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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照 圓頓門의 실체와 性徹禪師의 圓頓批判
(Ven. Sǒngchǒl's Critical View on the Theory
of Pojo's Sudden Enlghtenment)
鄭景奎(Chung, Kyong Kyu)*
*東國大學校 禪學科 講師 |
普照 圓頓門의 실체와 性徹禪師의 圓頓批判
鄭景奎
차례
Ⅰ. 들어가는 말
Ⅱ. 普照의 思想的 變遷의 계기에 근거한 思想構造
1. 思想變遷과 思想構造
가. 惺寂等持門 나. 圓頓信解門 다. 徑截門
2. 三門解析의 한계와 새로운 분류법
Ⅲ. 普照의 圓頓思想을 둘러싼 思想的 쟁점들
1. 문제점의 所在와 연구의 중요성
2. 圓頓의 문제
가. 普照思想과 圓頓門
나. 圓頓思想과 普照著述
다. 定慧結社文에 나타난 廻光返照와 隨相門定慧
라. 自明的 眞理로 회귀를 시도하는 普照의 사상적 전환과 圓頓死句
마. 확철하지 못한 전환과 普照의 안목비판
3. 三句, 三玄, 三要를 수행단계로 배정하여 해석하는 문제
4. 頓漸의 문제
가. 佛法체계 속의 기본적인 頓漸의 관계
나. 頓悟漸修와 頓悟漸修에서의 頓漸과 習氣의 문제
5. 知解의 개입에 의한 禪門異說.
Ⅳ. 맺는말
Ⅰ. 들어가는 말
필자는 普照思想에서 「眞理의 自明性과 禪門의 征路」라는 題名의 글을 발표한 바 있는데 지금의 이 논문은 원래 그 논문의 후반부에 달려 있었던 부분이다. 그때는 원고량의 제한 때문에 전반부밖에 못 싣고 후반부 내용은 목차 정도만 소개하고 그쳤다. 그러다가 그 후반부를 하나의 독립된 논문 형태를 갖출 수 있도록 단락을 다시 나누거나 조정하여 이제 여기 싣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소 손질한 부분은 있지만 그 전바넉인 개요나 입각처는 본래 하나의 논문이었던 만큼 동일하다.
다만 전반부는 그 題名이 말하듯이 진리 내지 선종의 궁극사상이란 ‘~에 의한’이 아니라 스스로 自明한 것에 입각하고 있음을 밝히는 데 있었다. 그런 만큼 다양한 문헌을 의지하여 고증하고 전거함으로써 논지를 전개하는 쪽보다 스스로 自己證明을 하고 있는 ‘自性(佛性)’에 근거하여 당연히 그러할 수밖에 없는 ‘진리로서의 선종사상 골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형식을 취했었다. 그래서 ‘그야말로 당연한 소리를 동어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조차 다소 있었지만 후반부가 생략된 글이었기에 그런 치우침은 불가항력적인 면이 있었다. 이제 지면을 달리하여 그 후반부의 내용을 싣기에 앞서서 전반부의 그 내용을 개괄해 두기로 한다.
불교의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서 불교문제는 진리의 문제이므로 그 진리는 어떤 권위있는 사람의 개인적인 판단, 종교적 가치관, 분별적인 해석 등에 의해서 건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은 누가 세우지 않더라도 스스로 그러한 自明的인 영역의 문제임을 보이는 것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했다.
특히 선종에서는 불성의 깨달음을 통하여 이러한 자명적인 진리를 증득하고는 이 진리를 直指하여 바로 나타내어 보이는 것에 그 宗趣를 둔다. 만일 이러한 입장에 서게 된다면 ‘禪’이 자치에 대한 이해방식에 있어서조차 ‘究竟妙覺을 이루기 위한 수행방편’이라기 보다 ‘究竟妙覺 그 자체’라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역대의 明眼宗師들은 이러한 입장에서 예외가 아니었으며 선문정로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성철스님으로서도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철스님이 禪이란 용어를 사용할 때도 이렇게 究竟覺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스님의 사상이나 특히 보조사상을 비판하는 논지를 이해하는 데 근원적인 혼돈을 느낄 것이다.
가령 頓悟라는 동일한 어휘를 사용했ㅈ만 頓悟漸修를 주장하는 보조스님의 돈오는 사실은 解悟에 해당한다는 문제만 해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즉 禪을 수행과정 정도로 보았기 때문에 구경묘각이 아닌 해오도, 그리고 禪을 깨달음의 방편 정도로 보았기에 漸修라는 것까지도 禪의 세계에 틈잆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선사상에 있어서 돈점논쟁을 비롯한 現今의 거의 모든 논쟁은 ‘禪’ 이 자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禪을 수행 방편으로 보면 선사상은 그 사상을 知解로써 창안해 내기에 따라 다양한 異說들로서 난립될 수가 있겠지만 禪을 구경묘각 그 자체로 본다면 선사상의 항목으로 포함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그러할 수밖에 없는 자명적인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경진리인 妙覺處를 直指해서 바로 보이는 정통선종의 입장에서 본다면 禪門의 사상적인 골격은 모두 자명적인 항목들만으로 이루어졌으므로 역대로 많은 종사들이 있었지만 異說은 발생할 수 없었던 것이며, 간혹 나타났던 異說은 그것이 知解로써 思量하여 생겨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처럼 선을 구경묘각처로 보는 입장 아래서는 다른 모든 항목들은 자동적으로 정립되는 것으로서, 그 모든 항목들이 얼핏 보면 표현도 다르고 그 내용도 다르기만 한 듯하지만, 사실은 이 모두가 佛性 내지 中道實相이라는 동일요소의 異名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가령 ‘見’과 ‘性’과 ‘佛’과 ‘頓悟’와 ‘頓修’와 ‘寤寐一如’와 ‘內外明徹’과 ‘定慧一如’와 그 외에도 선종의 사상골격을 형성하는 모든 항목들은 모두 이러한 명증성의 체계 아래서 원래부터 同體化되어 있는 것들이다.
이처럼 성철스님에게 있어서의 선이란 오직 妙覺을 의미하는데, 等覺을 비롯한 그 이하는 자연히 禪이라고 볼 수 없게 되며, 그것은 解悟이고 敎家이며 漸修門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禪이 구경묘각이라면 頓悟할 때 다시 더 닦아야 할 것은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그대로가 頓修임도 자명한 사실이다.
이처럼 선사상의 여러 항목들은 禪을 구경묘각으로 보는 정통선종의 입장에서는 자명적인 항목들로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경의 깨달음인 묘각으로서의 禪 체계가 실천하거나 증득하기에 어렵다고 하여 쉬운 방편으로서의 異說을 제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것이 적어도 정통선종의 사상적 항목으로 될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비록 어렵더라도 그것이 엄연한 명증적 진리라면 이것을 진리로 인정하는 데 인색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중생들을 위한 다양한 교설도 필요는 하겠지만, 그것이 정로를 장애하는 것이라면 안 될 것이며, 더욱이 으뜸의 정로를 묻어버리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普照(1158~1210)나 西山(1520~1604)의 저술을 검토하면 그들도 생애 중 후반에서는 이러한 자명한 진리의 세계에로 사상적인 전환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산의 경우 세수 85세를 누리며 확철한 사상적 전환을 보여주었음에 반해, 보조의 경우는 그 확철한 전환을 보이지는 못하고 53세의 이른 세수로 타계한 아쉬움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끝없는 구도의 정신만은 후학들에게 길이 귀감이 될 것이라고 본다.
대개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구성된 전반부가 선에서의 일반적인 원리와 구조적 체계를 보이기 위해 ‘禪과 自明性의 세계’를 다루었지만 여기서 보일 후반부에서는 그 일반적인 체계가 구체적으로 적용된 양상을 보이려고 ‘禪門의 異說과 圓頓思想’을 다루었다.
특히 후반부는 선문정로에서 禪門의 異說로 비판하는 보조국사 지눌의 사상을 전반부에서 보인 일반적 원리에 입각하여 검토한 것이었다. 그래서 선종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양상을 ‘自明性에서 본 頓悟漸修’, ‘禪敎一致와 知解의 장애’, ‘寂照와 照寂 및 禪家와 敎家’, ‘自明的 眞理로 희귀를 시도하는 普照의 사상적 전환’, ‘普照의 사상적 전환과 圓頓死句’, ‘臨濟三玄의 해석문제’, ‘證悟에 있어서 圓頓門과의 조화문제’ 등의 측면에서 언급한 것이었는데 이제 여기서 약간의 손질을 거쳐 싣는다.
그러나 지금부터 아무리 전반부와는 달리 어떤 문헌의 내용에 입각하여 ‘~에 의한’ 논지를 전개하더라도 문헌 내용에 근거한 이 구체적인 실례 ‘ 때문에’ 선종 진리가 전반부의 내용처럼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후반부의 이 내용들은 다만 전반부의 그 내용과 다르지 않음을 대조해 보는 것에 불과하다.
