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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친밀함의 함정>의 줄거리: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심히 다투고 결별합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바나바의 행적에 대해서 성경은 침묵합니다. 그래서 더욱 이 다툼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성령충만이 별명처럼 따라 다니던 이 두 사도의 다툼과 결별! 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장 전형적인 신앙의 장애를 발견합니다. 바로 친밀함의 함정입니다.
친밀함의 함정
(행15:36~41)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친밀함의 함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좀 더 나아가서는 내가 친밀함을 느끼는 일에 대해서 관계하는 동안에 우리는 신앙의 함정에 빠질 수 있게 됩니다.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신앙적으로 생각하고, 신앙적으로 말하고, 신앙적으로 행동하기가 가장 어려운 관계가 어떤 관계입니까?
경험적으로는 부부관계에요, 부부관계.
이 부부관계에서 말 한 마디 할 때, 신앙적으로 생각한 것을 신앙적으로 말하고, 부부관계에서 신앙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또 이뿐만이 아니에요.
교회에서 보면, 목사님과 교인이 만나면 목사님은 모든 말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신앙적입니다, 그리고 교인도 마찬가지에요.
‘아!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복음을 알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복음을 알게 돼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는 목사님께 하는 그 말대로 집사님이 남편한테 가서 그대로만 하면 그 가정에서 큰 소리 날 일이 하나도 없을 거예요.
권사님들도 심방 가셔서 교인들 앉혀놓고 말씀하실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신앙이 없습니다, 완벽합니다.
근데 김 권사님이 제일 친한 이 권사님과 만나잖아요? 그 다음부터는 뒷담화가 시작됩니다.
‘아, 우리 목사님 말이야, 이런 건 좋은데 이런 건 참~’
거기에는 사랑도 오래 참음도 화평도 다 덮어주는 그런 관용도 안 보이는 거예요, 친할수록.
딴 교회에서 온 권사님과 처음 대면하면 ‘아유, 참 인상이 좋습니다,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하셨군요!’ 덕담만 얘기합니다.
친할수록 이게 어려운 거예요.
이상하죠? 왜 그럴까요?
오늘 본문에 너무나도 우리 입장에서 이해가 잘 가고, 동시에 너무나도 이해가 안 가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바울의 2차 전도여행이 결정되는 단계를 보여주고 있어요, 본문에서.
근데 이게 웬일입니까?
39절에 바나바와 심히 다투어 갈라섰다, 아 이거 도대체 뭔 말인지 모르겠어요.
2차 전도여행을 결정해서 바울이 바나바에게 제안합니다, 1차 전도여행 때에 세운 교회들을 재차 방문해서 교회들을 든든히 세우는 일을 하자고.
얼마나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입니까?
바나바가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려고 하고 바울을 안 된다고 합니다.
안 된다고 하는 이유는, 1차 전도여행 때 마가가 동행해서 구브로 섬에 가서 함께 전도를 잘 했어요, 그리고 구브로 섬에서 배를 타고 다시 육지로 올라왔습니다.
그 육지가 바로 앗달리아라고 하는 밤빌리아 지역이에요, 밤빌리아 지역의 앗달리아라는 항구와 버가가 있는데, 버가에서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그때 일을 기억하면서 바울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 바울은 안 된다, 싸우다가 바나바와 바울이 결별합니다.
마음이 특히 아픈 것은, 바나바의 그 다음 사역의 현장이나 행적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성경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읽어보면, 바나바라는 이름이 바울에 의해서 아주 드물게 언급이 되기는 합니다마는 바나바 이야기가 성경에서 끝납니다.
그러니 마음이 괜히 더 아픈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너무나 이해가 가는 것은 우리를 보면 평생 예수님을 믿어도 이렇게 싸우는 일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사람이니까.
이렇게 서로 자기주장을 하다가 싸울 수도 있겠지요.
그런 면에서 이해가 갑니다.
24시간 일 년 365일 언제나 성령 충만해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이해가 또 너무나 안 가는 게 뭐냐 하면, 이게 사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아무것도 아닌 일로 다퉈서 잠간 헤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지금 2차 전도여행을 이야기하는 자리라는 얘깁니다.
그러므로 이해가 안 간다는 건 뭐냐 하면, 성령 충만이라는 단어가 정말 우리와는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마치 별명인 것처럼 따라붙던 두 사도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도가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면 제2차 전도여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제2차 전도여행을 이야기하고 있고 두 사도 모두가 다 성령 충만이 별명처럼 따라붙어 다니는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서로 다투다가 헤어지게 되고, 그 다투는 이유도 결별해야 될 만큼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일이라는 거예요, 마가를 데리고 가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바나바도 성령 충만하고 바울도 성령 충만했다면, 성령이 성령을 거슬러 싸운다는 얘기가 되니까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결론은 이들이 성령 충만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요.
성령 충만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도에 대한 결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게 이상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주석서들을 보면 대부분 이유를 이렇게 댑니다.
성격적 차이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어요.
둘 다 절대적으로 복음을 위해 주님을 위해 헌신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헌신의 공통점 위에 무엇이 다른가 하면, 바울은 엄격합니다, 바나바는 관대합니다, 그래서 엄격성과 관대함이 부딪혔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게 이해가 안 가는 거예요.
