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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81)
푸른 푸른
1.
“목매달고 죽기 좋은 날씨야!”
순간 왜 그 말이 떠올랐을까. 깔딱 고개에 올라서자 세 갈래로 갈라지는 조붓한 오솔길 한가운데 자리 잡은 바위에 널린 흰 종이가 눈길을 끈다. 바람에 날아가지 말라고 도톰한 나무껍데기로 괴어놓은 화선지에 붓글씨로 ‘푸른 푸른’이라 씌어있다. 서예학원 선생의 사인인 듯한 연필 표식과 함께 쓰인 날짜를 보니 사흘 전이다. 종이 옆에 놓인 달랑 열쇠 한 개 달린 열쇠고리. 위급할 때 호루라기로 쓸 수 있도록 고안된 그것은 열십자에 부조된 금속매듭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형상이다. 등산객의 왕래가 잦은 삼거리 바위에 흰 손수건처럼 널린 한 장의 붓글씨와 열쇠고리. 나는 걸음을 멈춘 채 그것을 뚫어지게 주시한다.
불길한 예감이 떠나지 않는다. 그가 남자고 자살하러 올라와서 가족들이 자신을 찾기 쉽게 표시 해놓은 것이라는 직감이 거의 단정으로 바뀌었다. 그는 아들이나 혹은 딸애가 정성들여 썼을 붓글씨를 주머니에 넣고 현관을 나서면서 집안 구석구석 꼼꼼히 둘러보았을까. 쫓기듯 뒤돌아볼 여유도 없었을까. 음식을 꼭꼭 씹어 삼키듯 따복따복 올라왔을까. 아니면 허위단심 미친 듯 땀을 쏟으며…….
산은 인근 두 개 구, 다섯 개 동 주민들의 산책코스로 능선을 따라 수 십 갈래로 갈라지기 때문에 산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방향을 짐작하기 어렵다. 잡풀 숲에서 불쑥 사람이 나타나 놀랐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길은 길이 아닌 듯한 곳에도 가르마처럼 숨어있었고, 없던 길도 사람들의 발길에 다져지면서 마지못해 길이 돼주었다.
바람에 화선지가 팔락인다. 소나무 껍데기에 머리채를 쥐어 잡힌 채.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흔드는 백기 같다. 구조를 요청하는 수신호 같다. 내 말에 귀 기울여줄 사람이 필요했어. 살고 싶어. 살고 싶다. 정말 이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어. 그는 정녕 한 생을 마치고 있는가.
하늘은 구름장이 낮게 가라앉아 금세라도 눈을 뿌릴 기세다. 이런 날일수록 더욱 광기와 광풍에 휘둘릴 수 있다. 나 역시 이럴 때 일기예보라도 하듯 뒤통수가 당기고 무엇에 홀린 듯 안절부절 못하지 않았던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종이와 열쇠를 가리키자 마지못해 한 마디씩 한다.
“열쇠 주인이 성당 다니는 신자 같은데요.”
“글쎄요?”
“그거 아까부터 거기 있었어요.”
아니, 불과 삼십 분 쯤 전에 내가 여기 지나갈 때만 해도 없었다. 그들은 알 바 아니라는 듯 내처 가던 길을 간다. 나는 여전히 바위 주변을 맴돌다가 산길 양편에 펼쳐진 가파른 숲을 눈으로 꼼꼼히 훑는다. 나목들이라 멀리까지 시야가 트인다. 열쇠 주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인근 숲 어디에서도 불온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것이다. 그를 찾아내면 어쩔 것인가. 특별히 어쩌겠다는 생각도 없이 막연한 불안감에 서성인다. 오 겡끼 데스까! 그애를 보냈을 때의 속수무책이 악몽처럼 되살아난다. 미리 알았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까. 일 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그 의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르마 같은 산길에 눈이 한 점 두 점 내린다. 차라리 누군가 불쑥 벼랑을 기어 올라와 종이와 열쇠를 집어 들고 아무 일 없다는 듯 휘적휘적 산길을 내려갔으면…… 그럼 나도 괜히 시간낭비 했군. 홀가분하게 내려가련만. 누군가 꼭뒤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 걸음이 무겁다. 곧 어둠이 내릴 것이다. 눈발도 더 굵어질 것이다. 갑자기 종소리가 두우웅웅 두우웅웅 들려온다. 어서 내려가라는 듯. 골짜기 아래 자리 잡은 산사에서 오후 5시를 알리는 종소리다. 항상 이맘때면 들린다. 그제야 쫓기듯 걸음을 빨리 한다. 아무리 도시 한복판에 있어도 산은 산인지라 해가 빨리 떨어지고 기온도 더 낮다.
갑자기 왼편 숲길에서 낯익은 한 쌍의 남녀가 나타났다. 이따금 마주치는, 눈에 익은 사람들이다. 나는 그들이 민망할까봐 한 번도 정면으로 쳐다본 적이 없다. 곁눈질조차. 그러나 감으로 안다. 아무리 자로 잰 듯 정확히 보폭을 떼도 남자의 걸음이 어딘가 어색하다는 것을. 오늘은 꼭 확인하고 싶다. 남자는 해가 있건 없건 항상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눈이 내리는 끄느름한 오늘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남자의 걸음이 하도 자연스럽고 거침없어 긴가민가했다. 여자가 왼팔을 내맡긴 채 남자의 보폭을 이끌고 있다. 낮은 소리로 자분자분 대화를 나누며 산길을 내려가는 걸음이 한 치도 주저하거나 망설임이 없다. 남자는 시각장애자가 분명한데 지팡이 하나 없이 아내의 팔에 의지한 채 가파른 산을 거의 매일 오르내렸던 것이다.
불현듯 오랫동안 손놓고 있었던 녹음이 생각났다.
‘책과 테이프를 받아온 게 언제였더라?’
