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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 25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 - 약 1: 26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약 1: 25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 -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
본 절은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자에 대한 설명이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라는 구절에서 '있는 자'(파라메이나스)는 '그 안에 거하는 자'라는 뜻이다.
다시 번역하면, '자유의 온전한 법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거하는 자'이다. 복음 진리를 믿고 묵상하며 그 안에 거하는 참된 성도는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행하는 자이다. 즉 참된 신앙은 행위를 동반한다는 뜻이다.
믿음을 강조한 바울 사도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안 됨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 롬 6: 1-2, 15 - 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2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 갈 5: 6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1]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야고보와 수신자가 유대지향적인 배경을 갖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Burdick), 구약 시대의 율법과 대조를 이루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리의 복음'을 의미한다(Moo, Tasker).
* 렘 31: 33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구약 시대의 율법이 사람을 얽매이게 하는 강제적인 것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복음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자유로운 것이다.
* 요 8: 32 -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고후 3: 15-16 - 15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이것은 제도를 통하여 법적 구속력을 지닌 모세의 율법이 신약 시대에 이르러 확실하게 드러난 실체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복음의 특징은
(1) 택하신 자들을 진리와 자유로 인도하는 것에 모순과 결합이 전혀 없는 것을 의미한다.
(2) 자유하게 한다.
즉 구속력을 지녀서 억지로 지키게 하는 것보다 성령의 능력으로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지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Burdick).
'들여다보고'(파라큅사스)는 몸을 구부려서 보는 것을 나타낸다. 혹자는 이것이 '대충 힐끔 보다'라는 의미라고 주장하나(Hort) 본문에서는 문맥상 '주의 깊게 관찰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Tasker, Burdick, Martin).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복음을 묘사한 말씀이다. 복음은 온전한 법이다. 여기에 율법 혹은 법이라는 말은 '원리'를 가리킨다. 이것은 로마서 8: 2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씀에서의 '법'이라는 뜻과 같다.
복음은 완전한 법이다. 구약의 율법은 불완전한 법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했던 제사 제도나 성막 혹은 성전은 신약 시대에 와서 다 폐지되었다. 신약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가 이루신 의로 말미암아 완전한 구원의 원리로 주어졌다.
복음은 또한 '자유하게 하는 원리'이다. 그것은 바울 사도의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바울 사도는 그 서신에서
(1) 복음의 유일성과 복음 안에 있는 자유
(2)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3)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를 밝히 증언하였다.
그 자유는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율법 제도와 율법 체계, 그리고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자유이었다.
* 갈 5: 1 -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바울 사도는 로마서 7: 6에서도 증언하기를,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 율법의 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했다.
2]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듣고 잊어버리는 자'(아크로아테스 에필레스모네스)는 히브리식 표현으로 글자대로는 '망각을 듣는 자'란 뜻이다.
야고보는 개역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알라'(그러나)를 사용하여 '실행하는 자'를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실행하는 자'란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못해도 그 행할 것을 위해 심사숙고하는 자도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Manton).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는 말을 '율법을 행함으로 인해 복을 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렇게 해석할 경우 율법을 지키는 그 일로 인하여 만사가 복을 받게 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실행하는 자체에 의미를 두어서 행위 자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복이라는 것이다.
성도가 죄를 범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다(히 12 장 - 주께서 주시는 징계,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자들에게 주는 경고 참조).
그러나 의와 선을 행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다. 신명기 28장에 계시된 복의 원리는 언제나 동일하다. 그것은 말씀을 순종할 때 받을 수 있는 복이다. 거기에는 건강의 복, 자녀의 복, 재물의 복, 평안의 복, 존귀의 복, 승리의 복 등이 포함된다.
