽃눈이 하염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일기예보를 보니 설악산에는 세찬 바람과 함께 눈이 내린다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용진신행회>와 <봉찬회>라는 불교성지순례 신행단체가 있는데, 용진신행회는 악천후때문에 일정을 취소를 했고, 봉찬회는 그대로 강행을 한다고 했습니다. 선장 친구 부인이 봉찬회에 미리 예약을 하여 나는 처음으로 봉찬회라는 버스를 타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기도객들로 가득찬 버스는 다른 일반 관광버스나 등산버스와는 다른 '무엇'이 있었습니다. 모두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새벽을 나선 사람들이 탄 버스여서 그런가 봅니다. 간절한 기도객들의 마음을 담은 버스는 순풍을 단 듯 서울-홍천간 고속도로를 달려 팜파스라는 휴게소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곧바로 용대리에 도착을 했습니다.
▲봉정암 성지순례 기도객을 태운 봉찬회 버스는 새벽을 달려 용대리에 도착했다.
용대리는 아직 봄이 오지않는 겨울철이어서인지 등산객도 뜸했습니다. 다만 봉정암으로 가는 기도객들을 태운 버스만이 4대정도 이른 아침에 전국에서 도착을 해 있었습니다. 용대리에서 백담사로 운행하는 셔틀버스도 아직 운행되지 않아 우리는 봉정암에서 마련한 스타렉스 한대에 15~16명식이나 포개어 타고 백담사로 가야 했습니다.
용대리에는 한 겨울을 난 황태들이 천장에 걸려 있거나 상품으로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1시간여를 기다리다가 마지막으로 백담사로 가는 차를 탔습니다. 기도는 기다리는데서부터 먼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모두가 아무말없이 기다리다가 좁은 자동차를 불평없이 탔습니다. 좁은 차에 사람들이 포개어 타고 가다보니 인도여행을 할 때에 작은 릭샤 3륜 오토바이에 20여명이나 메다리며 타고 갔던 생각이 났습니다. 사람은 환경에 따라 이렇게 행동도 변화를 하기마련입니다.
▲용대리 풍경. 겨울을 난 황태가 천장에 걸려있다.
▲매장에 진열된 황태
▲셔틀버스가 운행되지않아 봉정암에서 마련한 9인승에 15~6명씩 포개어 타고 백담사로 갔다. 어느날 인도여행에서 릭샤 한대에 20명이 탔던 기억이 떠올랐다.
용대리에서 백담사까지 거리는 약 20리에 이르는 길입니다. 문득 30년도 넘은 오래전 아이들의 손을 잡고 울퉁불퉁한 길을 걸어서 갔던 여름날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차량들이 다니지 않았고 포장도 안 된 길은 오직 걸어서만 다녀야 했습니다. 그 길을 걷기가 힘들다고 투정을 부리는 영이와 경이를 달래며 3시간도 넘게 걸려서 백담사에 도착했던 추억이 길 구비구비마다 떠올랐습니다.
그 때 징검다리를 건너 갔던 백담사에는 대웅전과 허름한 요사가 두 채 정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우리는 백담사의 작은 골방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런 오지에 지금은 포장도 되고 고래등 같은 기와 절집이 백담골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백담사로 건너가는 다리. 전에는 징검다리만 있었다.
▲백담사 일주문
▲크게 늘어난 백담사 전각
▲백담사 극락보전
▲범종각
▲범종각에서 바라본 설악산엔 아직 눈이 녹지않고 그대로 있다.
▲너와지붕으로 이어진 찻집 헌다실
백담사는 참으로 많이 변해 있었습니다. 백담사 선설당에서 마련한 우리는 절밥으로 점심을 먹었습니다. 미역국에 순 채소로 차린 절밥은 언제 먹어도 맛이 있습니다. 아마 아침겸 점심으로 먹는 밥이니 시장이 반찬이라 더 맛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공양을 들고 우리는 잠시 백담사를 둘러보았습니다. 백담사에는 아직도 여기 저기에 치우지 못한 눈들이 쌓여 있습니다.