의뢰인은 기다리다 지쳐 포기했을지 모른다. 왜 사무장에게서 재촉 전화가 오지 않았을까. 이미 다른 사람에게 다시 부탁을 했을지 모르지. 하지만 책을 내가 갖고 있잖아. 처음부터 그 책을 고르는 게 아니었어. 책 내용에 따라 읽는 속도도 비례한다. 개론서는 속도감이 떨어지고 내용이 지루해 썩 안 내킨다. 도표나 그래프, 그림이라도 나오면 설명이 난감해서 더듬거리기 일쑤다. 설명을 가장 압축해서 요약해놓은 것이 도표나 그래프라 본문보다 더욱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건만 문외한이 볼 때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저 난감할 뿐이다. 그러니 재미커녕 속도감이 있을 턱 있나. 물론 재미로 시작한 일은 아니다. 누구를 도우려면 싫든 좋든 기꺼이 해야 한다. 그러나 이따금 종잡을 수 없는 광기에 휘둘리면 모든 게 의미 없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어진다. 그 책은 ‘윤회’에 관한 내용이라 처음부터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봉사는 식당에서 메뉴 고르듯 고를 수 없는 것이고 하필 그 때 그 책 밖에 없었던 게 이유랄까. 자책이 이마를 친다. 마음이 조급하다.
푸른 푸른 푸른 산은 아름답고요 푸른 산 언덕 위엔 구름도 많고요. 토끼구름 나비구름 짝을 지어서 살랑살랑 구름 마차 타고 가지요~~ 초등학교 시절 음악시간에 두 손을 앞에 모으고 상체를 메트로놈처럼 흔들며 불렀던 노래다. 가사가 다 기억나진 않지만 경쾌한 곡이었음은 틀림없다. 눈구름 잔뜩 낀 컴컴한 날씨에 신날 것도 없는 기분으로 동요 <푸른 산>을 흥얼대기 시작한 것은 아까 본 ‘푸른푸른’ 글귀에서 여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이 시간 골짝 어디쯤에서 모반(謀叛)을 꿈꾸고 있는가. 부디 그가 준비한 밧줄이 튼튼하길…… 맹인 부부는 그새 어느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는지 보이지 않는다.
2.
어디까지 했더라. 테이프를 되감기해서 들어본다.
‘……성철 큰 스님께서는 윤회를 입증하는 방법으로 전생기억(前生記憶), 전생회귀(前生回歸), 전생투시(前生透視)등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에드가 케이시는 자기최면 투시 상태에서 환자의 육체적 병의 원인을 알아내 의학적인 처방에 대한 확실한 진단을 하는데 이것을 피지컬 리딩(Physical Reading)이라고 했다. 또 육체의 질병만이 아닌 온갖 삶의 고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를 투시함으로써 그 고난의 원인이 현생(現生)에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먼 전생(前生)에서 비롯된 카르마(業) 때문임을 밝혔는데 이것을 라이프 리딩(Life Reading)이라고 했다. 이 전생 투시에 나타난 카르마는 바로 동양의 업, 윤회사상에 대한 추정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녹음은 거기서 멈춰 있다. 알 것 같다. 왜 더 이상 마이크를 잡지 못했는지. 먼지가 쌓이도록 녹음기를 밀쳐두었는지. 내용이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을 때면 혀가 꼬이고 발음이 새는 것 같아 왕왕 울리는 내 목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행간을 놓쳐 읽은 데 또 읽다 결국 스톱 버튼을 누르고 만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던 탄식 중에 우리 남매가 가장 싫어했던 말이 바로 “전생에 죄가 많아서……”였다. 돌이켜 생각하면 대부분의 노인들이 힘들 때 버릇처럼 중얼거리는 말이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야말로 당신의 삶을 고달프게 만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전생의 혹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것이 근거 없는 피해의식일 뿐이라고 우릴 다독거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죄책감은 확신으로 바뀌었고 확신은 타인에 대한 막연한 분노와 함께 위축감으로 자리 잡았다.
전생이 다 무엇인가. 최면술사의 도움을 받아 잠깐 둘러보고 오는 호기심의 대상도 아니고. 삶이 그렇게 질기고 또 질긴 것이라면 생을 받는 것 자체가 불행이다. 가뜩이나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마치고 싶다 한들 뜻대로 마쳐지는 것도 아닌데. 나는 윤회를 믿지 않는다. 내생도 결코 믿지 않는다. 삶은 오로지 일회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궁금하지 않다. 다만 태어났으니 살 뿐이다. 그리고 주어진 삶이라면 어서어서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 지었으면 싶다. 뱃속에서 팔 개월을 살던 아기가 유산됐을 때도 담담했다. 남편은 그런 내게 치를 떨었다. 징그럽고 무섭고 독하고…… 할 수 있는 욕설을 다 동원해 비난했다. 그럴 수 있다고 남편을 이해했다. 그는 나보다 훨씬 삶에 대한 애착이 강했고 긍정적이고 단순했으니까. 나는 차라리 아기를 위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부모 자식이기 전에 인간 대 인간으로 말이다. 세상에 한 생명을 태어나게 하는 일은 경이(驚異) 이전에 엄청난 책임이 뒤따르며 어쩌면 감당 못할 죄를 짓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채 결혼을 하고 잠자리를 한 것부터 모순이었다. 남편은 계속 아이를 원했고, 나는 도리질 쳤다. 아이를 낳는 것은 이승에서 헤어날 수 없는 또 하나의 업을 짓는 일이었다. 그 모든 일이 카르마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는 내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할머니의 넋두리를 통해 반복 학습한 결과였다.
