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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불교 강동교당 원문보기 글쓴이: 알라
참회문 7월 30일 ~ 8월 4일
1. 참회문의 대의
⑴ 자성의 원리에 근거한 공부법
-무시선과 마찬가지로 자성의 원리에 근거한 공부법이다.
-수행방법의 하나의 교리체계이다. 신앙법과 수행법중에서 수행방법이다.
-무시선과 함께 인성의 양면성에 근거한 교리이다.
긍정성 - 성선설 - 무시선 : 자기 자성을 잘 활용하는 방법
부정성 - 성악설 - 참회문 : 자성을 잘 못 활용했을 경우에 수행하는 방법
⑵ 상생상극의 업력을 벗어나 죄복의 자유를 얻는 공부
- 상생상극이 생기는 원인은 음양상승이다.
가을이 오면 음이 성해지는 것이다. 가을겨울 지나면, 봄이 온다. 봄이 오면 양이 성해지는 것이다.
일원상의 진리는 음과 양으로 되어 있다. (태극문양) 음이 오면 반드시 양이 따라오고 양이 오면 반드시 음이 따라온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인(善因)을 지으면 선과(善果)가 따라오고 악인(惡因)을 지으면 악과(惡果)가 따라온다. 좋은 인을 지으면(선인) 선과가 온다. 내가 지은 것은 내가 가지고 오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빼앗아 갈 수 없다.
우리가 생활속에서 안심하며 살아가는 것은 음양상승의 이치, 즉 좋은 것을 지으면 좋은 것을 받는 이치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참회문에서 이 이치가 호리도 틀림이 없다고 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상생상극의 업력을 벗어나 죄복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참회의 공부를 해야 한다.
⑶ 모든 성현들의 자비 방편
잘못한 사람에게도 그 잘못을 벗어나 공부할 수 있는 길을 밝혀주신 것이다.
참회의 방법을 열어주신 것은 모든 성현들의 자비방편이다.
자성의 활용을 통해 선인선과를 짓도록 인도하는 것이 바로 참회문이다.
악인악과를 지은 사람에게도 개과천선해서 잘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바로 참회문이다.
2. 참회의 정의
⑴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
= 악도를 놓고 선도에 들어오는 초문
= 현대어로 해석하면 터닝 포인트가 된다.
대단한 결단이다. 경사스러운 일이다.
교당에 안 나가던 사람이 교당을 나가게 되었다면 자기 생활의 패턴이 바뀌는 것이다. 이 중요한 것을 몰라서 터닝 포인트를 시키는 사람이 적다. 인생의 전환점, 터닝 포인트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가정이나 조직을 운영할 때 과거 자기가 했던 방식 그대로 하게 되면 결국 뒤떨어진다. 어떤 계기가 되었든지 전환점을 만들어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한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것이 바로 참회이다.
마음작용하는 방법을 바꾸는 것이 참회이다. 과거에 공부하기 싫은 마음이 있었다면 싫어하지 않은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개척하는 초보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전심과 후심을 바꾸는 것이다. 앞의 마음, 전심은 나쁜 마음이라면 뒤에 오는 마음, 후심은 좋은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다.
⑵ 내적으로 보면, 죄업의 근본인 탐진치를 제거하는 것이다.
외적으로 보면, 죄과를 뉘우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대종사님께서 ‘솥 가운데 끓는 물’로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다. 위에서 찬 물을 붓는 것은 죄과를 뉘우치는 것이다. 참회의 외적 정의와 통한다. 밑에서 타는 불을 끄는 것은 내 마음속의 탐진치를 제거하는 것이다. 내적 참회이다. 더 이상 자상하게 설명할 수 없다.
두 가지를 아울러야 진정한 참회가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회개와 참회의 차이점을 살펴보자.
회개는 완전히 타력이다. 죄를 사해 주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뿐 밖에 없다. 이런 회개는 일시적인 환희심으로도 가능하다고 본다.
