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일어나자마자 수돗물로 눈을 씻고 양치를 하고 따뜻한 물을 한잔 마신 다음 책을 읽었다. 나는 아침 책읽기를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령 여행이나 교육을 받으러 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년 열 두달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요즈음은 <가족관계등록>과 관련된 책을 읽고 있다. 지난 1월 11일부터 가족관계등록업무를 보고 있는데 범위가 방대해서 그런지 애를 먹고 있다. 하루에도 몇 건씩 해당 관서나 민원인들로부터 질의가 들어오는데 만만한 게 없다. 답변은 고사하고 몇 시간을 연구해도 해답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때는 교육원에 질의를 해서 답변을 해준다.
내가 가족관계등록업무를 본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02년도에 거창지원에서 1년간 보았다. 하지만 10년 이상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법이나 예규, 선례 등이 많이 변경되어서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쨌든 열심히 공부는 하고 있지만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지 않아 내심 불만이다. 물론 57세라는 나이를 감안하면 당연할 수도 있다. 내 나이쯤 되면 열번, 스무번을 읽어도 이해하기가 힘들고 설령 이해를 했다해도 암기가 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어서 설명을 해주는데 애로사항이 많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업무를 맡은 이상 열심히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창원지방법원이 관할하는 지역은 창원시와 김해시 두 곳으로 관서는 15개 시, 구, 읍, 면이다. 비록 관서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인구는 100만이 넘는다. 그에 비해 거창지원 관할은 거창, 합천, 함양 세 곳으로 인구가 15만이 조금 넘지만 관서는 창원보다 훨씬 많은 43개에 달한다. 그래서 교육도 창원법원에서는 월 1회를 하지만 거창에서는 월 3회를 했었다. 감사도 창원에서는 하반기만 하지만 거창에서는 상반기, 하반기 두번에 걸쳐서 했다. 사실 전국 법원 어디를 봐도 거창지원 관할만큼 오지는 별로 없을 것이다. 1950년대 말까지 공비가 출몰할 정도였으니 가히 상상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전설같은 이야기지만 거창지원이 부산지방법원 소속이던 70년대까지는 부산에 근무하는 직원이 함양등기소장으로 발령이 나면 거의 출근을 하지 않고 지금의 실무관에 해당하는 차석이 등기소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오지다 보니 감사를 나가도 하루에 한 곳 또는 두 곳밖에 보지를 못한다. 사실 호적감사라는 게 별로 볼 게 없었다. 장부로 많지 않고 종류도 많지 않아서 1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런데 나는 당시 좀 별난 취미가 있었다. 책에 대한 관심이 컸는데 감사를 나갈 때는 반드시 그곳 군지나 면지를 한권씩 얻어오곤 했다. 물론 다른 특별한 책이 있으면 빌려보기도 했다. 함양군 안의면이란 곳에 감사나갔을 때였다. 당시에는 감사가 끝나면 식사를 마치고 주변 명승지를 구경하는 게 관례였는데 그날은 황석산에 있는 어느 절로 우리 일행을 안내하는 것이었다. 절은 크지도 작지도 않았지만 유명한 고승이 계신다고 해서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이면 그날 스님께서 출타를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승께서 지었다는 [불문보감(佛門寶鑑)]이란 책을 받아오는 것으로 만족해야했다. 거창으로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책을 펼쳤는데 세로 쓰기로 편집된 겉장에는 한자로 <佛門寶鑑>이라는 제목과 바로 아래에 <李性壽 著>라고 되어 있고 맨 아래에는 <黃垈禪院>이라고 적혀 있었다. 자서(自序: 서문)에 [불문보감]이란 말을 설명하는데 "각계 각층의 사람이 부처님 품안에 들어설 때 그들에게 교훈이 될 수 있는 말, 또 마음에 신뢰감을 가질 수 있는 글을 실어 지면을 꾸몄으니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은 모두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대목을 가려서 자신의 생활신조로 삼이 실천하면 많은 보탬이 되리라 생각합니다"라고 적어놓았다. 나는 고승의 지시대로 나와 관련된 대목을 찾기 시작했는데 마침 눈에 띄는 게 있었다. <법조인에게>라는 글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글을 읽어내려갔다.