Ⅱ. 普照의 思想的 變遷의 계기에 근거한 思想構造
普照國師(1158~1210)는 高麗 毅宗 12년에 태어나 熙宗 6년에 열반했으니 世壽는 53세 法臘은 36세였다. 黃海道 瑞興人인데 俗性은 鄭씨며 그 諱는 知訥이고 自號는 牧牛子이다. 열반 후 諡號를 佛日普照國師라고 받았다.
本考의 주된 논점은 Ⅲ章에서 다룰 ‘普照의 圓頓思想을 둘러싼 思想的 쟁점들’에 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性徹스님에 의하여 비판되는 思想的 쟁점들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普照의 사상전체를 구체적으로 다루지는 않을 것이지만 논의의 전개를 위해 우선 그의 사상체계를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의 사상체계에 대해서는 보조의 碑銘을 쓴 유학자 김 군수의 분류체계가 가장 오래된 이해방식의 하나이다. 물론 최근 학자에 따라서는 이것이 참된 보조사상의 체계를 왜곡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며 본고에서도 그러한 지적의 요지를 상당 부분 수용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김 군수의 三門 분류체계를 근간으로 삼고 몇 가지 보충언급을 하면서 간략해 소개해 보기로 한다.
1. 思想變遷과 思想構造
가. 惺寂等持門
보조는 어릴때부터 몸에 병이 많아서 佛前에 빌던 것이 출가의 인연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출가 후 25세 때는 普濟寺에서 僧選을 마쳤지만 이것을 名利의 길이라 하여 버린 다음 바로 수도에 임했는데 이때 全南 淸源寺에서 六祖壇經을 읽다가 첫깯달음의 계기를 맞이했다. 그 壇經의 내용은 “진여 자성이 생각을 일으키어 육근이 비록 보고 듣고 지각하고 인식하지만 객관경계에 물들지 않나니 참된 성품은 항상 자재하다[眞如自性起念 六根雖見聞覺知 不染萬象 而眞性常自在]”라는 구절인데, 지눌은 이때의 得力處 내지 六祖壇經의 사상에 바탕하여 頓悟漸修 定慧雙修를 그 내용으로 하는 惺寂等持門을 건립했다.
33세 때의 저술이라고 하는 勸修定慧結社文과 41세 이후 작품으로 추정하는 修心訣 그리고 52세에 저술한 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는 이 惺寂等持門의 사상을 반영한 저술들로 꼽고 있다.
나. 圓頓信解門
또 그는 젊은 시절부터 禪과 敎의 대립적인 양상을 해소할 수 있는 길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결국 敎를 통해서도 正覺에 이를 수 있는가 라는 문제로 귀착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28세 때 慶北 下柯山 普門寺에 머물 때 대장경을 열람하다가 “한 티끌 속에 大千經을 머금어 있는 것처럼 열지해가 중생 몸 가운데 다 갖추어 있지만 범부가 어리석어 알지 못할 따름이다.”라는 화엄경의 「여래출현품」과 “몸뚱이는 지혜의 그림자요 국토 또한 그러하니 지혜가 맑으면 그림자도 맑으며 대소와 인다라망 경계가 다 그러하다”라는 이통현 장자의 華嚴論 구절에서 크게 얻은 바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禪과 敎가 둘이 아니고 敎는 마침내 禪의 구경에 돌아와서 회통된다고 하는 禪敎一致의 원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에 근거하여 圓頓信解門을 건립했는데 선교일치에 관한 그 구체적인 방안들은 “圓頓成佛論과 華嚴論節要에서 제시하였다.
다. 徑截門
그러나 그는 위와 같이 두차례에 걸쳐서 나름대로는 득력한 바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아직 미진함을 느끼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頓悟漸修라는 그의 사상체계가 소위 頓悟로서 득력한 이후에도 계속 미진함은 남았으므로 漸修해야만 한다는 그러한 체계라는 사실만으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뿐 아니라 41세때 그가 대혜 書狀을 통하여 그의 마자미가 得力機緣을 이룬 후 “그동안 원수와 함께 있었던 것 같았다”고 고백한 사실만으로도 잘 입증된다고 할 것이다.
즉 보조국사의 碑銘에는
내가 普門寺로부터 십여 년이 되도록 비록 得意하여 부지런히 닦아 헛되이 때를 보낸 일이 없었지만, 그러나 아직 情見을 잊지 못한 채 한 물건이 가슴에 걸려 마치 원수와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지리산에 있을 때 大慧普覺禪師語錄을 얻었는데 그 가운데서 ‘禪은 고요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요, 시끄러운 곳에 있는 것도 아니며, 日用應緣處에 있는 것도 아니고, 思量分別處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고요하거나 시끄럽거나 日用應緣處나 思量分別處를 여의고 參究하지도 않아야만 하나니, 만일 갑자기 눈이 열리면 비로소 그것이 집안 일임을 알 것이다’고 하였는 바, 나는 거기서 계합하여 깨치게 되어 저절로 물건이 가슴에 걸리지 않고 원수도 한자리에 있지 않아 당장에 안락하여졌다.
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에 의거하여 보건대 지눌이 41세 되던 해에 도반 三四人과 함께 지리산 上無住庵에 올라가서 일체의 외연을 끊고 참선에 열중한 것은 스스로의 그 답답함과 미진함에 대한 발버둥이었다고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스스로의 수행에 있어서도 새로운 방법론을 채택하여 아마도 간화선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다.
아무튼 그는 이 上無住庵에서 대혜스님의 書狀을 읽다가 일단 徑截의 본연소식에 접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에 근거하여 그는 徑截門을 건립했으며 그 사상적인 내용들은 주로 看話決疑論에서 살펴볼 수가 있다.
2. 三門解析의 한계와 새로운 분류법
이상으로 보조의 사상체계를 김 군수의 삼문을 기준으로 하여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惺寂等持門-六祖壇經’ ‘圓頓信解門-華嚴論’ ‘徑截門-大慧書狀’같은 배대는 各門의 중심사상을 얻어내는 체험적인 계기가 그러한 서적을 통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진 면이 컸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므로 各門의 사상이 반드시 그 사적사상에만 한정적으로 입각되어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령 원돈신해문의 사상 가운데는 그 이전의 체험계깅인 六祖壇經의 定慧均等 내지 惺寂等持의 사상이 깔려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惺寂等持門의 사상을 대표적으로 담고 있다고 평가되는 勸修定慧結社文은 33세 때의 저술이지만 이때는 이미 圓頓信解門의 사상을 정립할 수 있는 첫 계기인 28세를 넘긴 시기이므로 그의 실질적인 성적등지문의 사상도 다분히 원돈신해문 사상과 얽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삼문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과연 무엇을 惺寂等持門이라 하고 圓頓信解門 및 徑截門이라고 할 것인가가 매우 막연해진다. 아울러 보조의 사상을 과연 김 군수의 이 삼문으로 분류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까지 부딪히게 된다. 이 문제와 관련된 심재룡 교수의 견해는 보조의 말년 저술들에 나오는 體中玄 句中玄 玄中玄의 三玄門에 대한 해석체계야말로 보조 스스로가 정리한 자신의 사상체계라고 한다.
