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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었다
창세기 50: 1-14
○ 야곱의 장례식
1.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막16:1, 눅23:56
3. 사십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민20:29, 욥2:13
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청컨대 바로의 귀에 고하기를 창47:29
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창47:29
6. 바로가 가로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비를 장사하라
7.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떼와 소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창45:10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10. 그들이 요단강 건너편 아닷 타작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호곡하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비를 위하여 칠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가로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강 건너편이더라
12. 야곱의 아들들이 부명을 좇아 행하여
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행7:16
○ 형제들을 위로하는 야곱
14. 요셉이 아비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군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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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장은 가히 ‘끝’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성경입니다. 창세기가 끝나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야곱의 생애가 “끝나고 그의 아들 요셉의 생애마저도 끝납니다. 오늘 본문은 특히 야곱의 죽음과 그의 장례식을 기록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미 49장에서 유언을 마친 야곱은 침상 위에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아버지가 남의 나라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말대로 나그네 인생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아주 성대하게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고 그의 유언대로 시신을 가나안 땅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은 통상적으로 있는 사람의 죽음과 그 이후의 처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비록 성대하기는 하지만 야곱의 장례식과 오늘날 사람들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속에서 하시고자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죽은 자의 죽음 이후
한 사람, 야곱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평범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게 있습니다. 죽음은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별 짓는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요셉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 손자들이 살아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구별됩니다. 일단 죽은 야곱은 살아 있을 때의 모든 언행으로 자손들의 기억 속에 남습니다. 산 자들은 그의 기억을 가지고 행동합니다.
그것은 살았을 때 유언한 내용입니다. 그 유언을 따라 장례식을 치릅니다. 산 자들은 자신들의 의견대로 장례식을 치르는 게 아닙니다. 그게 좋든 나쁘든, 정의든 불의든 죽은 자가 남긴 유언에 따라 장례를 치릅니다. 쉽게 말하면 죽은 자는 유언으로 살아있습니다. 유언은 안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유언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의 유언이 무엇입니까?
(머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전도와 양육이 예수님의 유언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야곱의 유언을 지키듯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예수님의 유언을 충실히 지켜야 합니다.
지금까지 살핀 내용이 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를 알고 있던 산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 해야 할 일이라면, 죽음 이후 그 죽은 사람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렇습니다. 야곱은 죽은 후 후손들에게 할일을 남겨주고 간 것으로 그친 게 아닙니다. 죽음 이후 심판이 있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이 심판은 두 종류입니다. 믿음을 가려 지옥으로 보내는 심판과, 믿는 이들의 상급 심판이 그것입니다.
(요3:18)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또,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것이 바로 지옥이냐 천국이냐의 심판을 가리는 불신자들의 심판을 말함입니다.
(계20:12-13)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생명록에 기록된 행위대로 받는 심판이 또 있습니다. 어쨌든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음을 알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 야곱은 참 잘 죽습니다. 죽음이 아르다워야 합니다.
(시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성대한 야곱의 장례식
야곱의 장례는 남의 나라에서 치러지는 장례식이지만 참으로 성대한 장례식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주치의를 시켜 야곱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었습니다. 향재료를 넣었다는 것은 장재전에서 시신에게 행하는 의례입니다. 가장 숭고한 시체 처리 모습이고 또 대부분의 애굽의 왕들이 그렇게 시체가 처리되어 매장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죽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향재료를 넣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애굽의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애굽에선 그야말로 미라를 만드는 것이고, 이스라엘에서는 향유를 바르는 정도입니다.
사람은 어떻게 죽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디서 죽느냐도 중요합니다. 만약 야곱이 애굽에서 죽은 게 아니라면 이런 장례 절차는 없었을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창녀촌에서 죽었다고 합시다. 그는 모든 살아있는 신앙인들에게 고개를 들 수 없는 모욕을 주고 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을 이야기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마:24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이는 죽으면서 망신을 남기고 어떤 이는 죽으면서 복음의 열매를 남깁니다.
