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즈 러너’라는 제목은 퍽 신박하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미로를 달리는 사람’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미로를 달릴까? 바로 주인공 ‘토마스’다.
('토마스와 친구들'의 '토마스' , '메이즈 러너'의 '토마스'.여기서의 '토마스'는 오른쪽 '토마스'이다.)
구글에 ‘토마스’를 치면 왼쪽의 친구가 나오지만 우리가 이야기할 ‘토마스’는 이 친구가 아니다. 오른쪽의 준수한 외모를 뽐내고 있는 친구다. 이 인물은 영화를 이끌어가는 매우 중심적인 인물로 시리즈 내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허나 본 글에서는 시리즈 1편에 해당하는 내용만 다루도록 하겠다.
영화는 주인공 ‘토마스’가 미로에 갇힌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상황의 사람들을 만나며 시작된다. 이곳에는 삭제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가득하며, 이 사람들의 기억은 거대한 미로로 둘러싸인 낯선 공간에서 시작하게 된다. 이곳은 ‘글레이드’라고 불리며 생존자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한다. 이곳은 철저히 분업화되어 사람마다 각자의 역할 군을 부여받아 생활하게 되며, 엄격한 규칙이 존재하여 사람들은 지도자의 통제 하에 생활하게 된다. 그리고 ‘글레이드’밖의 미로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죽음의 존재가 있으며, 미로에는 오직 허락된 자들(러너)만이 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글레이드’ 밖의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이 설정을 보고 생각난 만화 하나가 있다. 바로 ‘진격의 거인’이다.
('진격의 거인'.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가 극명히 구별되는 만화다.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다. 재미있다.)
‘진격의 거인’에서는 외부의 식인 거인으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해 거대한 요새를 쌓아 외부 세계로부터 내부 세계를 격리시킨다. ‘메이즈 러너’와 비슷하게 벽 밖의 세상은 ‘조사병단’이라는 특수한 군인들만이 나갈 수 있다. 이 만화는 중학교 시절 큰 인기를 끌었으며 지금도 연재되고 있는 작품이다. 이 두 작품 모두 외부 세계와 단절된 내부 세계 속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외부와의 장벽이 형성된 내부 세계의 인물 관계는 자신들과 외부 세계를 단절시키는 벽을 지키려는 자들과 부수려는 자들과의 대립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간의 갈등은 항상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어간다. 이는 ‘메이즈 러너’에서도 뻔한 클리셰처럼 나타났다. 따라서 등장인물들을 크게 ‘안쪽을 향한 사람들’과 ‘바깥쪽을 향한 사람들’로 나누어 이야기해고자 한다.
우선 ‘안쪽을 향한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이 영화에서의 벽은 무엇이었을까? 단지 외부 세계와의 단절만을 의미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영화를 보면서 오히려 부정적인 단절이 아닌 외부 세계로부터의 안전을 위한 보호막의 역할이 더 컸다고 본다. 이는 밑의 장면에서 여실히 밝혀진다. 그들에게 벽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보호해주는 방어막이었던 것이다.
<What do you mean “all of it”? I thought you were still mapping it. - 토마스>
<There’s nothing left to map. - 민호>
<...>
<People needed to believe we had a chance of getting out. - 민호>
민호는 왜 미로의 구조를 다 알고 있었으면서 다른 구성원들에게 이를 알리지 않았던 것일까.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이는 글레이드 안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주고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함이었다. 즉, 살아 움직이는 미지의 공간과 ‘그리버’라는 빠르면서도 잔인하고 영리한 괴물이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이미지는 미로 속 세상을 한없이 어둡고 무서운 공간으로 그려냈다. 이는 사람들을 벽 안에만 머물게 했고 3년간 벽 안의 생활이 희망적이라는 것이라고 인식되는데 성공적으로 기여했다.
(갤리. '글레이드'에서 '규칙'을 담당하고 있는 멤버! 라고 소개할 수 있을 정도로 규칙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갤리이다. 영화를 보면 갤리가 토마스에 대항하기 때문에 악역처럼 나온다. 하지만 우리는 갤리를 비난할 수 있을까? 오히려 저 상황에서 토마스의 선택과 행동은 공동체 생활을 유지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매우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갤리의 신념을 나름 정의해보면, ‘규칙은 지키는 것이 맞다.’ 정도가 될 것이다. 갤리는 영화 초반부부터 토마스와 부딪히다가 토마스의 돌발행동이 시작하면서 그 갈등이 폭발한다. 결국 갤리는 토마스와 노선을 달리하여 자신의 신념을 궂게 따른 채, 미로 안에 남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들의 선택은 영화의 분위기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 옳지 않은 듯하다. 토마스를 따라나선 사람들은 미로에서 탈출지만 따라나서지 못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상황에서 저들의 선택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아마도 저 상황에서 ‘글레이드’에 남기로 한 사람들은 어떠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미로에 뛰어드는 것은 바보 같은 선택이며, 공동체의 분열이 심화될수록 공멸을 야기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절대로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기존의 체제가 탈출을 하는데 실패했더라면 과감히 변화를 꾀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며 토마스가 제시한 기회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는 아마도 3년간의 규칙 속에서의 생활이 사람들로 하여금 벽을 넘어가는 선택과 행동이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철저히 자신들만의 합리성에 매몰된 것이다.
