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산 산행 photo 에세이 (2007. 1. 11 주차장-호텔- 민가- 안부-벌봉- 선운산-견치봉입구-용문굴-낙조대-천마봉-도솔암-마애불-진흥굴-일주문/ 일산신도시산악회 따라/http://cafe.daum.net/goyangjayooro)
*. 새해 첫 산행 선운산(禪雲山) 나는 고창(高敞)에 세 번째 온다. 문학회 따라 판소리를 집대성한 동리 신재효 고택과, 한국의 대표시인 미당시문학관을 주로 둘러 본 것이 처음이고, 대학 동창생들 따라 2년 전 가을 선운산에 온 것이 두 번째다. 그 해 단풍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게다가 비까지 촉촉이 적시어서 단풍을 짙게 물들이는 바람에 전국에서 몰려온 카메라맨들이 선운사 계곡을 따라 진을 치고 있었다. 그때 둘러본 선운산 도솔암 주변의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서 오늘을 별러 드디어 선운산에 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선운산 주차장에서 우측 호텔을 지나 경운산(443.3m) 쪽으로 해서 이 산의 최고봉 선운산(도솔봉)을 향하고 있다. 낙조대로 해서 도솔암, 선운사를 향할 것이다. 안개가 낀다는 예보처럼 겨울 날씨 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처럼 부드러운 산길이었다. 남녘 야산이라서인가. 흰눈 하나 찾아보기 힘든 이 선운산은 손이 하나도 시리지 않은 것을 보니 차 속에서 두터운 오리털 등산복을 배낭에 넣고 온 것이 잘한 것 같다. 앞서 가던 일행이 옷을 벗기 시작한다. 겨울산 산행은 겨울에 상하(常夏)의 나라로 떠나는 해외여행과 같다. 겨울이라고 해서 잔뜩 끼어 입고 온 옷을, 오르기 시작하면서 하나 하나 벗었다가, 하산 길에 하나 하나 되 입는 것이 그러하다. 1시간쯤 오르니 능선이 나타나며 북쪽으로 바위 지대 넘어 경수산(444.3m)이 보이기 사작한다.
*. 개이빨산(犬齒山, 345.1m)
앞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더니 전주 노인회에서 온 한 무리가 지나가는데 남자보다 노파가 더 많았다. 조선 시대는 남성공화국, 대한민국은 여성공화국이라더니 산에서 와서도 그렇구나. 선운산은 그 높이가 335m밖에 되지 않는 육산어서 노인들이 주로 찾는 산이라서인가 젊은이들을 만나보기가 드물었다. 여기서부터는 아까보다 더 부드러운 능선으로 서쪽은 바다가 보이는 심원면이요, 동쪽으로는 우리가 올라온 아산면이다. 이를 양쪽으로 굽어보며 길은 내리막길이더니 경수봉에서 1.7km 온 지점에 갈림길이 나타난다. '마이재'였다. 거기서 무덤 옆을 지나 오름길이 시작되더니 싱겁게도 여기가 이 산의 정상이라는 '수리봉'(일명 도솔산)이다. 고창에는 산악인도 없는가. 정상석 대신에 세워놓은 입간판은 초라하기 그지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안개는 아직도 완전히 걷히지 않아서 서해는 안개 속에 잠들어 있다. 어떤 산행 서적에서는 경수산이 정상으로 나오는 것이 있던데 그래서 그런가.