야곱의 장례식은 애굽식입니다. 오늘날 유교식, 불교식, 기독교식 장례예식이 있는데 그 의식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못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인이 죽는다 해도 불교국가에서 죽는다면 불교예식을 무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천국 갈 사람이 지옥에 갈리는 없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야곱의 장례예식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장례일수가 깁니다. 향재료를 넣는데 40일이 걸렸고, 70일 동안이나 애곡하는 기간을 가졌습니다. 그만큼 야곱도 그렇고 특히 요셉이 애굽 사람들에게 신망이 높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정승이 죽으면 조문객이 안 와도 정승 집 개가 죽으면 온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그리곤 그 기간들이 끝난 다음 요셉은 아버지의 시체를 가지고 가나안으로 갑니다. 애굽에서의 행사를 마친 다음에는 가나안의 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유언을 따르는 아들 요셉에 의해 이뤄집니다. 먼저 애굽 왕에게 하락을 받고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행합니다.
(5절)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신망이 높았던 터라 바로 왕은 당연히 허락합니다. 그뿐 아니라 애굽에서의 의식이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따르는 장례행렬이 대단합니다.
아닷 타작마당에 이르러 다시 7일간 애곡하는 의식을 행합니다. 결국 야곱의 유언은 그 아들들에 의해 완전히 이뤄집니다.
(12-14절) “야곱의 아들들이 부명을 좇아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소유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요셉이 아비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처럼 잘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예수님의 유언을 다 지켜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한 장엄한 장례식을 살펴보았습니다. 야곱은 살아있을 때 나그네 삶을 살았고 고통과 수고뿐인 사람이라고 했지만, 죽음 이후의 장면은 실로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지켜보십시다.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죽음이 아름다운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성도의 삶의 완성은 바로 죽음입니다. 주님의 유언을 잘 실천하며 살므로 죽음이 참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저자| 김학현목사(예은교회)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
요셉이 형들을 용서하다
창 50: 15~26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찌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창37:7, 10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신32:35, 왕하5:7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45:5, 7
21.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창45:11
22.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 십세를 살며
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욥42:16, 시128:6
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출3:16-17, 히11:22
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창47:29
26. 요셉이 일백 십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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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 창세기 강해설교를 마감하게 됩니다. 그동안의 창세기 강해설교를 잘 들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창세기 마지막 부분은 요셉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상처없이 사랑하기
우리는 최근에 요셉의 내면적인 모습과 외형적인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요셉의 외형적인 모습은 한 마디로 ‘꿈의 사람, 믿음의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꿈을 갖고 자랍니다.
꿈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믿음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 꿈은 이루어 졌습니다. 요셉은 30세에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고 위기에서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성장합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꿈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요셉의 내면적인 모습은 ‘용서의 사람, 사랑의 사람’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이 무슨 일을 했느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느냐 입니다. 그것으로 그 사람의 인격과 성숙을 가늠할 수 있습니다. 당신 직업이나 업적은 당신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 주변의 사람을 얼마나 사랑할 수 있느냐, 용서할 수 있느냐가 바로 당신입니다.
요셉은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갖게 되었을 때 요셉은 형들을 사랑하고 용서했습니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을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보냅니다. 요셉의 사랑과 우리들의 사랑은 좀 다릅니다. 우리의 사랑은 상대방의 반응을 따라 하는 사랑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 하면 나도 잘하고, 나를 선하게 대해주면 나도 선하게 대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사랑에는 조건이 많습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사랑은 목마르고 갈등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조건이나 반응을 따라 형들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 했고 파멸시키려 했지만, 요셉은 형들을 본질부터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를 보고 사랑하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태도나 반응과 상관없이 그분은 사랑하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찾아와 주셨습니다. 내가 죄인이었을 때도 나를 사랑하셨고, 내가 불순종했을 때도 이미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변덕을 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식언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가 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사랑의 특징은 기다림입니다.