3] 말씀을 들을 때 피해야 할 태도 : 김정남 목사
<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들음과 행함의 문제를 논하면서 무엇이 말씀을 올바로 듣는 자세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는 햇수가 늘다가 보니까 성도의 신앙척도를 가늠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생겼습니다. 바로 ‘듣는 자세’를 통해 어느 정도 신앙상태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다 보면 듣는 자세로 벌써 성적이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듣는 자세가 좋으면 점수를 더 주게 됩니다. 물론 시험 점수를 채점할 때에는 최대한 공정하게 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평가는 시험 점수만 가지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종합적으로 평가하여 듣는 자세가 좋은 학생은 학점을 잘 줍니다. 왜냐하면 그 학점에는 자세 점수와 태도 점수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원리는 영적인 경우에서도 같이 적용됩니다.하나님은 여러 가지를 보시지만 우리의 듣는 태도를 특히 주목하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내용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을 듣는 태도와 자세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말씀을 집중적으로 들어보십시오. 그러한 자세 가운데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고 했습니다. 위 로마서 10장 17절 말씀을 잘 분석해 보십시오. 우리가 믿음이 중요한 것은 압니다. 그리고 말씀이 중요한 것도 압니다. 그런데 위 구절을 보면 믿음 및 말씀과 ‘들음’이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듣는 자세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 말씀을 들을 때 피해야 할 태도 >
오늘날 신앙의 부족한 단면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가 듣는 바른 자세의 결핍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떤 태도를 피해야 할까요?
1. 들을 준비를 하지 않고 듣는 태도
어떤 분은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는 분이 있습니다. “말씀을 잘 전하나 보자! 틀린 부분은 없나 보자!” 그렇게 판단하는 자세로 있으면 어느 말씀이 은혜가 되겠습니까? 그런 자세라면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말씀도 은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요새 담임목회자가 공석이 된 어떤 교회 사이트에 들어 가보니까 젊은 부목사의 설교를 우습게 아는 글들이 많이 올라온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부목사의 설교가 부족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을 인터넷에 올려놓는 것을 보면 듣는 사람들의 자세가 더 큰 문제입니다.
요새 왜 말씀의 기갈 현상이 생기게 되었습니까?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의 내용이 과거보다 못합니까?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자세가 과거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젊은 목사의 말이라고 우습게 들어서는 안 됩니다. 인생을 많이 겪지 않았다고 유치하다고 넘겨짚어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서른에 목회를 시작하시고 서른셋에 마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 보고 젊어서 어떻다는 말을 누가 감히 할 수 있겠습니까? 젊은 목사의 말씀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저는 가끔 1988년 전도사 사역을 처음 시작할 때는 생각해 봅니다. 그때는 나이도 어렸고, 경험도 없었고, 지식도 별로 없었습니다. 정말 여러 모로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있었습니다. 너무 부족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말씀 준비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것! 그것 한 가지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씀 한편을 준비하면서 일주일을 씨름했습니다. 그러자 성도들은 젊은 전도사의 설교에 최선의 심령으로 귀를 기울여 주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때의 심정으로 말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5년간 신학교 강의도 했고, 1992년부터 교회를 개척했으니까 경험도 꽤 있습니다. 사실상 준비가 덜 해도 강단에서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는 정도는 됩니다. 그래도 저는 말씀 준비에 매일 혼신의 힘을 기울입니다.
매일 새벽 말씀을 전한다고 대충 준비하지 않습니다. 제가 언어의 표현력이 남보다 조금 낫다고 해서 준비를 덜 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개 교회 담임목사는 매일 신선한 꼴을 준비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저는 신선한 영의 양식을 위해서 매일 땀을 흘립니다.
제가 아직 40대이기에 아직도 젊은 목사인 편입니다. 그러나 젊은 목사이기에 최선의 기도와 최선의 땀을 더 흘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젊은 목사의 말이라고 우습게 듣지 말아야 할 이유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귀로만 대충 듣지 말고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들으려고 해야 합니다.
2. 듣는 것 자체만 즐기려는 태도
어떤 분은 말씀을 듣는 것만 좋아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런 사람을 ‘부흥회꾼’이라고 지칭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누가 말씀을 잘 전한다고 하면 보따리 싸들고 달려갑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고 “은혜 받았다, 재미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을 재미로 들으면 진짜 참 은혜가 없습니다.
