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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19-33 (중심에 회상하온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성경본문 예레미야애가 3: 19-33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21.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25.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27. 사람이 젊었을 때에 멍에를 메는 것이 좋으니
28.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메우셨음이라
29. 입을 티끌에 댈찌어다 혹시 소망이 있을찌로다
30.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찌어다
31.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32.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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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지태일 목사
월간 잡지 “목마르거든”란에 실린 어느 미스코리아 진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한 해에 미스코리아 진, 스마일 상, 스타상을 받아 3관 왕의 영애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미국 ‘마이에미 비치’에서 개최되는 ‘미쓰 유니버스 대회’에 참석할 때는 마치 여왕이 된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 아름다운 때문에 21살에 13살 위인 사업가 아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혼 전날 분홍빛 꿈은 산산 깨지고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돈이 다가 왔습니다. 내일이면 남편이 될 남자에게 6년을 동거한 여자와 아이가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안 것입니다. 미스코리아 자존심 때문에 누구보다도 행복한 신부의 표정으로 할 수 없이 결혼식을 올렸답니다
마음의 상처는 ‘결핵성 늑막염’으로 이어졌고, 그 때부터 3년 동안의 투병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지병으로 시댁 식구들도 등을 돌렸고, 외로운 병상에서 남편의 외도 소식을 전해들어야만 했습니다. 고통 가운데도 병을 잘 치료하고 정상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남편의 마음이 바뀔 것으로 기대했지만 남편의 방탕한 생각 때문에 조금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삶이 구차하게 느껴져 자살을 기도했지만 그것도 실패했습니다. 결국 아이를 데리고 가출을 하였고 패물을 팔아 아이 우유도 사먹이고 그럭저럭 버텨나갔는데 친정에서 아파트를 하나 얻어 주어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전교 학생회장을 지냈던 자신, ‘미스코리아 진’의 영광을 안고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자신의 모습은 이제 기미 투성이가 된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고, 스트레스로 만성 소화 불량이라는 초라한 이혼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룸살롱의 마담이 되어 아가씨 80명을 두고 술장사를 했습니다. 그 가슴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으로 돈을 물쓰듯 했습니다.
돈은 많이 벌지만 시간 지남에 따라 빚만 짚덩이처럼 불어났고, 빚에 쫓기며 괴로워하던 어느 날 16년 만에 고등학교 후배의 전화를 받고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집으로 들어선 순간, 이제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천국같은 분위기를 느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다정히 애기하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 분은 신앙이 좋은 남편이었습니다. 그 분을 통해 위로를 받고 그 분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들었고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갔는데 말씀을 들으며 지난 날을 회상하는데 복받쳐 오르는 설움에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 나가서 위로의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위로하시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손길을 붙들어 주신 것입니다 술집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교회에 나와 백일 작정 기도를 하면서 눈덩이처럼 큰 빚을 정리하고 6년간 새벽기도를 다니며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죄책감은 사라지고 마음에 참된 평강이 찾아왔고 고후1:4절 말씀처럼 “우리의 모든 환란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로 10년의 술집 살롱생활을 청산하고 음식점을 경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로 다시 일어선 그녀는 이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여인들을 위해 유흥가 선교의 버전을 가지고 살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위로는 힘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통하여 위로를 받으면 새 힘을 얻고 용기를 가지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꼭 힘이 있는 사람이 위로를 하고 힘이 없는 사람이 위로를 받는 것만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위로받지 않고 살만큼 강한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엔 위로하지 않고 살만큼 강팍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에 고난과 슬픔과 어려움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한 번도 고난이나 슬픔을, 불행을 당한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안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만약에 있다면 그는 틀림없는 위선적인 사람이거나, 아니면 인생을 아직 모르는 철부지일 것입니다.
해아래 사는 우리 인생은 남녀노소, 빈부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예외없이 인생고를 맛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신자라고 해서 고통과 좌절을 피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더 큰 믿음의 연단을 위해서 큰 은헤와 복을 주시기 위해 어려움을 주시기도 합니다. 아니면 자신의 유혹과 욕심에 이끌려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난을 어떻게 다루며, 극복하느냐에 있다. 특별히 신앙의 사람들은 고난과 좌절을 이겨내는 방법이 믿지 아니하는 세상의 사람들과는 완연히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점에 대해서 우리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9-20절까지는 절망의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선지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21절에서는 드디어 그가 절망의 밑바닥에서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전환점을 발견하고, 22-23절부터 33절까지는 믿음을 되찾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되돌아오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 먼저 뿌리채 흔들리는 예레미야의 믿음입니다.(1-18절)
본문 1-18절까지를 보면 는 유다민족의 참상과 재난이 나옵니다. 예레미야는 1절에서 이 모든 재난들이 바로 유다 민족의 죄에 대한 여호와의 노하신 매인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고난 당하는 자는 “내로다”고 했습니다.
