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살수 대첩 > 대첩大捷 (큰 대, 이길 첩)
전쟁 국가 | 고구려와 수나라의 싸움 |
원인 | 고구려의 팽창(고구려의 요서지방 공격)과 수나라의 대응 |
성격 | 고구려와 수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패권 다툼 |
장군 | 을지문덕 |
싸움 | 고구려의 을지문덕 : 수나라의 양제, 우중문 |
결과 | 고구려의 승리(612), 수의 멸망(618) |
<동· 서 세력과 남· 북 세력>
돌궐 | ||
고구려 | ||
수 또는 당 | | 신라 |
백제 | ||
왜 |
< 안시성 싸움 >
전쟁 국가 | 고구려와 당의 싸움(644-645) |
원인 | 고구려의 신라와 당에 대한 강경책 |
성격 | 고구려와 당의 동북아시아에 대한 패권 다툼 |
장군 | 양만춘, 연개소문 |
싸움 | 고구려의 양만춘, 연개소문 : 당의 태종 |
결과 | ▪ 고구려의 승리 ▪ 한반도의 방파제 구실을 함 ▪ 고구려의 국력 쇠퇴, 국토 황폐 ▪ 국민들은 전쟁에 염증을 느낌 ▪ 신라와 당의 결속력 강화 (이후에, 당은 신라와 연합) |
평가 | 단기적으로는 이긴 전쟁이었지만, 장기적으로는 진 전쟁이었다. 최후에 이긴 자가 최후의 승리자다. |
< 안시성 싸움까지의 과정 >
신라 진흥왕의 한강유역 점령(553) → 나·제 동맹 결렬 → 관산성에서 백제와 신라가 싸움· 성왕 전사(554) → 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 → 대야성 함락(합천, 김춘추의 사위와 딸 죽음) → 신라의 위기의식 최고조 → 김춘추는 개인적 원한 갚고 국가적 위기의 탈출을 위해 연개소문을 만나 지원 요청 → 연개소문의 거절 → 당에 원병 요청<진덕여왕의 치당태평송> → 고구려의 당에 대한 강경책 → 신라와 당의 군사동맹 결성 → 당의 고구려 공격(644) → 안시성 싸움(645) → 고구려의 승리 |
고구려의 수· 당군 격퇴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
▪ 잘 훈련된 군대(강력한 군사력) ▪ 성곽을 이용한 견고한 방어 체제(축성술, 청야 전술) ▪ 탁월한 전투 능력(용맹성) ▪ 요동지방의 철광지대 확보 ▪ 강인한 정신력과 애국심 |
고구려의 수· 당군 격퇴의 의미는? |
민족적 위기를 구하고, 한반도의 방파제 구실을 함 |
나 ․ 당 동맹의 체결 =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 체결 |
신라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당 태종은 작전을 바꾸어 신라와의 연합을 꾀함) → 나․당(신라와 당) 군사 동맹 결성(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당과 연합하여 멸망시킨 후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를 당에 넘겨주겠다고 비밀 약속을 함.648) → 백제의 상황(의자왕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력 쇠퇴) → 나 ․ 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김유신의 5만 신라군 탄현을 넘어 황산 공격, 소정방의 13만 당군 금강구로 진격 후 사비성 공격함. 즉, 신라는 동쪽에서 당은 서쪽에서 백제를 좌· 우 양면으로 협공한 것이다.) →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 전멸 → 백제의 멸망(660) →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 등 (5도독부 설치) → 백제 지배 시작 나․당 연합군 연합군의 고구려 공격 시작(661) 백제를 무너뜨린 신라와 당은 곧바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서둘러, 이듬해 당의 수륙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하고 신라도 군사와 군량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당군은 연개소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참패하여 철수하고, 신라군(김유신)도 혹독한 추위와 고구려군의 저항에 막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고구려 말의 정세(잦은 전쟁으로 국력 소모, 백제 멸망으로 외교적 고립, 거란 ․ 말갈족의 당 복속으로 요동 방어선 약화, 연개소문 사후의 권력 투쟁 - 665년. 