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것들을 위하여
- 정해영의 시세계
황정산(시인, 문학평론가)
경쾌함과 가벼움의 시대라고 한다. 깊이 있는 생각보다는 가벼운 오락거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두껍고 어려운 책은 이제 장식으로라도 팔리지 않고 무겁고 진지한 대화를 꺼내면 분위기 파악 못하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된다. 가벼움은 곧 자유로움이고 세련됨이다.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고 어떤 것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가벼운 정신이 이성의 구속과 윤리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준다는 담론이 넘쳐나고 있다. 가벼움은 솔직한 욕망과 그것이 주는 자유의 표상이고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유로움이 가벼움이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가벼움이 자유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자유로운 욕망을 가벼운 정신으로 무한히 충족하고자 할수록 우리는 욕망의 포로가 된다. 진지한 성찰이 없는 나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의 무한 복제일 뿐이고 나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타인들이 욕망하는 무수한 나가 대신한다. 결국 나는 거미줄보다 더 가벼운 그러나 헤어날 수 없는 속박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렇게 보았을 때 가벼움이 지배하는 세상은 곧 자신의 무게마저 잃게 하는 타자들의 세상이다.
정해영 시인의 시는 이 가벼움에 대한 저항이다. 저항이기보다는 가벼울 수 없는 자신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라는 것이 더 정확하다. 다음 시는 이를 아주 잘 보여준다.
넷째 기동이 열대여섯 살 됐을까 면장 집 손자를 때려 이빨이 세 개나 부러졌어 대쪽 같은 아버지 몸 구부려 빌고 허둥지둥 돈을 구해 새 이를 넣어줬어 그 후 그 집 앞을 죄인처럼 지나다녔지 그래도 우리 칠남매는 부모 애 먹인 적은 없었다 끓던 이야기 서늘히 식혀 우스개로 흘리시던 어머니 낯설은 사람이 되어 치매 병동에서 아들도 잊고 당신의 이름마저 잊으셨다 바라보시는 눈길 얼음 같다
해마다 돌아오는 사월이지만 이상고온과 폭설이 널뛰듯 오르고 내린다 먼저 핀 꽃들은 힘없이 떨어졌다
혹한과 꽃놀이가 한 몸에 있다
나비처럼 엷은 봄바람 타고 이 꽃술에서 저 꽃술로 꽃가루 부비며 꿈을 산란하던 먼 산 위의 봄이 돌덩이처럼 무겁다
- 「이상기온」 전문
이 시는 꽃이 피자 혹한이 다시 찾아온 이상 기온의 봄날을 소재로 삼고 있다. 봄날처럼 가볍고 환한 세상을 생각하지만 결코 이러한 봄날을 가벼울 수가 없다. 시인은 이를 “봄이 돌덩이처럼 무겁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무거움을 시인은 지금은 치매 병동에 계시는 시인의 어머니의 삶과 연결시킨다. 물론 시인이 지금 봄을 무겁게 느끼는 이유는 서늘한 눈길로 자식들을 바라보고 있는 치매 걸린 어머니 때문이다. 따뜻한 어머니의 우스개는 사라지고 낯선 사람처럼 자식들을 대하는 어머니는 시인의 삶에 큰 부담이고 슬픔일 게 틀림없다.
시인은 이를 통해 우리의 삶에는 가벼운 봄날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삶의 무게가 항상 깔려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그 무거움이 사실은 어머니의 삶도 다시 돌아보게 한다.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스개로 흘리”며 어려움을 견디며 살아왔지만 결국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치매로 삶의 마지막 부분을 붙들려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가볍고자 해도 가벼울 수 없는 삶은 봄날 혹한으로 뒤를 돌아보게 하는 이상기온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무게와 엄숙함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약속한 시간 가까워 오는데
두고 온 것이 있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
그냥 가기에는 기우뚱한 시간
안절부절 하는 사이
꽃은 이울고
벌써 잎사귀 퍼렇다
허수하게 놓쳐버린 것이
이것뿐이랴
빠져나간 헛 구멍들이
나를 바라보는
그림자 진한 봄날
- 「봄」 전문
시인은 봄날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런데 왜 안타까워할까? 봄날의 시간들이 덧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봄이라는 시간이 주는 기쁨과 기대가 크지만 그 시간은 너무도 짧고 허망한 순간의 연속이다. 시인은 그것을 “약속한 시간 가까워 오는데 / 두고 온 것이 있다”고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간에 대서 가야하는데 중요한 어떤 것이 나를 붙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지 나를 붙드는 이 중요한 것을 애써 잊고 살고 있다. 그것 때문에 이 찬란한 봄날을 즐길 수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것을 무시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한다. 자신의 삶의 뒤를 돌아보게하는 무거운 어떤 것을 포기할 수도 망각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봄날은 꽃의 색깔이나 향기가 진한 것이 아니라 “그림자 진한 봄날”이 된다. 세상이 온갖 화려한 가벼움으로 들떠 있는 봄날에 시인은 그 봄날의 뒷 그림자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진한 색깔로 말이다.