천하에 짐승만도 못헌 년! 어찌 고물고물헌 지 새끼들 놔두고 샛서방을 찾아 나섰을꼬! 내가 전생에 죄가 많다, 다 내 죄여……. 당신 딸의 허물을 속죄하겠노라고 자청해서 우리를 떠안은 할머니는 눈을 감는 그 날까지 업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애간장을 녹였다. 불쌍헌 년, 그 년도 어디서 펜히 눈 뜨고 살진 못헐 것이여! 그 년도 전생에 지은 죄가 많아 그런 것이다. 업보여. 모다들 업보여…….
윤회는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굴레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다.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도 떨칠 수 없고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것이 전생이다. 그래서 나는 흔적도,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싶다. 다시는 어느 누구에게도 기억되고 싶지 않다. 그런데 내게 <윤회의 참 의미>라니. 글자 한 자, 마침표, 물음표까지 다 놓치지 말고 읽으라니.
문득 하고 많은 책 중에서 이 책을 골라 읽어달라고 부탁했을 의뢰인을 떠올린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신앙의 힘으로 현실을 극복하는 것에 지쳤을 즈음 윤회를 떠올렸을 것이다. 현생은 이렇게 살고 있지만 내생에서 반드시 보상받을 거야. 그렇잖으면 너무 억울하잖아. 내생에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함으로써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고 싶었겠지.
마음을 가다듬고 목청을 고른다. 의뢰인도 성우 같은 청아한 목소리나 정확한 발음을 기대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시각이 사라진 대신 청각과 촉각, 후각이 민감해졌을 테니 최대한 맑은 목소리를 내는 게 좋을 것이다. 밝게 한 옥타브 띄어서 듣는 이의 기분도 고취시킬 겸…… 흠흠. 다시 녹음 버튼을 누른다.
‘……인간의 본체나 기원, 궁극의 목적 등은 모든 수수께끼 가운데서 가장 심원한 수수께끼라 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육체의 탄생과 죽음이 인간의 시작과 끝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단지 육체적 존재가 아니라 육체 속에 들어있는 영혼이며, 영혼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했고 죽은 뒤에도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입증된다면 그것은 정신과학을 완전히 바꿔 놓을 것이다……’
뮤지컬 “맑은 날에는 영원이 보인다”에 나오는 그리스 선박왕은 윤회를 철썩 같이 믿고 자신의 전 재산을 내생을 위해 남겨두려고 과도한 욕심을 부린다. 철저히 본능에 충실한 그의 모습이 안쓰럽다 못해 어리석어 보였었다. 그는 윤회를 부활로 착각했던 것이다.
‘……즉 현생의 상태는 단지 파묻혀 있는 과거 생의 비극적 인상을 다시 일깨우는 매개체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회론의 견해에 따르면 무의식의 마음은 밑바닥이 열리게 되어 있는 상자처럼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칼 융은 정신현상의 불가해를 설명하기 위해 심층영역이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예감해 <집단적 무의식> 또는 <인종적 무의식>이라는 일종의……’
미국 애리조나 주의 스커스 데일 냉동 창고에는 냉동인간 1호인 심리학자 베드포드 박사가 액체 질소가 가득 찬 영하 196도의 캡슐 속에 냉동 보관된 채 환생을 기다리고 있단다. 과연 현대 의학은 어디까지 발달할 것인가. 그의 무모하고 어리석은 욕심을 채워줄 수 있을까. 그가 다시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까.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고통을 베드포드는 짐작 못할 것이다.
‘……윤회론에 반대하는 사람들 대다수의 반대 이유는 우리가 자신의 전생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의식적인 기억이란 매우 조잡하여 여러 가지 일들이 마치 강물이 흐르듯 우리 곁을 지나가니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진 못한다. 그러므로 윤회에 대한 반론을 깨기는 어렵지 않다. 첫째는 망각과 기억의 퇴화가 극히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인간 현상이라는 점, 둘째는 현재의식의 기억이라는 것은 세밀한 점은 잊어도 큰 줄거리는 남는 성질을 갖고 있는 점이다. 따라서 세밀한 점은 망각해도 핵심적인 기억은 남아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의 양심, 기능, 능력 등의 정도는 상세한 기억이 남아있건 없건 전생의 경험을 모두 합친 총계의 이월이라는 말이다……‘
얼마 전에 발견된 500년 된 잉카 소녀의 미라는 보존 상태가 좋아 얼굴의 윤곽이며 표정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사후에 부활과 환생을 꿈꾸는 왕이나 귀족이 아니라 화산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재물로 바쳐진 순결한 소녀라는 점이 여느 미라와 달랐다고 할까. 메스콤은 인고의 5세기를 견뎠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생생한 얼굴 표정에서 수줍음마저 느껴진다고 떠들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세상에 결코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다는 완강한 거부에 더 가까웠다.
아…… 또 다시 입이 마르고 혀가 꼬인다.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돋아나는 상념에 사로잡혀 녹음을 포기한다.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인간이 단순하다는 것, 어쩌면 축복인지 모른다. 나도 단순하고 싶다.
3.
분량이 얼마나 남았나 책장만 뒤적이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여보세요?”
“박 영리씨 핸드폰 맞죠?”
“그런데요?”
“아, 영리씨, 나 8지부장. 어디 아파? 감기 걸렸나봐. 목소리가……”
신세계 예술의 김 부장이다. 친근한 척 반말에 소름이 돋는다. 예상치 못했던 전화라 내 반응이 떨떠름하다.
“아뇨. 그냥……”
“낼 스케줄이 걸려있거든.”
스케줄이라는 말에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을 뻔 한다. 나 같은 보조 출연자가 스케줄은 무슨.
“아침 7시까지 본관 현관 앞에서 모이니까 말이지. 나올 거지?”
썩 내키지 않지만 단번에 싫다고 자르지도 못한다. 그가 또 연락을 해올 줄은 몰랐다.
“이번엔 대사도 있어. 내가 특별히 신경 썼지.”