그 체계를 ‘體中玄-圓頓成佛論’ ‘句中玄-看話決疑論’ ‘玄中玄-良久․棒․喝’로 보았는데 이것은 김 군수의 삼문 중 惺寂等持門과 圓頓信解門은 ‘體中玄-圓頓成佛論’의 하나로 묶고 徑截門은 ‘句中玄-看話決疑論’으로서 그대로이며 ‘玄中玄-良久․棒․喝’은 추가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물론 ‘임제의 三玄門을 해석하면 임제종지에 위배된다’는 보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따르고는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보조가 스스로 자신의 사상을 체계 지은 분류방식의 하나라는 점에서 가장 정확한 그의 사상체계 중 한 양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골격을 다시 그의 사상을 형성할 수 있게 한 수행체험의 문제와 결부시켜 본다면 대개 간화경절의 소식을 접하기 이전인 ‘體中玄-圓頓成佛論’과 그 이후인 ‘句中玄-看話決疑論’ ‘玄中玄-良久․棒․喝’로 이등분하여 볼 수 있따. 그러나 圓頓과 看話에 결부된 그의 수행체험은 구체적으로 알려진 것이 있지만 良久․棒․喝’과 결부된 것은 별달리 없다. 그래서 결국 보조사상을 무언가 그 수행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실질적인 내용으로 나눈다면 圓頓思想으로 구성되는 前期와 徑截思想으로 구성되는 後期로 대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Ⅲ. 普照의 圓頓思想을 둘러싼 思想的 쟁점들
1. 문제점의 所在와 연구의 중요성
여기서는 주로 보조의 원돈사상에 대한 성철선사의 비판체계에 근거하여 필자의 견해를 전개하기로 하겠다. 普照思想을 둘러싼 그 思想的 쟁점들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논의들이 있어 왔지만 이때까지 보조의 원돈사상에 대한 실체가 어떠한가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연구는 매우 미흡했다고 본다. 간혹 그 언급이 있더라도 그것은 이른바 宗師들의 높은 안목에서 발설된 것이 아니면 그것을 학자들이 그대로 언급하는 정도여서 실제로 그것이 어떠한 것인가를 파악하기는 매우 어려웠다고 본다. 그러나 보조 스스로도 말년이 되면 ‘圓頓死句’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만큼 ‘圓頓死句’나 ‘三句․三玄․三要’ 같은 문제 가운데는 선문정로의 비판대상이 실질적으로 어떤 수행방식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인가를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보조의 사상은 그의 수행 중 득력한 계기에 따라 惺寂等持門 圓頓信解門 看話徑截門의 三門으로 분류되고 惺寂等持門은 頓悟漸修와 定慧雙修로 圓頓信解門은 禪敎一致로 대변된다. 간혹 설교일치를 ‘禪의 사상’과 ‘敎의 사상’이 그 사상적인 내용면에서 일치하는 이론적 일치의 문제라고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사실은 보조가 敎의 행위를 통해서도 正覺을 이룰 수 있는가라는 고민 속에서 화엄원리를 통하여 체득한 가능성이 禪敎一致이므로 禪과 敎의 이론적인 일치 문제라기보다 敎의 행위가 그대로 禪이 된다는 수행적인 문제였다. 결국 보조에게 있어서 頓悟漸修의 체계에 따라 행하는 실질적인 수행의 내용 중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바로 禪敎一致라는 敎的行爲로서의 禪이었다고 할 수 있고 그러한 근거들은 그의 저술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성철스님은 ‘頓悟漸修’와 ‘禪敎一致’를 ‘圓頓思想’이라고 묶어서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소위 돈오점수의 원리 하에 있는 수행법은 모두가 그 비판 대상이 되겠지만 특히 성철스님의 이 비판에 가장 귀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바로 이 禪敎一致 내지 圓頓言句들에 입각하여 수행해 가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선문정로의 緖言은 “古今 善知識들의 玄言妙句는 모두 눈 속에 모래를 뿌림이다”로 시작할 뿐 아니라 본문의 첫구절도 “見性을 하면 敎와 觀을 다 휴식하느니라”라는 구절로 시작하고 있다. 그만큼 이 구절은 선문정로 전체를 통하여 그 사상적인 색깔과 방향을 함축한다고 본다. 아울러 “十地의 보살들이 說法하기는 비뿌리듯 해도……” 라든지 “法談하는 것을 보면 부처와 조사를 죽였다 살렸다 마음대로 하지만……” 등등을 언급하며 ‘敎로서의 禪(선교일치)’ 다시말해 ‘圓頓言句를 觀하는 수행’을 경계하고 있다.
성철스님이 비판한 敎家의 사람들이란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 十地나 等覺에 까지도 올라 禪問答이나 法談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소위 한국적 분위기 內에서의 선지식들을 지칭하는 면이 더 강했다. 이처럼 성철스님이 보조스님의 수행관에 크게 젖어있는 한국 조계종의 한계를 비판했다면 그 가장 실질적인 수행방식도 圓頓言句를 觀하는 禪敎一致 등에 대한 연구는 성철스님이 평생동안 비판한 그 대상이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식의 수행을 하는 사람이 이 비판에 가장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이다.
자신이야말로 선문정로에서 비판되는 바로 그 공부를 하면서도 그 비판이 정작 자기에게 해당되는 내용인지는 모르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자기가 과연 성철스님의 그 비판 대상인가를 판별하는 전형적인 기준은 寤寐一如되었는가라는 문제로써 점검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오매일여 안 된 수행인이라도 자기의 수행법이 오매일여를 뚫는 데 있어서 오히려 장애가 되는 수행법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성철스님은 선교일치․원돈언구를 관하는 수행으로는 미래제가 다하도록 닦아도 구경각은 이룰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圓頓觀法이 과연 자신의 수행법과는 다른가 아닌가를 판별하는 것은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며 이 판별을 보다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원돈’, ‘원돈언구’, ‘선교일치’ 등의 연구도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는 것이다.
2. 圓頓의 문제
가. 普照思想과 圓頓門
보조의 사상에서 크게 주목할 부분은 역시 원돈사상이다. 보조사상과 연관지어 소위 華嚴禪․圓頓信解門․禪敎一致 등을 云謂하거나 또 그의 사상이 비판의 대상이 될 때는 바로 이 부분의 내용으로 집중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이 원돈사상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든 부정적으로 평가되든 간에 보조의 사상을 검토하려면 우선 이 원돈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결과제로 부각되는 것이다.
보조스님은 젊은 시절에는 오랫동안 禪敎一致의 원리로서 李通玄 장자의 華嚴思想에 근거하여 圓頓信解에 의한 如實言敎를 존중해 오다가 看話決疑論을 저술하던 만년에는 “圓頓信解인 如實言敎가 항하사수와 같으나 이를 일러 死句라고 함”이라고 하여 스스로도 이것이 禪門의 正傳이 아님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性徹스님에 의하면 “普照는 圭峰의 解悟思想을 知解라고 비판하면서도 節要․圓頓成佛論等에서 解悟思想을 연연하여 버리지 못하고 항상 이를 고취하였다. 그러나 普照는 만년에 圓頓解悟가 禪門이 아님은 분명히 하였으나 시종 圓頓思想을 고수하였으니 普照는 禪門의 표적인 直旨單傳의 本分宗師가 아니요 그 思想의 主體는 華嚴禪이다”라고 하면서 普照를 비판하고 있다.
‘圓頓’이란 어휘는 禪家에서도 그 사용의 기원을 추적해 볼 수는 있겠으나 가장 먼저 사용한 쪽은 禪宗에서보다 天台에서 살펴 볼 수 있으며 다음으로는 華嚴家들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普照의 원돈사상은 화엄에서 영향받은 바가 크므로 華嚴宗에서의 원돈을 간략히 언급해 본다면 일찍이 華嚴初祖인 杜順화상이 불교 전반을 五敎로 나눌 때 頓敎와 圓敎를 세웠다. 다시 三祖인 賢首는 華嚴敎가 一乘圓敎이면서 頓敎라고 했고, 四祖 淸涼에 이르러서 비로소 圓頓敎라는 말을 쓰게 됐다. 五祖 圭峰 宗密에 이르러서는 禪敎一致의 원리 위에 圓頓觀行門 및 圓頓修證思想을 고취하여 禪敎一元觀을 확립하는데까지 진전했으며 禪과 華嚴을 나름대로 통일하여 頓悟漸修사상을 확립하여 普照의 사상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普照의 원돈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서는 唐代의 李通玄 장자라고 할 수 있는데 보조는 그의 華嚴論을 요약하여 華嚴論節要를 저술했으며 나아가 이 사상에 근거하여 頓悟漸修사상이 포함된 圓頓成佛論을 저술하기도 했다.
이미 보였듯이 보조의 사상은 평가자에 따라서 세단계로 나누어 비평하기도 하며 이러한 방법론도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짐과 아울러 연구내용에 따라서는 이 분류가 편리성을 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보조가 간화경절의 소식을 접한 것을 전후하여 보였던 자신의 원돈사상에 대한 스스로의 입장과 연관지어 대개 초반기 사상과 후반기 사상으로 나누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나. 圓頓思想과 普照著述
앞에서 밝힌 것처럼 보조사상에 있어서 나름대로의 그 수행체험적 전환계기는 25세, 28세, 41세로 보며 원돈사상의 성립계기는 28세의 시기로서 그 이후 41세까지는 경절소식에는 아직 접하지 못한 시기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저술을 보면 정작 이 원돈사상에만 입각했다고 할 수 있는 28세와 41세의 사이의 것은 33세 때의 저술로서 勸修定慧結社文 하나뿐이다. 이것은 그의 첫 저술로 알려져 있는데 그 나머지는 대개 경절의 소식을 접했다고 자처하는 41세 이후의 작품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저술년대가 불확실한 몇 가지는 고려에 넣지 않았지만 그러나 중요한 저술은 학자들의 추측년대에 입각해서 고려한 것이다. 그러면 결국 이 경절의 입장이 배제된 수수한 원돈사상에만 입각한 작품은 결사문 하나뿐이라고 할 수 있다.
김 군수의 三門체계에서는 圓頓信解門보다도 惺寂等持門사상을 대표하는 서적으로 평가받던 결사문이 여기서는 오히려 원돈사상을 순수하게 대변하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자료로 평가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저술년대가 불확실한 수심결을 그 속에 大慧의 어구가 인용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대혜어록을 열람한 41세 이후의 작품이라고 추측하여 제외시킨 한계는 있다. 이에 관련하여 성철스님은 보조의 결사문과 수심결은 그 내용이 동일하므로 다 같이 경절의 소식을 접하기 전인 초년의 작품으로 본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普照의 저술 연차를 보면 結社文은 33세요, 節要는 入寂하기 전 해인 52세이다. 修道過程은 41세 上無住菴에서 物不碍膺하고 讐不同所하야 當下安樂하야 慧解增高라고 碑文에 明記하였으니 修道의 진전에 따라 思想의 향상을 볼 수 있다. 修心訣은 撰述年代가 없으니 그 내용이 結社文과 동일하므로 초년에 지은 것임이 분명하다.