▲아직도 녹지않는 눈
▲점심공양을 먹는 선설당
▲맛있게 먹엇던 점심공양
백담사 하면 나는 만해 한용운 스님이 먼저 떠오르지만 요즈음은 한용운 스님보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는 대통령에서 물러나 1988년 11월 23일부터 1990년 12월 30일까지 이곳에서 은둔생활을 했습니다. 10.27 법난의 주역인 그가 절집에서 은둔생활을 하게 된것은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이곳 백담사는 들어오는 길이 단 하나라 요새 중의 요새여서 경호를 하기에 최고로 좋은 자리라고 하는군. 그래서 죄를 많이 지은 전두환이가 경호원들과 함께 이곳을 선택했다는 거야."
누군가 화엄실에 진열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사진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화엄실은 전 전 대통령이 1988년 11월 23일부터 2년동안 기거했던 곳으로 화엄실의 방 한 칸에는 그가 사용하던 물품들이 박물관처럼 그대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 전 대통령이 머물다 간 이후 백담사로 가는 통행로이던 작은 오솔길은 차가 드나들도록 콘크리트 포장으로 변했고, 개울을 가로지르는 수심교가 지난 89년에 착공해 90년 9월에 완공되어 흉물처럼 아름다운 백담계곡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불교가 자비와 관용의 종교라고 하지만 10.27 법난을 용인한 그를 받아들여 2년 동안 먹여주고, 재워 준 것도 부족하여 그의 족적을 사진과 함께 보물처럼 보존하고 있는 절집의 처사를 지나가는 나그네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이 가난한 백담사 절집에 큰 시주라도 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도후 스님은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가 천수심경(千手心經)을 달달 외운다. 추울 때도 108배를 거르는 법이 없었다”며 백담사 생활을 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천수경을 외는 것은 무료한 시간을 달래고, 108배를 하는 것은 추위를 견디기에 좋은 운동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불교로 개종을 하여 얼마만큼 참회를 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최근까지의 그의 행적을 보면 전혀 참회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듭니다.
▲극락보전 화엄실에 진열된 전 전두환대통령의 흔적
원래 그는 가톨릭 신자로 세례명이 베드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담사 은거 생활을 한 뒤 불교로 개종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은둔생활 족적을 보전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1980년 불교계에 극심한 피해를 주었던 10.27법난의 주역을 법당 앞에 진열하고 있는 모습은 아무래도 아이러니하게 보입니다.
"..... 불교계에 참혹한 피해를 끼친 1980년 10·27법난을 언급한 바 있다. 나는 당시 ‘구국영웅 전두환 장군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세 차례 거절한 뒤 23일간의 불법 구금 끝에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당시 보안사령관으로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하고 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자신이 지시했다고 밝혔지만, 최고 권력자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 법난의 최종 책임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2011.11.10 동아일보, <나의삶 나의길/송월주 회고록에서>
전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던 송월주 스님의 회고록에는 그가 10.27 법난의 주역이라는 것을 통열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 그는 1997년 4.17일 대법원으로부터 무기징역에 2205억원의 추징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지고 있는 전 재산이 29만원뿐이라고 밝히고 추징금을 납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세상사람들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모두가 웃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연간 8억원을 들여 경호를 한다느니, 전두환 일가 명의의 골프회원권 355억원이 매물로 나와 있다느니 하며 세간에 화재가 되고 있으니 참으로 세상 일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만해 한용운 스님의 흉상
기도정진을 하러가는 사람이 남의 허물을 보고 험담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해 한용운 스님의 거룩한 독립운동 정신이 담긴 백담사에 전 전두환대통령의 족적을 극락보전 앞에 버젓이 늘어 놓은 것은 아무래도 어울리지가 않아보입니다. 오히려 만해 스님의 전시관은 오른쪽 구석에 떠밀려 있는 것처럼 보이고, 10.27 법난의 주역인 그의 때묻은 옷과 사진을 대웅전 앞에 진열해 놓은 것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해우소에 앉아 굳게 걸린 문고리를 바라보며 잠시 일을 보고 있는데, 다시 만해 스님과 전 전대통령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떠올라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백담사의 풍경이 혼탁하게만 보입니다. 아무리 불교가 관용의 종교라고는 하지만 중생의 눈으로 볼 때에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중생인지도 모르지만....
