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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점정리> 1. 유럽의 정복과 식민 시대 1) 라틴 아메리카 식민화 과정과 영향 라틴 아메리카는 유럽 정복자들이 우월한 무기와 내부 갈등을 이용해 무너뜨린 후, 300년간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억압을 겪었습니다. 금 대신 은광을 발견하고, 엔코미엔다, 레파르티미엔토, 아시엔다 등 강제 노동 제도를 도입했죠. 유럽 질병으로 원주민 인구가 급감하자 아프리카 흑인 노예를 들여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운영했습니다. 농작물 교환과 수출 중심 농업 구조는 현재까지 이어져 '바나나 공화국' 별칭과 소수 토지 집중 문제, 그리고 토지개혁 혁명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식민 정부는 카시케를 이용하고 원주민 공동체를 형성했으며, 원주민은 저항하며 폐쇄적 공동체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p.278) 2) 라틴 아메리카 식민 지배 영향 및 원주민 라틴 아메리카는 식민 시대 이후 농산물 수출 중심 경제로 '바나나 공화국'이라 불리며 소수에게 토지가 집중되어 20세기 토지개혁 혁명이 발생했습니다. 식민 정부는 원주민을 정착시키고 카시케를 통한 간접 통치를 시도했으나 후반에 직접 통치를 강화했죠. 원주민들은 저항하며 고지대에 생계형 폐쇄적 공동체를 형성했고, 저지대의 개방적 공동체와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원주민 문화에 대한 편견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p.279) 2. 라틴 아메리카 식민 지배 결과와 원주민 공동체 19세기 라틴 아메리카 독립운동은 현지 백인인 크리오요와 스페인 본토 출신 반도인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1810년경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시작된 이 운동의 주도 세력인 크리오요는 스페인의 세금 부담 증가, 사회적 지위의 모호함으로 경제적 압박을 겪었습니다. 또한 늘어나는 비백인 인구와 잦은 대중 반란에 위협을 느끼며 독자적인 세력 구축의 필요성을 절감했고, 이것이 독립운동을 이끄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p.280) 3. 종족의 구성과 변화 라틴 아메리카는 식민지배 중 유럽 문화 유입, 원주민 감소와 저항(고지대 피신 공동체 형성), 흑인 노예 유입으로 복잡한 인종 구조 형성. 이후 유럽, 아시아 등 다양한 이민으로 더욱 다변화되었습니다. 현재 원주민 문화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p.281~p.283 ) 4. 가족과 사회관계 라틴 아메리카는 제한된 친족 관계 대신 상호 호혜적인 '양자적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이는 지위가 다른 '후견인-수혜자 관계'나 종교적 의미의 '대부 관계'(유사 친족)로 나타납니다. 특히 대부 관계는 자녀의 대부모를 통해 사회경제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러한 관계는 사회적 긴장을 완화하지만, 계층 간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양면성을 지닙니다. (p.288~p.289 ) |
<교재 원문> 1. 유럽의 정복과 식민 시대 식민 시대 초기에는 약 3,000에서 3,500만 명의 원주민이 살았는데, 대부분은 아스테카, 마야, 잉카 문명권에서 생활했다. 유럽에서 온 정복자들은 우월한 무기와 원주민들 사이의 내부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원주민 사회를 쉽게 무너뜨렸다. 식민 지배가 본격화되면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종교와 토지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300여 년의 식민 지배 기간 동안 경제적 착취, 정치적 억압, 노예화, 그리고 민족 말살 등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유럽의 정복자들은 처음에 이 지역에 금이 풍부할 것이라 생각하고 금광을 찾아 헤맸다. 스페인에서 교육과 기술이 부족해 적절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전설 속 '황금의 땅(El Dorado)'을 찾아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실제로는 금이 거의 없었고, 단지 멕시코와 볼리비아 등지에서 은광만 발견되었다. 이 지역에서 채굴된 은이 스페인으로 들어갔지만, 오히려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여 스페인은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별다른 광물자원이 없음을 인지한 식민 정부는 시기에 따라 다양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 정복자들에게 토지를 부여하고 원주민들로부터 공물을 받으며 그들의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게 한 엔코미엔다(encomienda), 농작물과 광산물 생산을 위해 원주민들을 강제 노동에 동원할 수 있게 한 레파르티미엔토(repartimiento), 국내 시장용 식량 생산을 위해 부채로 얽힌 소작인(페온, peón)을 고용하는 아시엔다(hacienda)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또한 흑인 노예 노동자를 고용해 수출용 작물, 특히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장을 건설하여 농산물을 유럽으로 가져갔다. 