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봄호를 펴내면서
그리움의
크기
조영심
그리움에는 닿지도 못할 한 뼘 엽서를
본다
휠체어에 앉은 그녀가
간절한 전언인 양
최초의 선언인 양
붙잡고 있는
방금 보았지만 돌아서면 다시,
울컥
보고 싶어지는 온몸이 서늘해지는 그림
몸과 정신의 이별을 견딤으로 버티는 벼랑 끝에서도
한 줄 소식에 달게,
매달리는 날들
단단한 그리움 아쉬움 모두를 이 작은 종이그릇에
어떻게 다 담을 수 있을까
바다 건너온 바람이 옆에서 소리 높여 활자를
읽어주자
다섯 줄 골똘한 단문
한 뼘씩 목마른 곡절로 행간을 넓혀가며
다섯 장 장문으로 커가는
중인지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알고 있을
그녀만의 방언,
내 속까지 파고드는 둥그런 파동
자꾸 터져만 간다
그리움의 기원에는 외로움이
있고,
외로움의 기원에는 소외감이
있다.
소외감이란 어떤 집단이나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버림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외롭고 처절한 슬픔을 동반한다.
예로부터 사형 다음에 가장
무서운 형벌이 강제추방(유배)이었던 것이며,
강제추방된 사람은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
즉,
공동체 사회가 제공하는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는 사람을 말한다.
떠돌이-나그네,
이방인,
거지,
죄인,
요양병원,
노인병원 등의 사람들은
소외를 당한 사람들이며,
유배 아닌 유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유배지에서는 사람과
사람이 그립고,
이 그리움의 감정에서
로빈슨 크루소나 오딧세우스와도 같은 전형적인 인물들이 탄생하게 된다.
너무나도 그립고 그리운
조국이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들의
품에 안기는 것,
너무나도 따뜻하고 다정한
이웃들과 친구들과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이 세상의 행복을 향유해보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나 오늘날의 그리움이나
소외의 감정은 장소와 장소,
또는 거리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과
사상과 이념,
저출산과 고령화의 문제라고
할 수가 있다.
‘저비용--고효율’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군집형태는 닭장과도 같은
주거형태를 제공했고,
인간보다는 돈을 숭배하는
물신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파괴했으며,
‘저출산--고령화의 문제’는 전통적인 가족과 그 위계질서를
파괴해버렸다.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있으면서도 대화의 벽은 차단되어 있고,
실시간대로 자본과 인구
이동이 가능해졌으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주거의 장소와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렸다.
인공지능과 로봇과 드론과
사물인터넷 등이 어렵고 힘든 일을 대신해줘도 일의 성취감을 찾을 수가 없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와 정담을 나누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신뢰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오늘날의 소외는 군집구조
속의 소외이고,
사상과 이념의
소외이며,
저출산--고령화와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에 따른 소외라고 할
수가 있다.
당신도,
당신도,
당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었고,
나도,
나도,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있고,
우리는 모두가
‘남남,
또는
타인’으로만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 영원한
타인이고,
이 영원한 타인은
타인이면서도,
또한,
당신의 영원한
‘나’라고 할 수가 있다.
인간 속의 소외와 군중
속의 소외가 외로움을 낳고,
이 외로움은 또 하나의
영원한 타인에 불과한 자기 자신의 핏줄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조영심 시인의 [그리움의 크기]는 외로움의 크기가 되고,
이 외로움의 크기는
소외감의 크기가 된다.
그리움과 외로움과 소외감의
삼각관계 속에서 인간 소외의 ‘막장 드라마’가 펼쳐지며,
영원한 타인에 불과한
할머니와 그녀의 딸인 듯한 시적 화자의 “다섯 줄 골똘한 단문”이 “다섯 장 장문으로”
변주되는
[그리움의 크기]가 그 위용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움에는 닿지도 못할
한 뼘 엽서”,
즉,
대단히 안타깝고 아쉬운
그리움은 “다섯 줄 골똘한 단문/
한 뼘씩 목마른 곡절로
행간을 넓혀가며/
다섯 장 장문으로 커가는
중인지”라는 시구를 낳고,
그
결과,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알고 있을/
그녀만의
방언”이 탄생하게 된다.
하늘이나 알고 땅이나 알고
있을 그녀만의 방언은 그리움의 내용이 되고,
이 그리움의 내용은 이
세상의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게 된다.
언어에 구체적인 감정을
부여하고,
그 언어가 살아서 말과
노래가 되고,
[그리움의
크기]는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게
된다.
한 뼘의 엽서는 우주적인 크기의 그리움이
되고,
이 그리움은 새롭고 멋진
말인 그녀만의 방언으로 “내 속까지”,
아니,
우리들의 가슴 속까지
파고드는 “둥그런 파동”으로 수많은 산울림의 효과까지도 얻게
된다.
조영심 시인의
[그리움의 크기]는 현실주의의 극치인데,
왜냐하면
“휠체어에 앉은 그녀가/
간절한 전언인
양/
최초의 선언인
양/
붙잡고
있는”
“한 뼘
엽서를”
너무나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조영심의
[그리움의 크기]는 심리주의의 극치인데,
왜냐하면
“한 뼘 엽서를”
통해서
“몸과 정신의 이별을 견딤으로 버티는 벼랑 끝에서도
한 줄 소식에 달게,
매달리는”
할머니(어머니)의 심리를 “방금 보았지만 돌아서면 다시,
울컥/
보고 싶어지는 온몸이
서늘해지는”
그리움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양병원의
할머니,
즉,
그리움의 주체자가 처한
위치,
장소,
환경,
입장에서 그의 현실주의와
심리주의가 솟아나오고,
그러나 그 할머니의
그리움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그림 엽서와 “다섯 줄 골똘한 단문”이 “다섯 장 장문으로 커가는”
반전에 의해서 조영심
시인의 [그리움의 크기]는 철학적 내용을 부여받으며,
우주적인 크기로
확대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만 하고,
‘몸과 정신의 이별을
견딤으로 버티는’
요양병원의 그리움의 말과
소리와 그 크기도 새로운 말과 소리와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움이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으며,
하늘이나 땅이나 알고 있을
그녀만의 방언으로 그리움은 그리움의 몸집을 부풀린다.