1-18절 사이에는 “나”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데 27회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말은 저자인 예레미야를 가리키는 동시에 고난당하는 자기 민족을 대표하고 있는 대명사입니다. 더 나아가 “나”라는 대명사는 하나님의 정죄나 연단으로 인하여 고난당하고 있는 오늘의 성도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의 고통을 바로 자기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성숙된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거룩한 선지자로서 장차 유대나라에 임할 하나님의 징계를 예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클 것인가와 마지막 종국이 비참하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는 마음속으로 막상 그 날이 온다면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 과연 내가 그 고난을 잘 견딜 수가 있을까? 모든 고난의 쓴 잔을 끝까지 마시며, 그래도 인내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비극의 순간이 다가오자 예레미야 선지의 믿음은 뿌리채 흔들리고 맘니다. 충격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3년이 넘도록 계속된 기근으로 마른 막대기처럼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시체들을 볼 때, 잔인한 군인들이 임신한 여인의 배를 칼로 찌르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할 때, 어린아이들을 돌담에다 메어쳐 죽이는 모습을 볼 때,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불길이 휩싸이고 성전의 기구들이 전부 약탈 당해가는 것을 보았을 때 예례미야 선지는 얼마나 눈물을 많이 하염없이 흘렸던지 그 눈물속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습니다.
예례미야 선지는 전에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엄청나게 다른 현실을 직접 당하고 보니 그렇게도 좋던 그의 믿음이 뿌리채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믿음의 선지자였지만, 현실을 보고서는 그의 믿음이 흔들렸던 것입니다.
성도들 역시 믿음이 흔들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선지자도 역시 고난을 당할 때 약해지는 인간으로서의 불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그는”이라는 말이 매우 자주 나오는데 그가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이 약해지면서 나타난 불평과 원망의 모든 화살이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3절 이하를 보면..... 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소리가 샘물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자주 나를 치시는 하나님, 10절에 보면 치기를 엎드려 기다리는 곰이나 은밀한 곳에서 숨어 기다리며 기회를 엿보는 사자같은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선지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 아무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마치 연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을 비쳐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종종 평소에는 잘하는 것 같고, 잘 견딜 것 같기도 하고, 믿음이 좋은 것 같은데 좀더 큰 문제를 만나면 사정없이 흔들리면서 하나님을, 이웃을 사람을 심지어 가까운 믿음의 사람들도 원망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별수 없구나, 오늘날까지 기도를 많이 했는데 하나님이 안들어주시는 거야, 그래도 봉사도 하고, 때로는 많은 것을 바쳤고, 그 어려운 가운데도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고 인내하며 여기까지 왔는데, 은혜를 잊어 버리고 차라리 안믿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면서 원망과 불평, 낙심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18절을 보면, “스스로 이르기를 나의 힘과 여호와께 대한 내 소망이 끊어졌다 하였도다”
이제는 용기도, 위로도, 기도할 마음도, 내일에 대한 소망도 다 끊긴 것입니다. 거의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탁월한 믿음의 사람도 절망하며 불평을 할진대 우리 같은 사람이야 말할 것 없습니다.
나뭇가지에 달린 꽃송이가 바람에 흔들리듯 하루에도 바람 따라 몇 번씩 흔들림니다. 우리 모두는 예레미야와 같은 약점을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결코 교만해서는 안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자기의 신앙 경력이나 풍부한 성경 지식이나 교회안에서 가지고 있는 어떤 직분이나 많은 사람들이 보내는 칭찬에 현혹되어서는 안됨니다.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신앙이 앞으로 흔들리지는 않는 다는 것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마지막까지 지탱케 해 주시는 힘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됨니다.
2.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믿음의 사람으로 회복되는 예레미야입니다(20-33절)
어떻게 절망의 밑바닥에서 갑자기 소망의 높은 자리로 돌변할 수 있는가? 입니다.
20,21절에 “내 심령이 그것을 기억하고 낙심이 되오나 중심에 회상하온즉 오히려 소망이 있음은”
언제 낙심이 옵니까?