원주민들이 홍역, 인플루엔자, 천연두 같은 유럽에서 유입된 새로운 질병으로 대량 사망하여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자, 정복자들은 아프리카 흑인들을 노예 노동자로 데려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일하게 했다. 식민 시대부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사이에서는 활발한 농작물과 가축 교환이 이루어졌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토마토, 초콜릿, 담배, 고추, 옥수수, 감자 등이 유럽으로 수출되었고, 유럽에서는 말, 개, 올리브, 포도, 오렌지, 레온 등이 라틴아메리카로 보내졌다. 현재도 식민 시대의 농업 구조가 그대로 반영되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가 많은 농산물을 수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중미의 일부 국가들은 '바나나 공화국(Banana Republics)'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이러한 불균형한 농업 발전으로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고 토지 없는 농민들의 불만이 확대되면서, 20세기에 들어 멕시코, 쿠바, 니카라과, 볼리비아 등 여러 국가에서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혁명이 발생했다. 식민 정부는 원주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그들을 특정 지역에 정착시켜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했다. 소수의 백인들로 많은 원주민을 통치하기 어려워지자, 원주민 귀족 출신의 지역 정치 세력인 카시케(cacique)를 활용해 간접 통치를 실시했다. 식민 시대 후반으로 갈수록 스페인의 통치는 점차 강화되었고, 카시케들의 권한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식민 시대에 원주민들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피해 산속으로 도망하거나 저항했다. 이로 인해 고지대에는 원주민 중심의 '폐쇄적 농민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 사회에서는 강한 내적 유대와 동질성이 강조되었고, 판매보다는 생계를 위한 영농이 지속되었다. 외부 사회와의 관계를 최소화하면서 공동체 내에서 개인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저지대의 메스티소 중심 '개방적 농민 공동체'와 뚜렷이 구별되었다. 개방적 농민 공동체에서는 토지의 사유화가 실시되었고, 수출을 위한 상품 생산이 이루어졌다. 또한 상대적으로 이질적인 사회여서 개인 간 부와 권력, 위상에 있어 큰 차이가 존재했다. (p.278) 이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국가들은 다양한 농산물을 수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중미의 일부 국가들은 '바나나공화국(Banana Republics)'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져 있다. 20세기에 들어 이러한 불균형한 농업 발전으로 토지가 소수에게 집중되면서 토지 없는 농민들의 불만이 커졌고, 결과적으로 멕시코, 쿠바, 니카라과, 볼리비아 등 많은 국가에서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혁명이 발생했다. 식민정부는 원주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그들을 특정 지역에 정착시켜 원주민 공동체를 형성했다. 소수의 백인들이 많은 원주민을 다스리기 어려워지자, 원주민 귀족 출신의 지역 정치 세력가인 카치케(cacique)를 활용하여 간접 통치를 실시했다. 식민 시대 후반으로 갈수록 스페인의 통치는 점차 강화되었고, 카치케들의 권한은 급속히 약화되었다. 식민 시대 원주민들은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를 피하기 위해 산속으로 숨어들거나 저항했다. 이로 인해 고지대에는 원주민을 중심으로 한 '폐쇄적 농민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 사회에서는 강력한 내부 결속과 동질성이 강조되었으며, 상업적 판매보다는 생계를 위한 농사가 지속되었다. 또한 외부 사회와의 접촉을 최소화하면서 공동체 내에서 개인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결정되었다. 이러한 생활 방식은 저지대의 메스티소 중심 '개방적 농민 공동체'와 뚜렷이 구별되었다. 개방적 농민 공동체에서는 토지의 사유화가 이루어졌고, 수출을 위한 상품 생산이 진행되었다. 또한 상대적으로 이질적인 사회 특성상 부와 권력, 위상에 있어 개인 간 차이가 매우 컸다. 원주민들은 지금까지 폭력적 저항과 수동적 저항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지배 사회에 대항하며 생존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이 발전시킨 문화에 대한 편견은 여전히 심각해서, 이들의 의술을 마술로, 종교를 미신으로, 역사를 신화로, 예술을 민속으로, 언어를 방언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p.279) 2. 독립과 국가의 수립 19세기 들어 라틴아메리카에서 태어난 백인들인 크리오요(criollos) 계급과 스페인 본토 출신의 반도인(peninsulares) 사이의 갈등으로 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1810년경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거의 동시에 전개되었다. 