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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발굴 자료로 보는 ‘찔레꽃’ 백난아의 삶과 노래
재조명[1]
금지의 화살 맞으며 국민들 가슴에 붉은 꽃으로 피다’
2012년
08월 31일 (금) 16:32:42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옛 노래의 멜로디가 그 시대의 감성이라면 노랫말은
그 시대의 이성이다.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백난아가 발표한 ‘찔레꽃‘에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서를 담은 멜로디에 당시 상황, 즉 고향을 잃고 떠도는 국민들의 삶과 질곡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국민가요 '찔레꽃'의 가수 백난아
일제 강점기인 1941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이후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한 번 크게 애창된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삶의 지도가 크게 바뀐 국민들에 의해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노래로 애창되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수십년 뒤인 지난 2005년
KBS-1TV ‘가요무대’의 20주년 특집방송. 이 가요무대의 20년 간 총 1만5천 여 곡이 방송전파를 탔는데 그중 가장 많이 불리어진 노래로
‘찔레꽃’이 선정되었다. 20년 간 방송회수는 총 108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옛노래 프로그램에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로 선정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국민들에게 가장 많이 애창되는 노래라는 또 다른 증명이기도 하다. 그 ‘찔레꽃’의 주인공,
가수 백난아. 그의 삶과 노래를 두 차례에 걸쳐 발굴, 재조명한다.
찔레꽃, 금지곡 화살 맞으며 국민들 가슴에 붉은 꽃으로 피다
김교성 작곡가의 친필악보
옛 노래의 멜로디가 그 시대의 감성이라면 노랫말은 그 시대의 이성이다.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백난아가
발표한 이 ‘찔레꽃‘에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서를 담은 멜로디에 당시 상황, 즉 고향을 잃고 떠도는 국민들의 삶과 질곡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일제 강점기인 1941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이후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한 번 크게 애창된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삶의 지도가 크게 바뀐 국민들에 의해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노래로 애창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노래는 한 때 금지곡으로 몰려
방송 불가 판정을 받기도 했다. 금지 사유는 노랫말 속에 등장하는 ‘동무’라는 단어 때문. 1절 끝 부분의 ‘못 잊을 동무야’, 2절에서의 가사
‘노래하든(던) 세 동무’가 그것으로 이로 이해 당시 검열에 지적이 되었다.
심지어 당시 방송윤리위원회로부터 노래
부르는 위치가 되는 ‘북간도’라는 지역을 문제 삼아 월북작가 작품이란 판정을 내렸지만 작사자 김영일 선생의 항변으로 월북작가의 곡이라는 굴레로
부터는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동무’라는 단어가 이북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라고 해서 방송 불가판정을 내리는 바람에 별 수 없이
노래가사를 바꿔야 했다.
이렇듯 백난아 선생의 노래에는 노래의
메시지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으로 인해 개작 혹은 개사된 부분이 많다. 심지어 작사, 작곡자 표기가 다르게 되어 있는 것도
더러 눈에 띈다.
백난아는 1989년
1월, 자신의 가요생활 50주년을 즈음해 직접 현대악보출판사를 통해 대표곡을 수록한 ‘백난아히트애창곡집’을 발간한다.
자신의 애창곡 53곡의 악보를 수록한 이 책에는 수록곡 절반 이상의 곡이 일제 강점기, 그러니까 광복 이전에 발표된 노래들이다. 발표 시기가 그렇듯 이 노래들은 이후 작곡, 작사가들이 월북해 당국으로부터 금지된 노래들도 많다. 대표적인 월북작가가 ‘처녀림’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던 작사가 겸 당시 문예부장 박영호 선생.
※ 월북작가의 곡으로 밝혀져 금지된 곡 리스트.
이상의 곡들이 월북작가의 곡으로 분류되어 당국에 의해 금지된
노래들이다. 말하자면 백난아의 데뷔곡부터 금지곡으로 묶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국민들은 이 노래들을 부르거나 또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작곡가 입장에서는 이 노래들이 금지곡으로 묻혀져 버리는 것을 좌시할 수 없어 이후 문제가 되는 부분, 특히 가사 일부와 제목 등을
다른 인물을 통해 개작시켜 작자표기를 달리함으로써 월북작가의 곡이라는 화살을 교묘히 피해갔다. 사실상 이러한 노래들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6.29 선언이 있기까지 가사가 변형된 채, 또 작가가 바뀐 채 불리어져 왔다.