그것을 기억할 때, 즉 지금 당하고 있는 쓰라린 고통과 고난만을 생각할 때, 아무리 애쓰고 해도 하나도 해결받지 못했을 때 마음도 무겁고 소망이 생기지를 않습니다.
나의 죄로, 허물로 인한 고통과 범죄들, 고초와 고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끌려가 당한 민족의 모든 고난들을 생각할 때, 눈 앞에 아직도 불타는 예루살렘과 파멸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 "시온을 기억하고 울었습니다."
죄와 쓰라린 고통들은 감정으로 눌릴 뿐만 아니라 쓰려져 낙심케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중심에 무엇을 회상할 때 오히려 소망이 있음을 말합니까?
22절을 보면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다”는 것입니다. 오 하나님! 갑자기 내 중심에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고초와 재난을 기억할 때에는 내 심령이 낙심되고 소망이 없어졌으나,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다는 사실을 마음에 중심으로 회상할 때, 깊은 영적 묵상이 있을 때 소망이 넘쳐 나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생각할 때 아! 내가 이렇게 절망만 하고 있다니... 내가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는데... 우리 민족은 망한 것이 아니야, 몇 년 전에 바벨론으로 잡혀간 친구들, 동족들이 거기에 그대로 살아있고, 이제 하나님의 정하신 기간 70년만 지나가면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시며 불타버린 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국가를 회복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어, 이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있는데 왜 내가 이렇게 절망을 하고 있는 거지...
갑짜기 예레미야에게 소망의 빛이 비취기 시작한 것입니다. 검은 구름이 흩어지고 하늘은 개이기 시작합니다. 검은 구름 너머에 있는 밝은 태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절망이 아닌 소망, 슬픔이 아닌 기쁨이 다가 오기 시작합니다. 사망이 아니라 생명의 역사가, 실패가 아닌 승리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든 문제를 피상적으로, 근시안적으로,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심령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생각없이, 묵상하지 않고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예레미야가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무궁함을 회상하고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게 되자, 예레미야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급변하고 있는지 다음 구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1) 23절: “이것이(하나님의 자비와 긍휼)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아침마다, 즉 매일매일, 매순간 하나님의 자비(사랑)와 신실(성실)하심을 느낄 때 어두운 절망의 골짜기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다. 드디어 그는 다시 신앙의 사람으로 회복되었습니다.
찬양 ♬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2) 24절을 보면: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저를 바라리라 하도다”
여호와가 자기 기업(약속관계)의 일부분이 아니라, 자기 기업의 전부라고 고백하는 것은 흔들리던 그의 믿음이 확고해진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극한 고통속에서도 고요히 하나님만 바라고 기다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파숫꾼이 새벽을 기다림과 같이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다리시기 바랍니다.(찬송가 479장)
25절을 보면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구하는 영혼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신다”고 말씀하심니다. 26절을 보면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가다리시기를 바람니다.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여 주만 바라볼찌라
3) 32-33절: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니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은 내가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 아니심니다. 잠깐 선하신 뜻이 계셔서 연단위해, 성숙을 위해 고난을, 때로는 매를 드실만큼 나의 죄가 컸기 때문에 잠깐 징계를 허용하신 것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머지 않아 나를 평안하고, 형통한 자리로 다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아름다운 의도는 근본적으로 인간들이 형통하며 복된 삶을 누리는 것을 기뻐하심니다.
찬양 ♬
이 땅위의 모든 것 마지막 날 될 때에
주여 나를 받아 주소서
주의 얼굴 대할 때 귀한 상급 주시고
면류관을 쓰게 하소서.
하나님은 세상의 많은 인간들이 억눌리며 소외되어 아픔 당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심니다.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심을 예레미야는 깨달은 것입니다.
이제 예레미야는 참으로 믿음이 강한 사람으로 회복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뜻을, 하나님의 섭리를 읽을 수 있는 놀라운 수준에 까지 도달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예레미야와 다를 바 없는 그러한 연약한 존재입니다. 약한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생애들 가운데 어떤 일들이 일어날는지 모름니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라 해서 우리를 고난의 길에서 완전히 제외시켜 주셨다는 보장을 해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늘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우리의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절망과 고통과 슬픔의 상황에서라도 붙들어 일으켜 세워 주실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바라보고 살아가시기 바람니다. 절망의 밑바닥에서 소망의 정상으로 향하는 큰 믿음을 되찾아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그런 자리로 다시 되돌아오는 회복의 은혜가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찬송가 533장, 소망의 주여 479장)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