견치산(犬齒山, 345.1m)이나 가서 이 서운함이나 풀어볼까 해서 속력을 내다보니 서쪽 멀리 바위산이 내가 견치산이라고 멋진 자세로 모습을 뽑내고 있다. 개 '견(犬)', 이빨 '치(齒)' , 우리말로 '개이빨산'이 저것이로구나. 그런데 등산지도 책과 달리 이정표에는 '견치산 입구 왕복 1.2km'라 쓰였다. 견치산은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 다른 능선 상에 있는 산이라서 할 수 없이 가는 대신 사진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가평군과 이동면 경계에 '개이빨산'과 '민드기봉'의 능선이 개 이빨같이 뾰죽뾰죽 솟아 있어 '개이빨산', 또는 '견치산(犬齒山)'이라 하더니 저 산도 각도를 달리 보면 개 이빨 같이 생긴 모양이다. 거기서 조금 더 가니 우리 일행이 막 식사를 시작하고 있다. 이 분들은 산을 타러 온 사람이요, 나는 산의 구석구석을 뒤지러 온 사람으로 등산 목적이 서로 다르다. 이 분들을 따라 다니다 보면 건성 보고 지나쳐야 하는 곳이 많다. 그래서 이분들은 빠르고 그래서 나는 항상 가장 후미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쫓기는 산행을 한다. 이 분들이 식사하는 그 동안간은, 이들 산꾼들을 따라 잡거나 앞서 갈 수 있는 유일의 찬스라서 함께 식사하자는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말았다. 그런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 키의 두 배도 더 넘는 환상적인 산죽이 활짝 길을 열어주고 있다. 이름도 멋진 '소리재'는 참당암(懺堂庵)으로 가는 갈림길이기도 했다. 여기서 참당암까지는 1km로 고려 말에 지었다는 정사각형의 맞배지붕의 대웅전(보물 제805호)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대웅전에 모셨다는 매부리코의 불상도 보고 싶지만 참당암을 갈 수만 있다면 꼭 보고 싶은 것이 아래에서 말하려는 선운사 창사(創寺) 설화에 얽힌 인도로부터 석주(石舟)에 실려 왔다는 '옥석의왕불좌상(玉石醫王佛坐像)'이다.
*. 선운산의 비경
호남의 내금강'으로 겨울에는 설경이 기암괴석과 어울려 경관을 자랑하는 산이 선운산 또는 도솔산이라고 고창인들이 자랑하더니 명실상부(名實相符)하였다. 이 산이 TV드라마 '商道', 문인시대, 대장금, 서동요, 신돈, 주몽'이나 영화 '남부군'의 촬영 장소이어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게 아니라 '이 산의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서 TV드라마나 영화의 촬영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되었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난다. 미국의 '그랜드케년', 중국의 황산, 장가계, 백두산 천지를 굽어 볼 때 감흥이 되살아난다. 적지 않게 세상을 둘러본 내 눈을 놀라게 하는 우리 Korea의 이러한 장엄한 경치를 볼 때마다 한국에 태어나서 젊어서부터 70고개를 넘어선 지금까지 한국산하를 둘러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다니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나이로구나 생각게 한다. 전망대 같은 바위에 앉아 수없이 나는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며 행복을 만끽하고 있는데 그 바위 사이에 암자 하나가 이런 나를 훔쳐보고 있었다. 내원궁(內院宮)이라고 하는 상도솔암이었다.
*. '용문굴(龍門窟)'의 전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듯이, 아름다움도 아름다움끼리 모여 사는 모양이다. 낙조대 가는 능선에서 벗어나 좌측으로 통나무 계단으로 내려가니 멋진 자연 동굴 '용문굴(龍門窟, 裂石굴 또는 左邊굴)'이 있다. - 선운사를 지었다는 금단선사(黔丹禪師)가 절을 지을 때였다. 절터에 못 용택(龍澤)이 있어 이무기가 살고 있었다. 선사가 이무기를 몰아내니, 다급해진 이무기가 이 바위를 뚫고 서해로 도망쳤다. 그때 생긴 굴이 용문굴이다. 그 용문굴 안쪽에 돌이 싸여있는데 그것이 TV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장금의 어머니의 무덤이란다. 용문굴에는 두어 개의 작은 바위굴들이 더 있고 주위에 둥근 통나무로 쉼터가 있다.