사랑에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 기다립니다. 사랑은 포기할 수 없습니다.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사람이 깨닫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내 사랑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비판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형들을 사랑했습니다. 자기 인생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형들이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사랑했습니다.
저는 요즘 사도행전 큐티를 하면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로마 시민권도 갖고 있었던 사도 바울은 매도 맞고 쫓겨나기도 하고 숨어도 다녔지만 상처가 없었습니다. 누구를 원망하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비록 자기를 대우해 주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그에게는 예수뿐이었습니다. 제가 배운 것이 있습니다. 예수가 있는 사람은 상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겪어도 섭섭함이 없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마음 속에 섭섭함이 사라지기를 바라고, 상처와 원망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들은 상처를 받으면서 예수를 믿고, 원망하면서 예수를 믿습니다. 그것은 동기가 순수하지 않고 자기 자신이 동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어려움과 모함을 받아도 상처가 없기를 바라고, 지난 과거를 쉽게 잊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이 사도 바울이었고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에게 감동을 받는 것은 형들에게 받은 상처가 없다는 것입니다. 원망이 없습니다. 요셉은 조건없이 사랑하고 용서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마음 속에 조건없는 사랑이 흘러 넘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구덩이에 집어 넣고, 여러분의 인생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던 사람을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의 재산과 명예를 파괴했던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약속의 땅에 묻힌 야곱
오늘 우리는 창세기 50장에서 거대한 장례식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야곱의 장례식입니다.
49장 33절을 보면 야곱의 임종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인생의 시작이 출생이라면 인생의 마지막은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이삭도 죽었고, 야곱도 죽었습니다. 여러분도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저도 죽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각하게 하시는 것이 이것입니다.
야곱이 죽은 것을 구경하지 마십시오. 여러분도 언젠가 죽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죽느냐는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지옥이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지옥과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그것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죽은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으로 끝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죽은 후에 당신이 살아온 그 열매대로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은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영원을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에 입맞춤 합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시신이 썩지 않도록 향을 넣게 합니다. 애굽은 죽음에 대해 남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피라밋과 스핑크스를 보십시오. 미이라를 보십시오. 애굽은 향 재료를 넣어서 시체가 몇 백년이 지나도 썩지 않도록 하는 기술이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야곱의 시신을 40일 동안 처리했고 70일 동안 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야곱의 유언대로 애굽에 장사하지 않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옮겨 갑니다.
여기에 영적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죽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시신을 하나님의 약속 위에 두었습니다. 자신은 죽었지만 자기 시신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땅, 자기 조상들이 묻힌 그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위에 자기 인생의 결론을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죽음이 예수 위에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있는 죽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불안이 엄습하다
50장 7~9절을 보면 이 거대한 행렬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땅의 모든 장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떼와 소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인간은 장례를 치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억하고 죽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처럼 어마어마한 장례식을 치른다고 천국이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야 보장됩니다. 아무리 초라하고 아무도 오지 않는 장례식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에게 예수가 있으면 그 장례식은 천국환송식이 됩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장례식이 천국환송식이 되기를 바라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축복의 문이기를 바랍니다.
화려한 장례식이 끝났습니다. 이제 요셉과 그 형들은 장례식을 마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온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대개 장례식을 치르고 나면 허탈해 합니다. 죽은 사람의 유물과 흔적만 남은 채 외로움을 느낍니다. 그래서 장례식을 치를 때보다 치른 후에 그 집에 자주 가서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장례식을 치른 후에 요셉의 형들은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야곱이 살아있을 때는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죽고 장례식이 끝나자 형들 마음에는 보호막이 깨졌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 야곱이 형들의 보호막이 되었었는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까 불안해 졌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그런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형들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불안해지기 시작합니다. 미래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세계입니다. 누구든지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미래로 삼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미래는 너무나 찬란하고 황홀한 세계입니다. 미래는 불안하지 않습니다. 죽음도 불안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미래로 가면 갈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가슴을 느끼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흔들리지 않는 미래
요셉의 형제들이 불안한 까닭은 용서받지 못한 과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거를 돌아보면서 요셉이 자신들을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용서받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이런 생각을 갖습니다.