장자 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었으나 남건, 남산이 남생 축출하자 당에 투항하여 원병 요청. 연정토 신라 투항, 남생은 당에 항복하여 당의 고구려 공격 때 길잡이가 되었다.) → 국력 약화 → 나 ․ 당 연합군(신라 - 김인문, 당 - 이세적)의 고구려 공격 → 이세적이 이끈 당군은 요동 방면의 여러 성을 함락시킨 후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하고, 김인문이 이끈 신라군도 평양성에서 당군에 합세하였다. → 나 ․ 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는 평양성을 굳게 지키면서 1년간이나 항거하였지만 끝내 성이 함락되어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 평양성이 함락된 후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669) 2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669년에는 고구려인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고구려인 약 2만 8천여호를 당나라로 강제 이주시켰다. → 당의 고구려 지배 시작 → 이러한 당나라의 움직임에 대해 고구려 유민(遺民)들은 강력한 저항에 나섰다. |
(1) 고구려와 수의 전쟁 : 살수대첩(612)
1) 6세기 후반 내외 정세
신라 진흥왕의 한강 유역 점령(삼국의 주도권 장악) → 당항성을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 수용 → 고구려와 백제는 연합하여 신라에 협공을 가함 → 위기를 느낀 신라는 수(隋)에 도움 요청 → 수나라의 침입을 염려한 고구려는 돌궐과 연합하는 한편 전략적(戰略的. 군사상의 대책 ) 요충지(要衝地.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인 요서 지방에 대한 선제(先制)공격을 가함.
2) 수의 고구려 침입
고구려의 요서 지방 공격(영양왕.598) → 수나라 문제[文帝. 541~604]의 침입(육해군 30만) → 육군(장마로 군량 운반 차단, 굶주림과 전염병), 해군(산둥 반도에서 평양으로 향하다가 폭풍우 만나 배 난파) → 1차 침입 실패 → 양제[煬帝 .569~618. 시호 양(煬)은 악랄한 황제를 뜻한다고 한다]의 2차 침입(하북성 탁현에 24군으로 구성된 113만 명 집결 - 출발에 40일 소요 - 부대 깃발이 960 리 - 해군의 뱃머리 수백 리) → 고구려는 요하(랴오허 강)에서 1차 저지하였으나, 결국 수나라 군대는 요하를 건넘 → 요동성 공격 → 고구려는 수성전(守城戰), 지구전(持久戰) 전개 → 요동성 공격에 별다른 진척이 없자, 30만 명의 별동대(別動隊. 본대에서 떨어져 나와 전반의 작전에 유리하도록 행동하는 부대)를 조직하여 평양성 공격에 나섬 → 평양성을 지키던 을지문덕 장군은 유인전과 청야(淸野. 적에게 식량이나 말먹이를 빼앗기 않도록 식량이나 모든 백성을 성안으로 피난시키는 것) 전술로 수군을 지치게 만듦 → 평양성 30리 밖까지 적을 유인한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림 → 퇴각(退却)하는 수나라 군대를 살수(청천강 유역)에서 대파(大破)함 → 살아서 돌아간 사람이 2700여명 정도 (살수대첩. 612)
신무기(운제 - 성벽을 기어오르는데, 전호피차 - 성벽에 다가가 성 아래로 구멍을 파는데, 흉당차 - 군사를 성벽 가까이 접근시켜 공격하는 무기)를 동원하여 3차 침입(613) → 요동성 함락에 실패 → 내란(內亂) 소식을 듣고 퇴각 → 제4차 침입 → 오랜 전쟁에 지쳐 있던 고구려는 614년 거짓으로 항복을 한 후 수나라 군대를 돌려보냄 → 수의 멸망(618) → 4차례에 걸친 수나라의 공격은 실패로 끝이 남.
■ 수나라와 고구려의 실제 병력 수는?