선운산이 자랑하는 낙조대는 조금 전에 보던 겹겹이 쌓인 서쪽 하늘 끝에 큰 짐승 하나 웅크리고 있는 듯한 모양의 바위였다. TV드라마 '대장금'에서 악역을 맡은 최상궁이 자살했다는 바위가 바로 낙조대였다. 오르는 길에서 본 낙조대는 큰 짐승의 웅크린 자세더니 그 옆 천마봉에서 본 낙조대는 여러 개의 불꽃이 불붙는 형상이었다. 낙조대에서는 칠산바다, 변산반도, 곰소만 지역의 석양이 일품이라지만 지금은 3시경 우리는 서둘러 하산해야 한다. 복분자에 풍천장어가 예약되었기 때문이다. 낙조대에서 로프를 타고 내려와서 보니 건너 '배맨바위산'이 운치 있게도 길고 가파른 하얀 쇠층계를 놓고 오라고 유혹하고 있지만 이것도 생략해야 한다. 그런데 산 이름을 하필이면 '배맨바위산'이라 하였을까? 호사가들은 옛날 큰 장마가 있어 봉우리까지 물이 찼을 때 배를 매던 바위라서라고 말하지만 그건 너무 견강부회(牽强附會)하는 이야기 같아 나는 이를 불교적인 용어로 말하고 싶다. 이에 대하여 "화왕산의 '배바위'"를 설명한 일이 있다. - '용선대'(龍船臺)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盤若龍船'(반야용선)의 준말이다. 반야의 지혜로 사바세계와 극락 사이에 있는 고통의 바다를 건너 피안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배란 뜻이다. 이 배의 선장이 부처님이요, 이를 이끄는 것은 용이다. 한 마디로 이승에서 허우적거리는 중생을 구하여 열반의 세계로 이끌 때 타고 가는 배를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 흔히 대웅전을 반야용선(盤若龍船)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화왕산의 관음사 '용선대' 바위 끝에 선장이신 석가여래불이 결가부좌를 한 것이나 석굴암의 여래처럼 동쪽을 향하고 앉아있는 것 같이 선운산 도솔암 바위에 새긴 동불암마애불상이 바라보는 방향에 있는 이 산의 이름을 '배맨바위산'이라고 하였으리라 생각된다.
*. 도솔암
이 산에서는 낙조대 옆에 있는 천마봉(天馬峰)이 봉중에 봉이다. 여기서 마주 건너다보이는 도솔암은 천상의 세계같이 멋지고 아름답게 보인다. 옛날 선운사에는 동서남북, 상하에 6개의 도솔암이 있었는데 지금은 2개 도솔암과 내원궁만 남았다. 우측의 요사체 당우와 극락보전이 하도솔암이요, 거기서 '도솔산내원궁'이라고 쓰여진 문으로 들어 365개의 돌층계를 올라가 좁디좁은 너럭바위에 세워진 당우가 상도솔암이라는 내원궁(內院宮)이다. 내원궁에서도 마주 보이는 천마봉과 낙조대의 바위가 제일 볼거리지만, 내원궁에 봉안된 이조초기 5대걸작불 중에 하나라는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도 지나치면 안 된다. 두건 쓴 머리, 턱 밑까지 내린 귓밥과 귓바퀴(耳輪),오른쪽 어깨에 걸친 부드러운 옷 무늬가 그러한 것들이다.
*. 선운사동불암마애석불(禪雲寺東佛庵磨崖石佛)
'선운사에 갔다가 마애불을 보지 않고는 선운사에 갔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마애불(磨崖佛)이란 벼랑의 벽이나 동굴 벽에 새긴 불상을 말한다. 목조나 인조 건물은 유한하여서 훼손 되지만 반영구적으로 남아있는 것이 마애불이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왕가의 계곡 내의 벽화, 앙코르와트의 부조물 등이 마애석상을 빼고 말할 수 없으니 말이다. 선운사 마애불은 전체 높이 13.m, 너비 3m로 전북유형문화재 제30호로 백제 위덕왕이 검단 선사에게 부탁하여 조각한 미륵불로 결가부좌한 자세로 연화대좌 위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다. 이마에 백호가 유난히 툭 튀어나와 있고, 치켜 올라간 눈초리에다가 뾰죽 내민 입술과 네모진 얼굴에 목없이 몸에 딱 붙어 있는데 귀는 늘어져 어깨에 닿을 정도의 모습이다. 이를 자세히 보면 한 마디로 별로 잘 생긴 얼굴이라기 보다 그 반대로 익살스런 개그맨의 표정을 보는 것 같아 웃음이 절로 난다. 솔직히 말해서 북한산 승가사와 월출산마애여래좌상 등의 불상과는 격이 다르다. 전설에 의하면 위 암벽 꼭대기에 동불암이라는 공중누각을 짓게 하였다는데 그게 없어지고 지금은 숭숭 뚫린 구멍만 남아있다. 그 동불암(東佛庵)은 조선 말엽 폭풍에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 마애불상 가슴 속에는 검단선사의 비결록이 소장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가져간 후 땜질한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이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 *. 도솔산 선운사 나는 지금부터 이 글을 내가 간 방향과 달리 선운사 일주문부터 도솔사로 오르는 순서로 바꾸야겠다. 글을 쓰는 나도 그렇지만, 독자를 위해서도 내가 밟아온 대로 고지식하게 하산하는 식으로 거꾸로 이 글을 쓸 필요가 있는가 해서다.