독립운동의 선봉에 선 크리오요들은 식민 사회 내에서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먼저, 스페인의 국내 사정으로 식민지 내 세금 부담이 커지면서 크리오요들은 심각한 경제적 압박을 받게 되었다. 사회적 지위, 경제적 부, 공적 의사 결정에 있어 이베리아반도 출신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서 애매한 위치를 차지하며 많은 고충을 겪었다. 게다가 백인과 원주민 간 혼혈이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메스티소의 수도 빠르게 증가했다. 당시 인구 구성을 보면 백인 400만 명, 원주민 800만 명, 메스티소 500만 명, 흑인 100만 명 정도였다. 비백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대중 반란이 잦아지자 크리오요들은 스페인과 원주민, 흑인, 메스티소 사이에서 상당한 위협을 느꼈다. 이러한 상황에서 크리오요들은 자신들만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결국 독립운동을 주도하게 되었다. (p.280) 3. 종족의 구성과 변화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원주민 사회에 자국의 언어와 문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초기에는 원주민 사회의 상류 귀족층을 식민 사회에 흡수함으로써 식민 통치를 원활하게 진행했다. (p.281) 식민 초기 원주민 출신 귀족들은 식민 사회의 중개자 역할을 담당했다. 이러한 동화 정책은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 결과 원주민과 백인의 피가 섞인 혼혈인 메스티소(mestizo)가 등장하게 되었다. 현재 전체 인구의 약 5%가 원주민이다. 이들 대부분은 아스테카, 마야, 잉카의 후손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식민 통치를 피해 산속으로 피신하여 고립된 삶을 살아왔으며 지금도 대부분 고지대에 거주한다. 저지대의 원주민 수는 매우 적으며, 주로 아마존 지역과 중미에 분포해 있다. 고지대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옥수수, 콩, 호박, 감자 등의 작물을 재배한다. 원주민 사회는 의상과 의례 등 다양한 문화적 전통을 보존하고 있지만, 점차 외부 사회와의 접촉이 늘어나면서 스페인어 사용이 증가하고 도시화로 인해 정체성을 상실하거나 문화가 훼손되는 사례도 종종 발생한다. 저지대 원주민들은 화전농업과 함께 사냥과 어업을 병행한다. 고지대 원주민보다 공동체 의식이 강하지만, 지리적 여건상 외부인의 접근이 쉽지 않다. 또한 토지 없는 메스티소들이 농지를 찾아 원주민 거주 지역을 침입하는 문제도 있다. 과거에는 원주민을 '인디오(indio)'라고 불렀으나, 이 용어의 경멸적 의미 때문에 현재는 '인디헤나(indigena)'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흑인의 유입으로 이 지역의 인종 구조는 더욱 복잡해졌다. 대부분의 원주민이 식민지 억압과 유럽에서 유입된 질병으로 사망하자, 유럽 정복자들은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동자들을 데려왔다. 1506년 히스파니올라(Hispaniola)에 흑인이 도착했고, 카리브 지역 원주민은 1570년경 완전히 사라졌다. 흑인들은 주로 카리브 지역과 브라질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서 일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쿠바, 도미니카공화국, 푸에르토리코, 파나마, 브라질 등지에서 백인과 흑인의 혼혈인 물라토(mulato)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졌다. 오늘날 새로운 이민자들도 상당히 증가했다. 기존 스페인과 포르투갈인 외에 17~18세기에는 카리브 지역이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의 식민지가 되면서 새로운 유럽인들이 유입되었고, 19세기에는 이탈리아, 독일,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이 들어왔다. 대표적으로 브라질과 칠레에는 독일인들이, 카리브 지역에는 시리아인과 레바논인들이 이주했다. 20세기에는 유럽인과 더불어 유대인과 아시아인들도 이주해 왔다. (p.282) 20세기 초에는 약 20만 명의 일본인이 브라질로, 3만 명은 페루로 건너갔다. 중국인들은 19세기에 30만 명이 계약 노동자로 라틴아메리카에 왔으며, 그중 14만 명이 쿠바로, 10만 명은 페루로 향했다. 특히 중국인들은 계약 노동 과정에서 심각한 사회적 차별을 겪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추방되기도 했다. 한국인들은 1905년 1,033명이 멕시코 유카탄반도의 에네켄(henequen) 농장에 최초로 이주했으며, 본격적인 이주는 1963년 브라질로 103명이 농업 이민을 가면서 시작되었다. 2010년 현재 라틴아메리카에는 약 11만 명의 한국인이 주로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과테말라, 파라과이 등지에 거주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민족들의 유입으로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인종 구성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현재 라틴아메리카는 칠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백인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국가와 멕시코, 코스타리카,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에콰도르 등 메스티소가 다수를 차지하는 국가, 그리고 과테말라, 페루, 볼리비아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p.283) 4. 