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일(월요일) 오늘이 9월 1일, 어느새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들었다. 며칠 전보다 벌써 백여 km 북쪽이라서인지 대평원의 대부분에선 이미 밀 추수가 끝나고 야생 오리들만이 사방으로 떼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오후 네 시경 나는 사방에 조그만 날개를 반짝이며 날고 있는 벌레들을 발견했다. 저녁 날개로 햇살을 만사하며 날고 있는 그들을 헤치며 지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온몸이 따갑기 시작했다. 웬일인가 싶어 나의 몸을 내려다 본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파리 만한 모기들이 온몸에 새카맣게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모기들은 낮에 노상에서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는데 지독한 모기도 있다 싶어 멈추어 선 사이 모기들은 옷 뿐만이 아니라 얼굴, 손, 목을 향해 사정없이 달려들었다. 당황한 나는 그 들을 쫓으려 팔을 휘둘렀으나 수많은 모기떼를 어찌할 수 없었다. 이런 때는 삼십육계 줄 행낭이 최고인 듯 싶어 전 속력으로 뛰었다. 그러나 모기떼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할 수없이 잠자리를 찾기 위해 앞으로 멀리 가 있었던 Mr. 장을 무전으로 불렀으나 대답이 없었다. 얼마동안 뜯기면서 달렸을까. 마침내 깜박이고 있는 캠퍼의 비상등이 보였다. 차안으로 허겁지겁 뛰어 들어서야 가까스로 모기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우리의 캠퍼가 주차한 곳은 유료 캠프장이었으나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모기향을 피우고 밖을 보니 자동차의 유리창에 모기들이 새까맣게 붙어 있었다. 캠프장 사용료를 내기 위해 사무실에 갔더니 문 앞에 “십 불을 앞의 통에 넣고 전기와 물을 연결하시오 -주인“ 이렇게 써 있었다. 모기 때문에 주인도 어디론가 피난을 간 모양이었다. 해가 넘어가자 기온은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고 얼마 후 유리창에 붙어있던 모기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밤에는 기온이 내려가 활동을 할 수 없으니 낮에 모기들이 활동하는 것 같았다. 그 많던 모기가 어디로 갔을까? 궁금한 마음을 풀지 못하고 잠이 들고 말았다. 9월2일(화요일) 오후에는 바람이 몹시 불고 기온마저 떨어져 걷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설상가상 저녁이 되자 바람에 흙먼지까지 일어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다행히 길옆에 동네에 양로원이 있어 무작정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간호사인 듯 한 뚱뚱한 여자가 나오며 얼마 전 리자이나 TV에서 우리를 보았다며 아주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우선 흙 먼지를 씻기 위해 양로원의 샤워시설을 쓸 수 있겠냐고 요청하였다. 고맙게도 그녀는 쾌히 승낙해 주었다.. 나와 Mr.장이 안으로 들어가자 노령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나의 특이한 옷차림을 보고 무언가 말을 걸려고 다가왔으나 간호원의 만류로 대화는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외롭고 사람이 그리우면 저럴까?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새삼스러운 질문이 머리 속을 맴돌았다. 농촌 벌판에 있는 시설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시설이었다. 중앙 안내 데스크를 지나갈 무렵 TV에서 다이아나(Diana) 전 영국 왕세자비의 차량사고와 사망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짧고 한 많은 생애를 마친 그녀에게 깊은 애도를 보냈다. 샤워 후 캠퍼로 돌아와 저녁 식사 일찍 잠자리에 들었으나 바람소리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9월3일(수요일) 맑음 아침 일찍 우리는 싸스카툰(Sascatoon)시내를 향하여 행진하여 들어갔다. 이곳에는 2-30명의 교민이 살고 있다는데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우리는 언론 인터뷰가 예정되어있는 시청을 향하여 3시간 정도 행진하여 정오 경 그곳에 도착하였다. 내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 Mr.