선운산 일주문에는 '禪雲山禪雲寺'가 아닌 '도率山禪雲寺'라 쓰여 있다. 옛날에 '도솔산'이라 하던 산이 '선운사'를 지은 후에 자연스럽게 '선운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그런데 '禪雲'이나 '도솔'이란 무슨 뜻일까? -'禪雲'(선운)이란 '參禪臥雲'(참선와운)에서 따온 말로 '구름 속에 누워서 참선을 한다'는 뜻이다. '도솔'이란 천상계(天上界)를 뜻하는 말로 석가모니가 인도에서 태어나기 전에 수행하던 곳이요, 미륵불이 설법하며 성불을 기다리는 33천 중의 하나이다. 그러니까 '선운산'이나 '도솔암'은 한 마디로 불도를 닦는 장소란 뜻이 된다. 그래선가. 몇 년 전 선운사를 둘러보았을 때 참선과 관계되는 불경의 말씀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온갖 진실한 것을 보려하거든/ 법의 가르침을 즐겨 들으며/ 인색하고 옹졸한 마음을 버려라.
그것이야말로 최상의 믿음이다. 믿음은 능히 생사의 강을 건너고/ 그 복은 아무도 빼앗지 못하며
그것은 어떠한 도적도 막는다. -법집요송경
그 선운사 창사(創寺) 설화로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여 온다. -신라 위덕왕 때였다. 죽도포(竹島浦)에 돌배(石舟)가 떠와서 사람들이 달려가면 배가 바다 쪽으로 떠나가곤 했다. 소문을 들은 금단선사(黔丹禪師)가 달려갔더니 배가 스스로 다가 왔다. 그 배 안에는 삼존불상과 탱화, 나한옥돌부쳐(현재 참당암에 모심), 금옷입은 사람이 있었다. 그 금의인(金衣人) 품속에서 '이 배는 인도서 왔으며 배 안의 부처님을 인연 있는 곳에 봉안하면 길이 중생을 제도 이익케 하리라'는 서찰이 있었다. 그래서 본래 연못이 있던 자리를 메우고 절을 짓는데 불심이 가득한 진흥왕이 재물과 장정 100인를 보내서 뒷산에 무성한 소나무를 베어 숯을 굽게 하여 기금에 보태게 하여 역사를 돕게 하였다.
이 이야기는 해남 달마산 미황사에도 같은 이야기가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불교의 남방유래설로 설명하고 있다.
-신라 위덕왕 24년에 금단선사(黔丹禪師)에 의하여 이 절이 창건할 때 검단리(檢旦里) 해안 가에 도둑의 무리가 살고 있었다. 선사는 무리를 모아놓고 천일염 제조법 가르쳐 생업을 삼게 하였다. 그래서 대사에 대한 보은염(報恩鹽) 공양의 관습이 8.15 무렵까지만 해도 선운사에 전해 내려왔다고 한다.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려지는 선운산은 일명 도솔산이라 하며 선운사는 대한 불교조계종 31본산이자 제24교구의 본사의 하나다. 창건 당시에는 89 암자(지금은 4 암자)에 189채의 크고 작은 당우에 3,000여 승려가 수도 하던 대가람이었다. 이 절이 자랑하고 있는 문화재로는 66평의 조선중기 대표작 대웅보전(보물 제290호)과 일인이 훔쳐간 것을 되찾아온 금동보살좌상(보물 제279호) 등 수많은 보물과 자방문화재가 이 절의 역사를 말해 주고 있다.