말씀을 진정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으면 믿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믿음이 생겨나면 자연히 행함이 뒤따르게 되고 그렇게 믿음과 행함이 겸비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귀를 간질이지 않고 심령을 울리도록 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진지해 보이지만 아주 위험한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학문적으로 듣는 태도입니다.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들은 말씀에 관한 다양한 공부에는 잘 참여합니다. 벧엘공부, 크로스웨이공부, 주제별공부 등 말씀 공부는 많이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공부만 하는 사람들은 한없이 공부하고 한없이 탐구할 뿐, 별로 열매가 없는 경우를 봅니다. 그것도 말씀을 듣기만 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는 것 자체를 예배로 여기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것이 공로가 되기도 합니다. “나는 한 시간도 안 빠졌다”고 하는 것이 자랑입니다. 그러나 듣고 받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결국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단지 “안 빠졌다”는 사실만 있습니다. 말씀을 들었으면 소화하여 양식으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3. 듣고 나서 실천하지 않는 태도
어떤 분은 설교를 들을 때 “아멘!” 소리를 크게 합니다. 목회자가 제일 좋아하는 성도는 “아멘!”을 잘하는 성도입니다. 설교할 때 “아멘!” 소리로 화답해주면 얼마나 힘이 나는지 모릅니다. 목회자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부조입니다. 성도는 말씀을 들으면 은혜를 받지만 목회자는 아멘 소리를 들으면 은혜 받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전할 때 아멘으로 반응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아멘!” 소리를 크게 하면서 마음도 최고의 ‘아멘의 마음’이 되고, 생활도 최고의 ‘아멘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멘은 “그렇습니다!”라는 뜻을 포함할 뿐 아니라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뜻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입의 아멘이 손의 아멘으로 실천되어져야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을 보면 한 아버지가 두 아들 중에 맏아들에게 말합니다.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그러자 맏아들은 “가겠습니다.”라고 대답은 잘했지만 안 갔습니다. 요즘 교인 중에 이 맏아들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아멘은 열심히 해놓고 아멘의 삶을 향해서는 가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에서는 ‘듣는다는 것’과 ‘순종한다는 것’이 같은 개념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듣기만 하는 것이 체질화되면 스스로 속는 자가 됩니다. 자기를 고의적으로 속이지는 않지만 그렇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래서 아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시험을 당하고 보니 아는 것이 없습니다. 능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시험을 당하고 보니 능력이 없습니다. 심지어 중생한 줄 알았는데 시험을 당하고 보니 중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이 생겨나는 이유는 아멘의 삶을 살지 못하고 스스로 속아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동화해야 진정한 은혜가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교회에 참여해서 봉사하는 자만이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반면에 헌신과 봉사가 없으면 은혜의 깊은 뜻을 모르게 됩니다. 봉사하고 바쳐본 사람만이 은혜의 신비한 능력을 알 수 있습니다.
아멘에 내포된 두 가지 삶이 겸비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아멘이라고 동의했으면 그 아멘의 삶을 행하십시오. 믿음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신행일치의 삶은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놀라운 원천이 됩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4] 율법에 내포된 사랑과 자유 : 김정남 목사
< 법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
오늘 본문은 ‘온전한 율법과 참된 경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5절을 보십시오. 이 부분을 보면 마음에 쏙 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오묘한 뜻이 내포된 말씀이고, 참으로 감격스러운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법’ 하면 속박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법은 속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신호등을 볼 때 고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진짜 사회인이요, 진짜 성도입니다. 그래서 부담 없이 신호등의 지시에 따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의 교통문화가 얼마나 자유롭게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호등을 볼 때 답답함을 연상하고 속박을 연상하는 사람은 율법주의자입니다. 물론 억지로라도 신호등을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틈만 나면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위반하려는 마음을 가집니다.사실상 모든 법은 자유하게 하고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 안에서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10계명을 듣고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주님의 명령을 듣고 자유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저절로, 자발적으로 기쁘게 말씀을 지키려고 합니다.
신행일치의 삶! 아무리 가르쳐도 그러한 삶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을 고쳐먹으면 그러한 삶이 비교적 쉬워집니다. “법은 즐거운 것이다. 법은 자유하게 하고자 있는 것이다.”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족한 사람은 법을 속박으로 느끼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법이 싫다.”고 합니다. 그 말은 “빛이 싫다.”는 말과 같습니다. 도적질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달빛이 싫을 것입니다. 그래서 보기 좋은 만월을 보고 제 영업을 방해한다고 눈을 흘기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법을 속박으로 느꼈습니다. 율법은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요, 힘겨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법에 치이고 눌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법으로 명예를 높였고, 반대로 어떤 사람은 법을 차버렸습니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얼마나 많이 발견하고 있습니까?
계룡산에 성황이라고 자처하는 양모 교주가 있습니다. 너무 신기한 삶을 살아서 제가 그를 한번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원래 그는 성결교 목사였습니다. 그는 처음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 몸을 드리겠다고 스스로 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자가 되어도 자기의 삶에 새로운 변화는 별로 없었습니다. 결국 기독교에서 진리를 찾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율법주의의 반사작용!”이라고 지칭하고 싶습니다.가끔 보면 법을 속박을 주는 것으로 알고 지키려다가 한계를 느끼고 법에 대해 나쁜 감정을 품은 후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이단 사상이 기생하는 최상의 온실이 됩니다.