다음 시는 이런 삶의 무게를 좀 더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뒷받침도 없었다
아버지 시대
겨우 손에 잡히는
몽당연필 같은 도구로
있는 힘을 다해
꾹꾹 누르며 사셨다
뒷장에
자국이 남았다
쓰러질 듯 남은
몇 줄의 문자
평생 등줄 붙이는
돌기둥이다
- 「꾹꾹 눌러쓰다」 전문
과거 시인의 아버지 세대들은 품질 불량한 학용품으로, 그것마저 부족해서 몽당연필이 다 된 것으로 꾹꾹 눌러 공부를 해야했다. 그 공부를 통해 힘든 회사도 취직하고 농협에도 들어가고 시골 면장도 맡고 그렇게 해서 가난하고 힘든 세상을 겨우 버티며 살아나갈 수 있었다. 시인은 그렇게 공부하기 위해 쓴 글자에 “돌기둥”이라는 지극히 무거운 비유를 갖다 붙인다. 글자는 단지 기호일 뿐이다. 글자는 실재를 대신하지만 실재와 관련이 없는 임의적인 기호일 뿐이고 기호는 단지 또 다른 기호로 그리고 그 의미인 기의를 확정하지 못하고 기표로 끝없이 떠돌 뿐이다. 그래서 그것은 가벼움의 표징이고 우리의 삶은 이 모든 가벼운 기호들의 연쇄일 뿐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 가벼운 기호라는 글자가 결코 가벼울 수 없는 삶의 엄숙함을 담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꾹꾹 눌러쓴 글자의 그 확실함에는 절대로 기호라는 이름만으로 단정지을 수 없는 삶의 현실과 역사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 시는 바로 이 기호라는 것을 정면으로 다루며 우리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옛날 제주도 민가에는 정주석을 양쪽에 세워 놓고 정낭을 끼워
주인이 있는지 없는지
외출이 짧은지 긴지를 알렸다
베이징 국제 주방 설비 박람회에 한쪽 어깨와 한쪽 엉덩이를 완전히 노출한 언밸런스의 의상을 입고 등장한 간루루 아찔한 파격 노출로 관광객과 취재진이 몰려와 아수라장이 됐다
그 날 그녀는 시선집중의 인간 기호였다
그 아래 수려한 문체로 읽혀질 세계의 큰 손들이 행간을 따라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 「기호의 발달」 전문
기호는 사람들 사이의 약속이다. 그것은 믿음과 배려의 표시이기도 하다. 바로 제주도 민가에서 설치한 정주석과 정낭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때 쓰인 기호에는 인간미와 따뜻함이 배어 있다. 기호를 통해 서로의 신뢰를 확인하고 공동체의 윤리와 유대감을 지속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기호는 이와 다르다. 그 다른 점을 시인은 ‘간루루’라는 중국 여배우의 파격 노출에서 얘기하고자 한다. 그녀는 자발적으로 자신이 타인들의 욕망의 기호가 되고자 한다. 섹스의 심볼이 되고 욕망의 기표가 되어 또 다른 기표인 돈으로 미끄러지는 기호들의 행간을 따르고자 한다.
기호는 부재하는 것의 대리물이다. 부재는 결핍이고 결핍은 욕망을 부른다. 이렇게 욕망이 된 기호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면서 또한 모든 것이 된다. 욕망이 된 기호는 우리로 하여금 돈을 벌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출세하게 하고 물건을 사게 만든다. 그래야 우리가 또 하나의 기호가 되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욕망이 부여한 기호의 노예가 될 뿐이다. 바로 간루루의 노출 패션은 이런 욕망 기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해영 시인은 이 시에서 바로 이 두 기호를 병치한다. 그것을 통해 삶의 무거움과 거기에서 나오는 신뢰와 사랑을 담은 기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정해영 시인이 시를 쓰는 근본적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현대사회에서 말들은 경박한 욕망만 남겨놓은 채 기표로 분산되어 사라져버린다. 이런 말들의 허망함에 저항하며 진정한 기호의 무게를 찾고자 하는 지난한 노정이 정해영 시인의 시작 과정이 아니겠는가 짐작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