*. 백제의 노래 '선운산가'
백제의 노래로는 '정읍사, 선운산가, 지리산가, 방등산가, 무등산가' 가 있지만 그 내용이 현재까지 전하는 노래로는 정읍사 하나밖에 없고 나머지는 그런 노래가 있었다는 기록만이 한문으로 전할 뿐이다. 당시는 우리의 한글이 제작되기 전이어서 '정읍사'마저도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다가 조선 성종 때 악학궤범에 글자로 정착된 노래였다.
그 '선운산가'에 대한 기록도 고려사나, 중보문헌비고에 한문으로 그 유래가 전할 뿐이다. - 長沙人 征役 過期不至 登禪雲山 望而歌之: 장사인이 서울로 정역을 갔는데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 아내)가 선운산에 올라 (남편 오는 곳을)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불렀다
*. 선운산 동백 숲(천연기념물 184호)
선운산 골짜기로 선운산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선운산 동구
동백나무는 치나무과에 속하는 바닷가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다. 그 꽃이 피는 시기로 나누어 춘백(春柏) 추백(秋柏) 동백(冬 柏)으로 부르는데 선운사 동백은 북방한계선에 위치하여 피는 꽃으로 그래서 선운사 춘백(春柏)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늦게 만발하는 동백꽃이다. 이 동백나무숲은 선운사 입구 비탈에서 시작하여 선운사 뒤까지 약 30m 너비로 5,000여 평에 수령 500여 년의 6m 크기의 동백나무 3,000여 구루가 군락을 이루어 3월 말부터 4월 중순경에는 그 절정을 이룬다. 동백은 기름을 짜서 머릿기름, 등잔기름으로 쓰이는데, 선운사 절에서 등불을 키기 위한 동백기름을 얻기 위하여 심었다 한다.
*. 선운사의 자랑 '상사화'와 송악 선운사가 자랑하는 식물에는 이 외에도 '꽃무릇'과 '송악'이 유명하다.
-옛날 선운사에 잘 생긴 젊은 스님 한 분이 있었다. 불공드리러 온 젊은 처녀가 그 스님을 보고 연모의 정을 품게 되었다. 스님을 짝사랑하던 처녀는 애틋한 사랑을 완곡히 표현하였으나 스님은 처녀의 마음을 몰라주었다. 처녀는 끝내 상사병이 되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그녀가 묻힌 무덤에 처음 보는 붉은 꽃이 피었는데 이 꽃이 '상사화(相思花)'이라는 '꽃무릇'이라 한다.
9월 중순이경 온 산에 군락을 이루어 붉은 꽃이 피며, 꽃이 진 후 진녹색의 잎이 나와서 다음해 5월이면 사라진다. 잎이 진 후에 꽃이 피고, 꽃이 진 후에 잎이 나기 때문에 이 꽃무릇은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만 한다는 애틋한 연모의 정을 닮고 있어 일명 상사화(相思花)라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한 겨울이라서 선운사관리사무소~선운사 입구, 선운사~도솔암까지 탐방로 숲 바닥에 초록색 잎이 가득 덮여 있다. 9월이면 누구를 위해서 상사화는 다시 피어나는 것일까?
선운사 일주문 근처 좌측 선운산계곡 건너 편 절벽을 타고 얼핏 보면 소나무 같은 송악이 있다. 송악은 두릅나뭇과에 딸린 늘푸른덩굴나무인데 선운사 입구 송악은 가슴 높이의 줄기 둘레가 80cm요, 높이도 15m나 되는 거목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송악으로 천연기념물 제 367호이다. 꽃은 가을 10월~ 11월에 풀빛꽃이 산형꽃 차례로 피고, 앵두 같은 열매가 둥글게 모여서 달리는 나무로 줄기와 잎은 약재로 나무는 관상용으로 심는 나무로 선운산의 명물로 천연기념물 제367호다.