“대사요?”
“아 뭐, 긴 건 아니고 미스 박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거야. 낼 오케이?”
“……”
순간 망설인다.
“걱정할 건 없어. 사실 말이지. 두 컷이라 대사도 짧아. 딱 두 줄! 할 수 있지?”
그는 내가 행여 거절할까봐 내쳐 밀어붙인다. 어쨌건 대사가 있다니 돈은 좀 더 받을 것이다. 대사라도 얻으면 오매불망하던 연기자의 길에 들어선 듯 태도가 바뀌는 사람 여럿 봤다. 그러나 나는 대사 없이 뒷모습이나 옆모습만 스치듯 잡히는데 만족하고 안도했는데.
“촬영지가 멀어요?”
“아니, 한강 고수부지. 의상은 삼십 대 후반 아줌마. 매점 아줌마 복장이니까 신경 써서 챙기고. 아 참, 머리가 파마머리인데. 미스 박 생머리지? 어쩐다. 가발 빌릴 데 없나?”
“지금 이 시간에……”
“그럼 할 수 없지. 내가 미스 박 매니저인데. 소품 담당한테 특별히 부탁해 볼테니 시간 맞춰 나오기나 하라구.”
지난 번 <왕건> 촬영차 문경새재 다녀오던 날 밤. 사흘에 걸친 강행군으로 파김치가 돼 방송국 앞에서 해산하는데 김 부장이 스치듯 귓속말을 했다. 할 말 있으니까 이따 좀 남으라구. 버스가 떠나고 출연했던 엑스트라들이 다음을 기약하며 뿔뿔이 흩어지자 그가 소주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몇 차례 사양했지만 집요했다. 피곤할 땐 그저 소주가 제일이야. 한 잔 쭉 마시고 가서 자면 잠도 잘 오고 좋잖아? 결국 그가 잡아끄는 대로 곱창 집에 간 것까진 괜찮았는데 나중이 문제였다. 내 카드로 계산을 하게하더니 2차 가자며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각이었다. 이봐, 미스 박, 그 나이에 그 얼굴에 그래도 뽑아준 사람 성의를 생각해야지. 일 그만하고 싶어? 카메라감독이며 조감독들 다 나랑 한솥밥 먹는 처지란 걸 알아야지. 뭘 알고 튕기라구! 잘 만 하면 영화도 출연시켜 줄게. 그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의 입에서 뿜어지는 마늘과 소주 냄새에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나 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야. 알았니? 심심해서 하는 거라구! 이봐, 미스박, 미스…… 그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순간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택시를 잡아탔다. 술값에 택시 값, 하루 일당이 고스란히 날아간, 지독히 재수 없는 날이었다. 그는 그날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시침 뚝 뗀 채 한참 너스레를 떨더니 전화를 끊었다.
거울을 본다. 미장원 가본 지 오래됐다. 손질 안 하고 무작정 길러온 머리가 푸수하다. 여자 보조는 주로 사극에 많이 동원되다보니 항상 머리를 길게 기르고 염색은 가능한 한 피하라고 해서 시키는 대로 해왔다. 아침 일곱 시 집합이라고 해도 정작 촬영은 정오나 돼야 가능할 것이다. 주연들의 지각은 다반사고 거듭되는 NG에 우리 같은 보조는 마냥 기다려야 한다.
처음 <신세계 예술>에 사진과 서류를 접수시키러 갔을 때 그들이 알려준 보조출연자 수칙 일 호가 ‘기다림에 익숙할 것!’이었다. 그리고 ‘한 눈치 하되 튀지 말고 평범해야 하며 카메라에 잡히지 않도록 행동하되 감독이 큰 줄거리만 설명하면 스스로 알아서 자연스럽게 적극적으로 연기에 임해야 한다’였다. 카메라에 절대 잡히지 말라면서 적극성은 뭐고, 한 눈치, 자연스러움은 또 뭔가. 그것만 잘 지키면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를 가까이서 볼 수 있고, 부업으로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떠벌였다. 그들은 내 명함판 사진을 돌려보며 얼굴에 맞는 신을 찾아보겠다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자리에 김부장이 있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암튼 그렇게 신세대, X세대, 쉰 세대의 끼가 넘치고 다소 주책맞다 싶은 사람들 대열에 꼈다. 보조들끼리도 신참 고참 서열이 분명해서 나는 신참이지만 적지 않은 나이로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한 채 엉거주춤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루하게 기다리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자주 김 부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유심히 지켜봤다.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어도 끈적거리는 그의 시선을 피할 순 없었다.
사실 대부분의 아줌마들은 부업삼아 나오지만 솔직히 내겐 유일한 돈벌이다. 그동안 일주일에 많으면 서 너 번, 적으면 한 번 정도 연락이 왔다. 그러나 잦은 호출은 원치 않는다. 한 두 번이면 족하다. 그 정도면 최저 생계비는 벌 수 있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다. 아무리 짧은 신을 찍어도 내 출연 장면이 끝났다고 돌아올 수 없고 단체로 행동해야 하므로 온전히 하루를 다 뺏기는 게 불만이라면 불만일 뿐 큰 어려움은 없다. 언제 한 번 김부장과 담판을 지어야 할 텐데. 어떤 식으로 짓는 게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이젠 자칭 매니저라……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보조 출연자에게 매니저라니.
