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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토끼띠는 끼가 많아 연예인 스타가 많다. 최수종,짐캥리,양조위,관지림,톰쿠루즈 ...
그래서 사건으로 비틀즈의 스타 링고스타의 영입으로 하고자 한다.
2000년에서 딱60년전인 경진년
링고 스타는 1940년 7월 7일에 태어났다. 난산이어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태어났으며, 어려서는 두 차례의 힘든 고비를 넘기는 등 건강이 무척 안 좋았다. 부모는 어릴 적 이혼해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건강 때문에 공부를 하지 못해 학창시절 언제나 다른 학생들보다 성적이 뒤처졌다. 그 무렵 비틀즈의 나머지 멤버들이 그러했듯, 링고 역시 스키플 음악에 푹 빠져들었고 용접공으로 함께 일 했던 기타리스트 에디 마일즈와 첫 번째 밴드 에디 클레이턴 스키플 그룹(The Eddie Clayton Skiffle Group)을 조직했다. 링고는 그 밴드에서 열쇠를 흔들거나, 의자나 상자를 두드려 리듬을 넣는 등 드러머라 부르기는 어렵지만, 로컬 씬에서 몇 차례의 공연을 펼쳤다. 그리고 1957년 크리스마스 이브, 새아버지가 사 준 중고 드럼세트로 드럼을 접하게 된다.
1959년 링고 스타는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스(Rory Storm and the Hurricanes)에 가입한다. 당시 가입 조건은 '드럼 세트를 가진 드러머일 것'이었다. 로리 스톰 앤 허리케인스는 화려한 의상과 무대 매너로 순식간에 리버풀을 대표하는 밴드로 떠올랐다. 그는 무대에서 팔찌나 반지 같은 링(ring)을 많이 착용한 것에 착안하여 링고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리고 '스타 타임'을 통해 솔로 타임을 가질 만큼 드러머 링고 스타로서 역시 확실한 자신의 자리를 잡는다.
비틀즈는 소위 ‘영국의 미국 침략(British Invasion of America)’이라고 부르는 사건의 출발점이다. 1960년대에 영국은 팝과 록 음악의 세계적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에서 록 음악은 노동자 계급의 욕구불만이 표출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동안 서구 유럽을 수호하며 선두에 서 있던 영국은 경제적으로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도 10년간 음식 배급이 계속되었다. 일자리는 거의 없었고, 젊은 학생들은 학교를 마쳐도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비틀즈의 드럼주자 링고 스타(Ringo Starr)는 “음악은 출구였다. 그때를 생각해보면 모든 거리에는 밴드가 있었다. 우리 모두 기타와 드럼을 집어 들고 음악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라고 말했다.
비틀즈의 4명의 멤버들은 영국 북부의 산업 도시인 리버풀 출신으로 평범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룹은 1959년에 결성되었다. 1962년까지 그들은 영국과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다. 그들은 여왕 앞에서도 연주했고, 〈쉬 러브즈 유(She Loves You)〉와 〈아이 원 투 홀드 유어 핸즈(I Want to Hold Your Hand)〉라는 2장의 싱글은 엄청나게 히트 쳤다.