*. 진흥굴(眞興굴)과 장사송(長沙松)의 전설
선운사에서 도솔암을 올라가는 도중 진흥굴이 있고 그 바로 앞 위쪽에 장사송이 있다. 신라 24대왕 진흥왕이란 누구신가. 지증왕의 손자요,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이었다. 7세에 즉위하여 국토를 넓히고 북한산, 창녕, 황초령, 마운령 등에 진흥왕순수비를 세워 놓은 신라의 광개토대왕이다. 그뿐인가. 진흥왕은 화랑제도를 창시하여 삼국통일의 원동력과 기초를 닦아놓은 왕이기도 하였다. 진흥왕은 숭불왕(崇佛王)으로도 유명하여 경주에 흥륜사, 황룡사를 창건하였는가 하면 황룡사의 장육상을 주조한 왕이다. 말년에는 불교에 심취한 나머지 왕위를 스스로 물려주고 선운사에 들어가 중이 되어 법호를 법운(法雲)라 하였다. 그 진흥왕이 거하였다는 곳이 진흥굴이다. -신라 진흥왕이 왕위를 버리고 좌변굴에서 자다가 꿈을 꾸었다. 꿈 속에 미륵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지 않는가. 이에 감동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하고, 다시 이를 크게 일으켰으니 이것이 이 절이 시초라고 하였다. -도솔산선운사創修勝蹟記
그때 도솔암은 도솔왕비를 위하여, 중애암은 중애공주를 위해 진흥왕이 건립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당시는 삼국통일 이전의 백제 땅이었던 곳이어서 진흥왕 이야기는 황당한 것 같아서 후 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진흥굴은 신라 24대 진흥왕이 부처님의 계시를 받아 의운국사를 시켜 당시 백제 땅이었던 이 산을 살펴보게 하고 왕위에서 물러난 후 찾아와 수도했다는 곳이다.
지금은 이 진흥굴 속에는 불상을 모셔 놓고 촛불을 밝히고 뜻있는 선남선녀의 참배소로 사용하고 있었다.
진흥굴 옆에 있는 장사송(長沙松)은 옛날에 이 고장의 이름이 장사현(長沙縣)라서 장사송(長沙松)이라고 하지만, 진흥왕이 수도했다는 진흥굴 앞에 있다하여 진흥송(眞興松)이라고도 한다. 높이 23m 높이의 이 장사송은 가슴 높의 둘레가 3.07m인 데다다. 높이 3m 정도에서 줄기가 크게 세 가지로 갈라지다가 그 위에서 다시 여덟 갈래로 갈라져 부챗살처럼 뻗어 우리나라 팔도(八道)를 상징하고 있다는 노송이다. 이를 선운산가과 연관시켜서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다 숨진 부인의 넋이 낙락장송(落落長松)으로 환생했다는 전설도 갖고 있는 소나무다 .
*. 선운사의 삼미(三味) 풍천자어, 복분자, 작설차 등산의 매력 중에 하나는 뒤풀이와 먹거리다. 그것이 먼 고장일 때나 바다와 인접해 있는 산행을 할 때에 좀처럼 접하기 힘든 그 고장 특산 먹거리를 어찌 이를 생략할 수 있겠는가. 국내여행은 잘 보고 잘 먹으며 가니는 것인데-. 우리의 고창에는 자연산 삼미(三味)가 있으니 풍천장어, 복분자술, 작설차 그것이다. 우리 산악회는 선운산 등산을 왔지만, 떠나올 때부터 양기가 좋다는 풍천장어에 복분자를 이 때다 탐하며 입맛을 다시며 달려왔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인다듯이, 알면 더 그 맛을 알 터이니 지금부터 고창 선운사의 삼미(三味)를 알아 보는 것으로 이 긴 산행기를 맺도록 하자.