아무튼 보조는 41세 때 경절의 소식을 접했다고 한다. 그러나 41세 때 간화경절의 소식을 접했다고는 하지만 원돈관련의 저술은 그 41세 이후의 작품 가운데서 대부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41세 이후의 작품들인 원돈성불론을 비롯한 그의 원돈사상 관련의 저술은 시기적으로 볼 때 모두 자기 안목으로서의 경절입지까지도 내재시킨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아니 평가하기에 따라서는 보조는 경절소식을 접한 이후에도 그가 가장 힘들여 관심을 기울인 부분은 간화결의론 한권을 제외하면 오히려 원돈관련의 저술과 그에 관한 사상 정립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간화결의론에서조차도 완전한 경절사상만으로 매듭짓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는 원돈사상을 틈입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만일 보조가 참으로 경절소식을 투철하게 체험했다면 그리고 성철스님의 평가처럼 원돈사상과 경절사상은 서로 조화될 수 없는 체계라면 보조는 원돈을 버리고 스스로도 더 수승하다고 인정한 경절사상 쪽으로만 확실한 전향을 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경절을 접한 이후에도 오히려 계속 원돈쪽에 중심이 있는 저술 위주로 일관했으니 그의 경전에 관한 체험은 사실은 투철하지 못한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원돈사상과 경절사상이 서로 조화될 수 있다면 보조에 대한 이런 평가는 재고할 여지가 있겠으나 이 문제는 돈오점수와 돈오돈수가 조화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등과 복잡하게 얽혀 들어간다.
다. 定慧結社文은 定과 慧를 균등히 가짐으로써 깨달음의 공부를 해 나가자는 취지의 글인데 이는 다른 동학들에게 권하는 글이기도 하겠지만 스스로에게도 다짐하는 글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의 권유내용은 꼭 남에게만 권하는 것이라기보다 자기의 안목도 지금 이러하니 이런 공부법을 계속 지켜나가겠노라는 스스로의 다짐으로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공부 수준에 맞추어 그의 공부를 더욱 향상시키려는 것이므로 이 글의 권유내용은 스스로의 공부수준을 그러한 상태로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보조는 이 정혜결사문에서 밀밀히 返照自心하라고 했는데 어디에서 어디로 반조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念과 念의 천류가 있을 때 이 念의 事的인 입장에만 끄달리다가 이 事와 다르지 않는 理的인 면으로 돌이킨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반조를 통하여 비록 理事不異를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람의 공부는 아직 事上에서 理地로 환귀하려는 국면에 있는 것이므로 비록 이 理地를 반조하여 봄으로 寂地에 대한 앎이 전혀 없지는 않겠으나 그의 중심은 여전히 事上의 생멸쪽에 있다.
이것이 바로 等覺 이전의 照寂인 것이며 아직 생멸을 완전히 못벗어난 解悟요 言說에 있어서도 흔적이 잇는 敎家며 그 생멸의 핍박을 좀더 줄여 보려고 ‘애써 노력하는 觀行’을 놓아버리지 못한 채 아직 힘을 들여 공부하는 국면이다. 그래서 나머지가 있는 有餘의 입장에서 애써 노력하며 조금씩 조금씩 줄여보는 漸次의 공부 입장에 있다.
寂地에 대한 깨달음이 悟의 관문이라고 한다면 이 회광반조가 핵심적인 것이긴 하다. 그렇지만 회광반조는 역시 照寂의 입장이므로 회광반조를 말하는 한 그는 아직 완전한 無餘涅槃의 해탈을 이루지는 못한 해오의 경지이며 事上의 국면에서 이 事上의 핍박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입장이다. 아울러 그의 공부는 여전히 事上의 공부가 되고 이 회광반조를 주장하는 한 그것은 해오이다. 이것은 보조 스스로도 念念마다 밀밀히 반조할 것을 역설한 그의 초기 사상을 해오로서 인정했다.
물론 返照에 관해서는 百丈을 비롯하여 많은 正眼宗師들이 언급한 바이지만 頓悟頓修에 근거한 그들의 입장은 또 다르다고 보아야만 한다. 회광반조를 이야기해도 돈오돈수를 성취한 자신은 항상 涅槃妙心에서 寂照하지만 초심자를 위해서 회광반조하라고 말할 수는 있다. 이에 반해서 만일 그가 소위 頓悟漸修의 공부를 하면서 회광반조를 말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공부가 여전히 生滅位에 놓인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돈오점수에 의한 공부가 사실은 철저한 無念에 의한 無爲修가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假悟에 의한 어렵풋한 寂地의 계발은 있으며 이것을 悟라고 부르면서 이 悟를 타고 간다[乘悟]고는 하지만 엄격히 보면 아직도 念과 念의 事上局面에서 이 念流의 생멸 핍박을 받고 있는 事上공부인 것이다.
定慧結社文보다는 이후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그의 修心訣에서도
깨달은 뒤에 모름지기 오래 비추고 살펴 망념이 홀연히 일어나면 전연 이를 따라가지 말고 損減하고 또 損減하여 無爲함에 도달하여야 비로소 究竟이니
悟後 長須照察 妄念忽起 都不隨之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方始究竟
라고 했는데 여기서의 悟가 참으로 究竟妙覺의 頓悟라면 生相이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일단 忽起하는 망념이 있기는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頓悟漸修의 悟後修가 無爲修라고 말은 하지만 究竟的인 無爲는 오래오래 덜어서 제거한 뒤에 이루어짐을 보이므로 처음의 悟는 見性은 아니며 悟後의 修도 진정한 無爲修가 아니라 事上의 修임을 드러낸다.
이처럼 보조나 규봉은 이 돈오점수를 설명할 때 ‘첫 돈오에서 무념은 성취했고 그 다음의 점수행은 理事가 원명한 공부이므로 事上의 공부가 아니다’고 했지만 그것은 스스로 속고있는 국면일 뿐이며 실제로는 미세한 細妄識의 천류와 그 핍박을 완전히 못벗어난 것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정혜결사문에서는 定慧均等을 말하면서 自性門定慧와 隨相門定慧를 말했는데 혹자는 보조도 자성문정혜를 말했으니 이것은 정혜일여의 입장을 밝힌 것이고 그의 공부가 진정한 돈오에 의한 정혜일여의 국면이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돈오점수를 주장한 정혜결사문의 자성문정혜는 壇經의 정혜일여와는 구별되어야만 한다.
壇經의 정혜일여는 참으로 구경묘각에서 寂照함으로 해서 생멸의 핍박이 없고 애써 행하는 觀行의 수고로움도 없다. 더 이상 修할 바를 남기지 않은 돈오돈수의 경지에서 유유자적하게 평상심 그대로가 道心이며 평상의 일체행이 그대로 佛行 그 자체로 구족되어 있다. 그래서 억지로 꼭 무엇을 해야만 하는 구속이 없는 편안하고 고요한 참된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이에 반하여 보조의 돈오점수에 의한 자성문정혜는 얼핏 보면 같은 듯하며 보조 스스로의 설명도 흡사 같은 것 같지만 여전히 구경묘각에서 寂照하는 입장은 아니다. 그것은 적어도 等覺 이하에서(심지어는 住初에까지 소급되어) 照寂하는 생멸핍박의 국면이며, 애써 행하여 닦는 그러한 점수행을 남긴 미해탈의 상태로서 觀行을 놓아버릴 수 없는 수고로움의 국면이며, 증장시키려고 하는 功果도 있으며, 구체적인 중생도 보는 국면이므로 유위적인 보살행이나 자비심의 증장도 역설한다.
소위 돈오점수에 의한 수행과정이 해탈의 자유로움을 구가하는 국면이 아니라 엄청난 수고로움의 과정이라는 것은 보조가 대혜어록을 보다가 간화경전의 세계를 처음 맛보고서 그 이전까지의 삶이 원수와 함께 있었던 것 같았다고 묘사했던 것에서도 잘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돈오점수라는 말 자체가 이미 계속적인 수행의 필요성 아래서 애써야 한다는 점수의 行이라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이 자성문정혜와 아울러 수상문정혜도 역설했다. 그래서 혼침하면 慧를 증장시키는 공부를 하며 산란하면 定을 증장시키는 공부를 하라고 한다. 그러나 참으로 돈오점수의 이 돈오가 見性이라면, 그래서 자성문정혜의 정혜가 참으로 진정한 定慧一如의 정혜라면 어디에 혼침이나 산란이 붙을 수 있겠는가. 견성이면 寤寐一如까지도 이룬다고 했는데 어디에 혼침이 있을 것이며 견성이면 涅槃寂靜이라고 했는데 어디에 산란이 있을 것인가.