원불교의 참회는 자력에 의해서 죄업을 소멸해 가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받을 때 달게 기쁘게 받는다. 왜냐 내가 과거에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달게 받으면서 나쁜 짓을 하지 않는다. 자기 자력으로 자기 죄업을 소멸해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내적으로 자기보상이 온다. 내가 참회하여 나의 잘못을 받고 소멸시켰다는 자기 내적 보상이 있다. 외적 보상은 기독교의 회개이고 내적 보상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3. 참회의 방법
⑴ 사참(事懺)
① 정의: 삼보(三寶)전에 죄과를 뉘우치고 날로 모든 선을 행하는 것
-불보에 대한 참회: 법신불전에 죄과를 뉘우치는 것 = 진리불공
-법보에 대한 참회: 법에 대조하여 어긋난 점을 뉘우치는 것, 교법을 통한 참회
-승보에 대한 참회: 스승님앞에 고백하는 것, 현실적인 참회라서 대단히 중요하다.
② 방법
⒜실심(實心)으로 고백하라.
실다운 마음으로 고백하라.
공타원 조전권종사님이 대산종사님께 말씀을 드렸더니 대산종사님께서 별주부전의 예를 들으시며 (별주부전에서 용왕이 토끼간을 먹어야 낫는다고 하니 별주부가 토끼를 잡아 용궁으로 갔는데, 토끼가 간은 육지에 놓고 왔다고 해서 다시 육지로 데리고 가니 토끼가 도망치면서 간을 놓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면서 이리저리 뛰고 좋아하다가 사냥꾼이 놓은 덫에 걸렸고 그 뒷이야기도 많다.) 공타원님은 간을 빼서 다 보여주셨다고 하셨다. 사제간의 격이 없이 하나가 된 것이다. 수도인은 자기 스승앞에 자기 간을 내보어야 한다고 대산종사님께서 말씀하셨다.
⒝ 고백에 대한 감정을 받아라.
방향, 취사, 마음표준에 대한 감정을 받는 것이다.
⒞ 맹세를 해야 한다.
이 순서대로 해야 진정한 사참이 된다.
스승앞에, 법신불전, 교법에, 대중에게 맹서해야 한다.
⑵ 이참(理懺)
① 정의: 탐진치를 제거(원래에 죄성(罪性)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 망상을 제거해 감)
② 방법: 수양, 연구, 취사 삼학으로 해야 한다.
참회문이 무시선과 접근하는 시발점은 달라도 방법과 결과는 동일하다.
⒜ 탐심을 제거하기 위해 수양을 해야 한다. 수양을 통해서 욕심을 걷어내야 한다. 녹여 내야 한다.
⒝ 진심은 연구로 대체해야 한다. 성질이 팍 날 때 ‘이것이 진심이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한다. 알아차리는 것이 자기 마음을 보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보면 진심이 녹여지는 것이다.
진심을 걷어내면 마음이 밝아진다.
⒞ 치심은 취사로 대체해야한다.
이참이란 삼학수행을 통해 탐진치 삼독심을 녹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4. 참회의 결과
무시선의 결과와 똑같다.
⑴ 천업을 임의로 하고 생사의 자유를 얻는다.
-천업은 자기가 지은 업이 아니라 하늘, 진리가 주는 업이다. 태어날 때부터 천업을 가지고 태어났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원죄이다. 성주괴공, 생로병사, 육도변화하는 원리가 천업이다. 정업과는 다르다.
-임의로 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으로 한다는 것이다.
천업을 임의로 한다는 것은 순응한다는 것이다. 저항하지 않는다. 저항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정기일기 읽어줄 때 ‘공사중’ 이야기 했는데, 전부 다 공사중이다. 그것을 잘 순응하는 것이다. 순응하면 걸리고 막힐 것이 없다. 순응을 못하니 저항하고 거부를 하게 되어 막히는 것이다.
천업을 공업(共業)이라고 한다. 천업에 끌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생사의 자유이다.
⑵ 동정역순이 무비삼매이다.
동할 때 삼매, 정할 때 삼매, 역경에서 삼매, 순경에서 삼매를 얻게 된다.
무시선에서는 백천삼매라 하였다.
역경삼매에 대한 대산종사님 법문으로 살펴보자.
대산종사님께서 고(苦)를 세 가지로 해결하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첫째, 인고(忍苦)다. 참는 단계이다. 고를 해결하는데 가장 기초단계이다. 웬만한 고통은 인고로 해결해야 한다.
두 번째는 안고(安苦), 고에 편안하다. 고를 참고 참다 보면 그 다음 단계로 진입한다. 공부가 발전된 것이다. 괴로운 것이 아니라 편안한 것이 되더라도 상당한 경지이다. 그러나 역경삼매라고 할 수 없다.