왜 이해가 안 가느냐?
성령의 열매와 성령 충만을 바울사도가 이야기합니다.
성령 충만했을 때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 이런 단어 하나하나에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겠다고 하는 바울의 고집, 바나바와 결별할 정도로 부리는 고집이 엄격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는 거예요.
성격에 머물러 있었다고 하면 바울은 바울 되지 못했습니다, 성령에 붙잡혔으니까 사도바울이 된 거죠.
그러니 성격 탓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 절제 온유, 그 어느 것에 마가를 데려가지 않겠다고 바나바와 이렇게 싸우면서 고집을 부리는 바울의 모습과 어울리는 게 있습니까?
그리고 또 마가가 무슨 사탄의 자식입니까?
마가복음을 쓴 사람이에요, 마가복음을 쓴 사람.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을 때는, 마가의 인격을 존중한다면 마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바울이 알지 못하는.
그리고 나중에는 결국, 빌레몬서에서는 ‘나의 조력자’라고 얘기하고, 디모데후서에서는 ‘나의 일에 유익한 자’라고 얘기하고, 골로새서 4장 같은 데는 ‘나의 위로가 된다’고 얘기합니다, 바울이 마가에 대해서.
그러면 왜 이런 문제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친밀함 때문에 그렇다는 거예요, 바울과 바나바의 친밀함 때문에.
그래서 둘 다 함정에 빠진 겁니다.
바나바가 마가를 데려가겠다는 이야기 자체도 문제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2차 전도여행을 가자는 이야기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이전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원인인 친밀함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얼마나 친했겠습니까?
바울이 회심을 하고 예루살렘에 처음 왔을 때에 모든 사람이 바울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어요, 교회를 핍박하던 자라고.
이때 바울을 감싸준 자가 바나바에요.
그러니까 바울이 기존의 교회에 들어왔을 때 오직 의지할 사람이라고는 바나바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에 의해서 둘이 이방선교를 위해 선택을 받아 세움을 받고 1차 전도여행을 할 때 죽을 고비를 둘이서 함께 당합니다, 생사고락을 같이 합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돌아와서 안디옥에서 할례 문제로 신학논쟁이 벌어질 때 둘이서 같은 진영에서 한 마음이 되어서 믿음의 진리를 위하여 투쟁을 합니다.
그리고 둘이서 예루살렘교회에서 공히 인정을 받게 됩니다.
목숨을 내놓고 복음을 전하는 자라는 명예스러운 칭호를 받게 됩니다.
둘이 얼마나 친했겠어요?
이건 형제보다 부부보다도 더 친한 겁니다.
자, 이 친밀함에서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서로를 향해서 목숨을 내놓으라고 해도 내놓을 수 있는 친밀한 관계가 되었는데, 이 친밀함에서 나온 일이 뭡니까?
지금 2차 전도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하는 시점을 1차 전도여행을 어떻게 시작했는가와 한번비교해봅니다.
1차 전도여행 때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면, 13장 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자, 뭐라고 돼있어요?
‘주를 섬겨 금식할 때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두 사람을 세우라’ 성령께서 이렇게 시작을 해서 일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오늘 2차 전도여행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36절에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이렇게 기록합니다.
지금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성령님께서 두 사람을 불러 세우라고 지시를 해서 둘을 세웠습니다.
1차 전도여행도 성령님의 계획이고, 이 여행을 위해서 사람을 세우시는 것도 성령님께서 지시하는 사람을 세우게 됩니다.
그런데 2차 전도여행은 지금 그런 과정이 빠져 있습니다.
만약에 기도하다가 성령님께서 지시하신 것이라면 두 사람이 싸운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죠.
성령께서 지시해서 바나바에게 마가를 데려가라고 했는데, 그런데 바울이 반대를 했다면 성령을 거스른 겁니다, 그러니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죠.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이 둘 다 성령 충만한 상태에서 성령께서 지시한 일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에요.
2차 전도여행을 가자는 것도 그렇고, 마가를 데려가겠다는 것도 그렇고, 바울의 전도여행 제안과 바나바의 마가를 데려가겠다는 생각도 둘 다 자기들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왜 이 성령 충만한 두 사도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둘이 너무 친하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너무 친하기 때문에 항상 부부가 신앙생활 할 때 어떤 일이 생기느냐 하면, 선(先)결정 후(後)기도의 문제가 생깁니다.
각자가 하나님과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으로부터 마음에 감동을 받아서 감동받은 것을 이야기하지 않고, 부부가 자식에 대해서, 먹고 살 길에 대해서 서로 의논하다가 둘이서 결정한 일을 갖고 기도할 때가 많습니다.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친하기 때문에 그래요.
왜 김 권사님과 이 권사님이 그렇게 뒷담화를 하는 겁니까?
이 집사, 구역장, 권찰들을 데리고는 권사님께서 오직 신앙에 관한 이야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제일 친한 김 권사님을 만나면 이 권사님 입에서 나오는 얘기가 다 뒷담화에요.