그는 初心人을 위하여 수상문정혜의 공부법도 함께 하기를 권한다고 했다. 이것이 보조 자신은 그런 초심인이 아닌데 다른 초심인을 위하여 그런 권유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도 하는 다짐의 말인지는 좀더 세심한 통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돈오점수를 千聖의 軌轍로 본 것은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될 수밖에 없음을 보인 것이고 따라서 그의 공부도 돈오점수적이었음을 보이며 자연히 여기서 수상문정혜를 시설하는 것도 이 방법이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함을 시사한다. 결사문에는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비추되 먼저 寂寂으로써 攀緣하는 생각을 다스리고 다음에는 惺惺으로써 昏沈을 다스려 혼침과 산란함을 고르게 다스려라. 取捨하는 생각이 없으며 마음으로 하여금 歷歷하고 廓然不昧하게 하여 無念으로 알게 하라.
攝心內照 先心寂寂 治於緣慮 次以惺惺 治於昏沈 均照昏散 而無取捨之念 令心歷歷 廓然不昧 無念而知.
고 했는데 이것은 보조의 소위 수상문정혜에 해당한다. 수상문정혜의 소견에 의한 공부를 설하면서도 ‘無念의 知(無念而知)’를 말하고 있으니 비록 心歷歷과 廓然不昧를 말하면서 悟의 입장을 말한 듯하지만 아직 頓悟漸修의 분상에 있는 그의 無念이 과연 眞無念인지 아니면 無念이라고 오해하는 事上의 국면인지는 명백히 드러난다. 이 인용구의 바로 다음에 永嘉스님의 惺惺과 寂寂에 관한 언급을 하면서 논지의 근거로 삼고는 있지만 이것 역시 頓悟頓修에 입각하여 말하는 것과는 구별되는 것이다.
라. 自明的 眞理로 회귀를 시도하는 普照의 사상적 전환과 圓頓死句
보조의 원돈사상은 보조 저술의 전반에서 그 근저가 되어 흐르고 있음을 볼 수 있지만 그 대표적인 것은 역시 圓頓成佛論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돈에 관한 그의 前後思想이 모두 감안된 문헌으로서는 看話決疑論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看話決疑論은 원돈문공부에서 발생하는 知解를 깨뜨리는 데 거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看話決疑論이야말로 보조 스스로가 평생 동안 받들던 원돈사상에 대한 최종적인 평가와 해석 및 그 한계를 스스로 보여주고 나름대로의 극복방안까지도 보이려고 시도하는 저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을 비교적 압축적이고 요약적으로 살펴 볼 수 있는 것으로서 看話決疑論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들 수 있다.
1. 禪門에도 또한 은밀히 전하는 것을 감당하기 어려워하여
2. 敎를 빌어 宗을 깨치고자 하는 자를 위해서는
3. 眞性緣起의 事事無碍한 法을 설함이 있으니,
4. 저 三玄門의 첫 근기가 得入하는 體中玄에서 밝힌 바와 같다.
5. 그것은 ‘가없는 모든 경계에 自와 他가 털끝만큼도 구분되지 않으며’
6. ‘十世古今의 시작과 끝이라도 지금 이순간의 생각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고 말하거나
7. 또 ‘하나의 言句가 밝고 밝아 만상을 머금었다’고 말하는 것 등이 이것이다.
8. (그러나) 禪門 가운데에 이런 圓頓信解의 ‘實相과 같은 言句의 敎’가 마치 恒河沙數와 같지만 이를 일러서 ‘죽은 글귀[死句]’라고 말하는 것은,
9. 사람으로 하여금 解의 障碍를 내게 하는 까닭이다.
10. 아울러 이것은 初心의 學者가 경절문의 활구에서 능히 참구하지 못하는 까닭에
11. ‘性品을 불러 드러내게 하는 그러한 圓談’으로써 보여
12. 그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여 퇴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까닭이다.
[1. 禪門 亦有爲密付難堪 2. 借敎悟宗之者 3. 說眞性緣起 事事無碍之法 4. 如三玄門 初機得入 體中玄所明 5. 云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6. 十世古今 始終 不離於當念 7. 又云 一句明明該萬像等 是也 8. 禪門中 此等圓頓信解 如實言敎 如河沙數 謂之死句 9. 以令人 生解碍故 10. 竝爲初心學者 於徑截門活句 未能參詳故 11. 示以稱性圓談 12. 令其信解 不退轉故]
위 1, 4, 10에 의하면 圓頓門은 경절문활구에 參할 수 없는 초심학자의 경우를 위함을 알 수 있다. 아울러 12에는 그런 사람이 信하고 解하게 하여 信心이 물러가지 않도록 하는 데 圓頓門의 목적이 있음을 보이며 圓頓으로 信解한다는 圓頓信解門의 취지가 엿보인다. 또한 1, 10에는 경절문활구를 參하는 것을 원래적인 禪門으로 보며 비밀히 부촉하는 경우라고 보았다. 이에 반해서 2, 10은 원돈문이 敎를 빌린 禪門으로서 원래적인 禪門은 아니라고 보는 일면을 드러낸다. 그러나 1, 2, 8에서는 ‘敎를 빌리기는 했지만 역시 宗을 깨닫는 門으로 보며’ 여전히 禪門 가운데 있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원돈문에 의한 借敎悟宗이 禪敎가 一致한다는 사상으로 귀착됨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원래적인 禪門’과 ‘解에 의지하는 낮은 근기의 원돈적인 禪敎一致의 禪門’을 일단은 구별했음을 알 수 있고, 그러면서도 이 양자를 모두 禪門으로 인정하여 ‘결국 禪門에 지위와 계급이 부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을 4와 결부시켜 보면 원돈문의 선교일치 공부가 體中玄이라는 이름 하에서 처음 깨달아 들어오는 경우의 공부로 배대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따라서 보조의 사상은 悟入에 地位와 漸次가 두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선은 구경묘각 그 자체이므로 선에는 지위와 점차가 없음이 자명적이며 이러한 자명적 사실에 원래적인 선문의 입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조의 경우는 圓頓門 禪敎一致 頓悟漸修(사실은 解悟漸修) 등으로 구성된 漸修사상을 여전히 禪門 가운데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특히 4에서는 臨濟禪師가 설했던 ’三玄‘의 ’三‘을 ’세 가지‘라는 뜻의 三으로 분별하여 나름대로 ’解釋‘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그렇게 해석한 三玄의 각각을 깨달아 들어가는 순서에 배대시키고 있다.
또 3, 11에 의하면 그러한 원돈 공부 내지 선교일치 공부의 구체적인 방법이 眞性緣起(性起) 하는 事事無碍의 言句를 說할 때, 이러한 ‘圓談으로서의 言句’를 觀하여 自性에 稱合케 하며 性品을 계발하는 방법임을 알 수 있다. 禪門正路에서는 원돈문을 비판하는 논지 하에서 「決疑論」의 ‘稱性圓談’을 ‘自性에 稱合한 圓談’으로 해석했다. 원돈사상에서는 本性을 悟하여 性品을 드러내고 定慧一如를 구현함에 있어서 ‘言句의 <慧>的境界도 그대로 自性本<定>과 다르지 않음을 자각할 수 있다’는데 입각한다. 그래서 이때의 言句 言談은 圓談이고 이 圓談은 그대로 自性에 稱合한 境界라고 본 것이다.
아울러 7, 8, 11에 의하면 이러한 圓談으로서의 言句가 眞性緣起(性起)하는 양상을 一句明明該萬像으로 대변했음을 알 수 있고, 實性과 같은 言句의 經敎(如實言敎)를 事事無碍觀法으로서 觀하는 공부법이 소위 圓頓信解門의 禪敎一致 공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8, 10에서는 이것을 원래적 禪門인 徑截門 活句가 아니라 死句라고 단정하고 있는 중요한 일면을 볼 수 있다. 이것은 普照 초반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圓頓門 禪敎一致 頓悟漸修가 스스로에 의해서 死句로 시인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이러한 死句가 여전히 활발한 불성생명의 계발에 그 궁극목적이 있는 禪門 가운데 두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9에 의하면 그러한 圓頓言句가 死句로 간주되는 이유가 解의 障碍 때문임을 보여준다. 이것을 2와 결부하면 敎를 빌려 宗을 悟하는 것은 解를 못 벗어난 悟로서 소위 解悟임을 보여주고 있고 따라서 禪敎一致 圓頓思想 頓悟漸修 등이 사실은 解悟漸修임을 보여준다. 아울러 10에 의하면 이러한 解의 장애로 인한 死句化를 극복하는 방법이 경절문의 活句참선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8에서 보면 보조는 초반에 중요시하던 원돈언교를 死句라고 단정하여 분명히 사상적인 변화를 보여주고는 있지만 1, 4, 8에서 보듯 死句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것을 禪門 속에 두어서 선문 속에 地位와 次第를 형성하는 점수사상을 고수하고 있다.
마. 확철하지 못한 전환과 普照의 안목비판」
이상과 같은 검토내용은 看話決疑論의 도처에서 입증되지만 본고에서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그 다양한 항목들을 비교적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고 보아지는 이 부분만을 살펴봄으로써 번쇄한 고찰을 대신했다.