장이 시의 기념 뱃지를 얻기 위해 시청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의 얘기 인즉 시청에 들어가 기념 배지를 얻은 후 일정에 없던 시장 면담을 요청했는데 여의치 않음을 직감하고 그는 말을 바꾸어 비서에게 실은 우리가 바빠서 시장을 못 만나고 가니 이해해 달라고 해서 시청 안을 웃음바다로 만들고 나왔다며 역전승을 한 권투선수처럼 기분이 좋아 있었다. 얼마 후 도착한 신문사 여기자는 나의 행진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있었으며 인터뷰 도중 나의 북한 비자 신청이 기각될지도 모른다는 의미 심장한 말을 했다. 그녀가 나의 북한 비자 신청( 남북종단을 위해 신청한)을 어떻게 알았으며 그 소식은 어디서 나온 것인지 물었지만 그녀는 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북한 비자가 나오지 않으면 나의 남북 종단 꿈은 이루어 질 수 없기에 그녀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언론과의 인터뷰 후 우리는 다시 북서쪽으로 도시를 빠져 나오면서 한 고등학교를 지나치게 되었다. 마침 점심 시간에 운동장에 있던 한 무리의 학생들이 우리를 향하여 손을 흔들었다. 나와 뒤에서 에스코트 하던 Mr.장이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하자 순식간에 수 백 명이 우리에게 몰려들었다. 한동안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그 중 한 여학생이 나에게 “Are you Korean?"하고 물었다. 뜻밖의 질문 이었다. 그 곳을 보니 수많은 백인 중에 유일한 아니 한눈에 한국인 임을 알 수 있는 여학생이 있었다. 동족끼리는 통하는 감 같은 것이 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녀는 왜 우리 부모는 당신들이 여기에 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냐고 반문을 하였다. 나는 할말을 찾지 못하고 “아마 바빠서 나오지 못했을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의 머리 속에는 “다른 도시와 달리 이곳 교민들은 나의 캠페인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떠나질 않았다.. 분명 리자이나에서 이곳의 여러 사람들에게 통보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교민이 있는 도시를 지나며 한 사람의 교민도 만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뭔가 사정이 있었겠지 생각하며 그 여학생을 만난 것으로 섭섭한 마음을 달랬다. 도시를 지나 16번 옐로우헤드 횡단 도로를 따라 에드몬턴으로 향했다. 해질 녘 숙영지에 도착해 보니 랭햄(Langham)이라는 조그만 마을의 어느 피자 집 옆 공터에 캠퍼가 세워져 있었다. Mr. 장의 섭외 덕분에 피자가게 주인은 쾌히 우리에게 금방 구운 두 판의 피자를 무료로 제공했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수고를 덜게 되었다. 9월4일(목요일) 맑은 후 비 오늘은 80km 주파를 목표로 새벽 6시에 출발해 오후 2시경에 50km를 걸었다. 이대로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저녁 6시 즈음에는 오늘의 목적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는 기쁨에 점심시간도 아끼며 걸었다. 그러나 또 복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평원의 기후는 예상할 수 없는 기후였다. 마지막 코스를 걷기 시작한 5시경 남쪽 하늘에서 구름이 몰려왔다. 나는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예감에 뛰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다가오는 구름의 뒤편에서는 잿빛의 빗살이 평원을 향해 서릿발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비는 남쪽에서 밀려오고 나는 서쪽을 향하여 직경 10여 Km 되는 그물을 빠져 나오기 위해 몸부림치는 물고기처럼 온 힘을 다하여 뛰었다. 그러나 비구름과의 경주에서 이길 수는 없었다. 소나기가 나를 덮치고 목욕탕 샤워에서 갑자기 찬 물 벼락을 맞은 것 같은 그런 기분으로 뛰고 있을 때 앞쪽 하행선으로 캠퍼가 소나기와 경주라도 하듯이 전속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멈춘 차 안으로 들어가자 소나기는 천둥번개를 번쩍이며 사정없이 캠퍼를 때리기 시작했다. 소나기를 보고 나를 향해 달려와준 Mr.장이 너무나 고마웠다. 이제 는 제법 호흡이 잘 맞는 팀이 된 기분이었다. 반시간 정도를 사정없이 퍼붓던 우박과 비가 지나가자 평원은 방금 세차를 마친 자동차와 같은 깨끗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비 덕분에 목표에 10km 못 미친 길 옆 농가의 허름한 우사 옆에 자리를 잡았다. 우사를 드려다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어두컴컴한 속에서는 소들이 몰려와 우리를 마주 쳐다보고 있었다. 냄새도 나고 으시시한 기분이 들었지만 동물을 좋아하는 Mr.