광복 이후 정치적, 즉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이 노래들은 또한
61년, 5.16 이후 또 한 번의 철퇴를 맞는다. 우리 대중가요가 ‘퇴폐의 온상’, 혹은 ‘사회악’으로까지 치부되며 이전까지의 모든 노래들을
2절까지 밖에 부르지 못하도록 제약받게 된 것.
이러한 5.16 이후 당국의 정책에 의해 기존의 노래들이 재
취입될 때는 모두 2절까지 밖에 부르지 못하도록 규제를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과정에서 기존 노래의 가사들이 일부 훼손된 채 불리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리 가요계의 현실이자 비극적인 한 단면이기도 하다.
‘가요계의 슈베르트’라 불리던 천재 작곡가 이재호 선생이 타계한 직후 그의 방에서 발견된 사진이 바로 이 백난아 사진이다
‘찔레꽃’의 발표 당시 원 가사는 다음과
같다.
1.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언덕 우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자주고름 입에 물고 눈물 젖어/이별가를 불러주든 못 잊을 동무야.
2. 달뜨는 저녁이면 노래하든 세 동무/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삼년 전에 모여앉아 백인 사진/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3. 연분홍 봄바람이 돌아드는 북간도/아름다운 찔레꽃이
피었습니다/꾀꼬리는 중천에서 슬피 울고/호랑나비 춤을 춘다 그리운 고향아. (김영일 작사, 김교성 작곡, 백난아 노래)
‘찔레꽃’은 앞서 거론한 이유로, 그리고 ‘황하다방’이라는 곡은 노랫말 속에 일본어 가사가 들어가 있어 불가피하게 개사되었는데 이 노래는 이후 ‘청춘다방’이라는 제목으로도 바뀌어져 불리기도 했다.
가수 백난아가 타계 3년 전에 발행한
자신의 애창곡집에 수록된 악보와 작가 이름은, 그러한 이유로 일정 부분 사실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이러한 수모의 역사도 이제 모두 지난
과거. 이제금 월북작가의 곡들까지 모두 해금되었다. 아울러 원 노래들의 제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 백난아 선생의 노래와 삶을 제대로 기록하고
재조명하는데 중요한 과제이기도 할 것이다.
백난아의 삶, 그 연예 활동 기록
본명은 오금숙,
1927년 생 하나가극단 악극공연 광고
우리나라 가요계의 원로 대부분이 당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예활동을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가수 백난아 역시 집안과 그리고 학교의 반대에 부딪혀야 했다. 그럼에도 뛰어난 가창력으로 이러한 난제들을
극복, 40년 11월 첫 음반을 취입하며 일찍이 데뷔, 활동을 시작했다.
백난아는 데뷔 당시의 어려움을 71년, 당시 동아방송 ‘나의
데뷔시절’을 통해 이렇게 회고했다. “주위 분이나 동네 친구들이 나가면 꼭 당선될 것이다, 해서
용기를 내어 부모님 몰래 출전했어요. 그러나 학교에서 알게 되어 벌도 야단도 많이 맞았고 또 퇴학까지 당했지요. 그때 어머니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중학교에 진학을 할 수 있었어요. 학교 선생님이나 부모님들은 가수가 되는 걸 완강히 반대했지만 결국 음반이 나오니까 그 때서야 점차 가족들도
이해해주셨지요.”
초등학생의 나이로
무려 다섯 차례나 콩쿠르에 입상한 경력이 그러하듯 이 단발머리 어린 소녀는 곧바로 태평레코드사를 통해 음반 취입을 시작한다. 주위에서 변성기
이전 목소리라는 우려를 했을 정도로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가창력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 ‘제2의 박향림’으로 기대를 모으기도 했는데 이 때
처음 취입한 노래가 40년 11월, 처녀림(박영호) 작사 이재호 작곡의 ‘오동동 극단’과 ‘갈매기 쌍쌍’이다.
데뷔하자마자 ‘꾀꼬리’라 불리어지며 나이에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부한 성량, 구성진 가락, 타고난 천성으로 가수로써 뿐 아니라 이후 적극적인 활동으로 한국가요사에 큰 획을 그은 백난아는 그러나, 지난
1992년 65세의 일기로 안타깝게도 타계했다.
지난 2005년, 언니 오귀숙 여사가 미국으로 출국하기 직전
본인과의 네 차례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가수 백난아 선생에 대한해 보다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고 또한 지금 이 칼럼을 통해 공개되는 자료의
일부분은 당시 건네받아 현재 본인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이다. 특히 어려운 생활 속에서 의지하며 서로 힘이 되어주었던 백난아의 네 살
터울(23년 생)의 셋째언니 오귀숙 여사는 얼마 전 미국에서 타계했다.
