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 리 글
2002-07
껍데기를 벗고서
박병민목사(새터공동체)
봄의 옷을 벗고 얇은 옷을 입는 드러남의 계절이다. 만상(萬象)은 옅은 녹에서 짙은 신록으로 덧칠해 가는데, 우리의 입음새는 걸쳤던 것을 걷어 내어간다. 몸을 한껏 드러내는 노출(露出)의 계절이 왔다. 허울을 벗고 속내를 들어내기 좋은 때가 찾아든 것이다. 생각해보자면 무엇을 벗는다는 것은 한껏 자유롭고 가벼운 것이다. 예수 그도 적신(赤身)으로 왔다가 갈 때에도 적신으로 갔다. 갈 때에는 몸에 걸쳤던 한 자락의 옷깃마저도, 주사위를 던져 나누어 가지려는 이기적이고 얄팍한 사람 손들의 밀고 당김에 의하여 찢겨져 나갔다(마태복음 27:35). 그리고 대신 그의 머리에는 애처로움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가시관이 씌워졌다. 가시관하니 생각나는, 가시관이 아닌 사람의 손에 의하여 금관(金冠)이 씌워진 예수의 이야기인 김지하의 “금관의 예수”가 생각난다.
평화로운 성당 안에 신부님과 수녀가 있다. 수녀는 종교인으로써 마땅히 하여야 할 중요한 일이 이웃사랑임을 이야기한다. 이야기로써만이 아니라 몸소 손으로, 발로 옮길 것을 강한 어조로 신부에게 말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장면에는 거지, 문둥이가 비탄에 잠겨 살아온 날들을 주마등처럼 보이며 한탄한다. 뒤이어 몸파는 여인도 지나쳐간다. 그런가하면 십자가 앞에 돈 많은 사장이 등장하여 예수에게 많은 헌금을 드리며, 큰 교회도 지어 줄 터이니 하나님이 많은 복을 주셔서 사업이 더욱 잘되게 해주십사하고 기도한다. 문둥이가 예수에게 나타나 장시간에 걸쳐 신세한탄을 늘어놓는다. 이야기를 듣던 예수는 사장, 신부 등에 의해서 아름답게 만들어져 씌워진 머리의 금관을 벗겨 줄 것을 문둥이에게 이야기한다. 문둥이는 예수가 쓴 금관을 벗겨줌으로 금관 속에 갇혀 있던 예수를 그 곳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여 자유롭게 해준다. 그런데 사장, 신부, 순사 등은 예수의 머리에서 벗겨져 나가고 없어진 금관을 찾아 나선다.
신앙이 말하는 구원을 다르게 말하면, 사람들의 자유이고, 해방이고, 벗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몸에 지니려는 다섯 가지의 욕심(五慾)이 있단다. 재물욕(財物慾), 명예욕(名譽慾), 식욕(食慾), 수면욕(睡眠慾), 그리고 성욕(性慾)이 바로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것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완숙(完熟)에 이른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도 우리들은 추구(追求)하는 인간에 그치기가 쉽다. 아니 도(道)를 벗어나 오욕(汚辱)스런 사람에 머무르기도 한다. 훨훨 털어 버린다는 말처럼 매이거나 거칠 것이 없는 살아감이 필요한 철이다.
공동체 이야기
나 혼 자 가 아 니 라 다 함 께
경북 안동의 한 교회에서 종지기를 하고 계시는 권정생 선생님께서 예전에 “하느님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어린이 동화집을 쓰셨습니다. 그 책의 말미에 하신 말씀이 귀에 들립니다. “나 혼자 기쁘다고 생각했을 때, 문득 내 친구들, 내 이웃들은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 혼자 기뻤던 것이 오히려 미안할 때가 있답니다. 그러니까 나 혼자 기쁘고, 나 혼자 즐겁고, 나 혼자 행복한 것은 좋은 것이 못 되지요. 다 함께, 모두 같이 기쁘고 즐겁다면 가장 행복한 것이지요”. 나 혼자가 아니라 다함께...... 그런데, 왠지?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려운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자중자애(自重自愛)하는 모습이 나의 모습입니다. 삶의 자리를 다 함께, 모두 같이 기쁘고 즐거운 자리를 만드는 일이 큰 고민입니다. 어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을 명제(命題)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되는 일이 예사로운 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자기 자신, 다른 사람, 그리고 모든 사물까지도 사랑하는, 포괄적(包括的)인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겠지요. 슬픔은 함께 나누면 절반이 되고, 기쁨을 같이 하면 그 배가된다는 말을 합니다.
함께 계시는 할머니께서는 우리들사이에서 소외되는 생활을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노인 어른들이 계시는 다른 곳으로 모셔드려야겠다는 마음으로 마을의 보건소장님께 여쭈어 보았다. 소장님으로부터 어느 병원과 의사선생님을 소개받았다. 그런데 인상깊었던 말씀은 “그 의사선생님은 사심이 없으신 분이에요”라는 얘기였다. 사심(私心)이 없다는 말씀에 매료되다 시피 했다. 사심이 무엇인가? 사심은 바로 사욕(私慾)일 것이다. 우리는 사사롭기보다는 공공적이어야겠다. 그전에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접하였다. 성서의 앞 부분에서 선악을 알게 해준다는 선악과(善惡果)의 이야기가 나온다. 태초의 사람이 금단(禁斷)의 과실인 선악과를 그만 따먹고 마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르게된다. 그래서 그들은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혀진다. 그 책에서 사람은 왜 죄 인이었는가?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共有)하여야 될 과실(果實)을 한 두 사람이 사유화(私有化)하였기 때문에 죄라는 것이었다. 여러 사람이 함께 하게될 공공의 것을 그들은 독식(獨食)하게 되었다.
사리사욕(私利私慾)을 벗어나 널리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옛이야기를 머리에 떠올려 보자. 나 혼자 기쁘고, 나 혼자 즐겁고, 나 혼자 행복한 것은 좋은 것이 못 된다. 다 함께, 모두 같이 기쁘고 즐겁다면 가장 행복한 것이다.
공 동 체 소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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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터 공동체 가족
허 선
조점숙
박영근
문창수
정무래
박종만
어귀녀
박병민.진선미.한솔.진솔
* 02년 7월 4일에 충북 영동에서 오신 이영숙 어머니께서 7월 12일에 집으로 가셨으며, 6월 20일에 천안에서 오신 최동근 선생님께서 7월 15일에 집으로 가셨습니다.
☻ 기도하며 함께 하신 분들
주식회사EG(이광형).성남교회안수집사회.추부파출소.임채련외2인.벧엘교회(양순우외5인).만나교회(전남홍외16인).동산베이커리.김기옥.최현수.튼튼영어대전동구(연월순외11인).김기홍.어귀녀.문창수.정무래.대덕교회(한도식).세광교회채윤기(박현실).왕지교회.세상을아름답게만드는사람들(강정희.변영규.이종애이은숙).그리스도의집.박종만.대덕교회예수마을.대전서노회.박정도.조길환.마포교회(임지택외3인).옥천동부교회.광평교회(김흥태외2인).이영숙.김태훈.아름다운교회.그리스도의집.벧엘교회(양순우외3인).최종현(진수정).한삼천교회.조점숙.되살미사랑나눔봉사대(유영수.김장섭).이종국.유인숙
(호칭은 생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