장의 선택을 따르기로 하였다. 잠시 후에 나타난 스물 다섯 살 난 집주인 마크는 그곳이 누추하다며 우리에게 다른 장소를 권했으나 Mr.장은 언제 또 외양간 옆에서 자 보겠냐며 이곳을 고집했다. 집 주인은 비록 사람도 없는 외지에서 목축을 하며 살고있었지만 얼굴엔 행복이 그득해 보였고 자신의 생활에 매우 만족해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우리에게 5분 거리의 언덕에 살고 계시는 그의 부모님이 저녁 초대를 했다며 같이 가자고 제안 했다. 옆집손님도 불러서 음식을 나누던 옛날 한국의 시골 인심을 수 만리 떨어진 이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우리의 사정상 그곳에 합류하진 못했지만 우리는 잘 차려진 잔칫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밤새 비가 몹시 쏟아지고 기온이 내려가 대평원에 추위가 오고 있음을 암시해 주었다.. 9월5일(금요일) 흐리고 비 어제 가지 못한 거리를 보충하고자 아침 5시 반경에 일어났다. 아직도 보슬비가 내리고 있는 길을 출발하려는데 뒤의 차량이 따라오질 않았다. 자동차 배터리가 밤새 방전이 되어 시동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예비 발전기로 충전을 하여 겨우 시동을 걸고 길을 나서는데 집주인 마크가 다가와 20불을 성금으로 주며 아침 식사를 하고 떠나라고 하였다. 계획상 시간을 늦출 수 없어 못내 아쉬워하는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아무도 찾아와 주는 이 없는 이곳 사람의 그림자 만이라도 아쉬운 듯 했다. 여느 때처럼 캠퍼를 전방에 가 있고 내가 도착하면 다시 캠퍼는 떠나는 식으로 진행을 하였다. 정면에서 바람이 세차게 불어 앞으로 걷기가 점점 힘이 들었다. 온 힘을 다해 캠퍼에 도착하자 토론토의 회사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나의 출발 이후 생긴 여러 가지 문제점들을 호소해왔다. 당장이라도 뛰어가 보고 싶은데...... 더욱 무거운 마음으로 캠퍼를 나와 서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뒤에서 Mr.장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캠퍼로 돌아가 보니 아침부터 말썽이던 자동차의 시동이 다시 걸리질 않았다. 오늘도 가야할 거리가 멀어 마음은 급한데 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망망한 들판 한가운데에서 한참동안 점검을 하였으나 원인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때 50m 정도 떨어진 하향 선으로 내려 가던 차 한대가 돌아오더니 우리 옆에 와서 멈추어 서며 도와 줄 일이 없냐고 물었다. 차에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고 하자 자기 나름대로 점검을 해보더니 아무래도 수리소에 가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우리에게 15km전방에 Ford 딜러가 있다고 알려주고 20불을 성금으로 준 후 떠났다. 나는 다시 한 번 시도해보고 안되면 차를 남겨두고 먼저 가서 Ford 딜러에 도움을 청할 생각으로 이곳 저곳 점검하였다. 우선 Mr.장에게 뒤에 있는 발전기의 시동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발전기의 시동 모터도 움직이지 않았다. 자동차와 같은 배터리를 쓰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면 문제는 배터리에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배터리를 점검 하였다. 원인은 접속 터미날의 녹이었다. 가까스로 원인을 발견한 것이다.녹슨 부분을 제거하자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었다. 수리 후 출발하여 얼마를 갔을까Ford 딜러에서 수리 차량이 우리를 찾아왔다. 아까 그 청년이 가던 길을 되돌아가 수리소에 가서 고장 신고를 하였고 그들은 무상으로 우리를 도우려 긴급 출동한 것이었다. 남의 어려운 일을 보고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 그들의 마음이 고마웠다. 나도 이런 것만큼은 꼭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것들이 더불어 사는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의를 입고 가랑비를 맞으며 노던 배틀휠드(Northern battle field)라는 도시를 향하여 걸어가는 나의 마음은 그들에게서 받은 감동으로 따뜻해져 있었다. 차의 고장으로 시간을 많이 허비한 터라 우리는 도시의 일부만 행진하기로 결정하고 도시로 들어섰다. 그 곳에서 시민들 모두가 때묻지 않은 백합꽃처럼 고운 마음들을 가지고 있음을 느꼈고 적지 않은 성금 또한 모을 수 있었다. 도시를 빠져 나와 다음 도시로 향했다. 저녁때가 되자 다시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으로 인해 Mr.