학자들에 따르면 수나라는 60만 명 정도, 고구려는 30만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3) 수의 멸망(618) → 당의 건국(이연)
① 고구려 원정의 실패 → 국력 소모
② 무리한 토목 공사
③ 양제의 사치
→ 각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남
(2) 고구려와 당의 전쟁 : 안시성 싸움(645)
1) 천리장성(千里長城) 축조
당 고조는 건국(618) 직후 도교 전래, 포로 교환(1만 여명) 등을 통하여 화친 관계 유지 → 당 태종의 즉위(626. 당 고조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이세민. 수나라를 멸망시키는데 공헌하였으나 형과 동생이 시기하자 이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강제로 퇴위시킨 후 황제가 됨) → 긴장 고조, 당 태종은 국내 정치가 안정되자 고구려에 압력을 가함 → 고구려는 이에 대비하여(당의 침략에 대응하여) 연개소문의 주도 아래 랴오허 강(요하) 주변의 국경선을 따라 천리장성(발해만의 부여성 ~ 동북의 비사성. 631부터 16년간 공사) 쌓음
2) 연개소문 의 집권
당과의 긴장관계 고조 → 고구려의 영류왕(618 ~ 642)은 당과의 화해를 기본으로 하는 북수남진(北守南進. 북으로 당과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남쪽을 신라를 공격) 정책 추진 → 강경파 연개소문과 충돌 → 연개소문 변방으로 축출됨 → 연개소문은 천리장성을 축조하면서 세력을 키움 → 영류왕의 연개소문 제거 시도 →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조카인 보장왕(642 ~ 668. 마지막 임금)을 옹립(擁立. 받들어서 임금의 자리에 모시는 것) → 집권하여 대막리지가 됨( 행정과 군사권을 장악한 최고 관직. 642 ~ 665) → 당에 대한 온건세력 제거 후 → 무단적(武斷的. 무력이나 억압에 의하여 정치를 행함) 독재 정치(獨裁政治. 통치자가 혼자서 판단하거나 결정하여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 실시
3) 안시성 싸움(645)
당과 고구려의 국교 단절(644) → 고구려의 강경책에 위기를 느낀 신라는 당과 연합함 → 신라와 연합한 후, 당 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임금을 죽인 연개소문을 단죄한다는 명분) 구실로 고구려에 대한 침략 개시(開始) → 당군의 목표는 요동성이었다. 요동성은 수의 침략 이후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요새지로 알려져 있었고 요동성과 안시성 등을 점령해야만 평양성으로의 진격이 가능했다. → 643년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해 달라는 신라의 요청(고구려와 백제가 연합하여 신라를 압박하고 있었음: 여· 제 동맹 체결 - 642년)을 받은 당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차후 신라를 침범하지 말도록 권유하였으나 고구려가 이에 불응하자(사신 감금) 연개소문의 영류왕 살해 및 대신(大臣) 학살사건의 문책을 표방하고 644년 11월 당 태종 친솔(親率)의 10만 고구려 원정군을 일으켰다. 이듬해 4월부터 개모성 ․ 비사성 ․ 요동성 ․ 백암성을 차례로 점령한 당군은 6월에는 안시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격하였다. 요동성의 함락으로 요동반도에 길게 형성되었던 전선은 안시성으로 압축되었다. 안시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데가 없음)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에 고구려는 북부 욕살 고연수, 남부 욕살 고혜진을 대장으로 한 지원군을 안시성에 보냈으나 패하여 두 사람은 3만 6800명을 이끌고 항복하였다. 이에 당태종은 이세적을 시켜 안시성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 그 휘하 장수 도종은 먼저 많은 군사를 동원하여 안시성 남쪽에 토산(土山)을 쌓아올려 점점 성 높이와 같게 하였으나 성안에서도 이에 따라 성을 높여 막았다. 당군은 하루에 6~7차례 충거(衝車 :큰 나무로 성에 충격을 주는 攻城器) ․포거(抛車:돌을 날리는 공성기) 등을 동원, 성을 파괴하면 성안에서는 곧 목책(木柵)을 세워 이를 보완하였다. 이에 도종은 연인원(延人員. 어떤 일에 종사한 인원을, 하루에 완성한 것으로 가정하여 계산한 총수) 50만을 동원하여 60일에 걸쳐 안시성보다 훨씬 높은 토산을 쌓는 데 성공하였다. 당군은 부복애를 대장으로 하는 부대에게 토산의 정상에 올라 수비하게 했으나 갑자기 토산이 무너지며 성에서 고구려군이 쏟아져 나와 토산을 탈취하여 당군은 토산의 탈환전을 3일 동안 계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싸움은 날마다 6~7회의 가열(苛烈)한 공방전이 계속되어 당군이 안시성을 포위한 지 3개월이 지났으나 요지부동(搖之不動. 흔들어도 꼼짝하지 않음), 고구려군의 용맹성에는 당태종도 어찌할 수 없었다. 9월에 이르러 기후는 이미 한랭하기 시작하고 병마(兵馬)의 양식도 떨어져 당태종은 할 수 없이 철군(撤軍)하기로 결정하였다. 당군이 철군을 시작하자 안시성의 성주가 성 위에 올라 당태종을 비록 바라보고 송별의 예(禮)를 표하자 당태종은 적(敵)일지라도 성주의 영웅적인 지휘력에 감동하여 비단[絲繪] 100필을 보내 고구려 국왕에 대한 그의 충성을 기렸다.
