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위탁>을 받아들고 읽고자 했으나 저자의 머리말과 동 비딸 러오네 신부님에 대한 약력을 읽은 후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에 두고서 읽어보려고 했지만, 자신의 영적 수준을 알려주기라도 하듯이 얼마 지나지 않아 피곤해졌다. 사실 영성서적은 성경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시어 영적 명오(明悟)를 열어주시지 않으면 읽기가 쉽지 않다. 더군다나 <거룩한 위탁>은 역자 특유의 필체, - 전통 한학에서 조금 진전된 현대적 문장 스타일에다 아마 일본어판을 번역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바로 그로 인한 어투나 수사가 책의 가독률(可讀率)을 떨어뜨렸다. 오늘 오후에 <거룩한 위탁>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허락되었다. 저자의 머리말과 제1장, 그리고 결론을 읽었는데, "아! 대단한 책이구나!"하는 감탄이 나왔다. 저자 동 비딸 러오데 신부(트라피스트회)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까지를 사신 분이다. <거룩한 위탁>(1918년 저작)은 그의 <묵상의 각가지 길>과 <시또 수도회 지도서>와 함께 러오데 신부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저자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거룩한 위탁>은 '자신의 체험에 의해서 뒷받침된 저술'로 "자신의 경험에 의하여 알지 못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할 정도로 스스로 애호한 책이었다. 러오데 신부가 말하는 "내맡김(위탁)"은, 교회의 전통적인 교설 외에 당시 두 가지 계보의 대립적인 해석을 검토하여 "내맡김"에 대한 영성적 종합을 한 것이다. 러오데 신부님이 말하는 "내맡김"에 대한 당시의 두 가지 해석이란 일종의 적극적인 해석과 소극적인 해석의 경향을 말한다. 전자인 적극적인 해석은 즉 일종의 비약으로 지나치게 임의적으로 자신을 고뇌를 향하여 행하려는 것이고, 후자인 소극적 해석이란 자신의 先見이나 노력까지도 희생하여 자신의 영혼을 지나친 수동적인 상태로 두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두 경향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하여 러오데 신부는 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와 성 알퐁소의 영성적 해석, 특히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영성에 중심을 두고 정리했다고 저자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책의 전체의 구성은 "거룩한 위탁의 본질"과 기초, 대상, 이 영성의 우월성과 효과 등 서론 및 결론 외 총 4편(제1편 10장, 제2편 7장, 제3편 15장, 제4편 2장)으로 되어 있다. 글 묶음으로 헤아려보니 65개의 꼭지로 나뉘어진다. 일단 제1장과 결론을 읽었는 데 약 2시간 정도가 걸렸다. 처음에는 익숙치 않았으나 차츰 그 내용이 들어왔다. 버릴 것이 없을 정도로 글의 전개가 완벽하였다. 한번 정리해보았다. 먼저 제1장을 출발시켜본다. - 제1장 최고 규범으로서의 '하느님의 뜻' - 우리의 영적 생활의 완성이나 영혼의 구원은 자신을 뿌리로부터 정화시켜 모든 선한 덕으로 진보하고, 사랑에 의하여 하느님과 일치시켜 점점 깊이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힘만으로 불가능하며, 오직 하느님의 도움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의 진기한 생명체이니 하느님의 도움이 있다면 훌륭한 성업을 이룰 수 있는 존재다. 동시에 그는 하느님 없이는 가장 비참한 자로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우리의 성화는 물론이고 영혼의 구원은 하느님의 활동과 우리의 협력, 즉 하느님의 의지와 우리의 의지와의 끊임없는 일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느님과 함께 활동하는 자는, 순간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게 하며, 하느님에게서 떠나는 이는 즉시 넘어지고 무익하며 초조 안에서 지쳐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가장 사소한 행위에서나 마찬가지로 중대한 일에서도 날마다 시시각각 하느님과 함께 활동하는 것이 극히 중요하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것도 공허하고, 마치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허망한 꿈과 같이 형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 성화를 위하여 수도원이라는 '하느님에의 봉사의 학교'에 부르시어 우리를 그 군기(軍旗) 아래 소집하여 그분 스스로 우리를 전장(戰場)으로 이끌고 계신다. 그런데 이 끊임없는 종속은 우리에게 무수한 자아포기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자주 자기의 천박한 의견이나 일시적인 원망을 희생하여야 한다. 본성은 불평을 하겠지만 우리는 경계하여 그런 것에 귀를 귀울여서는 안된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영광과 우리의 행복 외에는 아무 것도 원하시지 않는다. 우리의 인성을 완성하시고 보다 높은 생활로 이끄시어 현세에 있어서의 참된 행복과 내세에서의 복락의 씨를 우리가 얻게 하시려는 것뿐이다. 우리가 자신의 가련한 지혜의 광명에 따르며 제 멋대로 상상에 지배되어 살기 위하여, 현명한 전능하신 손을 뿌리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며, 또한 불행한 일이다. "너 만일 영생에 들어가기를 원하거든 계명을 지켜라."(마태 19, 17)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하늘에 계신 성부의 뜻"을 수행해야 한다.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는 자는 살고, 그것에서 떠나는 자는 죽고 멸망하고 만다. 만일 그대가 완덕의 절정에 이르기를 바란다면 하느님 뜻을 완수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는 행위에 의한 확증되는 신앙, 곧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는 사랑 외에는 없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정도에 따라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이다. "오직 열망해야 할 것은 전력을 다하고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단호히 자신의 의지를 하느님의 의지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진보가 미지의 다른 특이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어서는 안된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나로서는 진심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자기에에 가까운 이를 자기와 같이 사랑하는 것 외에 완덕이 있다는 것은 전연 모른다."(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하느님의 의지에 대한 완전한 복종은, 사랑의 가장 고귀한, 가장 순수한 표현이다. 곧 이 사랑에서 꽃핀 다시 없는 아름다운 꽃이다."(로드리게스 신부) "완덕을 고행, 영성체, 염경기도 등의 다수에 있다고 하는 이는 분명히 오류에 빠지고 있다. 이러한 업(業)이 선업(善業)이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이런 것을 바라실 경우에 한한다는 것이며,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그것을 기꺼이 여기시기는커녕 도리어 이를 싫어하시고 또한 벌하신다. 모든 완덕, 모든 거룩한 일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을 수애하는데 있다. 결코 자기의 뜻에 따라서는 안된다. 항상 하느님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만에 전념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두 이를 행하며, 하느님께서 행하시는 것은 모두 이를 바란다."(성 알퐁소의 제자 성 오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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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로라20.07.24 21:33
<하느님께서는 우리 성화를 위하여 수도원이라는 '하느님에의 봉사의 학교'에 부르시어
우리를 그 군기(軍旗) 아래 소집하여 그분 스스로 우리를 전장(戰場)으로 이끌고 계신다.>
아멘
아버지 언제나 우연은 없는듯 합니다.제가 오늘 여기에 머무른 것 또한 주님의 이끄심과 부르심인 듯 합니다.
저의 모든걸 당신께 맡깁니다.저를 이끌어 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