남인수, 백난아,
김은하 일본공연 포스터
가수 백난아가 처음 가수의 꿈을 키운 것은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간다. 청진의 동덕보통학교 가는 길에 일본인이 경영하던 악기점이 생기면서부터.
당시 레코드 음반을 악기점이나 시계점
등에서 위탁 판매하던 시절, 악기점 스피커에서는 매일 새로운 유행가가 흘러나왔다. 학교보다도, 세끼 밥보다도 노래를 좋아했었다는 소녀 오금숙은
악기점 앞을 지날 때마다 악기점에서 흘러나오는 축음기소리에 종종 발걸음을 멈췄다.
이러한 행동을 눈여겨본 악기점 주인 사이또
마사오씨는 소녀 금숙을 안으로 불러들인다. 노래를 한,두 차례 듣고 곧바로 따라할 정도로 음악성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안 사이또 마사오씨는 그
해 가을, 빅타레코드사 주최로 청진에서 열리는 콩쿠르에 참가할 것을 권유한다. 본인 자신이 이 대회의 심사위원이기도
했다.
결국 소녀 금숙은 빅터레코드 콩쿠르에
참가, 입상하게 된다. 그 때 나이 불과 열세 살 때.
또한 백난아가 이후 자신의 프로필 란에 이 사이또 마사오로부터 2년
간 사사받았다고 기술한 부분도 발견된다.
입상 상품으로 받은 휴대용 축음기와 상장
등은 학교와 집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친구집에 몰래 맡겨놓곤 했지만 결국 모두에게 알려져 학교와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앞서 동아방송의
회고에서처럼.
백난아 가족은
20년대, 일제 강점기 시절. 제주 한림을 떠나 만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생활이 여의치 않자 함경북도 청진으로
옮긴다.
백난아가 유년시절을 보낸 이 청진을 떠난
것은 우리 나이로 열네 살 때. 태평레코드사에 발탁, ‘갈매기쌍쌍’, ‘오동동극단’ 발표하면서 부터다.
이 노래들의 히트로 최연소 태평레코드사 전속가수로 활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이듬해인 41년 2월에 ‘황하다방’, 3월에 ‘망향초 사랑’을 잇달아 발표하며 곧바로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했다.
‘망향초 사랑’은 1941년에 이병일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반도의 봄’의 주제가이기도 하다.
가수 백난아가 태평레코드사에 소속되었던
40년 11월부터 43년 3월까지 발표한 곡 중 본인이 직접 음반으로 확인된 것만 총 36곡, 그러니까 SP음반으로는 28장이다. 물론 실제
취입한 곡은 이보다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당시 물자 부족이나 열악한 녹음환경 등을 감안하면 매우 왕성한 취입을 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당시 신인가수 백난아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어떠했는가, 참고로 이
무렵 ‘아리랑 낭랑’ 신보 광고에 아래와 같은 문구가 등장한다.
신민요 (新民謠) 아리랑 낭랑(娘娘)
백난아 '아리랑 낭랑' 신보
가요의 舞台는 백난아 하나를 허락하기로 됏다(했다). 터저(터져)오르는 화산구(火山口)와 같이 그의 인기(人氣)는 역대(歷代)명가수(名歌手)를 까마케(까맣게) 떨어트리고 준마(駿馬)처럼 달린다.
「오동동극단」「아리랑낭랑」일즉이 이런 힛트가
드무럿다 (※ 원본 그대로 표기. 괄호 안은 필자 註).
이러한 문구에서 보듯 신인가수 백난아가 당시 받았던 기대와 인기가
어떠했는지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음반 취입은 모두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백난아 역시 음반 취입을 위해 주기적으로 일본을 다녀와야 했는데 43년 6월, ‘아주까리 선창’의 취입을 마친 뒤 잠시 오사카에
들렀다가 당시 국내 최고가수, 남인수 선생 부부를 만난다. 이때 가수 남인수 선생의 소개로 그 때까지 한국가요를 취급한 적이 없던 일본
킹레코드사에 발탁되어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이어 7월, 남인수, 김은하 멤버와 함께
日本吉本(요시모토)興行株式會社에 소속되어 6개월 간 일본순회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이후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음반 취입이 전면 중단된다. 백난아는 귀국 후, 음반 레코딩이 전면 중단됨과 때를 같이해 무대공연 위주로 활동을 전환하게 된다. 당시 태평레코드사 소속의 가수 백년설, 진방남, 작곡가 이재호 등과 함께 ‘하나가극단’을 조직해 활동했다. 전국 각지는 물론 멀리 만주지방까지 공연을 다녔다. 중국의 천진과 북경, 그리고 상하이 등지의 순회공연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 8.15 광복의 기쁨을 누리게 된다.