주인공 남자가 벌써 세 번째 강물에 빠졌다. 물에 빠져 자살하는 장면인데 그를 건져 올리는 장면과 가족들이 그를 붙들고 우는 신에서 자꾸 NG가 났다. 12월의 강물이 얼마나 찰까. 그래도 한사코 대역을 거부한다. 프로다운 근성이다. 그가 나오는 다른 드라마를 몇 번 본 적이 있다. 진중하고 인간미 넘치는 역할로 이미지가 굳어진 일급 탤런트다. 나는 그가 자살 두 어 시간 전에 소주 마시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진술하는 매점 아줌마 역할이다. 그가 죽은 장면이 마무리 되고 경찰들이 형식적인 탐문 수사 차 내게 몇 마디 묻는 장면으로 넘어오기까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강바람이 세차다. 그는 흠뻑 젖은 몸으로 또 강물 속으로 잠수한다. 축 늘어진 그의 몸을 잠수부들이 보트로 끌어 올리는 장면에서 카메라에 불이 들어오고 긴장감이 돈다. 땅바닥에 뉘어진 그의 몸에 흰 천이 덮이고 미처 덮이지 못해 비어져 나온 한 쪽 발에 묻은 흙과 시퍼러둥둥한 엄지발가락. 카메라 감독은 집중적으로 발치를 조명한다. 동상에 걸린 듯 검보라 빛을 띤 그의 발가락과 발바닥에 들러붙은 흙. 아내가 울부짖으며 상체를 잡고 흔들 때 마다 덩달아 흔들리는 그의 맨발이 낯설지 않다. 누군가가 덮어놓은 흰 천 아래로 드러난 그애의 한쪽 발도 맨발이었는데.
4.
작년 겨울은 혹독했다. 삼한사온을 비웃듯 연일 영하 십도를 웃돌면서 집집마다 수도관이 동파되고 산비탈의 얼어붙은 도로에서 노인들의 낙상사고가 줄을 이었다. 무엇보다 연탄보일러로 바꾼 집들은 연탄 배달이 여의치 않자 탄을 아끼느라 불구멍을 막고 살아 집안에 냉기가 돌았다. 나 역시 방안에서도 손과 코가 시려 아무 것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양말을 신고 털조끼를 입었지만 손이 시린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뜩이나 수족 냉증에 시달리는 터라 주먹을 쥐기도 어려웠다.
그때 그애가 첫 휴가를 나왔다. 군 입대 자원을 해놓고 입대 하루 전에야 털어놔 보낼 때도 황망했는데 첫 휴가도 외출했다 귀가하듯 기척 없이 들어섰다. 어릴 때부터 별명이 ‘유령’이라는 걸 새삼 일깨워주듯. 휴가 내내 다세대 반지하 방에 틀어박혀 꼼짝하지 않았다. 그애와 세상과의 유일한 통로는 인터넷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무엇을 하는지 내가 들어가면 얼른 화면을 바꾸었다. 피차 나이 먹으면서 더욱 말이 없어진 우리는 어둡고 습한 방에서 고스란히 몸으로 추위를, 시간을 견뎠다. 추위보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건 그애와 나 사이에 가로놓인 침묵이었다. 없는 사람 더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날씨가! 그러게. 날씨라도 풀려야 우리 같은 서민들 마음이 좀 누그러질텐데. 글쎄…… 애써 말을 건네면 무슨 궁리를 하는지 핏발 선 눈으로 화면만 뚫어지게 응시하면서 건성 대답이었다. 군대는 지낼 만 해? …… 묵묵부답이었다. 할머니 산소에 다녀올까? 아니. 언제 귀대하니? 내일. 내일? 나는 화들짝 놀라 물었다. 귀대하기 전 맛난 것이라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시장을 다녀오니 방안이 텅 비어 있었다. 휴가 마지막 날이라 친구라도 만나러 나간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가 짧은 겨울 초저녁 불길하게 걸려온 한 통의 전화는 청천벽력이었다.
그애는 재개발되면서 들어선 아랫동네 고층 아파트 아스팔트 위에 누워있었다. 엎어질 듯 뛰어간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것은 흰 천 아래로 드러난 맨발이었다. 구경꾼 중 누군가가 일 층 현관 지붕으로 떨어지면서 충격으로 튕겨나가 머리가 수박덩이처럼 으깨졌다고 했다. 천을 들추고 얼굴을 확인하는 대신 그애의 맨발을 감싸 쥐었다. 심한 감입조로 굳은살이 박인 엄지발가락만으로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시린 발을 주무르면서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어쩌자고…… 숨이 끊어져도 영혼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꼭 이렇게 몸을 끔찍하게…… 훼손하는 방법을…… 택해야만 했니?
동생의 영혼이 내려다보고 있다는 생각에 소리 내 울지 못했다. 그러나 끔찍하게 훼손된 몸이 너무나 불쌍해 가슴은 선지덩이가 엉겨 붙은 듯 미어졌다. 자기 가해자인 동시에 희생자. 모노드라마에서 시종 혼자 웃고 고함치고 위로하던 고독한 배우이자 외로운 관객이었던 그애는 결국 스스로 퇴장했다. 꼭 이렇게 망가진 모습으로 무대를 내려가야 했던가. 14층 계단참 창문 아래서 발견된 군화는 깔끔하다 못해 결벽주의자였던 주인 성미답게 깨끗이 잘 닦여 있었다. 뛰어내리기 직전 까마득한 땅바닥을 내려다보면서 군화의 긴 끈을 한 칸 한 칸 풀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해 현관에서 신발을 벗을 때의 느긋함? 이제 곧 영원한 휴식을 맞이할 수 있다는 기대와 해방감이 아니고선 도저히 그 높은 곳에서 몸을 날릴 수 없었을 것이다.