*. 선운사 풍천장어
신도시산악회 '조조' 님 사진 뱀장어를 한자로는 鰻(만)이라 쓴다. 그리고 이를 호사가들은 다음과 같이 파자(破字)하여 풀이하기도 한다. 魚+日+四+又: 이 고기(魚)를 먹으면 매일(日) 거시기를 네 번(四)씩 또(又) 할 수 있다. 이렇게 정력에 좋은 고기가 뱀장어라는데 그중에서도 풍천 장어가 최고라고 입소문이 자자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담수에서 성장하여 60cm 정도의 성어가 된 뱀장어는 8월~10월경에 깊은 심해 바다로 가서 산란하고 죽는다. 부화된 실뱀장어 새끼들은 어미처럼 민물과 바닷물이 섞인 물 기수(汽水)인 인천강(풍산강)을 통하여 담수로 올라와서 성어가 될 때까지 7~8년을 살게 된다. 그런 뱀장어 서식지로서 전국에서 유명한 곳은 가장 맑은 계곡 중에 하나라는 강원도의 내린천과 선운사 입구의 풍천강(인천강)이다. 풍천장어들은 먹이가 적은 곳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바다에서 자란 장어보다 사냥력과 탐식성이 뛰어나고 이런 운동량으로 인하여 힘이 매우 좋다. 이렇게 커오던 장어가 산란이나 겨울 동면을 하려고 바다로 나가기 전 선운사 입구 쪽의 기수(汽水) 지역인 인천강(풍천강)에서 머물다 잡히기는 것이 자연산 풍천장어다. 뱀장어는 클수록 값이 곱절로 뛰어 보통의 300g보다 큰 것이 아주 미싸다. 그래서 옛날 나랏님께 바친다는 2kg 뱀장어를 잡는 것이 풍천어부들의 소원이라고 한다. 장어는 예로부터 간장식품으로 고급식품이어서 김해군 녹산에서 1966년부터 양식하여 대만과 일본에 수출품 중에 하나이지만 풍산장어는 자연산 장어로 고기 색깔과 맛이 특이하다. -큰 놈은 길이가 10여자 모양은 뱀과 같으나 짧고 거무스름하다. 대체로는 물고기는 수어지교란 말 같이 물에서 나오면 꼼짝 못하지만 뱀장어는 예외다. 맛이 달콤하여 사람에게 이롭다. 오랫동안 설사를 하는 사람은 이 고기로 죽을 끓여 먹으면 이내 낫는다 - 玆山魚譜
*. 복분자(覆盆子) -옛날 선운사에 살던 노부부가 늦게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아들은 너무 병약하여 좋다는 약은 모두 다 먹여 보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어느 날 지나가던 선운사 스님이 노부부의 근심을 듣고 하는 말이 ' 이 산에 들어가서 어려서는 초록, 젊어서는 빨강, 늙어서는 검은 딸기를 따 먹이시오. 그러면 건강해 질 것입니다.' 하였다. 부부는 합심하여 검은 딸기를 찾아 먹여보았더니 놀랍게도 아이가 건강이 넘치더니 소변을 볼 때마다 요강(盆)이 뒤집어(覆) 지더라는 것이다. 그로부터 검은 딸기의 이름을 복분자(覆盆子)라 불리게 되었다. -성질은 평하며 맛은 달고 시며 독이 없다. 남자의 신기(腎氣)가 허하고 정(精)이 고갈되거나 여자가 임신 되지 않는 것을 치료한다. 또한 간을 보호하며 눈을 밝게 하고 기운을 도와 몸을 가뿐하게 하며 머리털이 희어지지 않게 한다. 과로나 몸이 허약해지면서 생기는 빈뇨증에 특히 효과가 있고, 피부를 곱게 한다.
-동의보감: 복분자 딸기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관목이다. 줄기는 30m 안팎에 가시가 있으며 끝이 휘어져 땅에 닿으면 뿌리가 내린다. 5월 초순에 개화하며 6월 중 하순에 열매가 파랗다가 붉게 익으나 완전히 익으면 검붉은 색을 띤다.
*. 작설차(雀舌茶) -작설차는 잎이 참새(雀)의 혓바닥(舌)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작설차(雀舌茶)라 이름한 차다. 봄철 곡우 철을 전후해서 잘게 돋아나는 어린 새싹을 손으로 직접 따서 말려 만든 차다 은은한 향과 빛깔을 띠는 이 차를 마시면 간이 좋아지고 눈이 밝아지며 정신도 맑아진다는 차로 선운사 명물 중에서도 제1위로 꼽히는 식품이다. 선운사 일주문에서 선운사까지 보성 녹차 밭을 연상케 하는 파란 작설 이랑이 탐방로를 따라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도솔암 막 들어가기 전에 찻집이 나그네의 발을 멈추게 한다. |