이상의 검토내용을 대개 종합해 볼 때 普照는 적어도 겉으로 드러난 그 교리 체계만으로 보면 禪門 內에 ‘活句의 길과 死句의 길’, ‘證悟의 길과 解悟의 길’, ‘원래적 禪門체계와 華嚴灌法과 결부시킨 敎的 변형태의 禪門’을 공존시켰음을 볼 수 있고, 이와 같은 특징은 비평자의 시각에 따라서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비쳐져 왔다.
긍정적인 평가를 하는 부류들은 대개 최상의 선문공부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게도 퇴전하지 않도록 하는 信의 解를 주었으며 중생에게도 선문에 들어갈 수 있는 친절함과 방편을 열어 주었다고 한다.
반면 부정적으로는 대개 최상의 궁극적인 관점에서 받는 비판으로서 결코 禪이라고 할 수 없는 체계를 禪이라고 이름붙여 놓고는 진정한 생사해탈을 추구하는 구도자들에게 그런 길을 따라가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知解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어 참으로 생사해탈하는 證悟로는 영영 갈 수 없도록 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禪門 가운데 들어와 이싿고 안심하게 하는 착각을 주며, 생사를 못벗어난 解悟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해오인 줄도 모르게 할 뿐 아니라, 그래도 예전과는 달리 悟門(실은 解悟지만 頓悟라고 착각하는)에 들어갔다는 나름대로의 見處 속에서 애매하게 허송세월하게 하며, 스스로도 속고 남도 그르치는 허물이 正法을 비방한 죄에 해당되어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은 양쪽의 비평은 決疑論 중 적어도 겉으로 표현된 내용만을 가지고 보면 모두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근거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원래적인 純粹禪門의 입장을 주장하는 부류로부터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그토록 혹독한 비평을 받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禪文 가운데 圓頓門을 틈입시킨 보조의 입장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을까. 이것도 역시 보조를 옹호해 줄 수 있는 시각과 비판하는 시각으로 갈라질 수 있다.
전자의 입장은 역시 보조 스스로는 궁극적인 證悟의 안목을 갖추어 완전히 생사해탈의 경지에 들어갔지만 단지 중생을 위해서 死句門 내지 解悟門도 禪門 속에 두었다는 시각이다. 이에 반하여 후자의 입장은 그러한 死句門 解悟門을 生死解脫門인 禪門 가운데 두었던 것은 普照의 안목자체에 으심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허물이라는 시각이다.
이와 같은 普照의 안목자체를 비판하는 입장은 다양한 시각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가령 보조는
十信의 地位에서 보고 듣는 것이 다하여 마음이 解와 行을 성취하고 十信이 다 채워져 十住의 初位가 되면 ‘증득해 들어간다[證入]’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華嚴論에서 말하기를, 먼저 聞과 解로써 믿어 들어가고[信入] 뒤에 無思로써 계합하여 동일하게 된다고 한다. 이미 無思로써 證入한다면 이것 또한 말을 떠나고 생각이 끊어진 것이다.
十信地 見聞終 心成解」行 信滿住初 名爲證入故 華嚴論云 先以聞解 信入 後以無思 契同 旣以無思 證入 亦是離言絶慮也
라고 하여 看話決疑論에서도 頓悟漸修의 사상을 보이는데 적어도 겉보기 표현만으로 보면 그 住初의 證入 이후에 닦는 漸修行이 悟에 의한 無思行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소위 이 頓悟漸修의 頓悟는 解悟로서 眞無心이 아니라고 하며, 이 假無心을 眞無心으로 착각하는 것은 그의 안목을 의심케 하는 것이라 하여 그 비판이 집중되고 있다.
이것은 위에서도 말했듯이 頓悟漸修는 원래적 禪門이 아니라 圓頓門으로서 死句에 의한 知解門이라고 보조 스스로도 인정한 점을 감안하면 普照 스스로는 正眼이었지만 단지 중생을 위해 方便門으로서 이것을 시설했다고 옹호해 줄 수도 있는 측면이 있다. 그래서 이것은 보조 스스로의 안목을 의심하게 할 결정적 증거로는 볼 수 없다고 변명해 볼 여지는 있다.
그러나 아무리 중생을 위한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正眼이라면 과연 知解死句門을 생사해탈의 방편으로 시설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남기며, 아울러 그것이 과연 중생을 위하는 길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일시적인 安心을 주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보조의 안목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어 주는 또 다른 지적은 그것이 보살행이라는 변명의 여지도 주지 않는 국면에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의 대표적인 내용은 臨濟의 三玄을 修行次第로 배대한 문제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지적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三玄의 문제만을 간갹히 검토해 보기로 하겠다.
3. 三句, 三玄, 三要를 수행단계로 배정하여해석하는 문제
임제록에 “一句의 말을 모름지기 三玄門을 갖추어야 하고 一玄門은 모름지기 三要를 갖추어야 한다[一句語 須具三玄門 一玄門 須具三要]”라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때로는 이 ‘三玄’을 ‘體中玄’과 ‘句中玄’ 및 ‘玄中玄’이라는 세 가지의 수행단계를 보인 것이라고 나누어 ‘해석’하기도 한다. 가령 普照스님은 원돈성불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禪에 三玄門이 있으니 一은 ‘體中玄’이요 二는 ‘句中玄’이요 三은 ‘玄中玄’이라. 처음 體中玄의 門은 ‘끝없는 세계경계는 自他가 터럭끝 만큼도 떨어질 수 없는 것이며 十世의 古今은 처음이나 나중이나 지금의 이 생각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등의 事事無碍法門을 이끌어서 첫 根機의 깨달아 들어오는 門을 삼는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이 言敎 가운데서 知解의 분상을 잊지 못하는 까닭으로 句中玄의 ‘흔적없이 평등하고 항상한 쇄락한 言句’로써 하여금 그 집착을 때뜨려 ‘佛法知解’를 몰록 잊게 하는데 이것에도 또한 ‘쇄락한 知見’과 ‘쇄락한 言句’가 남아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玄中玄에서는 ‘良久’하여 묵연히 있거나 ‘棒’, ‘喝’의 작용으로써 단련하나니 이러한 때를 당하여서는 앞의 둘째 번 玄門의 ‘쇄락한 知見’과 ‘쇄락한 言句’를 몰록 잊는다. 그래서 이르기를 ‘뜻을 얻고 말을 잊으면 道와 쉽게 찬한다’라고 하니 이를 일러 ‘法界를 몰록 증득한 자리’라 하는 것이다.
禪有三玄門 一體中玄 二句中玄 三玄中玄 初體中玄門 引無邊刹境 自他不隔於毫端 十世古今始終 不離於當念等 事事無碍法門 以爲初機悟入之門 此亦是言敎中 解分未忘故 以句中玄 無跡平常酒落言句 令其破執 頓忘佛法知解也 此亦有酒落知見酒落言句故 以玄中玄 良久黙然 棒喝作用鍛鍊 當此之時 頓忘前來第二玄門酒落知見酒落言句 故云得意忘言道易親 是謂頓證法界處也
원래 三玄은 임제선사의 발명이지만 이것을 체중현 구중현 현중현으로 표현한 사람은 운문중 계통의 法昌 倚遇(1005~1081)이다. 그런데 曹溪宗의 前宗正이셨던 西翁스님은 臨濟綠을 演義하여 간행하면서 ‘三句’, ‘三玄’, ‘三要’ 따위에 ‘의미’를 붙이고 ‘해석’을 가하여 따져들면(穿鑿하면) 이것은 臨濟宗旨와는 멀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現 宗正이신 性徹스님도 ‘三玄門’뿐 아니라 임제의 ‘三句’, ‘三玄’, ‘三要’를 悟入의 次第로 ‘해석’하거나 法門의 深淺으로 配定하면 妄中大妄이며, 이것은 오직 ‘佛祖命脈인 全機大用을 보인 것’일 뿐이라 했다. 선문정로에서는 圓悟禪師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三玄三要……등을 多少의 學家가 思量分別을 가지고 註解하나니 我王庫中에는 이러한 칼이 본래 없다 함을 전혀 모르는지라.(만일 사량분별로) 희롱하며 看觀하는 者는 어찌 다만 이 애꾸준이 아니겠는가. 모름지기 저 무리에서 뛰어난 上流는 계합하여 증득하고 시험하여 인정할새 바르게 단속하고 두루 대치하여 本分의 草料만 쓰거나 어찌(지위와 차제라고 하는) 사다리의 매개함을 빌리리오.
三玄三要……多少學家 搏量註解 殊不知我王庫內 無如是刀 及弄將來 看底只是貶眼 須他上流 契證驗認 正按旁提 還本分草料 豈假梯媒(圓悟心要上)
이것은 선문의 대표적 正眼의 한 사람인 圓悟禪師도 三玄을 ‘해석’하면 그의 안목이 애꾸눈에 불과한 것임을 밝힌 내용이다. 그래서 성철스님은 “一句中에 具三玄하고 一玄中에 具三要한 이 全機大用을 혹은 悟入次第로, 혹은 法門深淺으로 錯認하는 바 있으니 可悲可痛이다”라고 하여 普照스님의 입장을 통렬히 비판한다.