화장장으로 향하면서 다짐했다. 원망하지 말자고, 누구도 너의 행동을 비난할 수 없다고. 너의 결정을 존중하겠다고. 이해한다고. 용서하겠다고. 그러나 막상 관이 화구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화장로의 불이 켜지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 세상에서 유일한 혈육이었던 그애와의 인연을 정리한다 싶으니 억장이 무너졌다. 맹렬하게 일렁이던 불꽃이 사위어들면서 관망실 유리창을 통해 노을 빛으로 변한 뼛조각이 보였다. 두개골, 갈비뼈, 대퇴부, 두 다리…… 작은 불꽃에도 불티가 날았다. 벚꽃비처럼. 뼈는 시시각각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빛을 띠었다. 유리창이 어룽졌는지, 그렁그렁한 눈물 때문이었는지 노을빛 숯 조각이 살구 빛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연분홍 빛을 띠었다. 마지막 화력을 다하듯 눈앞에서 큰 불꽃 하나가 화르륵 피어오르는 것과 동시에 화장 종료 사인이 들어왔다. 육신의 흔적을 없애는 방법으로 화장만큼 깔끔하고 깨끗한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황이 없었던 나는 그제서 항아리를 사러 매점으로 달려갔다.
그애의 골분이 든 따뜻한 항아리가 수족냉증으로 시리디 시린 내 손을 부드럽게 녹여주었다. 납골당 대신 집 뒷산으로 향했다. 산에 오를 때마다 눈여겨 봐 두었던 아기 소나무 밑에 뿌리기로 작정했다. 수목장이라기엔 절차와 형식이 엉성하지만 상관없었다. 누군가 이따금 전지를 해줬는지 키는 작지만 여러 갈래로 뻗은 가지가 제법 튼실해서 아기 소나무라고 부르기엔 연륜이 느껴졌다. 미지근한 온기를 머금은 항아리를 열고 골분을 한 움큼씩 소나무 둥치에 뿌렸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되어 아무데도 얽매이지 말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라고. 그러다 어느 야생화의 거름이 돼 한 송이 꽃을 피워도 좋고. 황사에 섞여 대륙으로 비상해도 좋고. 더러 계곡을 따라 넓은 바다에 다다라도 좋겠지. 하지만 다신 누구의 몸을 빌려 세상에 나지 마라.
5.
화면을 건성건성 대각선 혹은 위 아래로 그냥 훑는다. 어느 제목도 마우스 쥔 손을 움직일 만큼 흥미를 끄는 것이 없다. 가입한 동호회나 카페가 한 군데도 없는 나는 뉴스나 연예기사 몇 건 읽고 나면 멍하니 화면만 응시한다. 더 이상 서핑할 사이트나 관심 가는 뉴스가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건만 종종 미아처럼 통로 입구에서 망연자실한다. 펄럭이는 배너나 자극적인 동영상 광고도 무기력한 내 호기심을 자극하진 못한다. 히키코모리 족들은 대체 어딜 그렇게 헤집고 다니기에 몇 년씩 구석방 신세를 자처하면서 인터넷에 몰두한담.
몇 초 간격으로 바뀌는 기사 제목을 훑다가 ‘드디어 싸이홀릭 등장’ 제목의 기사를 독수리가 발톱으로 찍듯 콕 찍어 낚아챈다. ‘20대를 중심으로 싸이가 급속히 확산되면서 중독증세를 보여 대학생은 물론이고 회사원들도 근무 중에 업무가 마비될 정도라 급기야 싸이홀릭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실험 대상자들에게 한시적으로 홈페이지를 폐쇄하고 반응을 지켜본 결과 알코올이나 금연 직후의 금단 증상과 비슷한 강박증세를 보인 것으로 조사됐다……’
싸이홀릭, 싸이홀릭이라. 드디어 갈 곳을 정한 방랑자처럼 마우스를 급히 움직여 싸이월드에 접속한다. 항상 로그인이 족쇄처럼 발목을 잡는 까닭에 썩 내키지 않지만 회원가입부터 한다. 한 평 혹은 꾸미기에 따라 백 명 남짓한 집을 분양받았다. 텅 빈 미니 룸 한가운데 멀뚱멀뚱 서있자니 누군가가 나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서둘러 이웃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누굴 찾을 것인가. 오래 전 소식 끊긴 친구들……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 그리운 얼굴도 없다. 누굴 찾아 볼까나. 여기까지 와서 또 미아 신세인가. 서둘러 미니 룸으로 돌아온다. 막 이사나간 집처럼 썰렁하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어 도로 나간다. 회원찾기를 누르자 이름, 생년, 성별의 조건을 대라고 한다. 만족할만한 조건을 입력하면 누군가가 응, 나 여기 있어! 응답할 것이다. 누굴 찾을까. 그애, 그래, 보나마나 없겠지만 그냥 눌러본다. 그애와 동갑의 동명이인이 촤르르륵 뜬다. 세상에, 36명이라니. 동갑에 동명이인으로 싸이를 공유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맨 앞의 이름부터 순서대로 한 명씩 클릭 한다. 펼쳐지는 페이지가 저마다 화려하다. 방명록을 가득 채운 재치 만점의 사연들. 장난기 어린 사진…… 다들 개성이 뚜렷하다. 무엇보다 페이지가 열릴 때마다 다른 음악이 흘러나와 심심찮다. 잔뜩 분위기 잡고 흘러나오는 발라드와 록, 가요 등등 취향도 갖가지다. 배경음악에 취해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눈이 팽팽 돌고 가슴이 왈랑왈랑 뛴다. 몰래 숨어서 엿보는 심정이 이럴까. 파도를 타고 한없이 망망대해로 나가니 살아서 결코 만날 일 없는 미지의 사람들 속내까지 들여다보는 게 무의미해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온다. 문득 화면 저쪽에서, 거기 말예요. 허락 없이 함부로 들락거리지 말아요. 와 있는 거 다 알아요. 왔으면 한 마디 해야죠. 주인이 내 존재를 알아차릴까봐 한 군데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도망치듯 또 다른 박영재를 찾아 클릭한다. 뒤로 갈수록 방문객 수가 뜸하고 방명록이나 사진첩, 게시판도 한산하다.