장은 예정보다 일찍 숙영지를 찾기 위해 떠나고 나는 허리를 90도로 굽혀 땅을 보며 세찬 마파람을 피해 걸었다. 이제까지 보이던 물오리는 온데 간데 없고 기러기들만이 들판을 누비고 있다. 오늘은 50km 밖에 걷지 못했다. 너무 피곤하여 9시경 잠자리에 들었다. 9월6일(토요일) 바람 아침부터 세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등 뒤에서 부는 바람이어서 걷는데 도움이 되었다. 거대한 구릉을 따라 소 떼들이 풀을 뜯고 있는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그러나 뒤에서 부는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자 오히려 바람에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텨야 했기 때문에 역시 걷기에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뒤에서 부는 바람에 불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태양을 따라 바람이 방향을 바꾸더니 저녁에는 정면에서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람 때문에 온갖 인상을 다 쓰고 걸었다. 누가 보면 싸우러 가는 사람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은 77km를 걸은 후 Mr.장이 교섭하여 놓은 와세카(Waseca) 라는 지역의 한 농가에 숙소를 정하였다. 내가 도착하자 집주인 레이몬드(Raymond)와 로사리(Rosali)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 백여 마리의 돼지를 기르며 오천 에이커의 밀농사를 짓고 있는 중형 농가였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돼지 우리(Pig Barn)에서 나는 냄새로 머리가 지끈 거릴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호의에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가급적 돼지 우리에서가장 멀리 떨어진 농기계 보관 창고 옆에 주차를 했다. 금방 밀 추수를 하고 돌아온 내 키의 세배 높이쯤 되는 거대한 콤바인과 내 키의 두배 크기의 트랙터가 마당에 서 있었다. 내가 농사에 관하여 질문하자 레이몬드는 신이 났는지 나를 농기계 창고로 안내하며 설명해 주었다. 창고 안에는 전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농기계가 있었다. 이 곳까지 오며 내가 갖고 있던 ‘이들은 어떻게 농사를 짓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풀릴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이렇게 넓은 들판에 어떻게 파종을 할까 하는 의문이었는데 트랙터가 미니 쟁기 수 십개 달린 파종기를 끌고 가면 쟁기가 땅을 파면서 동시에 바로 뒷 편의 구멍에서 압축 공기로 씨앗을 자동으로 살포하고 덮어 주는 방식으로 파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땅을 파고 심고 흙을 덮는 과정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것이었다. 기계 하나면 되는 일을 지게로 나르고 삽으로 파던 옛일이 떠올라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날이 저물자 우리는 그의 배려로 더운물 샤워를 할 수 있었다. 또한 주인부부는 우리를 저녁식탁으로 초대하여 집에서 만든 빵, 고기, 채소와 유가공 음식 등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였다. 캐토릭 신자인 그들은 식사 후 200불의성금을 냈으며 북한을 위해 추수 후 상당량의 밀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했다. 얼마 전 걸으면서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가 이 주를 떠나기 전 이루어진 것에 감사를 드렸다. 내일은 알버타주에 들어갈 예정이다. 9월7일(일요일) 바람 새벽에 바람 소리에 잠을 깨었다. 차창 밖의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나 나는 캠퍼를 나와 걷기 시작하였다. 벌판에서 바람을 거스르며 걷기란 정말 고역이다. 대평원에서 해가 뜨면 늘 바람이 부는 이유는 태양열에 가열된 공기가 상승하면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록키산맥 쪽의 찬바람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결국 아침부터 불어대는 마파람 때문에 20여Km를 걸은 후 대륙 횡단을 시작하고 나서 처음으로 바람에 TKO 되고 말았다. 솜처럼 지쳐 버린 나는 길옆에 세운 캠퍼에 들어와 깊은 잠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얼마를 잤는지 깨어보니 점심때가 지나 있었다. 그 몇 시간의 잠은 정말로 꿀맛과도 같은 것이었다. 