4. 頓漸의 문제
가. 佛法체계 속의 기본적인 頓漸의 관계
불법의 체계 내에서는 어떠한 요소일지라도 그것과 모순인 요소가 반드시 존립해 있는 것인데, 묘한 것은 모순되는 그 요소가 모순인 동시에 바로 그대로로서 그 모순이 해소되고도 있는 원융성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처럼 불법내에서는 그야말로 萬法은 一心으로 歸一하며 事事는 空性으로 원융무애하게 和諍되어 걸림 없고 모순 없이 되어 버린다. 가령 無量遠劫이 곧 一念이고, 一念은 곧 無量劫(義湘 法性偈)이라는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一心 가운데서는 길고 짧은 시간의 대립마저도 해소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頓이 漸을 배제하거나 漸이 頓을 배제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空性인 그 자리에는 본래 시간이 없으므로 혜능의 법보단경에 나오듯이 法에는 漸頓이 없는 것이며 動은 그대로 靜인 것[動中靜]이므로 ‘시간적 간격이 있는 漸’은 그대로 ‘頓’이기도 한 것인데, 이 때문에 때로는 ‘漸修를 頓우로 행하라’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나. 頓悟頓修와 頓悟漸修에서의 頓漸과 習氣의 문제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긴 시간도 그 본체에서는 본래 시간이 없는 것이라는 입장에서의 頓漸不二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悟가 이루어진 경우에 참으로 번뇌가 悟 그 순간에 모두 끊어졌느냐[頓悟頓修] 아니면 시간을 끌면서 점점 없어지느냐[頓悟漸修]라는 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긴 시간도 그 본체에서는 본래 시간이 없는 것이라는 그러한 頓漸不二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가 시간을 끌면서 漸漸 없어진다는 후자의 頓悟漸修조차도 그것은 頓의 입장인 것이다.
그래서 普照思想의 頓悟漸修와 여기에 대립적인 입장으로 제기되는 그러한 頓悟頓修의 문제는 긴 시간은 긴 사긴으로서 인정하는 경우에서조차 ‘그 중의 어떤 한 시점부터는 번뇌가 끊어져 버리는 경우가 頓修’이며 ‘그 시점 이후로도 계속 번뇌가 남아서 점점 없어지는 경우가 漸修’이다. 이러한 분류에 있어서 普照스님은 대개 頓悟漸修를 悟를 이루는 탁월한 한 방법으로 인정하는데 반하여 性徹스님은 頓悟漸修를 진정한 悟의 길로 인정하지 않으며 오직 頓悟頓修만을 인정한다.
나투는 것마다 ‘般若의 연꽃’이 되어 나툰다면, 즉 드러나는 일체가 그 어떤 것이라도 般若空으로 나툰다면, 그리하여 아무리 사소한 것 하나라도 인식당체를 꽉 채우는 전체자로서 나툰다면, 그렇다면 般若空 이외에 그 어떠한 것이 또 따로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드러나는 것마다 이미 般若이므로 닦아야 할 그 어떤 여분의 무엇이 드러날 수조차 없는 것이며, 따라서 닦을 그 무엇도 남아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여분이 숨어있을 만한 자리가 도대체 어디에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참으로 頓悟라 한다면 ‘頓悟는 그대로 頓修’인 것이다. 그의 인식 가운데 般若空이 아닌 상태로서 드러나는 그 무엇이 한 티끌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달리 닦아야 할 그 무엇일 수도 있으며 般若空으로 돌려주어야 할 그 무엇일 수가 있다. 그러나 티끌 하나가 드러나도 이 ‘티끌![鼓!]’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전체자로서의 般若空’으로 확인되면서 드러나므로 참으로 頓悟면 더 닦을 어떠한 티끌도 남을 수는 없는 頓修인 것이다.
설령 그 나툼이 習氣에 의한 나툼이건 무엇이건 간에 이미 나투면 나툰 그것은 般若인 것이다. 곧 習氣조차 般若로 나투는 것이며, 習氣에 의한 行이 일어나도 그 行은 般若로서의 行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般若로서만 나투는 것이 성립되면 習氣라는 것은 하등의 문제가 될 것이 없다. 따라서 새로운 習氣를 더 쌓건 말건 지우건 말건 그것은 본질적으로 하등의 문제가 될 것은 없는 것이다.
보조는 수심결에서 돈오 이후에도 점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서
비롯함이 없는 習氣를 단박 없애기 어려우므로 깨달음을 의지하여 수행하여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라고 한다. 즉 돈오 이후에도 習氣가 문제로 된다고 보면 그 때문에 점수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수심결에서는 여러 차례 이 습기제거의 문제를 거론하는데 가령
자성이 본래 공적하여 부처와 더불어 다름이 없음을 돈오했으나 이 오래된 習氣를 갑자기 끊기가 어려우므로 逆順의 경계를 만나면 성내고 기뻐하는 시비가 치연히 일어나고 멸하여 객진번뇌가 그 전과 더불어 다름이 없으니,
頓悟自性 本來空寂 與佛無殊 而此舊習 卒難除斷故 逢逆順境 嗔喜是非 熾然起滅 客塵煩惱 與前無異
라고 하여 돈오 이후에 점수가 오래오래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圭峰의 先悟後修사상을 인용하여
만약 능히 생각생각에 修習하면 자연히 百千三昧를 점점 얻으리니 달마 문하에서 서로 전하여 내려온 것이 바로 이 禪이다.
若能念念修習 自然漸得百千三昧 達磨門下 轉展相傳者 是此禪也
라고 했다. 그러나 達磨 血脈論에서는
본래의 몸과 마음을 깨닫기만 하면 곧 ‘習性’에 물들지 않으리라.
若悟得本來身心 卽不染習
다만 본래성품만 보면 나머지 ‘習氣’가 한순간에 다하고
但見本性 餘習頓滅
다만 見性하면 음욕이 본래 空寂해서 끊어 제할 필요가 없으며 또 집착하지도 않으리니 설령 남은 ‘習氣’가 있더라도 해치지 못하리라.
但得見性 婬欲本來空寂 不假斷除 亦不樂着 縱有餘習 不能爲害
라고 했다. 이 血脈論은 學界의 일부에서 비록 달마의 親作인가 아닌가가 논란되고는 있지만 적어도 習氣의 문제에 대하여 보조의 사상과는 정면으로 배치됨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혈맥론이 설령 달마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작품이라 해도 깨달으면 습기는 문제되지 않는 것을 달마의 사상으로 보았다. 이것은 규봉이나 보조처럼 돈오 이후에도 습기가 남아 있다하여 그것을 닦는 돈오점수를 달마 문하에서 전해 온 선이라고 주장한 것과는 상반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선문정로에서는
煩惱가 滅盡하여도 그 餘習과 殘氣를 習氣라 하며, 이 習氣消磨를 悟後保任이라고 云謂하는 바 있다. 그러나 前述함과 같이 悟後保任은 圓證 以後의 無爲無事하며 無心無念한 常寂常照의 大解脫深境이므로 絶學無爲閑道人의 任運自在한 이 無心大定에는 習氣는 紅爐點雪이다. 그러므로 오직 自性을 圓證하여 保任無心할 뿐 習氣는 문제삼을 필요가 없다. 馬祖는 著衣喫飯하여 長養聖胎하여 任運過時하니 更有何事오 하였으며, 誌公도 不起纖毫修學心하고 無相光中에 常自在라고 하였다.
라고 했고 또한 賢首의 起信義記 下本으로부터
菩薩地가 皆盡한 十地終心인 金剛喩定과 無垢地中에서 微細한 ‘習氣’ 心念인 業相이 전부 滅盡한 故로 得見心性이라고 하니라.
十地終心 金剛喩定 無垢地中 微細習氣心念 都盡故 云得見心性
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위 血脈論의 논지와 잘 일치한다. 아울러 선문정로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선종의 대표적인 정안종사들의 말도 언급하고 있다.
無心地에 到達하면 一切의 妄念과 ‘情習’이 俱盡하고 知見과 解碍가 都消하나니, 다시 무슨 일이 있으리오. 그러므로 南泉이 말하기를, 平常心이 道라 하니라.
到無心地 一切妄念情習俱盡 知見解碍都消 更有甚事 故 南泉云 平常心是道, 圓悟心要
正悟한 者는 장구한 암흑에서 광명을 만나며 大夢을 홀연히 覺惺함과 같아서, 一을 了達하매 一切를 了達하여 纖毫도 憎愛와 取捨하는 ‘情習’이 胸中에 체류하지 않느니라
正悟者 如久暗遇明 大夢俄覺 一了一切了 更無織毫憎愛取捨之習 滯于胸中, 中峯錄 五之上 示王居士
만약에 조금이라도 ‘情習’이 다하지 못함이 있으면 곧 心性을 悟達함이 圓滿치 못한 緣由이다. 혹 心性을 圓滿히 悟達치 못하면 모름지기 그 圓滿치 못한 當處를 소탕할지니, 특별히 생애를 세워서 廓徹大悟하여야 한다. 혹자는 心性을 悟達하되 未盡하였거든 履踐修行하여 未盡함을 窮盡한다 하니, 이는 薪草를 안고 火災를 消滅하려 함과 같아서 더욱 더 그 불꽃만 더 하게 한다.