그애 또래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토록 발랄하게 젊음을 구가하고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못 마땅하다. 배가 아프고 화난다. 제 몫의 삶조차 버겁다고 털어버리고 떠난 녀석. 한 번도 그애의 선택을 비난한 적은 없었다. 이해한다고, 너의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자신을 다잡았는데. 왜 갑자기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을까.
재기발랄한 일촌평과 대문글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다. 그애를 약 올리는 것 같다. 넌 인생의 패배자야. 울타리 밖에서 숨어보는 짓에 갑자기 욕지기가 치민다. 빠져 나가기 위해 마우스를 클릭 한다는 게 그만 마지막 이름을 눌렀던가 보다.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이 뜬다. 내 동생 박 영재……? 설마. 화면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뚫어져라 사진을 주시한다. 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턱을 괴고 앉아서 아래쪽을 응시하듯 내려뜬 눈. 무테 안경. 미추룸한 얼굴이 그애 맞다. 그애다. 세상에! 가까이서 오래 들여다볼수록 눈과 코, 입이 해체돼 본래의 모습을 잃는다. ‘누나 날 용서 하지마!’ 홈페이지 대문글이다. 죽은 자에게서 날아온 편지만큼이나 화들짝 놀랍다. 내가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단 말인가. 단 한 줄의 짧은 유서를 일년 만에 발견한 셈이다.
푸른색 도배지에 가구 하나 없는 텅 빈 방 한가운데 서있는 미니미 머리 위에 “나는 지금 군복무 중” 이라고 씌어 있다. 떨리는 손길로 방명록을 누른다. 아무도 없다. 방문객수 0, 사진첩에 올려진 두 장의 사진. 할머니와 나와 함께 찍은 유일한 가족사진이다. 그리고 처음 보는 아가씨. 긴 생머리에 얼굴선이 곱고 애띠다. 사진이 게시된 날짜를 보니 그애가 입대하기 훨씬 전이다. 게시판에는 등록된 게시물이 없다고 뜬다. 즐겨찾기, 선물함, 소망상자 모두모두 0이다. 음악 또한 깔려있지 않아 무성영화처럼 건조하다. 무엇이 스물한 살 젊디젊은 그를 고립무원의 골방에 갇히도록 만들었던가. 소망 또한 품을 수 없게 만들었는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엄마, 알코올 중독으로 일찍 죽은 아버지, 가난…… 다 아문 상처인줄 알았는데. 그딴 것쯤 이제 극복한 줄 알았는데. 우리 사이에서 금기였던 만큼 새 살이 오른 줄만 알았는데. 백정이 쇠가죽을 벗기다 보면 소가 생전에 얼마나 주인에게 사랑받았는지, 오지게 매만 맞았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상처는 죽어서도 남아있는 법이라는 걸 까맣게 잊었다.
다이어리를 클릭한다. 그애가 떠나고 없어도 시간은 흘러왔듯 왼쪽 상단에 뜬 푸른색 달력은 오늘 날짜에 짙게 표시되어 있다. 달력을 한참 뒤로 뒤로 클릭한다.
--2005년 10월 전역. 전역일을 카운트다운 하느니 거꾸로 세는 게 훨 빠르다. 이등병 주제에 전역을 꿈꾸다니. 한심한 자식.
--짐승새끼들. 다 죽여 버리고 싶다. 쌍둥이 XXX들 온몸을 총알로 누더기를 만들고 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 충동에 부르르 떤다. 무력한 나!
아무 날짜나 짚어 달력을 클릭하던 손길이 점점 조급해지고 눈동자에 힘이 들어간다. 오목가슴이 째질 듯 아파온다. 그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취침 시간이 두렵고 끔찍하다. 불침번을 자원하는 것도 한 두 번이다. 어제도 말호봉 최고참인 쌍둥이 XX들한테 당했다. 대민지원 나갔다 와서 피곤해 죽는 줄 알았는데 XXX들이 양쪽에서…… 동기들은 알면서 모르는 척 한다.
--하도 빨아서 입안이 다 헐었다. 드럽다. 좆나 열나 드럽다. 어제 저녁때는 나 때문에 XXX들이 군기 잡는다며 줄빳다를 쳤다. 소원수리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씨발 설문조사는 형식적이다. 구타니 가혹행위니 해도 군기교육대 며칠 가서 쌩노가다 뛰고 오면 끝이라고 협박했다. 따 당하는 것보다 밤이 더 무섭다.
--이 세상에서 나를 보호해주는 것은 아무도 없다. 오로지 나 자신 뿐이다. 그런데 이제 나도 나를 지킬 자신이 없다. 나는 나를 방치했다. 방치했다…… 이젠 정말 자신이 없다.
--출구 없는 상자 속에 갇혔다. 나는 죽고 싶어서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은데 살 수가 없어 죽는다.
더 이상 읽을 수가 없다. 조용히 가슴에 흐르던 강물이 ‘자신을 지킬 자신이 없다’던 마지막 말로 인해 성난 듯 출렁이기 시작했다. 사방이 캄캄하다. 그애가 들어앉았던 첩첩한 산중에 나도 들어앉았다. 그애의 마지막 절규가, 분노가 잘 벼린 칼날이 돼 가슴을 마구 헤집는다. 내무반에서 밤마다 벌어졌을 일을 상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다. 한 놈도 아니고 양쪽에서. 그애의 굴욕감과 모멸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손이 시리다. 주먹을 쥘 수가 없다. 주먹으로 가슴이라도 쾅쾅 치고 싶은데……
삶이 진실로만 가득 차 있지 않다는 것 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아니 모순과 구역질 투성이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너무 하지 않은가. 한 영혼의 자존감을 여지없이 짓밟아 놓고 모두 한통속이 돼 시치미 떼는 현실. 더 이상 현실의 조롱을 감당할 기운이 없다. 아니 감당하고 싶지 않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겨우 방명록에 한 줄 써 넣는다. ‘정말 목매달고 싶은 날이다! 영재야.’