▲백담사 해우소 문고리
우리는 백담사를 뒤로하고 봉정암을 향하여 발길을 옮겼습니다. 백담계곡에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돌탑들이 흐트러진 마음을 가지런히 잡아줍니다. 작년 홍수에 모두 떠밀려 가 버렸을 텐데 누군가의 손으로 다시 쌓아올린 돌탑들이 세태에 어지럽게 헝클어진 마음을 가지런하게 잡아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계곡의 돌탑에 합장 배례를 하며 개울을 건너 갔습니다. 개울에는 생각보다 많은 물이 세차게 흘러내려갔습니다. 겨울내 내렸던 눈이 녹아서 흘러내리려 많은 양의 물이 철철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만가지로 변해도 자연은 거기 그대로 있었으며, 물은 산위에서 아래로 아래로 낮은 곳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도 저 물처럼 낮은 곳을 향하여 흘러간다면 타툼이 없는 세상이 될 터인데, 자꾸만 위로만 올라가겨로 하니 세상은 언제나 헐뜯고 싸움질을 하는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백담사 앞 백담계곡에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돌탑
자연은 누구의 허물도 탓하지않으며 모두를 받아들입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백담계곡의 물을 바라보자니 전두환 전 대통령을 탓했던 마음이 눈이 녹듯 사라져 버렸습니다. 누구도 자연앞에서는 이렇게 겸손해 지는 법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지은 업은 걸코 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죽을 바라보며 "공수레 공수거 인생(空手來空手去是人生)라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몸과 재물은 두고 가지만 마음으로 지은 업은 짊어지고 갑니다. 그런 이치를 안다면 결코 나쁜 업을 지을 수 없는 것인데도 중생은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찌들어 나쁜업을 서슴없이 지게 됩니다.
▲백담계곡에 무수히 쌓아놓은 돌탑
아아, 이곳에서부터는 정말로 마음을 내려놓고 가야 겠습니다. 더구나 악천후가 예상되는 날씨에 거의 40리에 이르는 봉정암까지 무사히 가려면 정말 기도하는 마음으로 등산길에 집중을 하여야만 합니다. 일행중에는 70을 넘긴 할머니들도 몇 명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보다 더 큰 배낭(쌀, 떡, 미역 등 공양물을 담은)을 걸머지고 뚜벅뚜벅 길을 걸어갔습니다. 오직 기도 일념으로 걸어가는 그들을 바라보자니 존경스런 마음이 저절로 일어났습니다. 기도의 힘은 이렇게 큰 모양입니다. 우리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수렴동 계곡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내 딛으며 걸어갔습니다.
▲70을 넘긴 노구에 큰 공양물을 가득 담은 큰 배낭을 걸머지고 꽃눈이 휘날리는 봉정암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객을 바라보면 저절로 존경하는 마음이 나온다.
첫댓글 백담사는 아직 겨울이군요. 백담사에 가면 누구나 느끼는 갈등을 찰라님께서 리얼하게 표현해 주셔서 시원하면서도 정말 어떻게 할 수 없는건지 알 수 없군요. 광주 학살의 주역을 미화하는 것조차 잊고 열심히 살다보면 역사가 다 해결해 주겠지만 말입니다.
마지막 사진속의 노순례객의 모습이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선생님~!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백담사에 다녀온것도 전통의 백담사 거주기간이었답니다.
등산객들,백담사 순례객들 앞다투어 전통내외와 기념사진 찍던 기억도 생생하고,,,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세상사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허술했던 백담사 전경이 기억속에 있는데,지금의 모습은 정리가 잘 된 모습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