若有織毫 情習未盡 卽是悟心不圓而然也 或悟心不圓 須是掃其未圓之跡 別立生涯以期大徹可也 或謂悟心未盡 以履踐盡之 如抱薪救火 益其熾矣, 中峯錄 十一之中
이상의 내용들은 習氣의 문제에 대한 보조의 견해가 선문의 정안들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보조는 돈오한 이후에도 점수를 거쳐야만 부처가 된다고 하지만 혈맥론에서는 “見性하면 곧 이 부처[見性卽是佛]”라고 하였다.
또한 보조는 수심결에서 頓悟漸修의 漸修를 가리켜
천하선지식의 悟後 牧牛行이 이것이다
天下善知識 悟後牧牛行 是也
라고 하여 習氣 내지는 漸修를 남긴 수행도중의 사람들도 善知識으로 인정하는데 반하여 혈맥론에서는
만약 견성하지 못했으면 선지식이라 할 수 없다
若不見性 卽不名善知識
이라 하여 見性하여 佛이 되지 않으면 선지식이라고 할 수 없음을 보인다. 이상의 내용들은 어쨌든 普照의 禪이 정통의 달마선에서는 일단 멀어져 있음을 보인 것이라 할 수 있다.
5. 知解의 개입에 의한 禪門異說
自明的인 것은 自明한 그 내용의 구체적인 양상으로 본래 성립되어져 있는 것이므로 유동적인 생각을 할 필요도 없고 또 허용하지도 않는다. 이에 반하여 자명적이지 못한 이른바 ‘見解’라는 것은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는 것이므로 당연히 그 중의 한 가지를 ‘생각함’에 의하여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명적인 진리를 표방하기 이전의 사상이 있다면 그것은 자연히 사념적인 분별에 의한 知解所産임을 부정할 수가 없으며 이 知解所産의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모두 知解宗徒임은 분명한 것이다.
진리에 관한 한 그것은 자명적이므로 유동적인 사념과 판단에 의하여 임의의 어떤 하나로 표출되는 그러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념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자명적으로 성립되는 것이기에 사념의 개입이 없이도 자연히 표출된다. 참으로 구경묘각을 성취한 眞人이라면 진리에 관한 언급을 할 때는 이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진인에게도 사념이 민절하여 없어졌다고는 볼 수 없으며 자명적인 진리 내용 이외의 우연적인 세상의 상황들에 대해서는 유동적인 판단이나 의지적인 결정을 해야 할 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단 자명적인 진리를 증득한 분상이라면 설령 그러한 유동적인 사념을 하는 경우이더라도 그것은 이미 ‘無念의 念’이므로 무념의 분상을 떠난 것은 아니다. 이에 반해 자명적인 진리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아직 유동적인 사념의 영역으로 판단하는 양상을 보이는 사람이라면 그는 여전히 차별적인 사념분별의 경계에 있는 것인지 진정으로 ‘無念의 念’을 한다고는 볼 수 없다.
선문의 정설은 이러한 자명적인 진리들로 구성되어 있기는 아무리 시대가 바뀌거나 많은 종사가 나오더라도 누구나 한결같은 이 자염적인 진리를 말하므로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간혹 차별적인 사념이 개입되면 이 知解思念의 소산으로서 異說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문의 이설로서는 다양한 것들을 지적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는 禪門正路에서 한국불교의 정로를 밝히기 위해 보조사상 비판에 큰 초점을 두는 데 입각하여 돈오점수 선교일치로 근간을 이루는 보조의 원돈사상을 중심으로 간략히 압축시켜서 살펴 보았다.
Ⅳ. 맺는말
이상으로 보조의 원돈사상과 그에 대한 비판적인 견해들을 주로 성철선사의 입장에 입각하여 다루어 보았다. 여기서 다시한번 언급된 논지들을 정리해 보다면 우선 Ⅱ章에서는 普照의 思想的인 變遷을 그의 碑文 내용에 따라 일단 ‘惺寂等持門’, ‘圓頓信解門’. ‘徑截門’의 三門체계로 개괄했다. 다시 그 三門解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새로운 분류법을 그가 자신의 생애에서 경험한 일련의 수행체험에 바탕하여 41세를 기준으로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두었ㄷ.
다시 Ⅲ章에서는 그러한 普照의 사상구조 가운데서 圓頓思想을 둘러싼 思想的인 쟁점들을 다루었다. 여기서는 우선 보조사상 그 자체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또한 보조사상을 비판한 성철선사의 그 논지가 실질적으로 어디로 향하고 있느지를 알기 위해서도 이 연구가 매우 중요함을 보였다. 이러한 기본적인 인식하에서 普照의 圓頓에 얽힌 여러 가지 문제들을 ‘그의 수행체험에서 평가해 본 여러 저술들의 연대별 구조와 성격’ 및 ‘이에 따라 드러나는 定慧結社文과 원돈사상의 특별한 관계’ 아래서 검토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定慧結社文에 나타난 원돈사상의 한계를 廻光返照와 隨相門定慧의 문제점을 통하여 살폈다.
나아가 보조 원돈사상의 최종적인 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간화결의론에 입각하여 그의 말년사상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自明的인 禪門의 眞理로 회귀를 시도하는 普照의 사상적인 전환을 읽을 수 있는데 다만 부분적으로 그 전환이 확실하지 못하다는 것도 발견하게 된다.
아울러 보조 원돈문의 실질적인 수행양식은 禪敎一致에 있음을 보였다. 여기서는 이 선교일치란 것이 ‘禪과 敎라는 것이 일단 따로 있는데 그 <禪理論>과 <敎理論>이 일치한다’는 이론일치 문제가 아님을 보였다. 선교일치란 ‘言句의 觀行을 통한 敎的 행위로서의 禪’임을 밝혀 보였다. 禪과 敎라는 것이 일단은 따로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 經論을 읽는 敎, 이대로가 禪 그 자체라는 것이 禪敎一致임을 보였다. 그래서 수행 도중에 經論의 독서를 禁忌視하는 禪宗이 敎宗과 대립하는 것을 이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이런 觀行은 보조가 28세 때의 수행체험을 통하여 선교일치의 세계로 들어올 수 있었던 것처럼 返照觀行의 힘이 생긴 이후에 가능한 것이므로 일반 文字法師의 敎學行爲도 그대로 禪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선교일치에 대한 이런 해명은 현 학계의 일반적인 이해양상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本考에서는 규봉이나 보조의 선교일치를 이렇게 보아야만 그들의 사상을 온당하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논지를 전개했다.
나아가 이렇게 보아야만 성철스님이 원돈과 선교일치를 비판할 때의 그 구체적인 대상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즉 성철스님은 그러한 敎的 觀行으로는 知解 때문에 究竟妙覺을 이룰 수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정통 禪宗의 禪은 見性成佛한 究竟妙覺만이므로 禪敎가 一致못한다는 것에는 크게 비판을 가한다. 이러한 귀결은 보조 스스로도 말년에는 선교일치의 원조인 圭峰을 知解宗師라고 평함으로써 같은 입장을 보였다. 그렇지만 보조는 이러한 圓頓言句의 依敎觀行이 일반 교학연구자의 그 敎와는 비교할 바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이 말은 성철스님이 원돈과 선교일치를 비판할 바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이 말은 성철스님이 원돈과 선교일치를 비판할 때의 그 대상이 단순한 교학연구자들에게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等覺 이하에 위치한 圭峰 같은 이른바 나름대로의 선지식들이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만일 선교일치가 이론일치의 문제라면 선교일치를 비판한 성철스님의 그 비판대상도 일반교학자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그 대상은 禪問答이나 法談에 자재한 소위 상당한 경지의 수행인이 되는 것이고 실제로 이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보조는 말년에 비록 사상의 변화를 보였지만 그 전환은 확철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에 따른 긍정론과 부정론 및 普照의 안목 그 자체에 대한 비판문제를 거론했다. 특히 임제의 三句, 三玄, 三要를 수행단계로 배정하여 해석하는 행위 그 자체에 대한 문제들을 다루었다.
마지막으로 頓漸의 문제를 언급했는데 여기서는 우선 ‘佛法체계 속의 기본적인 頓漸의 관계’를 보이고 나아가 ‘頓悟頓修와 頓悟漸修에서의 頓漸의 차이’와 ‘漸修行의 필요성과 직결된 習氣의 문제’ 등을 정안종사들의 시각에 맞추어서 살펴보았다. 그래서 보조의 사상은 自明的이고 明證的인 禪門의 사상과는 차이가 있음을 보였고 이것은 결국 知解의 개입에 의한 禪門異說로 평가됨을 보였다.
本考가 妙覺으로서의 究竟眞理를 直指하는 정통선종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한 이론적 기초근거로서 수용되어질 수 있다면 특히 普照思想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한국불교의 사상적 흐름을 보다 온당하게 확립하는 데 일조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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