푸른 방문을 닫고 나오는데 가슴에 출렁이던 강물이 넘치는 바람에 미끄러졌다. 주저앉은 김에 질펀하게 울음을 터뜨린다. 명치를 뚫고 올라온 바늘이 등짝을 관통한다. 바늘에 찔린 채 중얼거린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널 지켜주지 못해서……
6.
없다. 아무 것도 없다. 사흘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화선지며 열쇠, 아무 흔적도 없다. 다만 헛것을 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듯 도톰한 소나무 껍데기만 바위 밑에 떨어져 있다. 그새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열쇠의 주인이 나타난 것인가. 가족 아니면 본인? 빈 가지를 흔들며 서있는 나무들은 말이 없다. 그들은 알 것이다. 열쇠와 붓글씨의 행방을. 자꾸 끔찍하게 훼손된 동생의 몸이, 상처투성이 영혼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기 소나무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영 무겁다. 평소 오며가며 나무 우듬지를 쥐고 안녕? 영재야. 나 왔어. 건네던 인사를 오늘은 할 자신이 없다. 그애에게 콱 잠긴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다. 그런 내 모습을 원치 않을 것이다. 평소 얼마나 사려 깊고 어른스러운 동생이었던가.
평소 다니던 등산로를 버리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좁장한 내리막길을 택해 방향을 잡는다. 역시 사람들의 발길에 다져지면서 가르마가 된 길이다. 경사가 심한 산의 중허리에 접어들자 군데군데 벌목당한 나무들로 뱃구레가 푹 꺼져 겉에서 보기보다 훨씬 야위었다. 버짐처럼 맨살을 드러낸 땅에 벌목당한 나무토막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제법 널찍한 바위에 올라가 책상 다리를 하고 앉았다. 칼바람이 매섭다. 검은 실로 짠 모자를 푹 눌러쓰고 눈만 내놓은 채 목도리를 칭칭 감았다. 눈을 감자 나뭇가지와 부딪는 바람 소리가 거세다. 온 산을 삼켜버릴 듯한 기세로 우왕좌왕하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감은 눈에 더욱 힘을 준다. 감아서 외면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이대로 영원히 감고 싶다. 포기, 체념, 망각…… 용서, 어느 것도 지금의 나를 구원해줄 순 없다. 용서는 체념할 수밖에 없을 때 내세우는 가장 무난한 방패다. 과연 진정한 용서가 있을 수 있는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 행위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 행위라고 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신적 행위를 감히 인간에게 요구할 수 있는가. 용서란 말 쉽게, 함부로 하지 말자. 그건 가식이다. 한낱 평범한 인간에게 어떻게 전지전능한 양반만 할 수 있는 용서를 구하는가. 제 의사와 상관없이 주어진 고난과 고통은 언제나 분노와 억울함, 용서와 화해 사이에서 갈등을 낳았다. 나는 그들을, 엄마를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영재가 내게 용서를 구하지 않았듯이 나 역시 영재에게 용서를 구할 면목이 없다. 22년 내내 분노와 용서, 그리움 속에서 몸부림치던 그애를 보내놓고 그 심정 이해한다고, 그것이 너에 대한 예의라고 착각했던 무심하고 이기적인 누나를 용서하지마! 눈자위가 바르르 경련을 일으키면서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른다. 목도리 가장자리가 다 젖었다. 그제야 미친 듯 스솨거리던 바람소리가 귓전을 파고든다. 거치적거리는 나를 바위에서 밀어낼 양 바람이 완강하다.
“어머 깜짝이야?”
“왜?”
“스님인 줄 알았어요.”
“누가 계신 모양이군!”
눈을 뜨자 바위 아래서 여자가 올려다보며 무안한 듯 미소 짓는다. 곁에서 검은 안경을 쓴 남자가 아내의 팔짱을 낀 채 서있다. 그들이다. 반사적으로 내 몸을 내려다본다. 검은 모자, 회색 점퍼와 쥐색 목도리가 영락없이 스님 차림새로 보였던 모양이다. 대답대신 희미하게 미소 지으려는데 남자가 먼저 웃는다. 검은 안경 아래 드러난 흰 이가 눈부시다. 낯선 이에게 아무 이유 없이 저토록 환히 웃을 수 있다니…… 감전된 듯 꼼짝할 수 없다.
“놀라게 해드렸다면 미안해요. 여보, 가요. 왼쪽이요.”
아내가 갈 길을 재촉하자 남자가 재차 웃는다. 나는 다시 눈을 감는다. 그들의 발짝 소리는 성난 바람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남자의 활짝 웃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진솔한 웃음이다. 오래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그 속에서 우주를 발견한 사람만이, 누구보다 세상 그리고 우주를 섬세하게 느낀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다.
문득 처음 낭독 봉사를 시작할 때 사무장이 당부했던 말이 생각난다. 몸의 장애는 불편할 뿐 불행하지 않습니다. 그 점을 염두에 두시고 선입견을 버려주십시오. 사람의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 다 상대에게 전해지는 법이거든요. 특히 시각 장애자 분들은 오감이 발달하신 편이라 목소리에 내 마음을 담겠다, 목소리를 통해 상대와 교감한다, 그런 마음가짐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항상 초심으로……
나의 오만이 툭 고개를 꺾는다. 영재야, 넌 내 심정 알지……? 잘 죽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으로 잘 살아 보려했는데 결국 나도 덫에 치였어. 영재야. 인생의 가장 푸릇푸릇한 시절에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체벌했던 너를 단지 이해한다는 말로 너무 빨리 포기했던 누나를 용서 하지마! 절대 용서하지 마! 그리고 정말 미안해!
두우우웅 두우우웅 두우우웅 골짜기의 산사에서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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