신라의 달밤, 금백댕기 신보광고
8.15 광복이 되자 일본인들이 모두
서둘러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때 백난아는 서울 충무로 3가에 있던 한 일본인 집을 매입해 그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딴 ‘백난아 양재학원’을
개원한다. 물론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경영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 광복 직후 물자가 부족하던 시절이었기 때문. 당시
남대문시장 등지에서 겨우 구할 수 있었던 것이 미국의 구제품 의류가 전부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의상을 만들 옷감이 턱없이 부족한
때였다.
당시 양재학원, 즉 의상디자인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던 때이기도 했던 탓에 결국 양재학원을 접고 당시 수도극장(이후 스카라극장) 등의 경영에도 관여하지만 곧 이러한 사업을 접고 다시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 무렵 우리나라에 자체적인 레코드
회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946년 최초로 고려레코드가 설립되었고 이어 조선, 서울, 아세아, 부산의 코로나, 대구의 오리엔트, 그리고
이어서 작곡가 박시춘 선생이 설립한 럭키레코드가 ‘신라의 달밤’을 제1호로 출반을 준비하고 있었다.
작곡가 박시춘 선생이 설립하고 당시 경향신문 기자로 근무하던 극작가 겸 작사가, 유호 선생이 문예부장을 맡았던 이 럭키레코드의 제1호 음반은 현인의 ‘신라의 달밤’ (48년), 제2호 음반이 백난아의 ‘금박댕기’와 ‘낭랑18세’(48년)이다.
작곡가 박시춘 선생은 우리나라 가요사에
있어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명사라 할 만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 그의 등장은 우리나라에서 민요의 자리에 가요가 자리하게 된 것을 의미할
정도로 대중가요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자리한 인물이기도 하다.
·박시춘 선생이 직접 설립한 음반사의 첫
전속가수로 발탁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음악성과 가창력, 그리고 당시 인기를 모두 인정받은 것으로 그 첫 남녀가수가 현인, 그리고 백난아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더욱 주목할 것은 상업적으로도 훌륭한 가수임을 인정받았다, 라기 보다는 작곡가 자신의 노래를 제대로 소화할 수
있는 가수임을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는 백난아가 주로 작곡가 이재호, 김교성, 전기현 선생과 컴비를 이뤄
활동했다.
백난아의 '자바여수'
음반라벨
서두에 기술한 것처럼 오케레코드사에서 남인수와 컴비를 이루던 박시춘 선생이 그동안 신생회사에서 경쟁회사로 올라온 태평의 여가수, 백난아를 무척 욕심내고 있었다는 또 다른 반증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 럭키레코드사는 계속해서 당대 최고의 가수들을 연이어 발탁하게 된다. 바로 이난영, 백년설, 황정자 선생 등이 가세, 럭키는 이후 한국전쟁 직전까지 가장 활발히 음반을 출시한 음반사로 성장한다.
백난아는 럭키레코드에서 작사가 유호-작곡가
박시춘 컴비와 손 잡고 ‘낭랑 18세’, ‘금박댕기’를 발표하며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낭랑18세’는 백난아 데뷔 8년, 그의 나이 스물한
살 때 발표한 노래다. 이 노래는 현재 비교적 젊은 세대들에게도 잘 알려진 노래로 지난 92년, 가수 한서경이 리바이벌해 또다시 히트를
기록했다.
어느덧 신생 음반사들이 음반사를 설립할 때
캐스팅 1순위였던 백난아는 심지어 장미레코드, K.T.J 같은 당시 신생, 마이너 레이블에서도 노래를 취입할 정도로 당시 신생 음반사들이 탐을
냈던 가수였다.
가수활동은 물론 49년 4월 27일, 고려악극협회가 시공관에서
막을 올린 악극 '지리산의 봄소식(윤부길 작)' 무대에 올라 윤부길씨와 함께 호흡을 맞추는 등 연기로 까지 다재다능한 활동을 펼쳤던 백난아
선생의 인기는 당시 공연장에서 절정을 이뤘다. 이 무렵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당시 연예인들도 모두 ‘군번 없는 용사’로 군예대로
편성되어 전쟁에 동원되는데 백난아 선생 역시 군예대에 소속되며 주로 부산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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