요새 몇 단계 회개를 전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구원을 얻었다, 잃었다 합니다. 그래서 처음 그 소리를 들으면 무서워서라도 그들의 교리를 지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견디다 못해서 그것도 버리고 결국 하나님도 버리게 됩니다.
그런 결과가 생기는 이유는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요? 그것은 사실상 그럴듯하게 보이는 율법주의의 해악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단은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헌신을 강요합니다. 법으로 얽어맵니다. 율법주의로 사람을 속박하다가 단물 다 빨아먹고 그 다음에는 나 몰라라 합니다.
< 참된 법은 사람에게 자유를 줍니다 >
참된 법은 사람을 자유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법을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사실상 율법은 원래 의미는 자유에 있습니다.우리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자유의 기쁨을 누리라고 주신 것이지 괴로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양심을 주신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20년 전 도둑질한 것이 수시로 회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회개하는 마음인 것 같습니다. 회개는 좋습니다! 그러나 20년 전 도둑질한 것을 수시로 회개하는 모습은 신앙건강과 정신건강이 심히 염려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믿고 잊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책감에 사로잡히라고 우리에게 양심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양심은 무엇입니까? 잘못했을 때 괴로운 것이 양심의 역할입니다. 거짓말했을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양심의 존재이유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할 필요도 있습니다.양심이란 내가 선한 일 했을 때 내 마음이 기쁜 것이라고 말입니다. 착한 일 하고 나면 내 마음이 좋아지는 것이 바로 양심입니다.
우리는 법을 모두 어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양심이 우리의 속박이 됩니다. 그래서 율법이 살리는 법이 아니라 죽이는 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두 법을 어겼기 때문에 법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이제는 법을 나를 행복하게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 법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
법은 다른 말로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서는 누구를 괴롭히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상 질서는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질서는 결국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만 혼란은 결국 우리를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과 명령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있기에 그 법이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누가 우리를 억울하게 죽이려고 할 때 그의 귀에 이 소리가 들립니다. “살인하지 말라.” 그 소리로 인해 사람을 소중하게 보게 됩니다. 그처럼 법에는 사랑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남의 순결을 짓밟는 입장에서는 속박이겠으나 순결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 율법이 사악한 사람들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고마운 법입니까? 그 법이 있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딸들에 대해 염려가 현저히 줄어들게 됩니다.
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대생의 지갑이었습니다. 그 지갑 안에는 돈이 일만 구천 원 들었고, 카드가 몇 개 들어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저는 그때 믿을만한 대학 당국자에게 주인을 찾아주라고 신신당부하고 그 지갑을 주었습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지 않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거짓증거하지 말라.”는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속일 때 남이 속으면 기분이 좋을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속임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기분 나쁜 것입니다. 이런 인격의 침해를 당하지 않도록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율법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율법에 대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 및 명령을 대할 때 순간적으로 어떤 느낌을 가지십니까? 그 안에서 사랑은 연상하고, 그 안에서 자유를 느끼십니까? 그리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을 하고 계십니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정말 행복한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런 행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약 1: 26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
신약 성경에서 본문에만 나오는 '경건하다'(드레스코스)는 '기도문을 중얼거리다'에 해당하는 '드레오마이'에서 유래된 듯하다(Robertson).
이는 예배의 외적인 모습 즉 기도, 구제, 금식 등을 언급하는 것으로서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암시한다. 이렇게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는 사람이 말에 대해서 자제하지 못할 때 자기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된다.
1]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재갈 먹이지'(칼리나고곤)은 '재갈'을 의미하는 '칼리노스'와 '이끌다'의 뜻인 '아고'의 합성어이다. 이는 재갈 먹이지(코뚜레) 않는 말을 함부로 날뛰지 못하도록 막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Lenski) 이것은 남을 비방하거나 악담하는 것을 제어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혀를 절제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확신하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렇게 말과 행위가 다른 경건은 위선자들에게서 오는 헛된 것이다.
* 마 6: 2, 16 -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누가 자신이 경건하고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않아서 조심스런 말을 하지 않고 선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그의 경건은 헛것이다. 그가 정말 경건하고 믿음이 있는 자라면, 그는 자신의 언어생활부터 고쳐야 한다. 그는 진실한 말, 선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한다. 그의 말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