여러분! 이 산승은 법률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 불교사상에 반영된 인간적 측면에서 말을 하겠습니다. 먼저 사회의 모든 규범이 법조인들에 의해 유지된다는 점을 감사드립니다. 그런 면에서 볼때 여러분은 국민에게 엄숙하고 근엄한 인상을 주어야 되는 것이 사실인 반면 국민에게 친밀감을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법관이 되어 주었으면 합니다. 옛날 위정자들은 선정을 베풀기 위해 민심을 살폈으니 법관들도 국민의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의식구조를 바탕으로 자신이 인간재판 속의 피고로서 심판대에 서면 그들의 심정을 잘 알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원리 원칙이 말해 주듯 법률 또한 예외 판결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모두가 도덕과 윤리에만 얽매어 산다면 그 얼마나 무의미한 인생살이가 될 것인가!
이를 볼 때 법이 율법에 의해서만 결정된다면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 아니라 법을 위한 법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옛날 명관들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기로 합시다. 어느 고을에 도난 사건으로 고을 원이 한 방편을 세워 양민을 모아 놓고 "여러분은 그 도둑 한 사람 때문에 이곳에 모이게 되었으니 도둑만 남고 양민은 모두 물러 가시오"하니 도둑이 먼저 가려 했습니다. 이에 원이 "네 이놈! 도둑은 게 섰거라!" 하자 도둑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으니 이것은 도둑이 제발 저리다는 말을 실감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볼 때 국민을 편안히 보호하려면 지혜가 밝고 올바른 판단력을 내릴 수 있는 이성이 있어야 합니다.
재판사를 보면 재판관이 오판을 한 도의적 책임을 느껴 물러난 사건이 여러 번 있었는데 이와 같이 자신이 저지른 오판에 도의적 책임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명관의 자격을 갖춘이라 하겠습나다. 국민은 선량하기 때문에 보야야 하는 손해가 적지 않으니 자상한 손길로 가족의 일을 돌보듯 어루만져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형을 선고하기 전에 그가 지은 죄는 밉지만 인간 대 인간의 따뜻한 인정을 베풀어서 머리 숙여 참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재범의 씨앗을 완전히 제거해 주는 것이 법관으로서 훨씬 보람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의사의 오진은 인명에 많은 피해를 가져오고 법관은 오판으로 이해 국민에게 해를 끼치는 경향이 적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지막 한가지 부탁은 현 시대에 맞는 명철한 법조인의 자격을 갖추는 한편 국민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아량과 도의적 책임을 능히 감수할 수 있는 명관이 되어 주기를 바랍니다.
고승의 글은 하나도 버릴 게 없었다. 물론 여기에 실린 글 모두는 직접 해당 기관을 방문해서 강연한 것들이다. 그래서 더욱 실감이 났다. 나는 책의 마지막 쪽에 나와 있는 고승의 사진과 약력을 들여다보았다. 흑백사진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얼굴이 약간 검고 말랐으며 하얀승복을 단정하게 입고 있는 상반신 사진이었다. 여느 노인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날카로우면서도 자상한 것이 세상을 달관한 눈빛이었다. 1923년 경남 울주군에서 출생. 1944년 3월 15일 득도 후 현재까지 수행 정진 중. 1967년 8월 대한 불교 조계종 총무원 교무부장 및 조계사 주지. 1968년 8월 부산시 범어사 주지. 1972년 10월 합천 해인사 주지. 1978년 10월 세계 불교지도자 대회 일본 주최 한국 대표로 참석. 1981년 1월 대한 불교 조계종 총무원 총무원장 취임. 1994년 현재 황석산하 정진중.
지금 고승이 생존해계신지는 나도 모르겠다. 1923년에 태어나셨으니 열반에 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그후 두어차례 더 그 산사를 방문했지만 그때마다 고승은 출타중이었다. 2003년에 내가 창원지방법원으로 발령을 받고 이사까지 하는 바람에 그곳에 갈 기회가 없었다. 조만간 방문할 계획이다. [불문보감]은 [성경]과 더불어 내가 가장 자주 보는 책이고 가장 많은 깨우침을 주는 책이다.
가족관계등록을 공부하다가 잠시 옛 생각에 잠겨보았다. 희망회원 여러분,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