■ 안시성 성주(城主)의 이름은?
야사(野史. 민간에서 사사로이 기록한 역사 - 송준길의 동춘선생별집,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양만춘(楊萬春 또는 梁萬春)이라고 전하나 정사(正史.정확한 사실의 역사 또는 중국의 역사)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 안시성의 위치는?
당시 인구 약 10만에 이르던 고구려의 영지(領地)로,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하이청[海城] 남동쪽에 있는 잉청쯔[英城子]이다.
4) 수․당나라 군대 격퇴의 원동력(중요)
① 잘 훈련된 군대와 성곽을 이용한 견고한 방어체제
② 탁월한 전투 능력 및 요동 지방의 철광지대 확보
③ 강인한 정신력
5) 고구려의 수 ․ 당군 격퇴의 의미
고구려의 수․당군 격퇴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 신라까지 구함으로써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 한반도의 방파제 구실을 함
(3) 나․당 동맹의 체결 : 신라와 당나라의 군사동맹 체결
→ 신라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당 태종은 작전을 바꾸어 신라와의 연합을 꾀함) → 나 ․ 당(신라와 당) 군사 동맹 결성(신라는 고구려와 백제를 당과 연합하여 멸망시킨 후 대동강 이북의 한반도를 당에 넘겨주겠다고 비밀 약속을 함.648) → 백제의 상황(의자왕의 사치와 향락으로 국력 쇠퇴) → 나 ․ 당 연합군의 백제 공격(김유신의 5만 신라군 탄현을 넘어 황산 공격, 소정방의 13만 당군 금강구로 진격 후 사비성 공격함. 즉, 신라는 동쪽에서 당은 서쪽에서 백제를 좌· 우 양면으로 협공한 것이다.) →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의 5천 결사대 전멸 → 백제의 멸망(660) →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 등 (5도독부 설치) → 백제 지배 시작 → 나․당 연합군 연합군의 고구려 공격 시작(661) 백제를 무너뜨린 신라와 당은 곧바로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서둘러, 이듬해 당의 수륙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하고 신라도 군사와 군량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당군은 연개소문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 참패하여 철수하고, 신라군(김유신)도 혹독한 추위와 고구려군의 저항에 막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고구려 말의 정세(잦은 전쟁으로 국력 소모, 백제 멸망으로 외교적 고립, 거란 ․ 말갈족의 당 복속으로 요동 방어선 약화, 연개소문 사후의 권력 투쟁 - 665년. 장자 남생이 대막리지가 되었으나 남건, 남산이 남생 축출하자 당에 투항하여 원병 요청. 연정토 신라 투항, 남생은 당에 항복하여 당의 고구려 공격 때 길잡이가 되었다.) → 국력 약화 → 나 ․ 당 연합군(신라 - 김인문, 당 - 이세적)의 고구려 공격 → 이세적이 이끈 당군은 요동 방면의 여러 성을 함락시킨 후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하고, 김인문이 이끈 신라군도 평양성에서 당군에 합세하였다. → 나 ․ 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는 평양성을 굳게 지키면서 1년간이나 항거하였지만 끝내 성이 함락되어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였다. → 평양성이 함락된 후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669) 2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 669년에는 고구려인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하여 고구려인 약 2만 8천여호를 당나라로 강제 이주시켰다. → 당의 고구려 지배 시작 → 이러한 당나라의 움직임에 대해 고구려 유민(遺民)들은 강력한 저항에 나섰다.
도호부 | 도독부와 그 밑의 여러 주를 통할하기 위하여 국경 주변에 설치한 최고 통치 기관 <지키고> |
도독부 | 당나라가 점령한 지역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목적으로 설치한 통치 기관으로, 하나의 도호부 밑에는 여려 개의 도독부가 있었다. <감독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