마지막 단계로는 낙고(樂苦), 고를 즐기는 것이다. 예전의 백발가**가 있는데, 백발이 오는 것을 한탄한것이다. 산업사회에서 고는 피하는 대상이지 수용하지 않았다. 미래학자들이 말하기를 지식정보사회에서는 고를 피하지 않고 즐긴다고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단계를 낙고라고 하셨다.
세 가지 단계를 거쳐 낙고가 되었을 때 역경에서의 삼매라고 할 수 있다.
어른들 법문에 의하면 역경에서 이겨내는 것은 쉽지만, 순경에서는 오히려 폭 싸여서 녹아나기 때문에 순경삼매가 더 어려울 수 있다. 옛말에 잘 나갈 때 조심하라는 말이 있다. 은생어해 해생어은이라고도 한다. 이치는 돌고 도는 것이다. 순경 뒤에는 반드시 역경이 오고, 역경 뒤에는 순경이 온다. 순경에서 마음이 해이해져서 더 어려울 수 있다.
*(....)당한 고를 면하는 데는, 첫째 인고공부(忍苦工夫)니 일체의 고를 당할 때에 공부심으로 힘써 참고 이겨 나가는 공부요, 다음은 안고공부(安苦工夫)니 일체 고를 당할 때에 안분하고 편안히 받는 공부요, 다음은 낙고공부(樂苦工夫)로서 어떠한 고를 당하더라도 즐겁게 초월하여 해탈하는 공부니 이대로 오래 공부 해 가면 고해에서 벗어나 영원한 낙수용(樂受用)을 할 것입니다. (대산2집 교리 고락에 대한 법문 중에서)
** 백발가(白髮歌) : 작자·연대 미상의 가사.
가사집 〈경세설 警世說〉에 다른 12편의 가사와 함께 실려 있다. 젊은시절을 값있게 보내라는 교훈적 내용의 가사이다. 지은이가 꿈속에서 거지 노인을 만나 젊은시절의 이야기와 늙음을 한탄하는 이야기를 문답식으로 듣는다. 젊은시절을 주색잡기와 가무·오락으로 허무하게 보낸 노인이 볼품없이 늙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고, 늙어서 후회말고 젊은 날을 잘 보내야 한다고 훈계하는 내용이다. 3·4 4·4조의 박자를 가진다. 마지막 부분을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엊그제 즐기던 일/모두 다 허사로다/지각나자 늙었으니/후회막급 할일 없다/이 모양이 되었으니/슬프다 청춘네들/이 경상 볼작시면/그 아니 우스운가/광음을 허송말고/늙기 전에 힘써보소."
⑶ 진대지가 이도량이 된다.
무시선에서는 진대지가 일진법계가 된다고 하셨다.
무시선의 결과와 참회문의 결과의 내용이 똑같다. 무시선과 참회의 시작은 다르지만, 과정과 결과에서는 무시선과 참회는 하나가 된다.
참회를 잘 하면 모든 업으로 벗어나서 대자유인이 된다.
5. 참회의 금기사항
⑴ 무애행을 경계하셨다.
과거 불교에서의 무애행을 경계하신 것이다.
“행도행음(行盜行淫)이 무방반야(無妨般若)요 음주식육(飮酒食肉)이 불애보리(不碍菩提)다”
도둑질과 간음을 행해도 반야, 본래자성자리에는 방해가 되지 않는다. 술과 고기를 먹는 것이 보리에는 해롭지 않다. 이 말이 무애행의 근거가 된다.
조선조말기 무애행을 한 대표적인 스님이 경허스님(?)이다.
반야와 보리는 자기 자성자리인데, 행도행음을 해도 텅 빈 본래의 자성자리에서는 방해롭지 않기 때문에 무애행을 한다. 진묵스님도 무애행을 하셨다. 진묵스님의 경지에 가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다.
참회문에서 과거 불교의 수행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시는데, 대종사님은 현실적인 내용으로 지적하신 것이 아니라 자성의 원리에 따라 지적하신 것이다.
자성에는 분별이 없는 자리가 있다. 분별이 없는 자리에서 보면 “행도행음(行盜行淫)이 무방반야(無妨般若)요 음주식육(飮酒食肉)이 불애보리(不碍菩提)다”*의 말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자성에는 분별이 있는 자리가 있다. 분별이 있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인과가 작용한다. 분별이 없는 자리에서는 무애행이 통하지만, 분별이 있는 자리에서는 소소영령하게 자기가 다 받아야 한다. 묘유의 분별이 있는 자리에서는 무애행이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론적으로는 무애행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무애행 자체가 죄업이 된다.