그들의 첫 번째 앨범 〈플리즈 플리즈 미(Please Please Me)〉는 영국 인기 차트에서 6달간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2년 후에 그들은 최초의 미국 투어를 시작했다. 1964년 한 주 동안, 비틀즈는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고, 카네기 홀에서 두 번 연주회를 했다. 워싱턴 콜로세움에서는 8천 명의 팬 앞에 나타났으며, 〈아이 원 츄 홀드 유어 핸즈〉를 미국 차트 1위에 올려놓았다. 1965년 그들은 미국 전역에서 투어를 했는데, 뉴욕 셰어 스타디움에서 공연할 때는 5만 5천 명의 10대들이 모여서 소리를 질러댔다. 그들은 미국 전역을 도는 투어에서 5천 6백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보다 유명하다.존 레논, 1966
1964년 비틀즈의 첫 번째 미국 투어는 콘서트 참여자의 숫자에서 기록을 세웠다. 카네기 홀의 3배나 되는 큰 규모의 하키 경기장인 워싱턴 콜로세움 공연은 과격한 비틀즈 마니아들 덕분에 순식간에 표가 매진되었다. 결국 비틀즈가 1965년 미국 투어를 할 때는, 가능한 한 가장 큰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그들은 뉴욕 메츠 야구팀의 홈인 셰어 스타디움을 선택했다. 이 역사적인 콘서트는 테크놀로지의 시험장이었고 결국 록 앤 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5만 5천 석이 가득 찬 오픈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틀즈의 기타 앰플리파이어(증폭기)를 만든 VOX 회사는 콘서트를 위해서 새로운 사운드 시스템을 디자인했다. 소리를 지르는 수만 명의 팬들이 음악소리를 잠재워 버렸지만, 그래도 콘서트는 성공적이었다. 테크놀로지는 곧 개선되었고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 같은 라이벌 밴드도 스타디움에서 콘서트를 하기 시작했다. 이와 똑같은 사운드 증폭 테크놀로지는 야외의 거대한 음악 페스티벌을 만들어내는 데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69년의 우드스탁 페스티벌(Woodstock Festival)이다. 그것은 600에이커의 교외 농장, 즉 야외에서 거행되었는데, 거의 50만 명의 관객들이 모여들었다.
비틀즈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음악은 리듬 앤 블루스와 록커빌리였다. 그들은 〈롤 오버 베토벤(Roll over Beethoven)〉 같은 척 베리의 노래도 커버(다른 가수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행위)했지만, 그들의 초창기 주요 모델은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존 레논(John Lennon)은 “엘비스처럼 나에게 영향을 준 가수는 없었다.”고 했고, 링고 스타는 “엘비스는 나의 삶의 바꿔놓았다. 나를 완전히 날려 버렸다. 나는 그를 너무나 사랑한다.”라고 말했다.
1960년대 비틀즈의 출현과 함께 대중 음악의 성격은 근본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1. 록 음악은 더 이상 미국의 국지적인 음악이 아니라 국제적인 활동이 되었다.
2. 모든 록 그룹이 그들 각자의 독자적인 사운드와 그룹 특유의 외양을 발전시켰다. 예를 들어, 초기 시절 비틀즈 멤버들은 모두 동일한 옷을 입고 그에 걸맞은 머리 스타일을 했다.
3. 록 그룹은 자족적이고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하나의 통일체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각 멤버들은 각자 특별한 역할을 담당했고, 개별적인 개성을 가져야 했다. 비틀즈의 경우,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은 리드 기타, 존 레논은 리듬 기타,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는 베이스 기타를 연주했고, 링고 스타는 드러머였다. 레논과 매카트니가 보컬 파트 대부분을 담당했다. 그룹의 각 멤버들은 연주할 때마다 같은 자리를 지켰다. 멤버들은 각자 자신의 숭배자들과 팬클럽을 가지고 있었다.