그러면 김 권사님도 거기에 장단만 맞춥니다.
왜 그래요? 친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친하다는 게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결국 하나님보다 더 친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고, 하나님과 더 먼저 친해야 되는데 이 권사님이 친한 권사님 만나서 그 권사님께 기도하는 것이 된다는 거예요.
지금 바울이 바나바에게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2차 전도여행 가자!’
이게 언제나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친한 것은 친한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에요.
바울의 문제가 지금 뭡니까?
자기가 기독교인이 되고 사도로 세움 받아서 처음으로 세운 교회들이에요, 1차 전도여행 때의 교회가, 비시디안 안디옥이라든지, 루스드라, 더베, 버가라든지.
자기가 말씀으로 낳은 자들입니다, 디모데에게 말했던 것처럼, 자기 자식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당연히 2차 전도여행으로 계획을 해서 그들을 권면하고 든든히 세워주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이게 문제에요, 사람이건 일이건 내 마음에서 친하게 생각되는 사이에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배제된 상태에서 결정하고 추진하면서 그 다음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게 안 된다는 겁니다.
선(先)결정 후(後)기도의 함정이 친밀한 관계에서는 그게 사람이든 일이든 언제나 놓여 져 있다는 겁니다.
결과적으로는 성령님께서 선하게 바꾸어주십니다.
결국 두 팀이 된 거예요, 바울과 실라가 한 팀이 되고 바나바와 마가가 한 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실라와 마가라고 하는 탁월한 조력자, 탁월한 사역자를 발굴하는 계기가 됩니다.
성령님이 당신의 복음의 확장을 위해서 이 두 사람의 다툼을 선하게 인도하신 거예요.
그리고 계획 속에 있었겠지요, 마치 주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아버지의 구원 계획 속에 있었던 일인데, 가룟유다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악역을 담당한 것처럼, 또 요셉이 형들에 의해 팔려갔는데 그 악한 행위를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계기로 바꾸신 것처럼 선한 일로 바꾸셨지만, 이들의 문제는 바로 친밀한 관계에서 이 친밀함 때문에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먼저 기도하고, 먼저 성령 충만을 통해서 지시를 받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는 겁니다.
각자가 기도했다면 분명히 그랬을 거예요.
성령께서 바나바에게 그랬을 거예요, ‘바나바야, 이제 바울과 헤어져서 마가를 동역자로 삼아서 구브로로 선교여행을 가라!’
그리고 바울에게는 그랬을 거예요, ‘이제 바나바와 헤어져서 실라를 너의 동역자로 삼고 2차 전도여행을 가라!’ 그랬을 겁니다, 사람을 세우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니까.
그렇게 되면 둘이서 이렇게 싸우고 헤어지는 게 아니라, ‘성령님께서 기도하는데 이렇게 지시하시더라, 그럼 우리가 순종해야지! 난 마가를 데려가려는데 그러면 자네는 어떡할 건가? 아, 실라가 믿음이 참 좋던데 나는 실라를 데리고 갈게!’ 이렇게 얘기가 돼서 이방선교가 한 팀이었던 것이 두 팀으로 갈라지고, 실라와 마가가 너무 기분 좋게 사역자로 세움을 받게 되면서 교회가 확장되어갔을 것이에요.
그런데 둘이 너무 친하기 때문에 다툰 겁니다, 너무 친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잊고 살 사람들이 아닙니다.
근데 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 거예요.
너무 친하니까 자기 속의 생각을 기도를 통해 걸러내지 않고 그냥 얘기해버리는 겁니다.
여러분, 이 친밀함의 함정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모든 친밀한 사람과 일을 다 우리로부터 떼어놓는 역사를 하시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기도할 때 가장 친밀한 것들이 다 떨어져나가야 됩니다.
그리고 떨어져나갈 때 비로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와 가장 친밀한 분으로서 내게 다시 다가오십니다.
이게 매일 반복해야 되고 매순간 반복해야 되는 일인 거예요.
그럴 때 하나님께서 갖고 계시는 계획이 성령님을 통하여 내게 전달이 되고, 그 뜻을 따라 움직여갈 수가 있습니다.
일도 그래요, 작년에 했던 일이라고 당연히 금년에 또 하는 게 아니에요.
전통적으로 하는 일, 이런 것들 안 된다는 거예요, 너무 친밀한 것들 익숙한 것들, 당연하게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다 죽어서, 하나님보다 친밀한 대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반드시 친밀한 인간관계가 깨지고, 친밀한 일의 관계가 비틀어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친밀함의 함정.
주님의 십자가를 먼저 보고, 그 모든 친밀한 대상들에 대해 죽으므로 그 친밀한 관계가 오히려 더 돈독하게 세우는 차원으로 발전하면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풍성해지는 관계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친밀함 때문에 하나님이 가장 먼저 친밀해야 된다고 하는 신앙의 대원칙이 무장해제 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아서,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심령상태가 함정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친밀한 사람과 일에 대해서 남의 일처럼 남인 것처럼 떼어내게 하시고 하나님이 제일 먼저 친밀한 분이 되어주셔서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에 대한 관계가 다시 시작되는 일이 반복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