대외적으로 활동할 때, 평양에 갔었을 때 만찬, 오찬이 있는데 매번 와인이 나온다. 분위기 돋는다고 테이블마다 건배를 하는데, 건배를 하면 입을 대야 한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경우를 경험을 했다.원불교의 진리관에 있어서는 무애행도 자기가 받을 업을 자기가 짓는 것이 되는 것이다.
* “음주식육(飮酒食肉)이 무방반야(無妨般若)요, 행도행음(行盜行淫)이 부해보리(不害菩提)” -초기 참회문 원본에 있던 말씀
⑵ 견성 후에 성불의 노력이 없는 것을 경계하셨다.
설사 자성의 광명을 스스로 보았다 하더라도 그 자성의 광명을 본 것이 수행의 끝이 아니다.
전통대승불교의 수행의 지향점은 돈오점수*이다. 돈오는 자기의 자성광명을 보는 것이다. 그다음에 점수, 점점 닦아야 한다. 무시습기, 자기가 오랫동안 습성에 의해 지은 업을 자기 스스로 닦아 제거해 가야 한다. 몸도 업의 덩치이다. 살찌는 것도, 살 안찌는 것도 업이다. 몸뚱아리의 모습도 자기가 지은 업이다. 그런 업들을 녹여내야 한다.
성철스님이 돈오돈수**를 주장하셨지만, 근래 와서는 다시 전통대승불교의 수행방식은 돈오점수로 자리잡아간다.
점수하는 방법은 수심결에서 두 가지로 말하는데, 수상문정혜***와 자성문정혜****인데, 두 가지를 한 번에 닦는 것이 아니라 근기 따라서 닦는 것이다. 상근기는 자성문정혜로, 하근기는 수상문정혜로 닦으라 하였다. 돈오이후에 점수가 필요하다. 서서히 녹여내는 것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 돈오(頓悟)를 위해서는 그 전에 점진적인 수행이 필요하다는 뜻, 또는 먼저 돈오하고 난 뒤에 점수(漸修)한다는 뜻. 돈점이라고도 한다. 돈오점수를 표방한 대표적인 인물은 보조국사 지눌(知訥)이다. 그는 돈오로써 마음이 곧 부처임을 깨닫고 나더라도 이전의 나쁜 버릇들이 일시에 제거되기 어려우므로 점수로써 점차적으로 닦아나가 온전한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수심결(修心訣)》에서 먼저 돈오하고 나중에 점수하는 것이 돈오점수임을 얼음의 비유로써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먼저 깨치고 나서 뒤에 수행한다는 뜻은 연못의 얼음이 전부 물인 줄을 알지만, 그것이 태양의 열을 받아 녹게 되는 것처럼 범부가 곧 부처임을 깨달았으나 법력(法力)으로써 부처의 길을 닦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닦는 점수 역시 먼저 깨치는 돈오 못지않게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듯이, 돈오와 점수의 선후(先後)에 관한 문제는 계속 쟁점으로 남아 있다. 그에게서 주목할 만한 것은 “돈오 이후 점수의 문(門)은 더러움을 닦는 것만이 아니요, 다시 온갖 행을 겸해 닦아 나와 남을 아울러 구제하는 것”이라고 하여 이타행(利他行)의 실천을 강조한 점이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차이를 《수심결》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대개 도(道)에 들어가는 문은 많지만, 요약해 말해본다면 ‘돈오’(頓悟, 단박 깨달음)와 ‘점수’(漸修, 차츰차츰 닦아감)라는 두 문에 불과하다. 비록 돈오돈수는 최상의 근기를 가진 사람들은 들어갈 수 있다고 하나, 그 과거를 미루어 따져본다면 이미 수많은 생을 살면서 깨달음(돈오)에 의지해 닦으면서(점수) 차츰차츰 변화해오다가, 금생에 이르러 진리를 듣자마자 즉시 깨달아 한꺼번에 모든 일을 마친 것이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의 차이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로 중국 선종의 5조 홍인의 제자인 신수와 혜능의 두 가지 게송을 든다. 신수의 게송은 “몸은 보리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와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 묻지 않게 하라(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이고, 이에 대해 혜능의 게송은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거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오(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이다. 《육조단경》에서는 이 두 게송을 듣고 홍인이 혜능에게 정법안장을 전했다고 한다.
