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
최 방식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는 약간 언덕위에 있어 위치가 높은 편이다. 거기다 고층에 살고 있어 내가 태어나 자라고 유년시절을 보낸 고향마을이 한 눈에 훤히 보인다.
그 옛날 맑고 푸른 바다와 고요하고 긴 해안가 백사장은 언제 사라졌는지 기억 속에만 있다. 아름답던 갯마을은 사라호 태풍에 황폐화 되었다. 그사이 동명목재가 들어와 국내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하다 사라지고 이제는 신선대부두가 들어서고 해수부와 각종 회사들이 자리를 잡았다. 대로에는 지하차도가 만들어져 광안대교와 부산항대교가 연결되어 5분이면 남구에서 영도구로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다.
나는 이곳으로 이사와 20여년을 살았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할 시간이니 많은 것들이 변했다. 베란다에서 동네를 내려다보면 하루하루가 변화가 없는 것 같으나 어느새 시간이 흐르고 조금씩 변한 것이 몰라보게 격세지감이 되었다. 유년시절과 비교하면 동네의 모양과 지도가 너무나 변하여 옛 모습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살던 옛집 근처에 오랜 세월의 숨결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정겨운 돌담이 남아있다. 우리 집 거실에 걸려있는 1952년 7월에 미국 종군기자 존 리치가 찍은 동네사진에도 이 돌담이 있는 것을 보고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이야기다.
해마다 끈덕지게 불어오는 바닷가의 비바람과 강한 태풍을 견디며 오늘 날까지 그 장소에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반갑고 경이롭기까지 했다. 그 시절 흔하던 돌담들이 시대의 변화에 밀려 모두 사라지고 유일하게 방치된 유적지처럼 허술하게 남아있다. 이제 돌담도 세월의 무게에 짓눌러 허물어질까봐 군데군데 시멘트로 바른 부분이 검버섯처럼 붙어있어 세월이 주는 훈장 같다.
다른 집들은 집을 신축할 때 돌담을 허물어 기초공사에 사용하거나 땅에 묻곤 했지만 골동품 같은 고풍스런 담장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장씨 댁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유년시절 해안가 비포장도로를 끼고 집집마다 돌담이 있었다. 돌담은 그다지 높지 않아 이웃들과 조그만 일까지도 숨길 것이 없었다. 이웃과 담장을 사이에 두고 얘기를 나누던 풍경이 그립다. 삽짝이 있는 돌담도 있었지만 아예 삽짝 없이 언제나 열려있는 집이 많았던 걸 보면 방풍용으로 돌담을 쌓은 것 같다.
이 돌담 아래에 서너 사람 앉기에 딱 알맞은 화강암 돌 의자가 있다. 옛날 그곳에 앉아 놀던 이들은 다 떠나고 없지만, 돌담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공간에 건건히 자리를 버티고 있다. 궂은 날을 제외하곤 날마다 햇볕을 안고 나지막한 돌 의자에 두 세 명의 할머니가 앉아 계셨는데, 그중에서 풍채가 좋았던 구장 집 할머니가 생각이 난다.
돌 의자에 앉으면 타원형으로 굽어진 해안도로와 사계절 불어오는 색 다른 바람들, 때때로 호수같이 잔잔한 바다를 품에 안고 세월을 낚던 그 자리, 아침저녁 드나드는 통통배 소리, 선창가에서 아낙들의 소리는 얼마나 거셌던가, 멀리 우뚝 솟은 신선대가 한 눈에 들던 곳이다.
이 돌담은 작가 최인호의 수필집 『인연』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들’에도 나온다. 작가는 오래전 어머니와 함께 부산으로 여행을 온 적이 있었다. 가족은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용당동으로 와서 삼 년 동안 이곳에서 살았다고 했다.
오후 늦게 들어서 우리는 용케도 우리가 살던 옛집을 찾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옛집의 돌담을 찾았던 것이다. 낯익은 돌담 아래로 나이 든 할머니 셋이 나란히 앉아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그 돌담 아래에서 지금은 땅에 묻혀 하얀 뼈가 되어있는 아버지와 나란히 앉아 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내개도 선연한 그 돌담의 풍경이 어머니에겐 얼마나 눈물겹도록 생생한 풍경으로 다가왔을까? 어머니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피난 시절 부산에서 보냈던 젊은 시절의 한때를 그 돌담 밑에서 다시 만났던 것이다. 많은 것들이 부서지고 또 많은 것들이 다시 생겨나는 와중에도, 그 돌담 하나가 남아 오랜 시간 나와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최인호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풍경들」부분
이 오래된 돌담 풍경이 유일하게 아직까지 남아 있어 작가가 살던 옛집의 흔적을 찾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고마운 돌담이었다.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고 사라지지 않은 한 조각 풍경이 있어 그리운 추억이 남아있는 살던 옛집을 찾을 수 있었다.
오래전 읽었던 기억 하나가 희미하게 생각이 난다. 서울 도심지 빌딩숲 사이에 허름한 옛집 한 채가 있었다. 금싸라기 같은 땅에 왜 허름한 집을 방치해 두는지 지나가는 사람들 마다 집을 쳐다보며 궁금하게 여겼다. 사연인즉, 집주인이 아들을 어릴 때 잃어버렸는데, 혹시나 아들이 옛집을 보고 찾아 올까봐 집을 허물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 사연을 접했을 때,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 적이 있었다.
유년시절 그곳에서 놀고 보았던 돌담이 주위의 모든 것이 변하고 사라져도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풍경을 보며 누구에게는 하나의 징표가 되고 누구에게는 옛 시절을 떠올리는 추억이 되었다.
피난시절 부산에서 유년시절의 한 때를 이 돌담과 함께 보냈던 작가는 사라지지 않은 돌담의 풍경이 자신과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었다고 썼다. 지금은 필자가 이글을 쓰기위해 돌담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었을까? 생각하며 미소를 짓는다.
이제 작가는 고인이 되었다. 돌담 옆에 작가의 시비라도 세웠으면 어떨까 생각도 해 보았다. 돌담에도 세월이 흘러 고담이 되어 군데군데 고색창연하여 지는 해를 맞고 있다.
언젠가 돌담도 사라지고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난다. 이 돌담이 언제까지 이곳에 존재할지 모르지만 해 아래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춘분을 앞두고 이 담장 앞에 섰을 때, 찬 기운이 묻어있는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햇빛이 돌담에 가득하다. 유년시절 사라진 풍경에 대한 그리움이 봄의 새싹처럼 하나 둘 솟아오른다.
첫댓글 나의 살던 동네가 그리워지며 옛 생각이 자꾸만 떠 오르네요
고향의 향수는 어머니 품 안같이 잊을 수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