식사 후 바람이 다소 잠잠해지자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알버타와 사스카추완 주 경계선이 도시 한 가운데에 나있는 로이드 민스터(Lloyd Minster)에 도착하자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바람이 잠잠해졌다. 도시를 지나 알버타주에 들어서자 맑은 하늘에 햇볕까지 따갑게 내려 쬐었다. 다시 길이 넓어지면서 차선 넓이의 노견이 다시 나타났다. 이 곳 고속도로의 최대 제한 속도는 100km인 다른 주와 달리 110km였다. 저녁 8시까지 걸었으나 57km를 걷는데 그쳤다. 길옆 농가의 잔디밭에 캠퍼를 세우고 알버타의 첫날밤을 맞았다. 주일이었으나 예배를 드리지 못했기 때문에 대신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다. 9월8일(월요일)맑음 알버타의 길은 넓고 반듯이 발 포장되어 있었다.. 방금 지나온 싸스카츄완 주와는 달리 걷기에 좋은 자연 조건이었다. 약간의 언덕이 있어 끝없이 평평하고 단조롭던 길보다 변화가 있어 좋았다. 끝없이 펼쳐진 초원 위에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석유 채취기들이 나를 반기기 라도 하듯이 꾸벅거리고 있었다. 에드몬톤까지 200여 km가 남았다. 아침부터 끈임 없이 걸어 84km를 주파했다. 9월9일(화요일) 맑음 대륙횡단을 시작한지 100일째 되는 날이다. 아침 6시에 출발, 에드몬톤을 향하여 길을 재촉했다. 점심 무렵 에드몬톤 한인회 김하종회장과 총무 김수련씨가 찿아 왔다. 김수련씨는 나와 같이 이야기 동무가 되어 함께 걸어 주었다. 그러나 어느새 우리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경주를 시작했다. 평소에 테니스로 체력을 단련했다는 그는 속보로 나는 Jay’s Walk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걷다가 나중에는 아예 뛰기 시작했다. 100일 동안 하루종일 걸어 이곳까지 왔지만 방금 나타난 힘 좋은 젊은 청년보다 빨리 뛰기는 힘들었다. 사실 내가 걷는 속도는 시속 7-8km이지 더 이상의 속력은 장거리를 가야하는 나에게 무리였다. 하지만 그는 온 힘을 다해 뛰었고 나 또한 여기까지 힘들여 온 나 자신이 얕잡아 보이는게 싫어서 힘을 다해 세시간 가까이 뛰었다. 그의 체력은 대단했다. 나는 그만 뛰고 싶었으나 먼저 그만두자고 제의하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그와 겨루어볼 양으로 저만치 보이는 고개를 전속력으로 뛰어 오르자 그도 사력을 다해 쫓아 왔고 그가 나를 앞지르려는 찰라 에드몬톤 시내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 순간 나는 “시내가 보인다. 다 왔다.” 고 소리치며 속력을 낮추었다. 그는 힘이 들었는지 한동안을 상체를 구부리고 숨을 몰아 쉬었다. 나도 속으로 그러고 싶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숨만 몰아 쉬었다. 그러나 잠시 후 그의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고 나의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누가 경쟁하자고 한 것도 아닌데 마중 나온 사람을 경쟁 상대로 삼아 이런 장난을 하다니. 그러나 그와의 경주 덕에 많은 거리를 예상보다 훨씬 일찍 올 수 있었다. . 에드몬톤에 거주하는 리사(전에 길에서 만났던)의 연락으로 에드몬톤 저널의 마크(Mark)라는 기자와 그 외 신문과 방송에서 나와 노상 취재를 하는 통에 절약한 시간은 다시 원 위치 되었다. 75km를 온 후 농로 옆에 차를 세우고 하루를 마감했다. 9월10일(수요일) 맑음 에드몬톤까지 90km. 일정에 맞추기 위해 일찍 출발했다. 새벽 4시 반, 나는 앞에서 새벽 길을 뛰기 시작했고 뒤에서 Mr.장이 캠퍼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따라오며 어둠을 밝혀 주었다. 지나가는 대형 트럭들이 경적을 울리며 우리를 응원했다. 사실 그 동안 트레일러 운전자들은 트럭에 설치된 무전기로 우리들의 위치를 서로 알리고 있었는데 캠퍼에 설치된 무전기에서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Mr.장은 그 내용을 녹음하여 나에게 들려주곤 했다. 어느새 밀밭은 사라지고 끝없는 초원에서 소 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목축 지대만이 펼쳐졌다. 오후가 되자 한인회 관계자들이 짜장면을 점심 시간에 맞추어 가지고 왔다. 길옆에 앉아서 오랜만에 먹는 짜장면의 맛은 형용할 수 없었다. 식사 후 5시까지 걸은 다음 에드몬톤 시내까지 15km를 남기고 한인회 부회장 최의식(2000년도 현 한인회장)씨 소유 주유소 옆에 캠퍼를 정차하였다. 저녁에는 에드몬톤 제일장로교회(심의남 목사시무)의 수요예배와 모금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Mr.장과 함께 시내에 있는 교회로 향했다. 이곳에서도 1500여불이 성금으로 모여 북한에 갈 식량기금으로 캐나다곡물은행에 보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