1986년대가 되면서 다른 록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들 중 가장 유명한 이들은 5인조 밴드 롤링 스톤즈(Rolling Stones)였다. 롤링 스톤즈의 매니저는 그들을 “착한 애송이들 비틀즈에 대립되는 그룹”이라고 규정했다. 1960년대의 공격적인 정신을 잘 포착한 노래는 통렬하고 으르렁거리는 듯한 〈새티스팩션(I Can’t Get No)〉(Satisfaction)이었다. 그때부터 롤링 스톤즈는 가장 오랫동안 음악 활동을 하는 밴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밴드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룹으로서 비틀즈의 경력은 대략 두 시기, 공적인 시기와 사적인 시기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공적인 시기는 투어와 라이브가 주축이 되고 주로 무대에서 부르는 곡을 만들어 발표하던 시기로, 1960년대 초반부이다. 사적인 시기는 1960년대 후반부로, 녹음에 몰두하고 스튜디오의 테크놀로지를 적극 활용하였던 때다. 이때의 곡들을 라이브 연주로 똑같이 실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후반부 시기에 그들은 테크놀로지의 차원에서 진보적인 시도를 하였다. 이것이 녹음 테크닉의 측면에서 이후 록 음악의 역사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이제 1960년대 비틀즈의 노래 2곡을 분석해볼 것이다. 첫 번째 곡은 〈잇 온트 비 롱(It Won’t Be Long)〉으로 비틀즈의 공적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두 번째 곡은 〈스트로베리 필즈 포에버(Strawberry Fields Forever)〉로 이것은 사적인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비틀즈의 앨범 〈페퍼 상사(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1967년 스튜디오 작업)가 발매되면서, 대중 음악 음반을 만드는 방식은 혁명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때부터 레코드 앨범은 생산에 있어서 새로운 예술적인 차원을 얻게 된다. 이전에 발표한 히트곡들과 몇 개의 새로운 곡을 모아 발표하는 것이 아니라 ‘콘셉트(concept) 앨범’이라는 것이 새롭게 나왔는데, 그것은 곡들이 통합되어 하나의 완전한 전체를 이룬다는 의미를 지닌다. 모든 새로운 곡들이 테마를 가지고 엮어진다. 〈페퍼 상사〉 앨범의 모든 측면은 특별한 주목을 받았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음반 재킷(표지)과 가사가 적혀져 있는 슬리브 디자인만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음악이 엄청나게 다양하고 창의적이었다. 그러면서 레코드는 현대적 삶의 다양한 국면들(예를 들면, 고독, 소외, 애정, 우정, 새로운 마약 문화 등)을 만화경과 같이 담아내고 있다.
대중 음악계에서 통용되는 많은 관습들로 비틀즈를 규정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졌다. 비틀즈의 팬들에게 춤은 더 이상 관심사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음악을 앉아서 듣고 분석하고 토론했다. 그리고 그 음악은 청취자들에게 지적으로 음악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다. 비틀즈의 창조성은 많은 부산물을 남겼는데 저서[존 레논의 그 자신의 글(In His Own Write)], 솔로 퍼포먼스[〈예스터데이(Yesterday)〉, 〈블랙버드(Blackbird)〉, 〈이매진(Imagine)〉], 영화[〈헬프(Help)〉, 〈하드 데이즈 나이트(A Hard Day’s Night)〉,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Magical Mystery Tour)〉, 〈옐로 섬머린(Yellow Submarine)〉], 사회적 정치적 활동, 동양 음악과 동양 철학 붐(특별히 인도)이 그 예다. 그들이 가졌던 부단한 호기심 중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마도 약물을 가지고 한 공공연한 실험이었을 것이다.
비틀즈라는 그룹의 생명력은 1970년까지만 유지되었다. 그 뒤 그들은 씁쓸함을 남긴 채 뿔뿔이 흩어졌다. 4명 모두 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들 4명의 개인적 성취는 그룹으로 활동하면서 보여주었던 비범한 시너지를 넘어서지 못했다. 비틀즈는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수백만 달러를 벌었고 많은 논쟁을 야기했다. 그들의 성취는 1963년부터 1970년까지 발표한 22개의 싱글과 11개의 앨범으로 남았다. 초기의 열정적이고 타이트한 하모니의 〈플리즈 플리즈 미(Please Please Me)〉에서부터 신비롭고 이상한 〈러버 소울(Rubber Soul)〉까지, 놀랍고도 다양한 〈페퍼 상사〉와 마지막 앨범 〈애비 로드(Abbey Road)〉까지 비틀즈의 음악세계는 풍요롭고 다양했다. 단 7년의 기간 동안 비틀즈는 대중 음악의 전체 도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그리고 2015년 새로운 앨범 《Postcards from Paradise》가 발표되었다. 링고 스타는 2015년 비틀즈의 멤버 가운데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