여러분, 용서하십시오. 용서받으십시오. 그것이 평안, 안심의 기초입니다. 문제를 그냥 두고 가지 마십시오. 세월이 약이 아닙니다. 세월이 가도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세월이 간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살아납니다.
형제들은 요셉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미래가 불안한 사람들은 안심이 없습니다. 초조합니다. 요셉이 어느 날 갑자기 자신과 자식들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늘 불안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과거가 있다면 현재가 불안한 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여러분의 과거가 다 용서 받았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과거와 인연을 끊기를 바랍니다. 과거가 여러분들을 괴롭히지 않게 하십시오. 나를 꼼짝할 수 없게 하는 과거의 기억을 버리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사람은 과거를 캐고 돌아다니는 사람입니다. 과거의 약점을 가지고 괴롭히는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과거를 캐는 것을 중지하십시오. 과거를 단절하십시오. 과거는 여러분의 미래를 만들지 않습니다. 예수가 여러분의 미래를 만듭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미래를 만드는 것이지 여러분의 지나온 과거가 미래를 만들지 않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찌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형제들이 얼마나 불안했었는지 조금만 자세히 보면 금방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16절에서 ‘당신의 아버지’라는 말을 한 것을 보십시오. 아직도 형제들은 야곱을 통해서 요셉의 용서를 얻으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요셉이 모르는 유언을 야곱이 했다고 합니다.
유언의 내용은 ‘내가 죽더라도 요셉은 형들에게 복수하지 말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내용이었다면 야곱이 왜 요셉에게 말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말했을까요? 형제들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렇게까지 했겠습니까? 자신들의 죄가 용서받지 못할 죄라는 것을 본인들이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용서받지 못할 죄일지라도 하나님은 용서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7절을 보면 형제들이 하는 말이 좀 복잡합니다. 용서받지 못한 사람은 말이 복잡합니다. 저는 여러분의 말이 복잡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이 정직하기를 바라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았음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조건은 없습니다. 내 믿음과 상관없이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요셉
오늘 우리는 요셉의 형들이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교회에 나오면서도 불안해 하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서도 불안해 하는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데 있지 않고 교회에 나오면서도 불안해 하는데 있습니다. 믿으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확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십시오.
능력은 평안에서 나옵니다. 자유는 안심에서 나옵니다. 사람은 인정을 받지 못하면 자유롭지 못합니다. 인정을 받으면 자유롭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사람은 세상을 사는 것이 자유롭습니다. 가난해도, 부유해도 자유롭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다가 아래로 떨어졌어도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용서하셨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2절을 보십시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에[베소서 2장 3절을 보면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시오.
에베소서 2장 5,6절을 보십시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 믿음을 갖기를 축원합니다. 담대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안심하십시오. 죽어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죽음을 넘어선 사람들입니다. 귀신들에 대해서도 선언하십시오. 귀신은 종이호랑이입니다. 과거의 상처와 죄로부터 떠나십시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불안해 하는 형들을 보며 요셉은 울었습니다. 요셉만 우는 것이 아닙니다. 불안해 하는 여러분들을 보며 하나님도 우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요셉의 형들의 영적인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
19~21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오늘 이 위로의 메시지가 예수님을 통하여 여러분에게 들려지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40장 27~31절을 보십시오, 메마른 땅을 종일 걸어가도 우리는 피곤치 않을 것입니다. 파도가 치고 폭풍이 친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승리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당신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당신의 과거는 끝났습니다. 미래가 있을 뿐입니다. 미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이십니다.
이사야 41장 9,10절을 보십시오.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을 믿으십시오. 확신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용서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죽기까지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출처 : 하용조 목사
출처: 성경 벌레들 원문보기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