**돈오돈수(頓悟頓修) : 불교에서 단박에 깨쳐서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를 이르는 말. ‘단박에 깨치고 단박에 닦는다’라는 뜻으로, 단박에 깨쳐서 구경각(究竟覺:궁극적이고 완전한 지혜를 얻는 경지)에 이름으로써 더 이상 수행할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는 중국 선종(禪宗)의 육조 혜능(六祖 慧能)의 가르침 속에 언급되었으며, 한국 현대불교에 큰 자취를 남긴 성철(性徹)이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제기함으로써 큰 논쟁을 일으켰다.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知訥) 이래 한국불교 수행법의 주류로 이어져 온 돈오점수는 단박에 깨친다는 점에서는 돈오돈수와 같지만, 깨치고 나서도 점진적으로 수행하여야 깨침의 경지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하여 돈오돈수는 깨치고 난 뒤에도 더 수행할 것이 남아 있다면 진정으로 깨치지 못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본래 돈오의 성불론은 선종에서 주장되었다. 곧 미망과 깨달음은 한 생각의 차이이니 본성이 단지 일념에 상응하여 중생의 자아가 바로 본심을 보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 돈오의 성불론이다. 그런데 돈오점수란 그렇게 한 순간에 깨달았다 할지라도 완전한 깨달음이란 순식간에 되는 것이 아니라 불도를 차례대로 닦고 행하여 점차적으로 향상하여 완성된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선종의 영향이 지대하여 돈오돈수, 돈오점수라는 말을 자주 쓰나 모두 깨달음을 취하는 방법에서 나온 용어이다. 그 자리에서 바로 깨닫느냐와 점차로 깨닫느냐의 문제는 돈오 속에서도 점수가 있을 수 있고 점수 속에도 돈오의 깨달음이 있다고 보는 것이 균형감을 갖춘 생각이다. 완전히 깨닫는다고 할지라도 깨달은 성인은 그전의 수행과 깨달음을 계속 실천하므로 돈오 속에는 점오의 과정이 있게 된다. 돈오점수도 마찬가지이다. 깨닫고 나서 계속 점차적으로 수행하여 단계를 밟는다 해도 그 속에는 깨달음의 찰라 찰라의 연속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나 돈오점수의 차별적 구별보다는 돈오 속에 점오, 점오 속에 돈오라 생각하고 열심히 수행하는 것이 옳은 방법이 된다.
***수상문정혜(隨相門定慧): 상(相)을 따르는 문. 자성문정혜(自性門定慧)에 대비되는 말로 보조지눌의 《수심결》에 나오는 말이다. 자성의 본래 성성적적(惺惺寂寂)한 이치를 벗어나 경계를 따라 움직이는 하근기가 애써 대치하여, 공력을 쓰고 마음마다 의혹을 끊어 고요함을 취하여 감을 닦는 방법이다. 《수심결》에서는 “자성에 비추어 천만 갈래로 흩어진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바른 법을 택하여 텅 빈 자리를 보아서, 혼침과 산란한 마음을 잘 조화하고 청정무위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산종사는 학인의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상문정혜(隨相門定慧)에 대한 질문에 “경계를 대하되 정한 상이 없음이 자성 정이요, 밝되 혜의 상 없음이 자성 혜며, 정을 닦되 정하는 상 있음이 수상문 정이요, 혜를 닦되 혜의 상 있음이 수상문 혜니라”(《정산종사법어》 경의편48)라고 했다.
****자성문정혜(自性門定慧): 돈오문의 상근기가 닦는 정혜. 불성 또는 체성이라 하는 자성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정과 혜를 말한다. 정산종사는 학인의 자성문정혜(自性門定慧)와 수상문정혜(隨相門定慧)에 대한 질문에 답하여 “경계를 대하되 정한 상이 없음이 자성 정이요, 밝되 혜의 상 없음이 자성 혜며, 정을 닦되 정하는 상 있음이 수상문 정이요, 혜를 닦되 혜의 상 있음이 수상문 혜다”(《정산종사법어》 경의편48)라고 했다. (원불교대사전에서)
무시선과 참회문은 결과에 가서는 똑같다.
시작은 서로 다르다. 무시선은 자성의 긍정적 활용에 바탕해서 시작한다. 자성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기에, 부정적으로 작용한 사람에게 공부할 문을 열어준 것이 참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