가족과 사회관계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전통적으로 인간관계에서 '양자적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양자적 관계란 두 사람 사이에서 경제적·정치적 행위를 할 때 상호 간 호혜적인 교류를 통해 서로를 도와주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가 지속되면 궁극적으로 강력한 결속력으로 발전한다. 일반적으로 이는 자발적 조직이나 핵가족을 넘어선 지역에서 개인들이 서로 친밀한 관계를 맺고 노동, 재화, 서비스 등을 교환하는 방식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친족 관계의 발전이 제한적이어서, 친족 외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관계 형성이 일상생활에 상당한 도움을 준다. 때로는 예수, 성모마리아, 성인 등 초자연적 존재와 관계를 설정하여 특정한 정신적, 물질적 축복을 기대하기도 한다. 지위가 다른 사람들 사이의 양자적 관계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후견인-수혜자 관계(patron-client relationship)'이다. 이는 서로 다른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다양한 지원과 보호를 주고받는 관계를 말한다. 보통 후견인은 정치인, 공무원, 성직자 등 권력과 사회적 영향력,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다. 다만 이러한 사회관계는 상대적으로 취약하여 쉽게 무너질 수 있다. 수혜자는 지속적인 빚을 짐으로써 후견인과의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p.288) 종교적 의미가 부여되는 대부 관계(compadrazgo)도 이러한 사회관계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는 '유사친족제도'의 일종으로, 단순한 혈통을 넘어선 사회적 관계를 만들어 정치적·경제적 협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을 가진다. 식민 시대에는 아센다도가 원주민들의 대부 역할을 했으며, 이는 상호 간의 의무와 권리가 주어지는 대표적인 후견인-수혜자 관계였다. 예를 들어, 아센다도는 페온들이 질병이나 기근으로 고통받을 때 도와주면서 정치적·경제적 안정을 추구하고 동시에 그들로부터 계속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아직도 지속되어 사람들은 친척이 아닌 이들과 자녀의 대부모를 구성하려 한다. 보통 자녀의 출생, 입학, 세례, 결혼 등 다양한 통과의례나 사회적 중요한 시기마다 대부모를 선정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여러 대부모를 갖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대부모 관계 이후 경제적 도움을 받기 어려운 사례가 많아 여러 대부모를 갖는 것이 전략적으로 안전하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녀를 보호하고 지원하기 위해 사회경제적,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의 사람을 대부모로 선택하려 한다. 도시 지역에서 이주한 농민들의 경우, 대부 관계를 잘 활용하면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일자리나 주거 문제 등을 원활하게 해결할 수 있다. 최근에는 가톨릭의 영향력 약화와 다양한 사회관계의 확산으로 대부모 제도의 중요성이 다소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 관계는 여전히 계층 간 경계를 넘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제도로 작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의 지속은 역설적으로 사회구조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p.2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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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학년도 1학기 기말과제물(온라인제출용)
교과목명 : 세계의풍속과문화(2-1)
문제1) 각 지역의 가족 및 친족과 관련한 관습 중 한 개 이상을 선택하여,
한국과 비교하고, 그 공통점과 차이점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서술하시오. (25점)
문제2) 1개 이상의 지역을 선택하여 식민지 경험이 그 지역의 풍속과 문화의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서술하시오. (25점)
문제2) 1개 이상의 지역을 선택하여 식민지 경험이 그 지역의 풍속과 문화의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서술하시오. (25점)................이 두 장을 서술하면 됩니다.
제9장 아프리카(식민시대/가족과 혼인)
제13장 라틴아메리카(식민시대/원주민과 종족)
제01강 세계의 풍속과 문화.....서문 소개(빼고)
제15장 강의가 없음(목차: 제14장까지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