육체는 쇠약하고
줄어들지만,
그리움은 더욱더
커가고,
그리움은 더욱더 건강한
몸통을 얻는다.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영원히 남남이며 혼자인
유령들’이 그리움을 살며,
그리움 속에
울부짖으며,
그리움의 산맥들과 우주들을
창출해낸다.
노인병원,
즉,
요양병원은 이 세상의
삶으로부터 격리된 곳이고,
삶보다는 죽음이 더
가까워,
이 세상이
아닌,
저 세상으로 가기 위한
대기장소와도 같은 곳이다.
이 세상의 삶은 더욱더
그립고,
저 세상은 다만 두렵고
무섭다.
이 두려움과 무서움
속에서의 그리움이란 그 얼마나 그립고 피 눈물나는 삶의 욕망이 배어있는 것이란 말인가?
그리움의 크기는 삶의
크기이고,
사랑의
크기이며,
그토록 처절한 외로움과
자기 소외감의 크기이다.
“단단한 그리움 아쉬움 모두를 이 작은
종이그릇에”
담을 수도 없는
것처럼,
그리움이 크면 클수록
그리움의 대상과는 더욱더 만날 수가 없다.
그리움은 이별의
무대이고,
죽음의
무대이며,
나 아닌
타인,
아니 영원한 타인들인
‘우리’가 저마다 외롭고 쓸쓸하게 퇴장해야할
‘막장 드라마의 무대’이다.
이 세상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여,
과연 당신들에게 아들과
딸이 있고,
사랑하는 손자와 손녀들이
있었느냐?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노인병원,
혹은
요양병원에서,
어느 누구도
모르게,
어느 누구와도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수많은 유령들이 죽어가고 있을 뿐 것이다.
‘기획특집:
논쟁문화의
장’은 일흔 아홉 번째로 ‘반경환 명시감상’을 내보낸다.
시는 인간의 삶을 위로하고
인간의 삶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의
행복한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한 비판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인은 모든 가치들을
전복시키는 혁명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새로운 언어와 사상으로서
아름답고 멋진 신세계를 창출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호의 ‘애지의 초대석’에는 오현정 시인과 이영식 시인을
초대했다.
오현정 시인의
[혼자면 어때]
외 4편과 이승하의 작품론 [인공과 문명보다 중요한
자연과문화],
이영식 시인의
[꽃의 정치]와 황치복의 작품론 [숭고의 아름다움,
혹은 성스러움을
찾아서]를 다 함께 읽고 감상해주기를
바란다.
‘애지의
초점:
이 시인을
주목한다’에서는 최혜옥 시인과 수피아
시인,
그리고 민구 시인의
신작시들을 내보낸다.
최혜옥 시인의
[블랙 스완]
외 4편과 권혁재의 작품론 [대속의 사랑을 위한 몸살들]과 수피아 시인의 [거북이]
외 4편과 전해수의 작품론 [친밀한 혹은 불친절한 ‘J’와 ‘나’의 돌올한 세계],
그리고 민구 시인의
[정물]
외 4편과 전영규의 작품론 [텅 빈 정물의 세계]를 다 함께 읽고 감상해주기를
바란다.
본지는 이번 호에도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쥐똥나무들이]
외 4편을 응모해온 신혜진 씨와 [말의 활주로]
외 4편을 응모해온 최병근 씨를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자로
내보낸다.
나태주 시인의
{꽃을 보듯 너를 본다}가 어느 덧 44만권을 찍게 되었고,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다.
‘애지’는 ‘지혜사랑’이며,
‘지혜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해왔다고
자부한다.
2019년 12월 7일 오후 3시,
유성문화원에서
‘애지창간 20주년을 맞이하여 제17회 애지문학상과 제6회 애지문학작품상과 애지신인문학상 시상식이
있었다.
제17회 애지문학상 공동수상자인 송찬호 시인과 이영식
시인,
제6회 애지문학작품상 수상자인 이돈형
시인,
그리고 애지신인문학상
수상자들과 함께 수많은 하객들이 참석해주셔서 그 자리를 빛내주고 축하를 해주셨다.
지혜사랑과 지혜클래식
시리즈가 수많은 시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수많은 시집들이
출간 대기 중에 있다.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시는 온몸으로,
온몸으로 쓰는
것이다.
이 온몸의 사랑이
‘애지문화’를 창출해내고,
우리 한국어의 영광과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으로 이어지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본지는 우수문예지의 신청과 정산과정의 수많은
규제와 후진적인 제도가 개선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우수문예지 신청을 하지 않을 것이다.
적은 규제와 적은 법률과
엄격한 처벌은 선진국의 제도이고,
수많은 규제와 수많은
법률과 느슨한 처벌은 후진국의 제도이다.
국가가 우수문예지
편집자들을 범죄인으로 취급하고,
국민은 국가를 범죄인
국가로 생각한다.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프기만
하다.
비판만이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
비판은 당신의 존재증명이다.
당신은,
누구를,
무엇을 비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