(미로를 탈출하기로 한 사람들. 민호와 뉴트도 포함이다. 탈출 과정 중 이들 중 꽤 많은 인원이 희생된다.)
그렇다면 ‘바깥쪽을 향한 사람들’은 어떠할까. 이들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단연 ‘토마스’다. 이들을 미로로 향하게 만들어 결국 미로를 탈출하게 만드는 ‘토마스’의 핵심적인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토마스’는 뛰어난 반사 신경과 신체능력을 갖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자질은 사람들을 이끌어 미로 탈출에 성공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핵심적인 요소는 그리버와의 전투능력이 아닌 집단의 벽에 대한 인식을 지켜야할 것에서 나아가기 위해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뒤집는 것이었다. 이는 기존의 규칙을 모두 부수고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정한 선택을 하게 만든다. 이는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글레이드’에 큰 경종을 울리는 일이며 다수의 사람들에게 상식적으로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행동일 것이다.
<I’m scared. But I’d rather risk my life out there than spending the rest of it in here. - 토마스>
토마스가 유별나게 그리버에 대한 공포가 적은 것도 아니었을 것이며, 미로의 구조를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토마스는 ‘글레이드’에 들어온 지 3일 만에 탈출을 감행하게 되었을까. 그 배경을 살펴보면, 토마스의 상황 인식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다른 사람들이 3년 동안 만들어 놓은 ‘글레이드’라는 체제에 들어서게 된다. 이들은 모두 초반에 탈출에 모든 신경을 기울였을 테지만 3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나름의 규칙을 만들어 각자의 탈출보다 역할을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들은 ‘탈출’이라는 것을 규칙이 지켜질 때 가능한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토마스는 이들과 다른 시점에 ‘글레이드’에 들어서게 된다. 토마스가 마주한 현실은 그들이 구성한 틀과는 상관없이 탈출해야 하는 상자 속이었고 그저 탈출을 결심한 것뿐이다. 이러한 결심에 대해서 ‘왜?’ 질문이 가능할까? 이는 철저히 합리성에 매몰된 사람들만 가능한 질문일 것이다. 가령 방탈출 카페에 가서 이 공간에 왜 갇히게 되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단서를 찾고 방을 탈출하기 위한 노력에 온 정신을 쏟는다. 이처럼 영화에서 ‘갇혀있다’라는 문제 상황 속에서 이유를 찾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으며, 그저 문제 상황에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야 할 것이다.
(탈출에 성공한 토마스와 그의 일행들.)
결국 토마스와 그 동료들은 희생을 치르지만 탈출에 성공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끝이 나게 된다. 이 영화를 다 보고나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영화의 내용이 수업시간에 배웠던 내용과 매우 겹쳐져 보였다는 것과 영화가 현대 사회를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이 영화는 우리 수업 내용에 비추어 봤을 때, 합리모델의 실패를 보여주고 있다. 벽은 사람들을 보호했으며 ‘규칙’이라는 그들의 합리적인 사고의 틀을 지키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토마스는 그의 직관을 통해서 이전의 사람들이 수많은 경험을 통해 얻었던 매뉴얼을 가뿐히 뛰어넘었으며, 벽이 갖고 있던 기존의 이미지를 철저히 깨부쉈다. 더불어 미로라는 부정적 공간을 극복할 기회를 제공했다. 이는 합리성이 직관에 비해서 불리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틀 안에 갇힌 사고는 절대로 틀 밖의 것을 상상할 수 없으며 그 상상을 행동으로 옮길 기회조차 가질 수 없다. 따라서 절대로 생각을 가두면 안된다. 항상 의심하고 부정해보아야 그 매뉴얼을 깨부술 수 있다.
두 번째로 현대의 우리 사회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계속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출구’를 찾지 못한다. 오히려 갇힌 채 ‘출구’라는 존재를 망각하며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이는 어른들이나 아이들 모두 마찬가지다. 하지만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은 주체성이라는 것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험난한 미로 속을 본인의 힘을 모른 채 알려주는 공식들만을 통해서 개척하고 출구를 찾아내야 한다. 하지만 ‘출구’를 찾아낸 아이들은 ‘자유’를 맞이할 수 없다. 제 2의 미로, 그리고 또 제 3의 미로가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어른들은 이러한 고리타분한 현재를 바꿔줄 ‘아이’를 원한다. 하지만 그 방식이 너무나도 잘못되었다. 아이들을 고립시키고 두려움에 빠뜨리며 경쟁시킨다. 아이들의 순수성은 어른들에 의해 더렵혀지게 된다. 결국 아이들은 어른들의 선택에 놀아나며 자신의 주체로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자유’를 맛볼 기회조차 박탈당하게 된다.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매우 만족스러웠다. 이전에 그저 SF장르의 영화 중 하나로 보았을 때에는 그저 그런 영화였지만 새로운 시각으로 보니 영화를 ‘해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직관과 합리. 이 둘 사이의 비교는 언제나 흥미롭다.
다음에 나온 시리즈들을 아직 보지 못했다. 과연 토마스가 1편에서의 직관적 태도를 잘 유지하여 친구들을 구원할지 아닐지 집중하여 영화들을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